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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희가 그러고도 천국 갈 줄 아느냐! 원문보기 글쓴이: 생명
고난과 리더십
-고난주간 절기세미나 주제발표문-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통합)
총회신학대학원 김경규 교수 (Ph.D)
누가 리더가 되는가?
역사적으로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의 문제는 첨예의 관심사였습니다. 누가 리더가 되느냐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에 따라서 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바뀔 수 있습니다. 한 기업체의 사활이 뒤바뀌기도 합니다. 잘 나가던 전도유망하던 회사가 리더십이 바뀜으로 몰락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거의 몰락할 수 밖에 없는 부도 직전의 회사가 지도자가 바뀜으로 기사회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렵던 교회가 리더십이 체인지 되고 부흥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부흥하던 교회가 리더십이 체인지 된 후에 교회가 분열하고 침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운동경기 팀의 감독의 리더십이 바뀌고 살아나는 팀이 잇는가 하면 좋은 팀도 감독이 바뀌고 죽을 쓰는 팀도 생깁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한국을 월드컵에서 4강까지 끌어 올린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입니다.
이처럼 리더십에 따라서 공동체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학자들이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에 관해 연구해 왔습니다.
전통적으로 지도자는 타고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리더는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며 어떤 불가사의한 과정을 거쳐 소명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The Great Man Theory”, 즉 “위인 이론’입니다. 이러한 위인이론에 의하면 리더의 자질과 운명은 타고난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해서 세습되어지는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가문과 혈통이 중요시 되었습니다. 우리 말에 “왕대 밭에 왕대 난다”는 속담이 이 이론을 한 마디로 잘 집약해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도 또한 위인이론을 뒷받침 하는 말입니다. 리더십은 타고난 것이라고 여겼기에 사람들은 리더십을 혈통과 가문과 상관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리더십 인식(leadership perception)은 사울 왕이 가진 인식이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이라는 리더십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삼상9:21). 사울의 생각에 ‘리더는 가문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리더십을 충분히 설명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위기’가 보통 사람을 지도자로 만들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이론이 “Big Bang Theory” ‘빅뱅 이론”입니다. 우리말에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 는 속담이 이 이론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이순신 장군이라는 전쟁영웅을, 미국의 독립전쟁이 조지 워싱턴이라는 인물을 만들어 냈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리더십상황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환경이 리더를 만든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에 이러한 리더십 퍼셉션을 가진 사람은 사사시대에 길르앗 장로들과 사사 ‘입다’입니다. 입다는 기생의 소생인지라 길르앗의 기업을 잇지 못하고 쫓겨나 놉 땅에 거하며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삿11:5,6)고 구원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삿11:9)고 확인합니다. 그 후 입다는 그들을 암몬에게서 구원해내고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았습니다” (삿11:11). 그들은 상황이 지도자를 만들 수 있다는 리더십 퍼셉션을 가졌고 실제로 그러한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장관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돌출한 것입니다. 그는 원래 길르앗의 적자출신이 아니고 기생출신의 어머니의 소생이라하여 길르앗의 기업을 얻지 못하고 그들에게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를 쫓아낸 그들에 의해 다시금 지도자로 추대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것입니다. ‘상황이 리더를 만든다’는 이론을 잘 설명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론도 지도자의 출현에 대한 설명으로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학자들은 ‘리더는 길러지고 리더십은 개발되어진다’고 하는 “Education Theory” 또는 Cultivating Theory” 즉, “리더십 교육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리더는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어지고 교육되어지고 개발되어지는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이러한 리더십 퍼셉션을 가진 사람은 시약시대에 사도바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4:15)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진보를 나타내게 하라는 말은 곧 자신을 개발시키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리더로서 더욱 더 성숙하고 발전하도록 전심전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은 오늘날 자기개발에 관한 관심을 갖게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지상주의’를 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날이 갈수록 더 많이 배우려는, 더 좋은 교육을 받으려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사교육비가 가장 많이 드는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얼마 전 한 달에 일천만원짜리 고액과외가 세상에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보다 좋은 교육을 통해서 지도자를 만들겠다는 소원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서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생각에 이르자 이제 사람들은 ‘누가 머리가 좋냐’가 관심사로 떠 올랐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좋으면 , 즉 IQ 가 좋으면 공부 잘하여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날 사람들의 생각 속에 가히 신앙 수준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한국 사람들에 국한된 생각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세계적으로 거의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들이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어머니들의 치마바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식을 위대한 지도자로 한 번 키워 보겠다는 야심찬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국 사람, 중국 사람, 필리핀 사람 할 것 없이 치마바람이 드셉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유대 사람들도 치마바람이 있었더라 구요. 누구의 어머니 였죠?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 였습니다. 마20:21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지도자가 되는 것과 IQ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런데 교육학자들의 오랜 연구에 의하면, 위대한 리더가 되는 것과 지능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바드 대학의 하워드 가드너 (Howard Gardner) 교수는 지능(Intelligence)을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물건을 창조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그 문화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정보를 처리하는 생물, 심리학적인 잠재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Gardner, 2001, p. 46). 학교에서는 학습에 중요한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만 중요시하여 학습지능지수(Academic Intelligence)를 측정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워드 가드너 (Howard Gardner) 교수에 의하면, 인간의 지능은 두 가지 학습지능만 있는 것이 아니고, 8가지의 다중지능 (Multiple Intelligence)이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 8가지 다중지능은 i)언어지능, ii)논리수학지능, iii)음악지능, iv)신체 운동지능, v)공간지능(spatial intelligence), vi)대인지능(interpersonal Intelligence), vii)자성지능(intrapersonal intelligence), viii)자연지능(naturalist intelligence)입니다 (Garder, 2001).]
