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이혜숙
연꽃이 방글거린다. 수련은 화려한 자태로 나를 유혹한다. 집 둘레에 만발한 꽃들을 보면 매우 행복하다. 텃밭을 가꾸며 사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꽃을 보며 만족하는 나는 아직은 이름만 농촌 아낙이다. 충청도 태생이면서 음성이란 지명만 알았었지 다녀간 적이 없는 곳으로 내가 온 것은 어떤 인연일까.
삼십여 년 넘게 타향살이를 하다가 대소에 집을 지었다. 남편 고향은 포항인데 부모님 돌아가시고 그곳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청주 사는 동생이 이곳의 땅을 추천했다. 퇴직 후 전원생활을 꿈꾸면서 사 두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울산 집을 팔려고 내어 놓았다. 팔리지 않자 전세를 놓고 이곳에 집을 지었다. 허허벌판에 집만 덩그러니 짓고 보니 세찬 바람만 지나간다. 바닷가 마을만 바람이 세게 부는 줄 알았더니 이곳 바람도 장난이 아니다. 남쪽에 오래 살던 몸은 여기 날씨에 적응을 못 하고 추위에 병이 나고 더위에도 병이 난다. 그러기를 삼 년, 이젠 몸도 마음도 순응에 간다. 더워도 추워도 가뿐이 이겨내고 정착을 한다. 이제는 나도 음성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처음 집을 지을 때는 내가 과연 여기서 살 수 있을까 했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심 때문에 뿌리를 내리기가 겁났다. 같은 충청도 사람이라 이해가 될 줄 알았는데 강한 텃세에 정이 떨어졌다. 어울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도시보다도 더 이기적인 주민에게 다가가기도 싫었다. 둥지를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다 역사학자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충북 이북 지방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땅, 백제 땅, 신라 땅이었다 한다. 늘 이리저리 침범당하다 보니 배타적이 되었단다. 그 강의를 듣고 조금은 이해가 간다. 지역성 특성이 그렇다면 내가 이해해야지. 우리가 일본을 배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성은 그 지역 땅의 기운을 닮아 간다는 생각을 해 본다.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는데 늘 내 처지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직 음성을 잘 모른다. 그래서 인터넷도 뒤지고 이곳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다가 대소면 주민자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 둥지가 된 곳을 조금 더 가까이서 알고 느끼기 위해. 난 행운아인가보다. 자치 프로그램에서 훌륭한 선생님도 만나고 좋은 친구들도 만났다. 서로 의지를 북돋아 주고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다시 일깨운다. 세계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반기문 유엔 총장님의 고향도 음성이다. 문학인들의 활동이 왕성한 곳도 이곳 같다. 둥지를 옮겨와 산 덕분에 음성 문인 협회에도 가입했다. 가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설성문화제에 참여했다. 호스피스 교육받을 때 실습 나간 꽃동네를 만드는데 초석이 되신 최귀동 어른도 이곳 금왕 태생이란 걸 알았다. 이름난 분에서부터 민초에 이르기까지 나보다 주위를 더 살피는 곳이 바로 음성인 것 같다. 내 주위 분들도 많은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본다. 그분들을 가까이 보면서 알게 모르게 몸에 배어든 봉사정신은 이 고장의 맑고 깨끗한 정신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곳곳에서 나보다 남을 위해 열심히 사는 많은 분을 본다.
엉성하던 집 주위가 정돈되었다. 솟대도 세우고 장승도 세웠다. 어느새 자란 나무들은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는 놀이터가 된다. 허수아비가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지만, 한 명의 도둑을 열 명의 경찰이 잡지 못하듯 집 주위를 맴돌며 먹이가 있으면 어김없이 먹고 간다. 곡식을 빼 먹을 때는 밉다가도 공생하며 살자고 마음먹으며 피식 웃고 만다.
사 먹는 것에 익숙하던 내가 지금은 손수 차도 만든다. 민들레, 연잎, 매실, 아카시아, 쑥, 무공해 식물들을 채취해서 차를 만드는 기분은 도회지에선 상상도 못하던 것이다. 편리함에 길든 생활에서 힘은 들지만 뭔가를 직접 한다는 것이 보람찬 일이란 것을. 비록 작지만 넉넉한 둥지가 되어 누구든 와서 차도 마시고 즐거운 마음도 나누고 살았으면 한다.
지금은 마을 분들이 지나가다 아는 체도 하고 정다운 인사도 나눈다. 가끔은 들어와 차도 마신다. 밀어내던 마음이 변해 서로 안아주는 관계가 된다. 알기 전에는 무심하더니 지금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있음을 느낀다. 세상은 더불어 둥글둥글 살아야 하는데 고맙다. 몇 번의 둥지는 도회지에서 틀었었다. 시골에서는 절대 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곳에 내 둥지를 만들었다. 대소의 포근한 사랑과 넉넉한 기운이 따뜻한 내 둥지에 더 큰 사랑이 찾아와 주기를 기대해본다.
차갑기만 한 내 마음에도 포근한 둥지하나 만들어야겠다. 음성이란 곳에서 새로 태어난 멋진 사랑의 둥지를 만들어 늘 따스한 봄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뒤쪽 야생화밭에 꽃들이 활짝 웃는다. 비록 시작은 볼품없지만, 동네 입구를 환하게 하는 마을의 작은 명소로 만들어야지. 꽃을 보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정원을. 내 마음을 저 꽃들이 아는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정답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