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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
妙香山小記[2]
甲午朝食, 挾指路僧, 始肩輿而東. 金鉉中曰: [寧邊人, 博學能詩. 其香山諸作曰: “瀀渤春深柳花白, 檀木秋晩國香殘. 十王殿邃浮生感, 萬世樓高日月長.” 餘散佚無傳] 曰: “荇人國今普賢寺地也. 漢鴻嘉三年, 高句麗東明王, 遺其將鳥伊扶芬奴, 伐之, 荇人王大敗, 奔匿石窟, 爲扶芬奴擒降. 謂其窟曰國盡窟, 其深纔坐而巳. 如石窟, 在普賢在.
15일 갑오.
아침밥을 먹고, 길잡이 중을 데리고 처음 담여(擔輿)를 타고서 동쪽으로 향했다. 김현중[영변사람으로 박식하고 시에도 능했다. 묘향산을 노래한 작품들 가운데 이런 것도 있었다.
- 우발수(瀀渤水)에 봄은 깊어 버들꽃 희게 날리고
박달 숲에 가을 늦자 국향(國香)이 시들었네.
시왕전(十王殿) 으슥해서 뜬 인생들 의혹하고,
만세루 드높아 세월이 길구나,
…… (나머지는 흩어져서 전하지 않는다.)]
이 말했다.
“예전 행인국(荇人國)은 지금의 보현사 터입니다. 한나라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세기)에 고구려 동명왕이 장수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이곳을 정벌했습니다. 행인국의 왕이 크게 패해 달아나 석굴로 숨었다가 부분노에게 사로잡혀 항복했지요. 그 굴을 가리켜 국진굴(國盡屈)이라 하는데, 깊이는 겨우 사람이 앉을 정도여서 석실과 같은데, 보현사의 왼편에 있습니다.”
武陵瀑從深谷爲陰湫, 盈科而出, 冒石而下. 窮源而坐, 俯視其浸入樹底之狀, 此觀瀑之一變格也. 遂題一律而返. 詩云: “跫音相襍峽叢叢, 仰視료天映數鴻. 百尺飛泉橫石白, 一竿初日犯人紅. 逶迤樹隔歸僧沒, 惆悵雲深去路窮. 不必忘勞昇絶頂, 別無奇處只倥傯.”
무릉폭포수는 깊은 계곡에서 흘러나와 깊이 못을 이루다가 그 곳을 다 채우고 넘쳐흘러 바위를 타넘고 내려온다. 그 발원지까지 다가앉아 나무 밑을 파고드는 그것의 모양을 굽어보았다. 이는 폭포를 구경하는 한 가지 특이한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마침내 율시 한 수를 짓고 돌아왔다. 그 시는 이러하다.
- 발자취 소리 서로 들으며 울창한 골짜기 찾아들어
고개를 치켜드니 기러기 떼 비치누나
백 척으로 내리는 폭포가 가로 걸려 바위는 흰데
한 발 남짓한 햇살이 사람 얼굴 붉게 물들이네.
이리저리 나무에 막혀 앞선 중은 사라지고
아쉽다 구름 깊어가는 갈길 보이지 않네.
두어라 절정까지 오를 필요 없네
기이한 곳 더 없으면 다만 마음 허전하리.
西山大師登香爐峰詩曰: “萬國都城如蟻垤, 千家豪傑若醢鷄. 一牕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齊.”
西山大師, 名休靜, 東方佛家之祖. 壬辰起義兵于香山, 李堤督如松, 贈之以詩云: “無意圖功利, 專心學道禪. 近聞王事急, 摠攝下山巓.” 明將七十一員, 又聯名折簡于休靜曰: "奉上東方義僧禪敎都摠攝大和尙帳下. 爲國討賊, 忠誠貫日. 不勝珍謝欣仰. 各以銀伍兩靑布一端, 謹助義饗, 伏惟勿却.“ 云云. 其紙紅, 而在內院菴.