하워드 가드너와 달리 다른 학자들은 인간의 능력지수를 여러 가지 분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임상과 연구 결과 학자들은 ‘IQ(지능지수) 이외에도 EQ(감성지수), SoQ(사회지수), PQ(실천지수), CQ(문화적응지수), AQ(역경지수), 그리고 SuQ(성공지수)가 사람들의 리더십과 커다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감성지수(EQ)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젠 IQ시대가 아니다. 감성시대다. 그래서 감성지수(EQ0를 개발시켜야 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선진국에선 IQ나 EQ이야기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오히려 IQ이야기 하면 이젠 시대에 뒤 떨어진 촌놈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왜냐하면 IQ는 이제 거의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학생들의 IQ를 검사하지 않습니다. 아니 미국에선 법으로 IQ검사를 학교에서 못하게 합니다.
예전에는 미국에서도 IQ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미국 전 부시 대통령과 고어 전 부통령같은 사람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IQ는 고작 102와 104라고 밝혀졌습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의 IQ가 대충 그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한국의 전 노태우 대통령이 보통사람 대통령을 들고 나온 적이 있는데, 그런 구호가 아니래도 대통령도 머리가 좋은 측별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머리 나빠서 지도자가 못 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서구에서 EQ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고 믿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은 Global 시대입니다. 글로벌 시대이자 다문화 시대인 지금은 사람들이 CQ(문화지능지수)에 관심이 많습니다. 대학교 학과도 Intercultural Studies 학과가 뜨고 있습니다. 수요가 많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CQ Test를 할 정도입니다.
제가 박사과정 논문에서 한국의 Intercultural Leader 12 분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하나같이 CQ, 즉 ‘문화적응 지수’가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혀 예기치 못했고 연구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들이 모두 다 역경/고난지수(AQ)가 놀랄 만큼 높은 분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그분들이 누구인지 궁금하시죠?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선교학자 조동진 박사, 세계 침례교 총회장을 역임하신 김장환 목사, 세계 하나님의 성회 총회장을 역임하신 조용기 목사, 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현 이희돈 WTC국제무역센타 부총재, 전 미국 백악관 부시대통령 정책보좌관 강영우 박사, 김창준 전 미 연방 3선 하원 의원, 현 미국 강석희 얼바인 시장, 현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마원석 선교대학 학장, 김병윤 필리핀 PBTS 학장, 현 미국 조재길 쎄리토스시 부시장, 연방정부 하원의원 공화당 후보인 최석호 현 어바인 시의원 같은 분들입니다.
리더가 되는 결정적인 요소는 AQ(역경지수)이다.
미국의 폴 스톨츠 박사는 경영 컨설턴트로서 저명한 자입니다. 그는 1976년부터 역경에 처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연구해 왔습니다. 그의 연구는 무려 그 표본에 있어서 회기적이라 할 100여 개의 회사를 대상으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역경지수 (Adversity Quotient, AQ)를 측정했습니다 (Maltz, 2002).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해 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미래는 IQ나 EQ보다 AQ에 의해 결정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저의 박사학위 논문 연구 결과가 밝혀준 사실도 그분들(참여자 12분)이 국제적인 리더가 된 것은 그분들의 IQ나 EQ가 높아서가 아니라, 그분들 모두 고난을 극복하는 역경지수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좋은 환경과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더더욱 역경 앞에서 맥을 못 추는 분들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능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AQ(역경지수)가 낮은 사람들입니다. 몇 년 전에 현대의 정몽헌 회장이 대북 비자금에 대해 검찰의 조사를 받다가 높은 사옥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해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만약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이었다면 결코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 보다 더한 모진 시련과 역경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학자들은 ‘IQ가 선천적인 요인이 강한 반면, AQ는 선천적인 요인보다는 후천적인 요인이 더 강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IQ는 내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 있는 정도가 거의 미미하지만, AQ(역경지수)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역경지수가 낮다고 낙심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어나는 환경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듯이 높은 역경지수도 우리가 가지고 태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노력으로 역경지수는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밝혀진 바와 같이, 한 사람이 위대한 리더가 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AQ(역경지수)가 과연 얼마나 높은가’의 문제 였습니다. 이것은 고난은 리더가 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난과 역경 그 자체가 어느 한 사람을 리더가 되도록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고난과 역경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고난에 반응하는 태도는 각기 다르기 마련입니다.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은 고난과 역경이 닥쳐 올 때 자신에게 닥쳐오는 암담하고 부정적인 환경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반응하여 문제를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고난과 역경 그 자체는 어느 한 사람을 파멸로도 성공으로도 이끌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은 그 고난과 역경을 파멸이 아닌 성공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역경지수(AQ)를 높이려면
