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이 품고 바람이 키우네…쫄깃한 '꼬막' 맛에 홀려 '벌교'를 가다
- 소화와 정하섭이 여기서…읽고가면 배로 즐겁다
삼면에 바다를 끼고 사는 한국 사람은 참 먹을 복이 많습니다. 토지가 메마르는 겨울이 오면 바다가 고이 키운 해산물을 아낌없이 퍼줍니다. 개불, 낙지, 굴, 해삼과 온갖 생선들. 생으로 먹고 튀겨먹고 젓갈 담가먹고 하다 보면 추운 겨울도 다 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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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벌교읍 대포리의 갯벌. 해뜨기 전 물이 빠지면서 속살을 드러냈다. |
그런데 저기 구석에 주름진 입을 꼭 다물고 새침하게 돌아앉아 있는 녀석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늦게 소개하는 법인데 성격도 급합니다. 네, 맞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꼬막입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흔히 피조개라고 알고 있는, 삶아서 양념장 얹어먹는 꼬막은 대개 새꼬막입니다. 피조개는 꼬막의 한 종류로 크기가 주먹만한데 구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피조개, 새꼬막 외에 참꼬막이라고 있습니다. 새꼬막과 비슷한데 껍질의 주름 수가 적습니다. 새꼬막보다 더 쫄깃쫄깃하고 맛있지만 어획량이 많지 않아서 가격이 배는 더 됩니다.
종류야 어떻게 됐든 바로 이 꼬막을 맛보러 오늘 벌교에 왔습니다. 아, 물론 부산에서도 꼬막은 살 수 있습니다. 날로 먹기는 좀 그래도 약간 삶아서 양념장 만들어 얹으면 밥반찬으로 먹을만 합니다. 하지만 음식을 먹는다는게 어디 입으로만 먹는 것이겠습니까. 꼬막을 품어키우는 벌교 갯벌도 보고, 꼬막을 성숙시키는 벌교 바람도 쐬면서 분위기를 만끽하는 거죠.
벌교읍내에는 수십 개 식당이 있는데 거의 모든 곳에서 꼬막정식을 합니다. 오늘은 이 집이 맛있다가 내일은 저 집이 맛있다가 합니다. 제가 자주 가는 곳은 할머니가 하시는 꼬막정식 집입니다. 이번엔 다른 데 가야지 하면서 걸었는데 어느 새 그 집 앞입니다.
데친 꼬막부터 한 접시 내 오시는데 새꼬막입니다. 참꼬막은 요즘 많이 비싸서 식당에서 내기 힘들답니다. 날씨가 요상해선지 꼬막잡이가 아직은 시원찮답니다. 데친 꼬막을 한 손으로 단단히 잡고 다문 입을 오도독 벌립니다. 진흙물이 뚝뚝 흐릅니다. 해감이야 했겠지만 꼬막은 여느 조개처럼 뻘물이 쉽게 빠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진흙을 머금은 그 탱탱한 꼬막살이 더 싱싱하고 맛있어 보입니다. 따로 간을 안하고 휘휘 헹군 뒤 삶아낸 꼬막에서는 갯벌 냄새가 물씬 납니다.
삶은 꼬막에 홀려 허겁지겁 배를 다 채우면 안됩니다. 뒤이어 나오는 꼬막전, 꼬막무침, 양념생꼬막은 다 어쩌시렵니까. 달걀 입혀서 노릇하게 구워낸 꼬막전에 막걸리도 한 잔 해야 하고요, 꼬막을 무채 당근 미나리 등 갖은 야채와 함께 새콤한 초고추장에 버무린 꼬막무침은 반쯤 남겨서 밥도 비벼 먹어야 합니다. 전라도하고도 남도인데 반찬은 또 얼마나 맛나겠습니까. 꼬막된장국에 짭짤한 굴젓을 남길 수 없어서 밥 한 그릇 더 시켜야 할 지도 모릅니다.
벌써 꼬막정식 한 상 받은 기분 드십니까. 상상만으로는 성이 안 찬다면 올 겨울 벌교에 한 번 다녀가시죠. 꼬막 먹으러 여기까지 오겠느냐고 웃으십니다만, 정말 달랑 꼬막 뿐이라면 굳이 벌교까지 오라고 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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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현부잣집(왼쪽), '조정래태백산맥문학관' 작가의 꼼꼼한 취재 수첩. 키높이로 쌓인 육필원고도 있다. |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을 읽지 않아서 벌교에 못 가고 있다는 핑계에는 고개를 끄덕여 줄 수밖에 없다.
