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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유의 일반적 이해
(1) 신유의 의미
신유(神癒, divine healing)란, 하나님께서 병든 사람(영․혼․몸, 환경, 관계등)을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능력으로 고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말미암는 역사이다.
(2) 건강의 개념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육체적(Physical), 정신적(Mental) 및 사회적(Social) 온전(wholeness)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WHO). 한편 1982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기독의사회(World Christian Medical Society)에서는 영적(Spiritual)인 분야를 더 추가하여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는 상태가 아니며 불구가 아닌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즉 건강이란 전인성(全人性)을 표현하는 것으로 조화를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 지(知), 정(情), 의(意)가 조화를 이루고, 몸과 마음과 영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환경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각각 건강한 마음, 건강한 인간,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다.
(3) 질병의 개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질병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의 복합적 현상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질병의 원인은 하나님의 법과 자연의 법의 불순종으로부터 오는 죄에 기인한다(신 28:20-22; 대하 26:19; 막 2:5). 그리고 이 자연의 법은 하나님의 법의 범주에 속한다. 질병은 파괴적 요인들이 인간을 침범할 때, 예를 들면 마음에 탐욕․분노․질투 등이, 몸에 감염․중독․빈곤 등이, 사회에 무지․부도덕․부정 등이 침입하면 인간과 사회는 항상성(homeostasis)․통합(integration)․질서(order) 등이 붕괴되고 각양의 질병이 발생하게 된다. 로마서 8:22, 23절을 찾아보라. 이 말은 인간과 사회가 다 병들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도 바울의 탄식이다. 그러므로 포괄적인 의미에서 질병이란 신체적, 정신적, 영적 및 사회적 질서가 정상(조화)상태로부터의 이탈된 상태를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질병이란 자아와 인간(관계)와 환경과 하나님과 부조화(disharmony)를 이룬 상태이다.
2. 신유의 성경적 이해
(1) 구약에서의 신유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치유하시고 그의 백성을 고쳐주시는 ‘야웨 라파’(출 15:26)이시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말미암아 영적인 죽음과 질병에서 인간을 치유해내시는 최초의 치유자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형벌, 저주, 혹은 은총을 위한 시련으로써 나타난 구약의 질병은 반드시 속죄와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구원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치유는 사실상 구원과 그 의미에서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치료하신 예는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여자들이 태문이 열리지 않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치료하셔서 생산케 하였다(창 20:17).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려서 고생을 할 때 모세가 그를 위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역시 치료해주셨다(민 12:9-16). 히스기야의 병을 치료하시어 십오년의 생명을 더 연장시켰으며(사 38:1-6), 나아만의 문둥병을 엘리사를 통해 고치셨다(왕하 5:8-14).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원망하여 염병에 걸렸을 때 아론이 기도함으로 치료되었고(민 16:41-50),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엘리야를 통해 치료하심으로 다시 살리기도 하셨다(왕상 17:17-24).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진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고(왕하 13:20, 21), 욥의 악창이 치유되었다(욥 42:10).
이와 같은 구약의 치유 사건들을 볼 때 구약의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며 치유의 능력은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의 치유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용서하심이 나타나 있는 뚜렷한 구원의 징표였다.
(2) 예수님의 신유
예수님의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만이 아닌 영혼과 몸을 포함하는 전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9장35절에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서 세가지 주요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일을 하셨다. 즉 가르치셨고(taught), 설교를 하셨고(preached), 병자를 고치셨다(healed). 그러므로 가르치심과 설교와 치유(teaching, preaching, healing)를 예수 그리스도의 3대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은 바로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은 바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사 53:4)이라는 메시야적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다(마 8:16, 17). 또한 마태복음 9장6절에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실 때는 그의 죄사함의 권세를 증거하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함이었다(요 11:4).
예수님께서는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치유하셨다. 만지심으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셨고(마 8:14), 말씀으로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낫게 하셨으며(요 5:3-9), 안수와 말씀으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눅 7:11-17),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 치유되었고(막 9:20-22), 벳세다에서 소경을 고치실 때는 침과 진흙을 사용하기도 하였다(막 8:22-26). 이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예수님은 병자들의 다양한 질병을 고치셨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몸과 영을 깊은 교제를 맺게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메시야이심과 선지자이심을 알 수 있다. 말씀을 선포하심과 치유하심은 바로 구약의 선지자적 전통과 일치한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에 대한 동기는 인간에 대한 순전한 사랑으로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그의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서의 신적인 증거의 일부로서 나타난다.
병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가장 호소력 있는 이유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기 때문에 우리도 병자를 위해서 치료의 사역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믿음과 행실의 모델이라면 예수님의 치료사역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병자를 치료해주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막 16:15-20).
(3) 초대교회의 신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사도들도 치유의 이적을 일으켰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요 14:12).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어서 세상에 보내심으로(마 10:1; 눅 10:1, 9) 사도행전에는 초대 교회 사도들이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행 2:43). 특히 베드로와 바울이 중심이 되어 치유사역을 행하였다.