성공적인 위대한 지도자가 되려면 우리는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AQ(역경지수는)는 과연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고난과 역경을 잘 이해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고난을 계속적으로 이겨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AQ가 높은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고난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닥쳐오는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난의 의미:
인간은 그 누구도 고통 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철인들이 고통에 대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각기 다른 고난에 대한 이론들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것 하나 고난에 대한 완전한 답을 제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모두 다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이해에 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평면적인 우주에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우리가 원기둥을 위에서 내려다 본다면 단지 원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동일한 원기둥을 우리가 측면에서 바라 본다면 직사각형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원기둥을 단지 평면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면, 사람의 시각에 따라 원기둥의 형태는 각기 달리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원기둥의 모양에 대해 각기 다른 주장을 할 것이고 이것은 끊임없이 논쟁을 유발할 것입니다.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기둥은 3차원적인 물체이기에 평면적인 2차원의 견지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차원을 달리하여 입체적인 3차원의 견지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마치 원기둥을 평면적으로 보고 이해하려는 것만큼이나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의 차원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시공의 제한을 받는 삼차원적인 우리 인간과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은 그 존재하는 차원부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특별한 원인들도 우리가 헤아리고 분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반면에 죄를 지어 매를 맞는 하나님의 징계의 수단으로서의 고난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훈련시키고자 하시는 시련의 고난도 있습니다. 반면에 사탄의 시험에 의한 시험의 고난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심리적인 요인이나 부주의에 따른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고통을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고통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아무도 고통을 원치 않지만 고통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생존 자체에 커다란 문제가 야기됩니다. 고통스런 느낌이 없다면 손가락이 불에 타고, 발목이 삐고 심지어 잘려 나가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생존 자체를 위해서 고통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경고 신호를 받기 때문에 우리는 병이나 극단적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가장 비참하게 느끼는 점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고통은 우리가 참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것입니다.
순간적인 고통과 마찬가지로 어느 일정기간 닥쳐오는 고난과 역경도 우리 인간에게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련과 환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고 성경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난이 가져 다 주는 유익성 때문입니다. 이차원적 관찰로는 삼차원인 원기둥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듯이, 우리 인간의 제한된 견해로는 고난의 유익성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베토벤이 음악적으로 완성될 시기에 그에게 끔찍한 시련과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음악가인 그에게 서서히 음악이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련과 함께 '운명'고향곡, '영웅'교향곡, '전원'교향곡 등의 교향곡을 작곡했으며,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베토벤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9개 교향곡 중에 가장 마지막 작품이면서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한 불후의 명작 9번 '합창'교향곡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미 청력을 잃은 상태인 1824년 5월 빈에서 베토벤은 스스로 지휘봉을 잡고 초연했습니다.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을 마치고도 음악이 끝난 것도 모르고 청중의 박수도 듣지 못해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 청중의 환호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닥쳐온 모진 고통과 시련은 천재 음악가를 신의 경지로 올려놓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존 밀턴은 장님이 된 후에 [실락원](Paradise Lost)과 [복락원](Paradise Regained)이라는 대작을 썼습니다. 존 번연은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혀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ogress)이라는 대작을 써냈습니다.