서산대사는 「향로봉에 올라」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 만국의 도성은 개미 둑만 같고
세상의 호걸들은 초파리와 다름없네.
창문 가득 밝은 달빛 청허(淸虛)의 베개머리엔
끝없는 솔바람의 가락도 가지가지일세.
서산대사의 이름이 휴정(休靜)이고, 동방 불가의 스승이다. 임진왜란이 일어 묘향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그의 의기에 감동되어 이런 시를 지어 그에게 주었다.
- 공명 이익 뜻 없이
오로지 도와 선에만 전념하더니
나랏일 다급함을 알고
총섭으로 하산했네.
또 명나라 장수 71명이 연명(聯名)으로 휴정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동방의 의승(義僧) 선교도총섭대화상의 장막 아래 받들어 올리나이다. 나라를 위해 적들을 토벌하시니, 그 충성이 하늘을 꿰뚫습니다. 진정 감사함과 숭앙을 이기지 못해 각각 은 5냥과 청포(靑布) 한 단을 내어 삼가 의로운 자리에 보태오니, 부디 물리치지 마소서.
붉은 그 종이는 지금까지 내원암에 남아있다.
惠寰居士送人遊香山詩曰: “妙香山以妙高峯, 靈蹟奇蹤到處逢. 羅漢去時留白鹿, 雙雙花下養新茸.” 擔輿之繩, 編麻也. 倚輿之軛, 揉藤也. 擔以長立, 肋不方列. 前者曳而後者隨, 容於曲, 賴繩長也. 攀於危, 恃前登也, 仰則緩前擧後, 俯則擧前緩後 傾則護臂齊足, 是以輿恒無患. 然俯視肩痕如筧, 背汗如豆, 則輒命屢㵣. 而不忍固坐也.
혜환거사(惠寰居士 : 이용휴 李用休)는 「묘향산에 유람 가는 사람을 전송하며」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 묘향산은 묘고봉과 엇비슷하여서
신령하고 기이한 자취 도처에서 만나네.
나한이 떠날 적에 흰 사슴을 남겼으니
쌍쌍의 꽃 아래서 새 녹용은 자라네.
담여(擔輿)의 멜방은 삼을 꼬아 만들었고. 그 멍에는 등나무를 휘어서 만들었다. 담여를 멜 때는 앞뒤로 서서 메고, 옆으로는 늘어서지 않는다. 곧 앞사람이 끌고 뒷사람은 따르는 형세다. 굽은 길에서도 쉽게 움직이는 것은 멜빵이 길기 때문이고, 오르막에서도 쉽게 오르는 것은 앞사람을 믿기 때문이다. 오르막에서는 앞을 늦추고 뒤를 들며, 내리막에서는 반대로 앞을 들고 뒤를 늦춘다. 한쪽으로 기울면 팔뚝으로 보호하면서 보조(步調)를 서로 맞추는 것이다. 이런 원리로 담여를 이용하므로 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어깨는 눌린 흔적으로 대나무 통처럼 패이고, 등에 맺힌 콩알만 한 땀방울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잠깐 쉴 틈을 주었다. 차마 자리에 편히 앉아 그대로 보기가 민망해서다.
古木衣絶壁而枯, 兀如鬼身. 蟹如灰色, 剝如老蛇縣退, 禿如病䲭蹲顧. 腹穿而枵, 旁無一枝. 依山之石黑, 沿逕之石白, 浸溪之石靑綠. 其疑澼之所摩, 疏之所渡, 石光如舐, 潤赤而滑. 一匹秋暉, 遙鋪楓間, 叉疑洞沙皆淡黃也.
