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회덕향교 유교아카데미 일반강좌 제9강
숭현서원의 역사와 배향인물
송 구 영(숭현서원 원장)
● 위치 : 대전광역시 유성구 엑tm포로 251길 36(원촌동)
● 지정 :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7호
1. 숭현서원
삼현서원(三賢書院) 혹은 팔현묘(八賢廟)라 불리웠던 숭현서원은 회덕의 명현인 수부 정광필(守夫 鄭光弼), 충암 김정(沖庵 金淨),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죽창 이시직(竹窓 李時㮨), 야은 송시영(野隱 宋時榮),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그리고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배향한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선조 18년(1585)에 정광필, 김정, 송인수 등 삼현을 향사하기 위해 용두록에 지은 삼현서원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타버리자 광해군 원년(1609)에 송담 송남수(宋潭 宋枏壽)를 중심으로 회덕지방 유생들이 현 위치에 중건하고, 그해 유생들이 나라에 상소하여 숭현(崇賢)이란 이름을 받았다. 이후 김장생. 이시직. 송시영. 송준길 그리고 송시열 등 5현을 더 배향한 숭현서원은 고종 8년(1871)에 단행된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지게 될 때까지 회덕향교와 더불어 우리지역의 유생들이 학업을 익히며 선현에게 제향을 지내던 장소였다. 묘정비만 남아 있던 이곳을 1994년 발굴 조사하여 1995년에서 2001년까지 복원하였다.
2. 배향인물
● 정광필(鄭光弼) : 1462(세조8)~1538(중종33)
문신으로 자 사훈(士勛), 호 수부(守夫), 본관 동래, 시호 문익(文翼).좌참찬 정난종(鄭蘭宗)의 아들로 태어나 성종 23년(1492)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학유, 부제학, 이조참판, 예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6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정암 조광조와 충암 김정을 구하려다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가 회덕에 은거 중 김안로의 무고로 김해에 유배되었다.
● 김정(金淨) : 1486(성종17)~1520(중종15)
문신이자 학자로 자 원충(元沖), 호 충암(沖庵), 본관 경주, 시호 문간(文簡).보은에서 이조판서 김효정(金孝貞)의 아들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한 후 정암 조광조와 더불어 지치주의 (至治主義)를 실현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 미신타파, 향약실시 등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 송인수(宋麟壽) : 1499(연산5)~1547(명종2)
문신이자 학자이며 절신(節臣)으로 자 미수(眉叟), 호 규암(圭庵), 본관 은진, 시호 문충(文忠). 건원릉 참봉 송세량(宋世良)의 아들로 태어나 중종 16년(1521) 문과에 급제, 홍문정자, 사헌부지평. 예조참판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고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 청주에 은거하고 있던 중 사약을 받았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특히 성리학에 밝았고 그 보급을 위해 힘썼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 김장생(金長生) : 1548(명종3)~1631(인조9)
문신이자 학자로 자 희원(희원), 호 사계(沙溪), 본관 광산, 시호 문원(문원).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이이, 송익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율곡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대학자이다. 선조 11년(1578)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공조참의.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정묘호란 때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 후 형조참판에 올랐으나 곧 사직하고 연산에 은거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문인으로는 송준길. 송시열을 비롯 이유태. 김경여 등이 있다.
● 이시직(李時㮨) : 1572(선조5)~1637(인조15)
문신인 선생은 자 성유(聖兪), 호 죽장(竹窓), 본관 연안, 시호 충목(忠穆)
청암 도찰방 이빈(李賓)의 아들로 태어나 선조 39년(1606) 사마시에 합격하고 인조 2년(1624)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종묘시직장. 병조좌랑, 사헌부장령, 장악원정을 거쳐 봉사시정을 역임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 들어가 항거하였으나, 결국 적병이 강을 건너 성을 함락시키고 쳐들어오자 사복시주부 송시영과 더불어 자결하였다.
● 송시영(宋時榮) : 1588(선조21)~1637(인조15)
문신인 선생은 자 공선(公先), 호 야은(野隱), 본관 은진, 시호 충현(忠顯). 좌랑 송방조(宋邦祚)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고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6년(1628)에 김장생의 천거로 벼슬을 시작하여 봉사직장. 상의원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 들어가 항거하였으나 이듬해에 적에 포위되고 남문이 함락되자 김상용. 심현. 이시직과 더불어 자결하였다.
● 송준길(宋浚吉) : 1606(선조39)~1672(현종13)
문신이자 학자로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본관 은진, 시호 문정(文正). 여천군수 송이창(宋爾昌)의 아들로 태어나 인조 2년(1624)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관직에 진출 동몽교관, 장령,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이이를 존경하고 20세 때 김장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기호학통을 이어받은 선생은 우암 송시열과 더불어 효종 조에 북벌계획을 주도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 0607(선조40)~0689(숙종15)
학자이자 문신으로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 본관 은진, 시호 문정(文正). 송갑조(宋甲祚)의 셋째 아들로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학행(학행)으로 1635년 봉림대군(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된 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지만 주로 회덕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여덟살 때부터 송준길의 아버지(송이창)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 후 대전지방에 살면서 송준길과 함께 연산의 김장생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대학자로 추앙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