간질 병을 가지고 있었던 ‘줄리어스 시저’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쉴 사이 없이 몰아 붙이며 하루에 두 세시간만을 마차에서 자면서 끝 없는 행군을 계속하여 결국 로마의 전쟁 영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출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 KBS 교향악단 송년 음악회|작성자 샤로테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혀 고난 중에 서신서 중에 1/3을 기록하여 기독교 신앙의 초석을 깔았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적절한 고통은 필요합니다. 양 우리에 양만 넣어 두면, 잘 자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너무 나태하여 운동부족으로 각종 병에 시달리다 결국은 모두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러나 염소를 양과 함께 풀어 놓으면 염소가 끊임없이 양을 뿔로 받아서 양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 당하지 않으려고 양은 원치 않지만 이리 저리 피해 다니며 운동을 하게 됩니다. 결국은 고통이 양을 건강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최근 한 팀의 러시아 과학자들이 편안한 생활이 생명을 단축시키는가, 연장시키는가에 대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동물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한 그룹의 동물들로 하여금 아주 이상적인 환경에서 살게 했습니다. 즉 많은 음식을 주고 긴장 없는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나머지 다른 그룹의 동물들에겐 생명의 위협을 가하면서 음식을 적당량만 주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병들어 죽는 동물, 생기가 없는 동물은 이상적인 환경에 놓여 있던 동물임을 발견했습니다. 동물에게 조차도 적절한 고난과 긴장은 생기 있는 삶을 살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뿐만이 아니라 짐승에게 조차도 적절한 고통은 생명의 길로 걸어가도록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고난을 일컬어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선물로 주셨지만 그 자유에는 책임도 수반됩니다. 따라서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또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아가지 못할 때 인간에겐 고통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양심의 고통을 느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통의 한 원인을 설명할 뿐 고통의 의미를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본연의 책임을 다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반응이 리더십과 인간의 성패를 결정한다
고난에 대해 올바른 반응을 계속 잘해 나가는 사람은 갈수록 AQ(역경지수)가 높아집니다. 그리고 그 AQ(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은 위대한 지도자로 발돋움하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책에서 ‘도전에 적절히 대응한 나라와 민족과 각 개인은 살아 남았지만, 도전에 대해 적절히 반응하지 못하는 나라와 민족과 개인은 멸망 당하였다’고 주장한바 있습니다. 존 화이트는 [투쟁](The Fight)이라는 책에서 “당신은 어려운 시기를 통해 무너지든가 서든가 할 것입니다. 당신은 고난을 겪음으로써 삶을 더욱 진지하게 살게 될 것이고 의식은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프루타르크트는 “인간을 재는 기준은 불행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견디느냐 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그리스인인 에픽테투스는 “인간은 문제 그 자체 때문에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때문에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의 작가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인물인가는 그가 절망적인 상황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가를 보면 알 수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험난한 역경을 잘 극복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데이빗 왓슨은 [악이 없는 두려움](Fear No Evil)이란 책에서 고난에 대한 상반된 반응의 예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날 비극적으로 어린 아들을 잃은 두 아버지가 나를 찾아 왔습니다. 한 아버지의 아이는 네 살 때 백혈병으로 죽었고, 또 한 아버지의 아이는 다섯 살 때 뒤뜰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한 아버지는 자칭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같은 불행을 당하자 그만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또 한 아버지는 자칭 인본주의자였는데 그는 뜻밖에도 헌신적인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거의 같은 고통을 당했지만 그 반응은 아주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고통과 슬픔을 이기지 못한 반면 또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가 주시는 심령의 평안을 깨닫고 그의 고통을 극복했습니다. 이렇듯 고통 그 자체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고통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을 보이느냐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p.140-143)
기도는 우리에게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약5:13)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해야 할까요? 고난 중에 기도는 시험을 이기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마26:36-42).
여기 나타나는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심적고통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영어성경 NIV는 “He began to be sorrowful and troubled...My soul is overwhelmed with sorrow to the point of the death”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몰려오는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고통스런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요1:29). 더 나아가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을 뿐만 아니라,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이유와 고통의 의미를 확인하셨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뜻입니다. 당신께서 고난을 당하셔야만 하는 의미를 이미 알고 계셨겠지만 재확인 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고난 중에 기도하는 보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바울도 사람인지라 질병의 고통 중에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자신에게 다가온 질병의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의 의미는 두 가지였습니다. 그 하나는 자신이 받음 바 은혜가 너무 커서 자고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배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능력이 자신이 약한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고난을 기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다음 고백을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12:9-12)
바울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닥쳐온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자는 누구든 그 고난을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위의 예수님의 예에서와 바울의 예에서 살펴보았듯이 말입니다.
의미 부여는 역경을 통과하게 합니다.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 남아 의미치료법을 개발해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의미를 발견하는 그 순간, 어떤 면에서 그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나찌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이나 지능지수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꼭 살아야 할 절실한 삶의 의미와 목표를 가진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하기를,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견딘다”는 니체의 말은 그곳에서 저의 삶을 지탱하는 모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저 자신에게 살아갈 이유와 목적을 제시함으로써 고난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17세기 수사인 브라더 로랜스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고난들 바라볼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견딜 수 없는 고난은 없는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그 누구나 삶에서 의미를 찾는 순간 고난과 역경은 더 이상 그를 파멸로 끌어내리지 못합니다. 즉 고난의 의미를 찾은 사람 또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그 고통이 어떠하든 그것을 견디게 합니다.