미문의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한 베드로의 치유사역은 주님의 능력을 나타낸 대표적인 증거이다(행 3:6, 7). 또한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을 치유함으로써 주께로 남녀의 큰 무리가 나아오게 한 것은 성령의 치유능력에 의해 나타나는 교회성장의 전형적인 형태이다(행 5:14-16).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아나니아의 기도에 의해 병 낫는 체험을 하였던 사람이다(행 9:15-19). 이런 체험을 가진 바울도 베드로처럼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 된 자를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행 14:10)하여 고쳐주었다.
초대교회의 치유사역은 예수의 치유사역을 이어받은 것이며, 그분의 대전도 명령-가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치유하라는-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었다. 또한 초대교회는 치유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증언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극적으로 증거하기도 했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서 능력으로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지금 그 자리에 임재하심을 증거하고 나타내신 것이다.
(4) 현대교회에서의 신유
교회사를 통해 면면히 지속되어온 신유의 역사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주후 3세기경에 터툴리안(Tertullian), 오리겐(Origen), 클레멘트(Clement)등이 남긴 기록에서 신유에 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영국을 크게 부흥시킨 요한 웨슬레의 사역에서도 신유가 나타났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세계 도처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심지어 죽은 사람들을 살리셨다는 많은 내용들이 책이나 간증문을 통해 세상에 소개되고 있다. 이처럼 병든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셨던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병고침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 13:8).
3. 치유에 대한 견해
(1) 모든 질병은 과학적인 치료 방법을 통해서만 치료되어야 한다는 견해.
(2) 모든 질병의 원인을 귀신들림에 두고 축사(귀신을 쫓아내는)의 방법을 통해서만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주장.
(3) 기도와 의학적인 치료방법은 서로 상치된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치유(신유)는 기도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고, 의학적인 치료는 세상적인 치료의 수단이므로 진실된 신앙을 가진 신자라면 환자를 의사에게 데려가거나 세상적인 약을 쓰지 말고 기도를 통해서만 병을 치료해야 된다는 입장.
4. 균형잡힌 치유관
우리는 먼저 모든 질병의 근본적 원인은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질병의 원인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치유에 있어서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고치실 때에 기도하는 한 가지의 통로만을 통해서 고치시지 않고 그 외에도 그 발병의 원인에 따라서 약물치료, 의학적 수단, 축사, 상담, 목회등의 통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환자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도(신앙)라는 한 가지 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신유의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조그만 하나의 통로 속에 가두는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균형잡힌 치유관은 먼저 하나님의 치료를 간절히 구하고(왕하 20:1-11; 눅17:11-19; 딤전 5:23), 동시에 현대의학의 도움을 사용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5장14절도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여기서 “기름을 바른다”는 말씀은 의학적인 행위요, “기도한다”는 말씀은 신앙적인 행위이므로 치유에 있어서 의학적인 방법을 결코 배제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한 가지 진리는 모든 궁극적 치료는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사실이다.
신유(神癒)의 은혜
2005-10-23주낮
(마4:23-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
1. 서론
요즘 황우석 박사가 베아줄기세포(2004년) 연구를 통해서 난치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줌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연구는 매우 돋보이며 우리 한국의 이미지를 또 한번 업그레이드 하였다. 이러한 낭보가 문학 예술 체육 기업 기술 정치 모든 분야에서 자주 들려지기를 다시 한 번 기도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황박사의 연구가 비교될 수 없는 굳 뉴스감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는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고통을 받고 있고 마침내는 목숨을 잃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하여 무어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23)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다 고치시더라(24). " 할렐루야! 오늘 말씀에 큰 깨달음과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2. 신유의 개념 정의
신유(神癒 Divine Healing)는 흔히 치유의 개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엄밀하게 치유(治癒)와 신유는 개념상 차이가 있다.
치유는 넓은 의미의 개념으로 신유를 포함한 모든 육체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러한 치유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창조섭리에 의해 형성된 인체의 여러 가지 면역체계, 또는 자연적인 요소들에 의해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미치는 은총으로써의 건강회복이다. 여기에는 생리작용을 통한 치유, 자연법칙을 통한 치유, 합리적인 이성작용, 즉 의학을 통한 치유 등이 포함된다.