고목이 절벽에 기댄 채 말라버렸는데, 우뚝 선 것은 귀신의 몰골 같고, 게처럼 엎딘 것은 회색이다. 또 껍질이 벗겨진 것은 마치 늙은 뱀이 허물을 벗은 것 같으며, 대머리처럼 뭉툭한 것은 병든 수리가 웅크려 돌아보는 듯했다. 속은 뻥 뚫려 텅 빈 채 곁가지도 하나 없다. 산에 박힌 바위는 검고, 길가의 돌은 희며, 시내에 잠긴 돌은 청록색이다. 그리고 빨래터와 건널목에는 돌이 닳아져서 혀로 핥은 듯 불그레한 윤기가 돌고 미끄러웠다. 멀리 단풍사이로 한 필의 비단 같은 가을볕이 펼쳐지자, 골짜기의 모래 색은 의아심을 품을 만큼 모두 담황빛을 띠었다.
僧之饌松皮脯, 似肉鯖. 鹽沙蔘似魚. 番椒醬似鰕卵醢. 濁酒似牛酪. [東俗以수酪爲肉, 不用於素食.] 入舍利閣, 觀佛畵, 小苾蒭特長竿, 竿頭包紙如矢鏃. 佛像佛蹟, 指點如誦, 甚悉而敏. 衆不看畵, 皆向苾篘之口, 年可過十, 剃髮慾長, 覆額而玄. 舌音向喃喃也.
승려들이 찬거리로 솔 껍질로 만든 포(脯)는 청어의 살과 같고, 소금에 절인 더덕은 건어물과 같다. 또 고추장은 새우알젓과 같으며, 막걸리는 우락(牛酪)같다. [우리나라 풍속에 우락은 고기로 여겨 소식(素食)에 쓰지 않는다.] 사리각(舍利閣)에 들어가 탱화를 구경하는데, 어린 비구가 끝에 종이를 감싸 마치 화살촉 같이 만든 긴 장대로 불상과 부처의 사적을 모두 외우듯 가리키며 설명했다. 몹시 자세하고도 잽싸서 사람들이 그림은 보지 않고 모두 중의 입만 바라다보았다. 나이는 열 살 남짓한데, 깎은 머리가 자라서 이마를 덮을 만큼 검었다. 혀끝에서 나오는 소리로 쉴 새 없이 조잘댔다.
日中踰金鋼窟, 石覆而广, 呀如開口. 少立, 頭不載而重, 佛不懼壓, 猶坐其中. 或有擧杖仰鑽, 試其動靜, 石雖可恃, 余則不忍也. 高比京城彰義門後佛菴, 稍寬敞而拆其窓.
仰見土嶺, 可五里. 禿楓如棘, 流礫橫逕. 尖石冒葉, 遇足而脫, 幾跌而起. 手爲搨泥, 羞後人嗤笑, 迺拾一紅葉以待之.
한나절이 지나서야 금강굴(金鋼窟)을 넘었다. 금강굴은 바위로 덮여 있었는데, 입을 벌린 듯이 속이 텅 비었다. 들어가 잠시 서 있자니 머리에 인 것도 없는데 묵직하다. 그런데 부처는 짓눌리는 것도 두려워 않고 그대로 그 속에 앉아 있다. 어떤 이는 지팡이를 들어 천장을 떠밀어, 그 움직임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바위야 당연 믿을 만했으나, 나는 차마 그러질 않았다. 높이는 서울의 창의문(彰義門) 뒤편 불암(佛菴)에 비길만한데, 조금 더 넓은데다 창문을 열어둔 정도다.
토령을 올려다보니 5리쯤 되어 보인다. 잎 진 단풍나무는 가시나무 같고, 흘러내린 자갈이 길에 가로로 널려있다. 뾰쪽한 돌이 낙엽에 덮여 있다가 발길을 디디자 삐어져 나와, 거의 넘어질 뻔하다가 일어나니, 짚었던 손이 진흙으로 범벅으로 변했다. 그게 뒷사람에게 웃음거리로 비칠까봐 무안하여 붉은 잎 하나를 주어들고 아무 일 없었던 듯 그들을 기다렸다.