조지 헨델은 전신 마비 증상이 일어나는 가운데 [메시야](The Messiah)를 작곡한 전설적인 음악가입니다. 헨델이 불후의 명곡 메시아를 작곡한 배경 은 이렇습니다. 헨델은 근세기에 가장 뛰어난 작곡가로서 그가 만든 곡마다 사람들의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그의 곡이 발표되는 공연장마다 깡패들을 동원하여 공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는 반신 불구가 되었습니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던 어느 날 그에게 이름 모를 한 시인으로 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와 버림받은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능의 주님은 온 세상의 왕이 되어 다스리고 계십니다. 힘을 내십시오!" 이 한 통의 격려 편지가 헨델의 마음 속에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의미를 재해석하게 해 주었습니다. 다시 힘을 얻은 헨델은 2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묵상에 몰두했습니다. 24일째 되는 날, 하인이 그의 방에 들어갔다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헨델을 보았습니다. 헨델은 잠시 후에 악보를 들고 "내 앞에 하늘이 열렸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었다!"고 외쳤습니다. 바로 그 날 헨델은 영원불멸의 명작 “메시아”를 작곡하였던 것입니다. 한 무명의 시인이 보낸 격려의 편지가 절망과 좌절로 죽어 가던 헨델로 하여금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고난은 그를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가 자신에게 닥쳐온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고난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마침내 영원불멸의 명작 메시야를 작곡하는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의미부여는 삶의 태도를 바뀌게 합니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정신 분석학자인 칼 메닝거(Karl Menninger)는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명한 심리학자 셀리그먼 (Seligman)은 “해석이 사건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태도는 사건해석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건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건에 대한 태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캔터키 치킨의 창업자 쌘더스는 65세의 나이에 자신의 아들과 모든 재산을 잃고 부인은 떠난 고난이 겹치고 겹치자 정신병원에서 처음에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자실로 고난에 대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기도 중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1008번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은 세계적인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를 일구어 내고 마침내 자신은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 사업에 헌신하게 됩니다.
(*다음은 설교자료를 위해 그분의 자세한 고난의 스토리를 소개한 내용입니다.)
캔터키 치킨의 창업주 Harland Sanders 의 사건해석:
캔터키 치킨의 창업주 Harland Sanders는 1890년 이디아나 에서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6살 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일을 나가야 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그는 두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음식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10살부터 농장에 취직하여 노동일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에 4불을 벌기 위해 하루에 14시간씩 새벽 4시부터 밤늦게까지 옥수수 방과 치즈로 허기를 채우며 일했습니다. 그는 청년이 되어 철도 노동자, 보험설계사, 주유소 경영 등 고된 일들을 하면서 아름다운 아내와 자녀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공항과 함께 그의 나이 40세에 무일 푼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지 않고 주유소 귀퉁이 작은 공간에서 어릴 적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조리법으로 직접 만든 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 여섯 개로 시작한 카페는 입 소문을 타고 크게 성공했다. 45세에 켄터기 주지사로부터 커넬(대령)이라는 명예대령칭호도 받고 이후로 ‘커넬 샌더스’로 불리며 마을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카페에서 번 돈을 모두 모아 모텔을 지었으나, 하루아침에 레스토랑과 모텔은 화재로 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그 자리에 142석의 대규모 레스토랑을 다시 지었지만, 국가 도로사업 계획으로 일년도 채 안돼 헐 값에 레스토랑을 처분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아내마저 그를 떠났습니다. 그의 60년간의 수고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절망과 좌절감에 휩싸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께서 자기를 이 땅에 살려두시는 것은 나를 사용하시거나 아니면 벌을 주시기 위해서다’라고 생각하며 마침내 하나님과 자신까지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는 1950년 어느 날 늦은 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남몰래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그는 자살을 하려고 병원을 빠져 나와 배회하다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찬송가소리를 듣고 찬송 소리를 따라 자신도 모르게 한 조그마한 교회로 이끌려 갔습니다.
그는 늙은 노인이 부르는 찬송 소리를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노부인과 더불어 한참을 울며 기도하고 회개하고 나서야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쓰시기 위해 부르시고 계시다’고 고난의 사건에 의미를 깨닫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안과 자신감이 생겨났습니다. 비록 자신의 나이가 65세였지만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사업을 일으켜 하나님의 복음사업에 헌신해야겠다는 새로운 인생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가 새로 하기로 작정한 사업은 닭튀김 장사였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닭튀김 비법을 설파하기로 작정하고 중고 포드 자동차에 압력솥을 싣고 전국을 누볐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황당한 제의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1008번의 퇴짜’를 맞고서야 결국 옛 친구의 레스토랑에 치킨 한 조각에 4센트를 받는 조건으로 첫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얼마 안되어 그의 치킨요리법은 대 히트를 치게 되고 친구는 얼마 후 200개가 넘는 프랜차이즈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샌더스는 꾸준히 승용차를 타고 전국을 돌며 프랜차이즈를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그의 매점은 전세계에 80여 개국에 프랜차이즈가 생겼습니다. 그는 75세에 다른 사람에게 회사의 운영권을 넘기고 남은 생을 구제와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1008번의 실패(퇴짜)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그에게 닥치는 시련과 역경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AQ(역경지수)가 지극히 높은 사람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노먼 빈센트 필 목사님은 아흔 다섯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평생의 친구 페니(j. c. penney : 미국의 전설적인 백화점 왕)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오래 사신 만큼, 인생사를 살아오면서 온갖 어려운 문제들을 겪으셨을 겁니다. 당신의 문제 해결 철학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노먼 목사님, 사실 나는 어떤 문제를 직면하면 먼저 감사 드립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하나하나 극복할 때마다 내가 더욱 강해지고, 앞으로 더 큰 문제를 대면할 만한 준비를 갖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문제를 발판으로 더욱 성장한다고 할까요?”