이에 대해 신유는 좁은 의미의 개념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신적 능력에 의한 치료를 의미한다. 이런 좁은 의미의 신유개념은 1887년 사중복음을 쓴 미국인 부흥사로 근대 복음주의 신유운동의 지도자였던 심프슨(A. B. Simpson)에게서 타난다. 심프슨은 “신유란 인간 육체 속에 주입하시는 초자연적 신적 능력으로써, 병으로 고통 받는 육체의 힘을 새롭게 하시고, 허약한 것을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라고 정의 한다. 나아가 심프슨은 신유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신유가 아닌 것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3. 신유가 아닌 것
첫째, 신유는 의약적 치유가 아니다. 신유는 하나님 자신의 전능하신 팔의 직접적인 능력이다. 둘째, 신유는 형이하학적 치유가 아니다. 신유는 정신요법 등의 합리주의적인 체계가 아니다. 셋째, 신유는 최면술적 치유가 아니다. 신유는 한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흘러 들어가는 어떤 신비로운 흐름(a mysterious current)이 아니다. 넷째, 신유는 강신술(신통술, 무당 등)이 아니다. 악령에 의한 치유가 아니다. 다섯째, 신유는 기도 그 자체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신유는 인간의 기도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유를 행하시는 주 되신 그리스도의 신적 어루만지심( His own divine touch)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섯째, 신유는 믿음 그 자체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이 흐르는 일종의 도구일 뿐이다. 일곱째, 신유는 의지력이 아니다. 인간의 의지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여덟째, 신유는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4. 신유의 유익
심프슨은 신유는 신유의 유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유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육체의 은혜로서 성결한 삶을 살도록 믿음을 진작시켜준다. 신유는 체험한 사람뿐 아니라, 목격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하게 증거해 준다. 신유는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친밀하게 동행하고 있음을 믿게 한다. 신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는 위로 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고 하였다.
5. 신유의 필요성
선교사 라우드 부인은 신유의 필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때부터 의사를 통하여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하셨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는 치료의 주가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구속받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신유의 특권을 누려야 한다. 모든 사람은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질병에 직간접으로 악한 영향을 받고 살고 있는 만큼 신유는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절대적인 필요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유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6-1. 구약의 근거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에서 추방될 때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고 처벌을 내리시기는 했지만 아주 버리시지 않았다. 즉시 저주하고 사망에 처하시지 않았다. 다만 에덴을 떠나 살게 하였다. 이때 가장 안전한 곳에 살던 그들은 에덴을 떠나면서 몹시 불안해하며 공포에 떨자 하나님은 양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셨다(창3:21).
이것은 가시와 엉겅퀴가 무성하고 질병과 사망이 시작되는 곳에서 살 때 상처를 싸매주시고 보호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요, 먼 훗날에 메시아를 통해서 일류를 타락한 영혼의 구원과 병든 육체를 고쳐주시겠다는 예표였다.
세월이 흘러 택한 족속 아브라함 가문의 4대에 걸친 족장시대가 막을 내리고, 애급의 바로의 학대에서 신음하며 울부짖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를 보내 바로에게로부터 구원역사를 펼치셨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우상을 신봉하는 애급전역에 온갖 재앙으로 고통을 주시지만 택한 족속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고센은 항상 무사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것이다. 특별히 애급을 탈출하던 전날 밤 어린 양의 피(출12:21-22)는 이스라엘을 사망에서 온전히 구원하였다. 여기에서 신유의 분명한 근거를 찾는다.
마침내 바로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생활이 시작 되었다. 이 광야 40년 세월에 백성들은 변화되지 못하여 원망 불평 불신앙 불순종 등 많은 죄를 지었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만나와 마실 물을 주시고 갈 길을 인도했습니다. 특별히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너무 지연되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 많음으로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원망 불평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여 광야의 불뱀을 몰아와 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장대에 놋뱀을 만들어 달아놓고 이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해독을 받아 살게 하였다.(민21:6-9)
(출15:26)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급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순종해서 믿음으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는 자는 다 고침을 받게 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치료하시는 분이다.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자에게 질병을 주시지 않으며, 혹 잘못하였어도 회개하고 주를 바라보는 자를 용서하고 병을 고쳐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다.
모세 이 후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말라기 등등 선지자 시대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의인을 질병에서 고치시고 보호하셨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말씀처럼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 즉 신유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었다. 이렇게 신유의 은혜는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까지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허락되었던 것이다.
6-2. 신약의 근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3년의 공생애를 통해서 신유를 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병에서 자유하게 하셨으니 성경에 실제 소개된 사례만도 26회이며 그 중에 몇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마12: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마19:2)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요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 "
주후 1세기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유사역을 그대로 이어받아 계승(전승傳承)하였다. 초대교회의 신유사역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 성령세례를 받은 사도들을 통하여 현저하게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권세를 부여 받았다. 그리하여 기사와 표적은 초대교회의 전형적인 특징이었고, 사도들은 병자를 고치는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김득중). 초대교회는 특별한 신유의 공동체로서 신유는 보편적인 일이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간주한 것 같이 행동하였다(이재범). 심지어 초대교회 상황에서 병자들은 베드로의 그림자를 통 하여 신유의 기적을 바랄 정도였다.
이러한 신유역사는 사도들에게만 국한 되지 않았다. 성령이 충만했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빌립 집사를 통해서 사마리아성에 많은 귀신이 쫓겨나가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신유역사로 온 성에 큰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으니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행8:6-8)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
또한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 집사을 통해서도 많은 기사와 이적들과 신유의 역사들이 일어났으니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행6:7-8) "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사도바울도 복음전도의 현장에서 수많은 병든 자를 고쳤다. 바울의 신유는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가장 절정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베소는 그 당시 최고의 문명도시였다. 문화수준도 대단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환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 했다. 이에 하나님의 능력은 두란노서원에 모인 군중들에게 특별한 신유의 이적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고 했으니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행19:11-12)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러한 놀라운 신유의 이적을 본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많이 예수를 믿었다. 즉,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요, 문화인인 에베소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신유의 이적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이성주).