'태백산맥'을 읽지 않았다고 벌교를 즐길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소설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벌교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만큼은 과장없는 사실이다. 쫀득쫀득하고 '향긋하게 비릿한' 꼬막을 맛보면서 소설 속 한 대목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감흥이 조금은 더하지 않을까. 열 권을 벼락치기로 읽는 것은 불가능하니 대략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1권만이라도 읽고 가거나 '만화 태백산맥'을 읽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태백산맥을 테마로 잡고 벌교 걷기에 나섰다면 회정리에 있는 '조정래태백산맥문학관'부터 들르자. 길 찾는데 도움이 될 태백산맥 문학지도도 한 장 얻을 수 있고, 태백산맥의 내용을 되새기며 워밍업을 할 수 있다. 빨치산 루트를 헤매고 다닐 적 사진, 이적성 논란, 지속적인 신변 위협 등 소설 집필 과정의 모든 것이 전시돼 있다. 오랜 세월의 지난함을 한 눈에 봐 버린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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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역(왼쪽), '태백산맥 문학거리' |
태백산맥 트레킹의 출발점은 벌교역으로 잡는 것이 좋겠다. 일제강점기때 화물열차를 통한 전남내륙지역 곡물수탈의 허브로 이용됐던 이 역에서 염상구와 주먹패들은 치기어린 담력결투를 했다. 역사를 빠져나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태백산맥 문학거리'라는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본정통'이라 불렸던 이 길은 소설의 주무대인 벌교읍내 옛길이기도 한데, 보성군이 소설을 기리는 거리를 만들기 시작해 지난 10월 완성했다. 이 길에는 당시의 건물 상당수가 원형그대로 남아 있어 마치 근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세트장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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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일식당(왼쪽), 보성여관 |
꼬막정식으로 유명한 국일식당이 소설에 등장하는 옛 술도가다. 거기서부터 막바지 수리중인 보성여관(남도여관·등록문화재), 남초등학교(현 벌교초등학교), 북초등학교(현 벌교여중), 포목점(현 신협), 금융조합(현 농민상담소), 자애병원(현 벌교어린이집) 등 과거와 현재의 주요 지점을 짚어보는 재미를 만끽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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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의 집(왼쪽), 부용산 쌈지공원에서 내려다 본 벌교읍내. |
조금 떨어진 회정리에도 소설 포인트 몇 곳이 있다. 벌교제일고등학교는 옛 벌교상고이고 그 옆에 조정래 작가가 살았던 집도 있다. 언덕 위 '현부잣집'은 본래 벌교의 만석지기 박 씨 문중의 집이다. 한옥을 기본틀로 하고 있지만 척 보기에도 일본식 가옥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는 독특한 이 집을 보면서 조 작가는 친일 마을지주를 떠올렸으리라.
원래는 현부자집 제각 안에 있었던 소화의 집은 공사와 보수를 거치면서 없어지고 대신 대문 밖에 작은 초가집으로 재현해 뒀다. 현부자의 전속 무당이나 다름없는 소화와 술도가집 아들 정하섭의 애절한 사랑이 이 곳에서 시작되면서 기나긴 소설도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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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천 |
합리적 민족주의자로 소설의 중심을 잡는 김범우의 집은 벌교천 끝에 있다. 이 집은 벌교 대지주의 집인 김 씨 문중의 집인데 조 작가가 어릴 때 그 집 아들과 친해 곧잘 놀러갔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하루는 좌익천하 다음날은 우익천하로 바뀌는 동안 수많은 목숨이 총칼에, 대창에 희생됐다. 그 살육의 현장이 바로 벌교천에 가로놓인 소화다리다.
# 벌교여행 키워드
◇ 꼬막
벌교, 순천지역에 얼마나 많은 꼬막식당이 있을까. 이 가운데 맛있는 집을 몇 곳만 골라내는 건 오만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도 먹어본 곳 중 어거지로 몇 군데만 추천하자면 전통적인 국일식당(061-857-0588), 벌교태백산맥꼬막맛집(061-858-6100), 그리고 순천시청 근처의 풍미정(061-744-4300)을 꼽고 싶다.
혼자 맛있는 꼬막을 먹고나면 집에 있는 식구들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벌교 역 근처에는 꼬막을 도매가에 살 수 있는 수산물 가게가 즐비하다.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대신 3㎏ 아래로는 팔지 않는다. 스티로폼 박스로 잘 포장해 주기 때문에 한나절쯤 지나서도 살아있는 꼬막을 먹을 수 있다.
◇ 갯벌
꼬막이 나고자란 갯벌을 보러가려면 썰물때를 미리 체크해야 한다. 가장 아름다운 갯벌은 역시 순천만이다. 특히 용산전망대의 일몰은 몇번을 봐도 감탄하게 되는 경이로운 장면이다. 하지만 삶과 어우러진 갯벌의 정취를 느끼려면 벌교읍내에서 차로 10분거리의 대포마을(벌교읍 대포리)을 추천한다. 마을어귀 방파제에서는 물메기를 매달아 말리고 있고 물빠진 갯벌 위엔 배 몇 척이 얹혀 다시 물이 차기를 기다리는, 전형적인 어촌이다. 물 빠진 뒤 마을 동산에 오르면 S라인이 끝없이 늘어진 갯벌 장관을 볼 수 있다. 일몰, 일출때라면 더 아름답다. 10월 꼬막축제가 열릴 때를 빼고는 아주 조용한 마을이므로 여행자로서의 에티켓을 지키자. 마을에 슈퍼마켓을 겸한 민박집이 한 곳 있다.
◇ 벌교5일장
벌교 5일장은 4, 9일에 열린다. 장날이면 벌교는 물론 인근 보성과 순천의 어르신이 모두 모인 듯 북적댄다. 이 때 만큼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전남물류의 중심지였던 벌교의 모습이 재현된다. 3000원짜리 벌교 명물 장터국밥은 장날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 잠잘 곳
벌교에서 숙박을 하려면 읍내 모텔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벌교읍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순천 낙안읍성에서 민박을 해도 괜찮다 .
From : 국제신문
배경음악 : 이렇게 나는 오늘도 - 이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