(노먼 빈센트 필 “생각의 힘”, p.10 )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문제에 봉착했을 떼 노(老)백화점 왕 페니처럼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정신 분석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가 말한 것처럼,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나머지 10정탐꾼 스토리가 나옵니다. 10정탐꾼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하고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의 태도는 10정탐꾼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과는 사건해석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건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우리가 그 땅을 쳐서 취하자”라며 저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사건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문제를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태도는 그 인생을 결정합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정식학교 교육은 3개월도 채 받지 못했습니다. 교사도 학생도 바보라고 희망이 없다고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보를 천재로 변화시킨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사가 장학사에게 에디슨은 바보라서 더 이상 교육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을 에디슨이 듣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에디슨을 데리고 학교로 가서 목청을 다해 ‘내 아들 에디슨은 당신들 교사나 장학사보다 더 머리가 좋다’고 외쳤습니다. 후에 에디슨은 ‘어머니의 그 외침이 자신이 정말 바보가 아니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게 했다’고 회고 했습니다 (강영우, 2002). 어머니때문에, 에디슨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미부여를 다르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에는 스스로를 바보로 생각했지만, 이제, 어머니의 말을 믿고 스스로를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에디슨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의 태도 변화에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지속적인 노력이 더해져 바보가 천재로 변화된 것입니다
꿈과 비전은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희망은 사람에게 “활동하고 성취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합니다. 성경은 “묵시(계시/비전)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잠29:18)라고 말씀합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규모 없이 계획도 없이 방자히 되는대로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희망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일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거나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긍정적인 부분들이 부정적인 부분들보다 훨씬 많다 할지라도 꿈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부정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고 바라봅니다. 실제로 꿈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좋은 환경 가운데서도 부정적인 모습들만 바라봅니다. 반대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두운 환경 가운데서도 항상 긍정적인 면들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갑니다.
최근 의학 잡지에서 미국 종양학 협회(American Society of Medical Oncology)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의사는, 암 전문가 두 명이 토론하는 것을 우연히 듣고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두 의사는 암 환자들에게 Etoposide, Platinol, Oncovin, 그리고, Hydroxyurea라는 동일한 처방약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의 환자는 22%의 호전율로 다른 의사의 환자는 74%의 호전율로 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나쁜 결과가 나온 의사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하자, 좋은 결과를 낸 의사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환자들에게 Hope이라는 한 가지 약을 더 처방하고 있다네! 즉, 나는 내 환자들에게 그들이 곧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해주고 있다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께서 쓰신 위인들은 모두다 극심한 고난을 극복해낸 사람들입니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그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모진 고난을 이겨낼 비약(秘藥)을 저들에게 아주 어렸을 때에 주셨다는 점입니다. 저들에게 저들의 장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 형제가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꾸게 하시므로 자신이 장차 위대한 왕이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겐 어머니로부터 동족을 구원해내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장차 커서 동족을 구해내는 지도자가 되리라’는 비전을 가슴에 품게 하셨습니다. 다윗도 어린 시절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셔서 왕의 기름부음을 받게 함으로서 자신이 장차 왕이 되는 꿈을 갖게 하셨습니다. 위대한 지도자가 되려면 고난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필수 코스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일수록 그 받아야 할 고난과 역경도 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쓰시고자 하는 종들이 극심한 고난 도중에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 준 것입니다.
희망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사실이 동물 실험 중에서 입증된 바 있습니다. 한 실험에서 시궁 쥐를 물 속에 넣고 분무기를 뿌렸습니다. 그러자 얼마 동안 쥐들은 살아 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17분쯤 후에는 포기하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또 다른 그룹의 시궁 쥐들에게 도 똑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17분쯤 후 쥐들이 물에 빠져 죽기 직전에 그 쥐들을 물에서 건져 내 몸을 말려 주어 정상적으로 건강을 회복 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얼마 후 다시 쥐들을 물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쥐들은 35시간을 버티다가 죽었습니다.
감사는 고난을 극복하는 힘을 줍니다.