坐萬瀑洞, 夕陽映人. 巨石如嶺, 長瀑踰來. 流凡三折, 始齧於根, 凹而湍起, 如蕨芽叢拳, 如龍鬚, 如虎爪, 如攫而止. 噴聲一傾, 下流徐溢, 縮而復泄, 如喘息. 靜聽久之, 身亦與之呼吸. 小焉闃然無聞, 又小焉, 益厲漰湱也.
만폭동(萬瀑洞)에 앉으니 석양이 비친다. 거대한 바위가 산마루 같은데, 긴 폭포가 넘쳐흐른다. 흐름을 세 번이나 꺾고서야 떨어져 돌부리를 짓씹는다. 물줄기가 움푹 팬 곳에 들어갔다가 소용돌이쳐 일어날 때는 마치 고사리 싹이 주먹을 모둔 것 같고, 혹은 용의 수염이나 범의 발톱 같기도 하여 움켜쥘 듯하다가 그친다. 뿜어내는 소리와 함께 내려 흘러 서서히 넘치다가 주춤하고서야 다시 또 헤쳐 나가니 마치 숨을 헐떡이는 것과 같다. 가만히 한참을 듣고 있으려니까 내 몸, 또한 그와 함께 숨 쉬는 듯했다. 조금 뒤에는 고요하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가, 또 조금 지나서야 더욱 세차게 물결을 이뤄 소리쳐서 흘렀다.
褰袴至脛, 擖袂過肘, 脫巾與襪, 投之淨沙. 圓石支尻, 踞水之幽, 小葉沈浮, 腹紫背黃, 凝苔裏石, 燁如海帶. 以足割之, 瀑激于爪, 以口潄之, 雨瀉于齒. 雙手泳之, 有光無影, 洗眼之白, 醒面之紅, 時秋雲照水, 弄余之頂也.
바지를 정강이까지 걷어붙이고, 소매는 팔꿈치 위로 걷어 올렸다. 두건과 버선을 벗어 깨끗한 모래 위에 던져놓고, 둥근 바위를 깔고 물가에 걸터앉았다. 작은 나뭇잎이 잠길락 뜰락 하는데, 배는 자주색이고 등은 황색이다. 돌을 싸고 엉킨 이끼는 미역처럼 반들반들하다. 발로 물살을 베니 발톱에서 폭포가 일어나고, 가신 입안의 물을 뿜어내자, 이빨 사이로 비가 쏟아진다. 또 두 손으로 물을 휘저으니 빛만 있고 그림자는 없다. 눈곱을 닦아내고 술기운에 불콰한 얼굴도 씻는데, 때마침 가을 구름이 물에 비쳐 내 정수리를 어루만진다.
萬木來洞一道, 遠天在瀑布上, 望之若可延頸而及. 泝而登之, 嚴勢坦曠, 亂水流離. 步不可著, 諸人在下, 爲子懼墬, 挽之不得, 可望而不可攀. 一步回頭, 招呼之手口可數, 五步回頭, 眉睫猶向我而仰. 十步回頭, 笠頭如丱, 只辨納納. 百步而顧, 洞口之人, 如坐瀑底, 瀑底之人, 巳不見我矣.
수많은 나무가 골짜기를 끼고 한 길로 늘어 서있다. 먼 데 하늘은 폭포 위에 있어, 바라보니 마치 목만 늘이면 닿을 듯하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자 바위의 형세가 펑퍼짐하니 넓은데, 어지러이 물길이 흘러내려 발붙일 수가 없었다. 여럿이 아래에 있으면서 내가 떨어질까 염려하면서 말려보았자 소용이 없음을 알고 그저 보기만 하고 올라오지 않았다.
한걸음 가서 고개를 돌리니 부르며 외치는 손과 입을 헤아릴 만했다. 다섯 걸음 안에 고개를 돌리니 눈썹과 눈동자들이 여전히 나를 향해 우러르고 있다. 열 걸음에 고개를 돌리니 갓을 쓴 머리가 마치 상투와 같은데, 겨우 가물가물 알아볼 수 있었다. 백 걸음을 가서 돌아다보니, 골짝어귀의 사람은 마치 폭포아래 앉은 듯하고, 폭포 밑의 사람에게는 이미 내가 보이지 않았다.