7. 질병의 요인
조용기 목사는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게 중병을 가져다주는 가장 큰 요인을 마귀와 관계, 아담의 범죄, 율법의 저주, 잘못된 생활태도, 그리고 부주의로 규정한다. 그는 본래 질병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사단으로 말미암는 죄와 저주의 결과이기 때문에 신자는 질병의 치유를 간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8. 신유체험 방법
그러면 어떻게 신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우리 성결교단 월간지 활천 1923년 10월호에 쓴 신유운동가 머레이의 글에 의하면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의약에 의지하는 방법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는 치료를 위하여 의약을 의지할 때 사람들은 자기 육체에만 집중하고 염려하게 되고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다. 나아가서 육체의 일에 대하여 많은 염려를 하지 않게 되므로 의약을 의지할 때 보다 더 행복하다. 또한 신유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줄이다. 그리고 신유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모든 죄를 다 자복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 복종하고, 자신을 완전히 주의 손에 맡겨 주 예수께서 몸을 지배하시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신유의 은혜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게 되고 새로운 생애가 시작 된다”고 하였다.
세계적인 신유운동가 조용기 목사는 게네스 하긴의 믿음의 씨앗과 말씀인 로고스와 레마의 개념을 목회에 적용하여 “기록된 말씀"(로고스)이 “선포된 말씀"(레마)으로 각 사람에게 다가와야 신유의 은혜는 나타난다고 설교한다. 그의 신유신학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은총의 결과로 신유의 축복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미 약속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여러분, 아담의 타락이 인간의 전 삶의 영역에 미쳐서 질병이 생긴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도 인간 삶의 전 영역에 미치는 만큼, 예수를 믿고 새로 태어남(거듭남)과 육신건강의 축복, 환경의 축복도 가져야 함을 믿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대속의 범위는 죄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질병까지 담당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굳게 믿고 다음 6가지 방법을 실천하면 신유의 은혜를 받도록 하자.
첫째, 환자의 열망이다. 구원과 신유의 은사는 동시적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면 질병의 원인에서 해방되어 반드시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병 고침은 간절히 갈망하는 자에게 주시기 때문에 병이 나아야 되겠다고 결단하고 신유를 갈망해야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성경의 근거를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의 치유에서 찾는다.319)
둘째, 회개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병의 원인은 죄이기 때문에 질병의 치료를 위해 죄의 고백은 필수적이다. 치유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귀의 가장 큰 무기인 죄와 사망을 없이 하기 위해 생각과 행동으로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성령의 조명 하에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이 죄가 되었는지 깨달았으면 그것을 부끄러워하며 애통해 하며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그 죄에서 떠날 것을 결심하고 용서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 생각과 의식 속에 귀신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면 귀신이 가져다 준 질병은 생명력을 잃고 당장 혹은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다.320)
셋째, 용서이다. 여기서 말하는 용서의 대상은 자신과 이웃이다· 한 번 회개하고 용서받은 후에도 종종 자신의 과거의 죄를 들춰내서 정죄하는 것은 마귀의 참소이다. 마귀는 인간 에게 정죄의식과 죄책감을 심어주고 두려움과 형벌을 가져와 몸을 병들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전한 마음으로 철저히 회개하고, 회개한 죄는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과 흘려주신 피로 처리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깨끗하게 용서되었음을 믿고 죄책감에서 해방 되어야 한다. 자신을 용서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죄책감으로부터 오는 질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내 속에서 생기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나아가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용서받은 감사와 기쁨이 없는 마음으로는 절대로 나에게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참으로 주께서 용서해 주셨다는 믿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믿어지기 전에는 어렵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느낌과 상관없이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기도하는 그 순간 주님은 이미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감정을 지닌 인간인지라 마음에 용서에 대한 기쁨, 감사가 느껴지지 않으면 스스로 의심하여 마음이 편치 못하다. 평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죄책감에 눌려 살게 된다. 그래서 회개한 다음에는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심령에 확증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마침내 성령으로 응답하여 용서가 믿어지며 기쁨과 감사를 경험합니다. 바로 이런 은혜를 통하여 나 자신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넷째, 믿음이다. 병 고침을 받는 데 있어서 필수적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구원과 동일하게 성령을 통하여 마음속에 주어지는 초자연적이며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회개한 모든 자에게 이 믿음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지금은 나 자신이 건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병에서 해방되어 건강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며, 이미 건강을 되찾은 것처럼 믿음으로 가지고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해야 신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확신의 단계에서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고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 등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참으로 나올 것을 믿고 의심치 않을 때 신유가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질병의 문제는 이천년 전에 이미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결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이 사실에 대하여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는 것뿐이다.322)
다섯째, 치유의 명령과 선언이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하셨다. (마9:22) 혈루증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막5:34)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눅13:12)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마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9:29) 소경에게는 그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마15:28) 귀신들린 딸을 둔 가나안여인에게는 “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렇게 주님은 신유를 명령하거나 선언하였다.