저의 논문 참여자 12분 모두 역경지수가 높은 분들이지만 특별히 그 중에 역경지수가 가장 높은 분은 강영우 박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해외 시각장애인으로써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에 이릅니다. 한국인 1세로서 미국 최초의 차관보급에 오른 시각장애인 강영우 박사는 자신이 어떻게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계기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고난 중에 감사하는 믿음을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다. 그에게는 육신의 가시, 죽 불치의 병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도에 응답 받지 못했다고 실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고나 불평하지 않았다. 나는 두 눈의 시력을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에 응답 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을 무척이나 원망하였다. 실명의 고통에 더하여, 양친이 돌아가신 후 그나마 누나가 공장에 다니며 우리 네 남매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누이마저도 과로로 세상을 떠나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절망에 싸인 나는 눈만 다시 보게 해주신다면 공장 일이라도 하여 어린 두 동생과 뿔뿔이 헤어지지않게 하겠다고 호소하며 피눈물 나는 기도를 했다. 하루 이틀이 나니라 2년 동안을 한결같이 열심으로 기도하였다.
그러한 기도를 응답 받지 못하고 아홉 살 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열세 살 된 남동생은 남의 집 철물점으로 보내고 나는 맹인 재활원으로 들어가야 했을 때, 좋으신 하나님,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서 역사하신다면 어떻게 이렇게 처참한 비극을 그대로 지나쳐 버리실 수 있겠느냐고 원망하고 불평하였다.
그런데 유사한 처지에서 바울은 감사하는 믿음으로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그 동안 잃은 것은 시력 하나인데 천하를 다 잃은 것처럼 생각하고 방황의 세월을 보냈지만, 관점을 바꾸어서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나에게 주신 은혜도 헤아려 감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p. 203-211).
성경은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50:23). 감사하는 자는 고난도 역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고난을 통해 위대한 리더가 된 인물들
요셉
역경을 통해 하나님이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아주 좋은 예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질투심 많은 형제들 때문에 노예로 팔려 갔던 사람입니다. 그는 12년 동안 노예로 지내다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한 그로서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 중에 절망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훗날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고통을 통과함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통을 사용하셔서 그의 가족을 구하셨습니다. 그때 그는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50:20)
모세
신앙인 중에 모세의 광야 40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광야에서의 40년의 간의 고난을 통하여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에게 40년의 고난과 시련이 없었다면 과연 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바울
우리는 성경에서 고난의 종하면 예수님 다음으로 모세, 요셉, 바울을 떠 올립니다. 모세도 요셉도 그렇지만 바울을 바울되게 한 원동력이 그의 받은 고난과 그 고난을 올바로 기쁨으로 받은 것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 바울처럼 고난을 긍정적으로 대면한 이물은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 중에도 스스로 기뻐했을 뿐 아니라 고통스런 옥중에 있으면서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빌3,4장) 바울은 고난을 기쁨으로 맞이한 리더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그는 감옥 속에서도 찬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합니다. 그 어떠한 고통스런 환경도 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환난 중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한 지도자 바울에게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딤후2:9),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딤후3: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고후4:8) 고백합니다. 바울처럼 AQ(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극복한 바울은 선교지에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효과적으로 세우는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고난을 먹고 자란 미국의 역대 대통령의 위대한 리더십: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 항해에서 풍랑이 몰아치거나 캄캄한 터널이 다가오면 그 동안 가슴에 품었던 큰 뜻이나 꿈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참된 리더는 오히려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더 큰 꿈을 향해 도전에 맞서는 사람입니다.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링컨은 어린 시절 정규교육이라곤 고작 1년 남짓 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어머니를 통해 최고의 신앙에 기초한 최고의 가치교육을 받았습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오늘날의 나는 모두 어머니가 있기에 가능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머니에게 꿈꾸는 것을 배웠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훌륭한 어머니에 비해, 그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이 하루 하루를 그냥 저냥 살아가는 거친 농부였습니다. 그런 부친은 링컨과 링컨의 어머니가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이면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가만 두지를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을 통해 미래를 꿈꾸고 새로운 비전을 가지게 된 링컨은 아버지의 핍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 그를 아버지는 더욱 미워하게 되었고 핍박은 날이 갈 수록 거세어졌습니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링컨의 시련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농사일을 돕는 것도 벅찬 어린 링컨에게 아버지는 집안 농사일을 다 마치고 할 일이 없으면 이웃 집 농사일을 해주고 돈을 벌어오라고 해서 벌어 온 돈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링컨이 “나도 한 때는 노예였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역사가들은 이 때를 두고 한 말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핍박을 통해 노예 같은 삶의 비참함을 체험한 링컨은 노예들의 참담함을 자기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링컨의 이러한 고통은 후일 노예를 해방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통령에 도전하게 하는 게기가 됐습니다. 따라서 그의 노예 같은 고난의 삶은 그의 리더십 성취에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링컨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성자 같은 인품으로 잘 알려진 링컨이었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에 조차도 참석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아버지의 묘지에 비석하나 세우지 않았습니다.