荒林路絶, 遠日且低. 肅然而恐, 不覺其忙. 廻柯彈面, 叉枝裂裾, 積葉滲泉, 膝以下泥如也. 於是水窮而源見, 潺湲無聲. 曳于石根, 北瞰大壑, 洞然而幽. 紅樹滿谷, 並無一物, 香爐上峰, 咫尺欲來. 空中之路, 一橋可杭. 而邈若仙凡, 香莫致之, 竟㨄掁而歸.
거친 숲길은 끊겼고, 석양마저 낮게 깔렸다. 호젓함에 오싹 겁이 나기도하여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숲을 헤쳐 가니 늘어진 나뭇가지가 얼굴을 때리고, 엉킨 나뭇가지가 옷자락을 찢는다. 쌓인 낙엽에 물이 스며들어 무릎 아래가 진창 같다. 그러다가 진창이 끝나고 폭포의 발원지가 들어났다. 물은 소리도 없이 잔잔히 돌부리로 감아 흐른다. 북쪽의 큰 골짜기를 굽어보니 휑하니 뚫려 그윽하기까지 하다. 단풍 든 나무만 골짜기에 가득하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향로봉 정상이 지척에서 다가들었다. 허공에다 다리를 하나 놓으면 쉬이 건너가련만, 선계와 속세가 아득하여 바라만 보고 갈 수 없으니, 끝내 한스럽게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大略石勢如曬腹, 披至胸乳. 下飽中蹲, 數紋橫臍, 所登之地, 如牛之角之間額之上. 不知石之生也, 空其中, 如覆甕邪. 仰徹低皆石邪. 扣之何窂, 呼之何響邪. 泉源不大, 始出如帶, 借石爲聲 肆于其末, 此造翁之權也.
子之初登也, 一僧躡焉, 指示歸路. 衆人皆散, 留輿于洞, 使乘而至. 步自迦葉敗菴 從石隙, 西踰檀君臺, 脚力費於人十里也.
대략 바위의 모양새는 배를 드러내놓고 가슴께까지 풀어헤쳤다. 아래쪽은 불뚝하고 가운데는 잘록한데, 주름 몇 개가 배꼽근처로 가로질렀다. 내가 올라갔던 곳은 쇠뿔의 사이, 곧 이마빡의 위와 같은 곳이다. 바위가 생겨날 때 그 속이 텅 비어 옹기를 엎어둔 것 같은 것인지, 아니면 통째로 모두 돌덩어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두드려 보면 너무나 단단한데, 소리를 지르면 어째서 울리는 것일까? 샘의 발원은 그리 크지 않아, 처음에는 띠처럼 흐르다가, 바위를 탓으로 소리를 내고, 끝에 가서는 기세가 대단하니, 이는 조물주의 힘이다.
내가 처음 올라올 때 중 하나가 따라와 돌아갈 길을 일러주었다. 그 길을 따라 내려와 보니 다른 이들은 모두 흩어져 가버렸고, 오직 담여만 골짜기에 남겨두어 타고 오게 했다. 나는 이미 퇴락한 가섭암(迦葉菴)에서 바위틈을 따라 서쪽의 단군대를 걸어서 넘었으니 남들보다 10리나 더 다리품을 팔았다.
檀君窟石坼可四丈, 立如剖甕, 腹穹而首銳. 窺天於隙, 避雨於根. 世傳檀君降處. 史云檀木下者, 是也. 檀木叢鬱于上云. 而四尋皆弗見, 只毘盧香爐矗矗遠攢者香木云. 頹菴依窟, 小齊于肩如鴿籠. 石風嚧冷, 僧不得居. 檀君臺窟之西嶺也. 一麓類蝌蚪, 四顯有大海孤之狀.