조용기 목사는 설교가 끝난 다음과 같이 회중을 향해 명령하거나 선언한다. “오늘 우리 주님이 여러분의 질병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각자 믿음으로 아픈 곳에 선을 대십시오.” 라고 한 다음 통성기도 후에 명령기도를 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각종 질병을 앓게 하는 마귀는 물러갈지어다."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엄히 명하노니 병마는 묶임을 받고 떠나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고침을 받으라.”
그리고 잠시 묵상을 한 다음 분별의 은사를 사용하여 성령께서 가르쳐 준 병명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셨다고 선언한다. 이때 많은 성도들이 일어나 영광을 돌린다. 이러한 신유의 방법은 전후 오순절운동의 신유 사역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브랜햄 (William Branham) 목사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시행된 적이 있다.
여섯째, 안수나 기름 바름이다. 안수는 개인적으로 받는 경우와 신유를 위한 공중기도 때 아픈 곳에 환자 자신이 손을 얹는 집단안수가 있다. 대개 머리 위나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구체 적으로 병명을 지적하면서 기도한다. 이러한 안수가 신유방법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또 기름을 준비했다가 기름을 환부에 바르고 안수기도를 한다. 기타 신유은사자의 소지품을 가지고 기도한 후 환자에게 가져가 환부에 대는 일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신유은사 자나 환자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행해야 은혜를 받는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신유는 치유의 좁은 의미로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병을 고침 받는 것을 뜻합니다. 신유는 인류역사가 시작하여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하나님의 은혜이자 은사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심판과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러 말세에 오신 구세주십니다. 그분은 삼년의 공생애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믿게 하는 도구로써 신유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을 양육해서 신유은사를 주어 사역하게 하였고 그것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쪼록 이 귀한 은혜를 매일 매 순간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 은사를 행사하여 복음을 전하고 하늘의 상을 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신유의 은사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1) 신유는 Q의 사역이다
Ⅰ. 서 론
신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구약성경에서 ‘치료하는 여호와’(출 15:26)로 자신을 표현하신 하나님은 신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신다. 성령으로 공생애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에게는 죄를 사하시는 구주로, 병든 자에게는 병을 고치시는 의사로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복음서 전체에 잘 묘사된 것처럼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병자들이 그를 따랐고 그가 고쳐주심으로 깨끗함을 받았다. 예수는 심지어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의사 중의 의사’셨다. 최근 들어 서구신학이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교회도 그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시작된 오순절 운동(Pentecostal movement)을 통해 방언을 비롯한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후 1960년대부터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과 제3의 바람(The third wind)을 통해 신유와 축사가 보편적인 교회의 사역으로 인정 받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흐름은 한국교회와 신학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유’에 관한 서적이 활발히 출판되고 있고 신학교에서도 ‘신유’와 관련된 강의들이 개설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1960년대 초 김기동 목사에 의해 시작된 신앙운동인 베뢰아 운동과 같이 한국교회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활발하게 일어난 바 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로써 그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유가 사도 시대 이후 혹은 초대교회 이후로 종료되었다’는 왜곡된 교리, 즉 ‘은사종료설’(cessation theory)를 만들어냈던 전통신학의 오류가 드러났다. 본 글은 지면상 이적(세메니아,) 가운데 ‘신유의 은사’(카리스마타 이아마톤, 헬라어를 그대로 보면 ‘병 고치는 은사들’로 번역이 된다-필자 주)만을 다루고자 한다. Ⅱ. 본 문
1. 성경이 말하는 신유
1) 구약성경에 나타난 신유 신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파’()는 구약성경에서 총 67회 나타난다. 이 단어는 ‘치료하다’, ‘건강하게 하다’라는 의미다.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 라파’, 즉 ‘우리의 의사이신 여호와’로 표현하신다. 구약성경의 신유사역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병을 죄의 결과로 본다(출 23:25, 시 107:20, 잠 4:20∼22). 그 실례로 광야에서 미리암이 모세를 향하여 이방 여인을 취한 것에 대하여 힐문하면서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 하나님은 미리암을 문둥병으로 치셨다. 그러나 모세가 그녀를 위하여 기도하자 문둥병이 나았다(민 12:1∼15). 이처럼 죄를 지었다가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회복되면 육체도 동일하게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준다(출 15:26). 둘째, 신유사역이 특정한 사람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왕상 17:17∼24), 엘리사를 통해 아람 사람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하신 일(왕하 5:1~15),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 왕의 병을 치료하신 일(왕하 20:1∼11) 등이 그 예다. 이처럼 구약에 나타난 신유는 하나님이 쓰시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신유사역 신약성경의 신유사역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병의 원인을 피상적인 인간의 범죄로 보기보다는 그 이면에 역사하는 영적 존재인 귀신으로 본다. 귀먹고 벙어리가 된 원인은 귀신이며(막 9:25) 십팔 년 동안 꼬부라져 펴지 못하게 한 원인도 귀신이다(눅 13:10∼17). 또한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게 한 원인도 귀신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병든 자들을 만날 때마다 병을 가져다 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귀신의 정체를 폭로하시고 꾸짖으며 쫓아내셨다. 