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서악동 산92~2
무열왕릉 바로 뒷 편에 있으나 관리가 허술해 보인다.
진지왕(眞智王, 550년~579년 8월 24일 (음력 7월 17일), 재위: 576년~579년)은 신라의 제25대 임금이다.
휘는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나 장남인 동륜태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대신 즉위했다.
어머니는 사도왕후(思道王后), 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능은 경주(慶州)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있다.
즉위와 동시에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이듬해에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드렸다. 재위 3년(578년) 7월에는 남조의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외교 관계를 이어갔다
백제와는 대결 양상을 이어갔다. 재위 2년인 577년 10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이에 왕은 이찬 세종(世宗)을 파견하여 물리치고,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방비를 굳게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주었고, 579년 봄에는 백제가 웅현성(熊峴城), 송술성(松述城)을 쌓아 산산성(䔉山城), 마지현성(麻知峴城), 내리서성 등의 길을 끊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17일, 왕이 죽고,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야사 《삼국유사》에 의하면, 즉위한 지 4년 째 되던 해에 정사가 어지럽고 문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하였다. 폐위되기 직전 진지왕은 도화녀(桃花女)를 후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화녀가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2년 뒤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혼령이 도화녀에게 나타나 둘이 관계를 맺었고, 도화녀는 이후 비형을 낳았다. 이후 비형은 진평왕 대에 관리로 등용된다.
한편, 위서 논란이 있는 야사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미실을 왕후로 만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과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던 것 때문에 미실과 사도태후가 결의하여, 노리부를 앞세워 폐위시켰다고 한다
부왕 : 진흥왕
모후 : 사도왕후(思道王后) 박씨
형 : 동륜
조카 : 진평왕
왕비 : 지도부인 박씨 (知道夫人)
아들 : 김용춘(金龍春)
며느리: 천명부인 (신라 진평왕의 장녀)
손자 : 태종무열왕
부인 : 도화녀(桃花女)
아들 : 김비형 金鼻荊
577년에 이찬(伊飡) 세종(世宗)이 서쪽 변경의 주군(州郡)으로 침입하여온 백제군을
일선군(一善郡:지금의 선산) 북쪽에서 격파하여 3,700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축조하여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리서성으로 통하는 길은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熊峴城:지금의 보은군내로
비정)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음으로써 막히고 말았다.
578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진(陳)나라에 사신을 파견, 진흥왕 이래의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었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인터넷자료)
첫댓글 신라 제 26대왕 진평왕 (眞平王)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