단군굴(檀君窟)은 바위가 네 길쯤 되게 갈라져서, 서있는 품이 마치 독을 갈라놓은 듯하다. 배는 텅 비고 머리는 뾰족하다.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그 밑에서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단군이 하강한 곳이라 세상에 알려져 있다. 문헌에서 박달나무 아래라고 말한 곳이 바로 이곳이니 박달나무가 위쪽에 숲을 이룰 만큼 울창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방으로 찾아봐도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비로봉과 향로봉에 뾰족뾰족 아득히 솟은 것은 향나무라 한다. 퇴락한 암자가 굴에 붙어있는데, 작기가 어께 높이만 해서 마치 비둘기 집과 같다. 바위바람이 차게 일어 중이 살 수 없다고 했다. 단군대는 굴의 서편꼭대기에 있다. 산기슭 하나가 마치 올챙이와 같은데, 사방을 둘러보니 너른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의 형상과 같기도 했다.
風浮樹抄, 技舞婆裟, 滿座旣醉, 凝絃方促, 遠氣忽夕, 相視以寒, 催笻呼屐, 略無第次. 望寺而起, 趁烟而下, 人之半膝, 暝色巳沒. 而薄暉猶在臺頂一寸也.
바람은 나뭇가지 끝을 흔들고, 기생은 너울너울 춤을 춘다. 만좌(滿座)는 이미 취했고 거문고 줄은 바야흐로 바삐 울었다. 먼 산으로 벌써 저녁 빛이 깃들어 추워지니 서로 눈치를 보며 내 지팡이, 내 신하며 찾느라 뒤엉켰다. 절 쪽을 바라보며 일어나, 안개를 따라 내려오는데. 사람의 무릎 반쯤은 어둠 속에 이미 묻혔으나 넘어가는 햇살은 아직도 단군대 이마 끝에 한 치가량 남아있었다.
並騎不欲後, 前馬之蹄下, 難免飛塵. 下山不須先, 後人之履頭, 易蹴危石, 天柱石屹如巨僧, 遙立西峰. 朝往路上, 見僧之指, 夕過其處, 雙眼先迎. 擔輿之僧, 皆一擧首, 以爲遠途之堠人也.
여럿이 나귀를 타고 함께 갈 때는 뒤처지려 들지 않는데, 그것은. 앞선 나귀의 발굽 아래서 날리는 먼지를 면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또한 산을 내려갈 때는 앞장서지 않는데, 그것은 뒷사람의 신발 끝이 바위를 차 굴리기 쉽기 때문이다. 천주석은 저 멀리 서편 봉우리에 덩치 큰 중처럼 우뚝하니 서있다. 아침에 갈 때 길 위에서 중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보았는데, 저녁에 그곳을 지나려니까 두 눈이 먼저 알고 반긴다. 담여를 맨 중이 모두 한 번 고개를 들어 쳐다보며 그것을 후인(堠人)이라 말했다.[예전에는 5리 10리마다 장승을 세워 거리를 알게 했다. 즉 이정표다.]
過極樂殿, 暝燈邃靑, 藏經古閣, 瓦稜陰陰, 田徑麻竿, 白立依依. 老釋迦拜, 各致殷動, 朝見其人, 夕返其寺. 一日之面, 若故人然. 極樂殿屬普賢.
극락전을 지나는데 어두침침한 등불이 그윽하여 푸르기까지 했다. 장경고각은 기왓골이 침침하고, 밭두둑에는 희게 마른 삼대가 어슴푸레하니 서있다. 늙은 중들이 나를 맞아 반기며 저마다 은근한 정을 보낸다. 아침에 그 사람을 보고서 저녁에 그 절로 돌아와 하루 만에 만났는데도 마치 옛 벗을 마주한 듯했다. 극락전은 보현사에 속한다..