그때마다 귀신이 나간 후 병자는 온전케 회복되었다. 둘째, 신유사역이 소수의 사람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가는 곳마다 병자를 고치셨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마 10:1). 또한 70인에게도 동일한 권능을 주셨고(눅 10:1∼9) 이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막 16:17, 18). 셋째, 신약성경은 예수 안에서 영혼의 구원과 육체의 치유를 하나로 간주한다. 헬라어 ‘소테리아’()는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구원’에 걸쳐 모두 사용되는 용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의 광풍으로부터 구원받았을 때나(마 8:25, 26) 혈루증 걸린 여인이 육체의 질병에서 구원받았을 때도(마 9:22) ‘소테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수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문제 뿐 아니라 환경의 문제까지도 모두 담당하셨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그것에 대한 확증으로 병고침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반드시 신유의 복음도 병행되는 것이다. 만약 현대 교회가 신유의 복음을 제해버린다면 그것은 ‘반쪽복음’(half-Gospel)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구약과 신약에서의 신유사역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구약은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나 신약은 귀신에게서 찾는다. 구약에서는 신유의 능력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졌으나 신약에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로 그 범위가 확장된다. 구약은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육체의 구원이 이루어졌으나 신약은 영혼의 구원과 육체의 구원이 예수 안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신유의 완성 구약에서의 희미하고 제한적인 신유사역이 신약에 이르러 더욱 선명하게 확장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 4절에는 장차 올 메시아의 사역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여기에서 ‘질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홀리’()는 구약성경에서 모두 질병을 의미하며(신 7:15, 왕상 17:17, 왕하 1:2; 8:8, 대하 21:15; 21:15) ‘슬픔’에 해당하는 마크오브()는 주로 병상의 고통과 아픔으로 인한 슬픔을 말한다. 특히 이사야 53장 11절에서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에서 ‘담당’이란 말과 53장 4절의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에서 ‘당하였다’는 말은 히브리어 ‘사발’()을 동일하게 사용한다. 또한 ‘우리의 질고를 지고’(사 53:4)의 ‘지고’라는 말과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사 53:12)에서 ‘지며’라는 말은 동일하게 히브리어 ‘나사’()가 사용된다. 결국 죄악의 담당과 아픔의 단어가 동일하며 죄의 짊어짐과 질고의 짊어짐이 동일한 단어로 쓰였다. 따라서 앞의 것을 믿으면 뒤의 것을 믿어야 하고 앞의 것을 인정하면 뒤의 것을 인정해야 한다. 더욱이 ‘그는 질고를 아는 분이시다’(사 53:3)에서 ‘알다’로 번역된 ‘야다’()는 이성적인 작용을 통한 앎이 아니라 완전한 육체적인 경험을 통한 앎을 말한다. 창세기 4장 1절에서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에서 ‘동침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도 ‘야다’다. 이와 같이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는 인간의 모든 질고와 아픔을 친히 몸으로 체휼하신 분이시다(히 4:15). 그러므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환영해야 한다. 2. 현대 신유사역의 형태
비록 성경이 이렇게 신유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교회와 신학자들은 신유의 현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신유의 은사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그 능력을 나타내셨다. 비록 이들은 신유사역을 행하고 있지만 그 사역 형태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1) 개인 중심의 신유사역자 그룹 이들은 기본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유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신유사역을 행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로는 베니 힌(Benny Hinn), 오랄 로버츠(Oral Robert), 라인하르트 본케(Reinhard Bonnke) 등이 있다. 이들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여 신유사역을 행한다. 베니 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방언과 신유는 행하지만 축사(逐邪)는 행하지 않는다. 반면에 베니 힌은 병의 원인을 귀신으로 보고 축사를 적극적으로 행한다. 이처럼 이 그룹은 구약의 신유 사역자들처럼 신유의 능력이 특정한 개인에게만 부여된 것으로 인정한다. 그 때문에 신유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거나 교육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 개인의 사역으로 끝날 경우가 많으며 분파(sect) 운동으로 취급 받기 쉽다. 2) 신유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신유 사역자 그룹 이 그룹은 신약성경에 말씀한 것처럼 신유의 능력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뿐 아니라 세미나나 양육을 통해 신유에 대한 신학적 근거와 방법에 대하여 가르친다. 이 그룹에 속하는 인물로는 프란시스 맥너트(Francis MacNutt), 챨스와 프란시스 헌터(Charles & Frances Hunter),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존 윔버(John Wimber), 맥스웰 휘트(Maxwell Whyte), 프레드 디카슨(Fred Dickason), 마크 부벡(Mark I. Bubeck) 등이 있다. 특히 이들은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중 챨스와 프란시스 헌터는 그의 저서 『신유의 방법』에서 “귀신 쫓기”라는 한 항목을 할애하여 축사사역을 소개할 정도다. 아쉬운 점은 이들이 신유사역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개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하기 때문에 신앙 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기보다는 비주류로 남아 있다. 3) 말씀과 체험으로 균형 잡힌 신유 사역자 그룹 말씀과 체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신유사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신유 이해는 통전적이고 균형 잡힌 신유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전통신학은 인간 창조 이후 인간 범죄로부터 전개되는 인류구속사적 하나님의 경륜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믿고 인정한다. 그래서 그 신학의 출발도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요 1:1, 엡 1:4, 벧전 1:20). 