링컨은 아버지때문에 어린시절 극심한 시련의 때를 보내고 가슴 깊이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품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련과 고통이 링컨에게 꼭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 다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현재에 당하는 고난을 장차 이루어질 비전을 바라보며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링컨은 오히려 고난의 역경을 통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온화함과 문제 앞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과 인내심을 갖게 했습니다. 링컨은 고난을 통하여 위대한 리더십의 자질들을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약관 38세의 나이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낙선이었습니다. 낙선에 이어 그의 인생에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닥쳐 왔습니다.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이었습니다. 소아마비는 주로 소아들이 걸리는 것인데, 루즈벨트는 39세 장년의 나이에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의한 하반신이 마비되어 중증 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을 꿈꾸는 젊고 의욕이 넘치는 그에게 청천 벽력과도 같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그 당시 1920년대에, 미국에서조차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때문이 만만찮았습니다. 그래서 하반신 마비 중증 장애인이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측근들은 ‘정계 복귀는 불가능하니 대통령이 되는 꿈을 포기하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중증 장애인으로 만든 소아마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 앞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 그 고난을 딛고 그 위에 올라 섰습니다. 그는 윔스프링스에서 7년 동안 재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연설할 동안은 서 있을 정도가 되자, 정계에 복귀한 그는 1928년 휠체어에 앉은 채로 뉴욕 주지사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932년, 결국 미국 제3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인생의 거센 시련과 풍파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고야 만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국가의 명운이 걸린 경제 대공황의 침체에서 나라를 건져 냈습니다. 또한 그는 세계 대전에서 2차에서 연합군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39세 때부터 남은 생애 24년을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20세기의 영웅으로 미국인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위대한 리더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리더십을 연구할 때 항상 연구모델이 되는 사람이 바로 링컨과 더불어 32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입니다.
영부인이었던 에러너 루스벨트에 의하면 ‘그는 장애때문에 오히려 세계를 가슴에 품는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소아마비 장애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도 냉정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할 줄 아는 그러한 마음을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휠체어에 앉은 중장애인이 되면서부터는 가난한 사람들, 노약자들,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고난이 그를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 남을 섬기는 위대한 리더가 되게 한 것입니다.
고난의 민족 유태인, 그리고 한국인
타임즈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알버트 아니슈타인과 외교와 평화협상의 귀재로 알려진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등을 비롯, 각계에서 20세기를 이끌어온 최고의 지성 21명 중 15명이 유태인입니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사는 유태인은 고작 1천 5백 만 명에 불과한데도 노벨상 수상자 3명 중 1명이 유태인입니다. 타민족에 비해 유태인들이 지능지수가 결코 높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이 각계 각층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은 1948년에 독립을 이루기까지 2천년을 나라 없이 떠돌며 디아스포라로 살아온 민족입니다. 어느 민족보다 고난과 역경을 오래 많이 겪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역경이 저들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저들을 더욱 위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난과 역경 앞에서 굴하지 않고 그 민족적 시련을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못지않게 고난을 많이 격은 민족을 꼽으라면 우리 한민족을 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민족 역사상 960여 차례의 외침을 받아오면서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겪은 민족입니다. 특히 일제치하 40년의 강압과 수탈을 겪고 6.25 동란의 동족 상잔의 참담한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러한 민족적 고난의 쓴 잔을 마신 한민족은 지금 어떠합니까? 고난을 통해 빚어진 한국인의 강인한 정신력은 오늘날 한국을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섬기는 리더십의 요체는 고난
섬기는 리더십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섬기기 위해서’라고 하신 데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고난을 통한 섬김 그 자체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강건함을 위해 친히 채찍에 맞으시므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 친히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시기 위해 친히 마음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모두다 당신 자신에게는 고난을 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섬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참된 리더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두다 예수님처럼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남을 섬긴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고난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과연 섬기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고 경험이 많을지라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약한 자들을 섬기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긍휼은 영어로 ‘compassion’인데, ‘com’은 ‘함께’라는 뜻이고 ‘passion’은 ‘고통’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compassion’이란 글자 그대로 ‘고통을 함께 나누는 마음’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약한 자와 고통과 고난을 함께 하신 삶이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대신 짊어지신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가난한 자와 죄인와 창기의 친구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11:19, 눅7:14). 그래서 섬기는 지도자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소유자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에겐 쉽게 나타나는 성품은 아닐 듯 싶습니다. 40년의 모진 고난과 시련을 통과한 모세의 온유한 성품이 곧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쓰임 받은 종들이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고난을 받다 보니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과 시련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럽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참으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의미를 아시고 고난을 참으셨던 것같이 저와 여러분도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의미 있는 고난은 그것이 아무리 거센 고난일찌라도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고난이 크면 영광도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세지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더 커지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온유하고 부드러워지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순결하고 정직하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주님 가까이 가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영적으로 더 예민해지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죄와 멀어지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AQ(역경지수)를 높여 줍니다.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은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고난은 우리를 참된 지도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모세처럼, 요셉처럼, 바울처럼 말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위대한 리더가 되게 하는 영적인 밥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케 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더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고난 주신 주님께 감사하십시다. 할렐루야!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 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4: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