與禁寰師, 講正法華火宅喩. 師五十餘臘, 口能誦經, 向人疑疑. 其兄慧信亦爲僧, 住極樂殿, 經旨多於寰云, 問: “爲僧樂乎?” 曰: “爲一身則便.” “曾到京否?” 曰: “一人其中, 萬塵奔汩, 似不可居之地也.” 又問 : “師肯還俗否?” 曰: “十二爲僧, 獨住空山四十歲, 囊時猶遇侮則忿, 自願則憐. 今則七情枯矣. 雖欲俗不可得, 爲俗亦無用. 將終始依佛, 以歸于寂.” 曰: “師初何爲僧.” 曰: “若己無願心, 雖父母不能强此也.”
금환스님과 함께 「법화경」에 나오는 화택(火宅)의 비유에 대해 토론했다. 나이는 오십여 세인데, 입으로는 불경을 잘 외우면서도, 남에게는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의 형 혜신(慧信) 또한 중이 되어 극락전에 사는데, 경전의 뜻에 대해서는 금환보다 낫다고 한다.
내가 물었다.
“중노릇이 즐거운가?”
“자기 일신을 위해서는 편합지요.”
“서울은 가 보았소?”
“한 번 들어가 보았지요. 온갖 먼지가 자옥이 일만큼 복잡해서 살 만한 데가 못 되는 듯하더이다.”
내가 또 물었다.
“스님은 환속은 하고 싶지 않소?”
“열두 살에 중이 되어 홀로 산중에 산 것이 올해로 마흔 해올시다. 예전엔 남에게 모욕을 받으면 분함도 솟구치고, 스스로도 돌아봐도 자신이 처량했습지요. 지금은 칠정이 모두 말랐습니다. 비록 환속하려 해도 할 수도 없거니와, 속인이 되어본들 전부 쓸모없는 일이지요. 이제 장차 죽을 때까지 부처님께 의지하다가 적멸로 돌아기를 원할 뿐입니다.”
“스님은 처음에 어쩌다 중이 되었소?”
“만약 자기가 믿는 마음이 없다면, 비록 부모라도 이 노릇을 억지로 시킬 수는 없지요.”
是夜望月如素. 繞塔三匝, 酒盃一巡. 遠籟在葉, 如瀉如掃. 從萬歲樓, 入大雄殿, 紙燈曠素, 金身燦映. 閣侈而野, 畵詭而襍. 老僧侍佛而立, 袈裟曳足. 白衲覆頂. 觀之, 皴紋仰接垂眉願鬢之間, 剃痕輕輕有水墨色, 諦視之, 木像也. 左右金剛, 齒根若堞, 舌葉有燄, 衣剝如鱗. 蛇鬼迸出, 威則威矣. 望之, 輒有詼諧之氣, 是知禦悔者在德, 不在貌也.
이날 밤 보름달은 흰 비단결 같았다. 탑을 세 차례 돌고, 술잔을 한 순배 돌렸다. 잎사귀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데, 마치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비질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만세루를 거쳐 대웅전에 드니, 환히 켜진 지등(紙燈)으로 금신의 부처는 찬란히 빛났다. 전각은 사치스럽게 꾸미긴 했어도 속되 보이고, 그림은 기괴하게 그렸으나 보기에도 조잡스럽다. 늙은 중이 부처를 모시고 서있는데, 가사는 발에 끌리고 백납이 이마를 덮었다. 살펴보니 주름살이 위로 눈썹과 턱과 귀밑 사이로 얼기설기 엉켰고, 머리를 깎은 자국은 수묵색을 띠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목상이었다. 양편의 금강은 이뿌리가 성가퀴 같은데다, 혀는 불꽃같았다. 옷이 비늘처럼 벗겨졌는데, 뱀과 귀신이 비집고 나올 것 같았다. 위엄스럽긴 해도 바라보면 문득 장난기가 가득 느껴진다. 위풍이란 것은 덕망에 달린 것이지 겉모양에 달린 것이 아님을 이로써 알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