성경은 인간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책이며 아들을 증거하는 책이다(요 5:39; 20:31).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전통신학과는 달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인간’이라는 신본주의적 인간론을 지향한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균형 잡힌 신유신학을 전개한다. 둘째,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영적 존재에 대하여 명확히 제시해 주고 있다. 세 영적 존재인 하나님, 천사, 인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마귀, 미혹의 영, 귀신의 활동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병과 귀신과의 관련성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다. 셋째, ‘능력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이는 신약성경이 제시한 신유 이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신유는 목회자나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사임을 주장하고 가르친다. 평신도에게 제자를 삼아 가르칠 권리를 인정하며 병 고치는 사역을 적극적으로 독려한다. 특히 베뢰아아카데미에서는 ‘복음중재로서의 신유’라는 세부적인 항목으로 가르칠 정도로 신유사역에 대해 열려 있다. 일반 장로교회에서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도사 시험을 통과해야만 설교할 수 있는 목회 환경과는 달리 신유사역이 모든 평신도에게 개방되어 있다. 3. 신유사역, 어떻게 행할 것인가?
신유는 영혼을 구원하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유사역을 행할 때 다음과 같은 전(前) 이해가 필요하다. 신유사역을 행한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니다(마 7:21∼23). 우리는 신유사역을 하다가 타락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신유사역을 행하기에 앞서 올바른 성경적 신유신학이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영혼을 살리며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1) 복음중재로서의 신유 신유사역을 행하기 전에 먼저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을 해결받도록 도와야 한다. 일반 무속에서도 병을 고치는 경우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분명한 죄에 대한 인식이나 회개는 없다. 오직 죄에 대한 문제는 성경에서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원죄, 본죄, 자범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분명한 회개 체험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나서 병든 자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예수 이름이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이름이며(마 16:17) 영생을 얻게 하는 능력의 이름임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마 1:21, 요 20:31). 마지막으로 말씀으로 꾸준히 양육해야 한다. 병 고침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는 이유는 말씀으로 양육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육이 빠진 신유사역은 의미가 없다. 신유사역은 영혼을 구령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유 ‘믿으면 모든 병이 다 낫는다’고 주장하는 ‘믿음 치유’는 많은 위험성을 안고 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다 낫는 것은 아니다. 신유를 행하는 사람이나 병든 자는 단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일 뿐이다. ‘믿으면 모든 병이 다 낫는다’고 강조하다 보면 병든 자가 낫지 않았을 때 신유를 행한 사람이 능력이 없다든가 혹은 병든 자의 믿음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이것은 신유를 행하는 사람이나 병든 자를 시험에 들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맡기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약을 쓰는 것이나 의사의 도움을 받은 것을 죄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는 말씀처럼 의사나 약의 사용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말한다. 이 경우에 바울은 포도주를 약으로 사용하라고 권한 것이다. 의사의 도움을 받거나 약을 쓰는 것도 가하나 먼저는 믿는 자에게 주신 병 고치는 능력을 적극 사용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3) 병 고치는 능력이 함께 하는 신유 신유사역을 활발하게 행하는 사역자들의 공통분모는 기도에 있다. 이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 육체에서 능력이 나감을 공통적으로 고백한다. 이는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막 5:30)라는 말씀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눅 6:19)는 말씀에서처럼 예수의 공생애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증명된다. 마치 발전소에서 전기가 흘러 나와 각 가정에 공급되듯이, 병 고치는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신유 사역자를 통해 병든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신유를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병 고치는 능력을 끊임없이 공급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을 공급 받는 통로는 끊임없는 기도와 적극적인 행함에 있다. Ⅲ. 결 론
신유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다. 예수께로부터 시작된 신유의 능력은 12제자와 70인의 제자를 거쳐 모든 믿는 자에게 부어주신 권리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때로는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다가도 낫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에게 주신 권리를 좌절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나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능력을 행하는 신유 사역자들도 신유사역을 처음 행할 때는 거듭되는 좌절을 겪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신유사역을 행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의 사역을 인정해 주셨고 그들을 통해 놀라운 신유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신다. 일평생 우리 몸을 통해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순종하자. 이럴 |
예수님의 신유 연구
1. 예수님의 신유의 특징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쉬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셨는데 항상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기 앞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필요를 채워주셨다. 더우기 병고침의 신유는 복음전파와 함께 항상 동시적인 사건으로 일어났다.
1) 예수님의 신유는 메시야 즉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신유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구원의 선포이다. 그러기에 신유의 체험자들이 즉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을 체험한다. 복음이 구원의 선포라면 신유는 그 구원의 일 부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역에서 설교와 가르침과 신유는 하나였다. 이것들은 하나라도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2) 에수님의 신유는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신유는 구속적인 은혜와 그 은혜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의 질병에 근원을 확실히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 질병이 단지 육체적인 것만으로 혹은 정신적인 것에만 국한시키지 않으시고 그 인간이 속해 있는 악의 세력까지 포함해서 승리를 선포하신 것것으로 곧 온전한 신유를 이루시는 것이다.
3) 예수님의 신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으며(마12:38)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백성들 중에 임한 것(눅11:20)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신유역사를 나타내실 때에 에수님 자신이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메세지와 행하신 신유를 연결시키시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메시야이며 사단의 세력과의 대결에서 반드시 승리하신다는 것과 그 승리가 곧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예수님의 신유에 대한 기초적인 진리를 몇가지로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1) 예수님의 신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인간성 회복에 기초를 두고 있다.
(2) 예수님이 신유는 인간의 육체적,정신적,영적 모든 영역에까지 포함된 전인구원에 근거를 두고 있다.
(3) 예수님의 신유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인 영혼구원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4) 예수님의 신유는 질병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단의 의도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인간의 몸과 정신과 영이 하모니를 통하여 완전한 겅강을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예수님의 신유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장애물을 제거하기를 원하시며 지금도 계속 제거하며 치료하고 계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유의 차원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신유의 기초가 되며 본질인 것이다.
2. 예수님의 신유 동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신 후 신유역사를 나타내기 시작하셨다(눅3:21-22,4:4-19). 예수님은 몰려오는 모든 병든자(막7:31-37)와 귀신들려 고통 당하는 자(마17:14-21)를 고치시고 심지어 육체적으로 죽은자까지 살리셨다(요11:43-44).
예수님은 병든자,마귀에게 눌린자,죄인들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다. 눅13:32절에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3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고 하심을 보아도 생의 많은 비중을 치유이적에 사용하셨고 또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요 합당치 않다는 반대를 무릎쓰고서도 병자를 고쳐야겠다는 그분의 의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치유이적의 사역은 자신으로 끝나지 않고 12제자들(마10:1-15)과 70문도(눅10:1-20)와 그밖에 믿는 자들에게(막16:17-18) 이러한 사역을 위임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유역사의 동기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병든자들의 편이되어 수 많은 신유의 역사를 행하시고 계시는가? 이제 그 원인을 아래와 같이 논하고져 한다.
(1) 병든자를 치료하기 원하심
예수님은 병든자가 있을 때 항사 치료하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마8:7)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완전히 동일시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고통이 예수님이 고통이 되었고 사람들의 슬픔이 예수님의 슬픔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찾아온 병자 중에 치료 받지 못하고 돌아간 병자를 복음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이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은 병든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치료해 주시기를 원하심을 알 수가 있다.
(2) 사단의 세력에 대한 분노이다
예수님은 질병이 외부로부터 칩입해 들어오는 원수로 간주하고 계셨다. 그래서 정신적인 질병이나 육체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악한 영의 세력이나 영향권 아래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 악한 지배 세력을 향하여 꾸짖고 비난하시고 내어 쫓으셨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신유사건이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고 쫓아내시는 것으로(막1:25) 시작되고 있다. 또한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이나(막5:8) 간질병을 앓는 소년을 치료해 주실때도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 (막9:25)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사고는 악한세력(사단,귀신들과 파괴적이며 비창조적인 것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나 성령을 거스리는 것들)은 병자들을 지배하고 있거나 저어도 부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본질상 이러한 악한 세력들과 맞서시고 이런 악한 영들에 대해서 적대심을 가졌던 이유로 인하여귀신들을 굴복시키시고 이로서 사람들이 영육간에 건강하고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3)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사람들이 진 죄를 회개하는 것을 도와 주시기 위해 신유역사를 행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와 질병은 함수관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계셨기 때문에 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다가와 고통과 슬픔을 갖다주는 질병에 대해 단호하셨으며 더 나아가 사람들의 온전함과 신앙의 성숙을 이끌기 위하여 필요함을 인지하고 계셨다.
막2:1-12에 중풍병자의 치료사건과 요5:1-14의 베데스다 연못가에 병자를 치료하신 신유사건에서 예수님은 질병과 죄를 결부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죄는 질병을 유발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질병을 유발시키는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 신유역사를 베풀고 계신 것이다.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은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하시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 즉 예수님의 신유를 통하여 치료를 받는 사람이나 그 신유의 산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시에 보다 더 경건하고 성숙한 삶을 영위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권능에 대하여 사람들의 눈을 뜨게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삶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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