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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연의 미를 보여주는 합실골 중단부의 ‘리틀 이과수폭포’. 물, 바위, 나무, 햇살. 그리고 사람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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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바짝 잡아당긴 활처럼 휜 백두대간 응복산(鷹伏山·1,359.6m)~만월봉(滿月峰·1,280.9m)과 복룡산(伏龍山·1,014.5m) 능선 안쪽에 형성된 합실골은 여전히 꾸밈이 없었다. 아니 3년만에 다시 찾았는데도 새롭고 신비로움은 오히려 더했다. 태곳적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게로구나 하는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는 골짜기다.
바위협곡 안에 기묘한 형상의 폭포와 소가 연이어지며 아름다움을 과시하면서도 시설물은커녕 징검다리조차 제대로 놓인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 손을 타지 않고, 골 양옆이 가파른 절벽이나 사면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지계곡이 여럿 나타나 수시로 지형도를 들여다보게 하는 등의 탐험적 요소까지 갖추었으니 마니아급 산악인들에게는 한여름 산행대상지로 최고인 계곡이다.
무념무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합실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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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창한 숲속을 가르는 합실골(초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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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실골~만월봉~영골~가마소계곡~법수치리 원점회귀 산행을 계획하고 날짜를 언제로 잡을 것인가 망설였다. 장마철 취재산행시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다. 특히 협곡산행은 폭우시 위험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마철 일기예보는 하루 앞을 제대로 못 맞출 적이 많아 예보를 믿었다가 당황한 적이 많다.
올해도 매 한가지였다. 7월 첫째 주말로 잡았다가 장맛비가 주말에 퍼붓는다는 뒤바뀐 일기예보를 믿고 서울을 출발한 4일 영동고속도로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전주에서 출발한 임봉근씨와 강릉에서 합류한 오후 5시경부터 먹장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빠끔히 열리더니 하조대를 거쳐 법수치리로 들어설 즈음에는 하현달과 반짝이는 별들이 법수치리 계곡을 밝혀주었다.
“아니 이게 뭐야, 길이 없잖아. 시작부터 물에 빠져야한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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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합실골(중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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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실골에서 1km쯤 못미친 광대골 입구에서 하룻밤 지낸 뒤 이튿날 오전 8시30분경 일행 4명은 심산유곡의 절정을 자랑하는 합실골로 들어섰다. 마지막 민가(합실민박 033-673-2962)를 지나 전나무숲길을 거쳐 합실골로 내려선 뒤 첫 도강지점은 커다란 바윗덩이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를 밟고 건널 수 있었으나 두 번째 도강지점에는 밟을 만한 돌이 전혀 없다. 일행 중 유일하게 등산화를 신고 있는 노영수씨는 “뭐 이런 데가 다 있냐”며 툴툴대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 한숨을 푹 몰아쉬더니 물에 젖을 만한 것은 모두 비닐에 싸 배낭 속에 집어넣은 뒤 발을 물 속에 풍덩 담그고 만다.
어제 내린 비로 물이 제법 불었다. 급하게 흘러내리는 계류는 바윗덩이를 넘어설 때는 우리를 집어삼키거나 핥퀴기라도 하려는 듯 혀를 날름거린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반갑다는 표정이다. 장딴지 정도의 평균수위가 바닥이 푹 꺼지면서 허리까지 빠져들어도 시원스럽다는 표정이고, 바위벼랑길은 미끄러지는 순간 깊은 물에 잠기는 상황이건만 그래도 얼굴빛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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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위벼랑을 끼고 소 위로 오르려다 풍덩 빠지고도 환한 미소를 짓는 임봉근씨.
- 골짜기는 소와 바위벼랑으로 막히면 건너편으로 희미한 산길이 나타나 인도해주고 끊길 듯 좁아지다가 갑자기 터지면서 너럭바위가 반갑게 맞아준다. 울창한 숲에 묻히고 옥빛 계류에 잠기고 우렁찬 물소리에 귀가 멀면서 무념무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간간이 쏟아지는 햇살은 짙푸른 나뭇잎을 투명하게 하고, 우리 얼굴에 퍼부으며 마음을 맑게 해준다. 장마통에 이런 날 이렇게 깊고 자연미 넘치는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는 것은 분명 산꾼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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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된비알로 이어지는 만월봉 동릉을 타고 대간에 올라선 취재팀.
-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계곡물을 수시로 가로지르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신 들려오는데 이건 또 웬 일.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햇살과 함께 장대비가 쏟아진다. 이것마저도 좋다. 얼굴에 땀이 맺힐 즈음 시원스레 비가 퍼부으니 말이다. 커다란 나무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한 채 계곡에 가로눕고 나뭇가지들은 물에 몸을 담그려고 긴 가지를 옥빛 물을 향해 뻗고 있지만 계곡물은 누가 몸을 담그건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로 향하고, 그 물을 거슬러 오르는 우리들은 여유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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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이 끊어지면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야 했다. 폭우 이튿날이라 수위가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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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25분, 물줄기를 거슬러 오른 지 3시간 가까이 지나고 있는데도 누구 한 명 지루하다거나 힘들다 하는 이가 없다.
가옥 축대 흔적을 지나고 지계곡 합수목을 지나 가파른 사면길을 5분쯤 올랐을까, 저마다 입이 쩌억 벌어지면서 계곡으로 내려선다.
합수목 위쪽 주계곡에는 그림 같은 폭포가 장식하고 있다.
거무죽죽한 바위는 짙푸른 이끼 옷을 입고 그 위로 물고기 비늘을 연상케 하듯 포말을 퍼붓는다. 신비경이 따로 없다.
아름다운 소녀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형상의 ‘리틀 이과수폭포’를 지나 30분쯤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쌍폭이 앞을 가로막는다. 합수목이다.
왼쪽 지계곡을 무시하고 곧장 뻗은 합실골로 들어서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골이 한층 좁아지고 가팔라지다 대간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는 것일까. 아니 좁은 골 따라 물이 거세게 쏟아지면서 동승한 물바람일지도 모른다.
지형도란 어느 한 순간 무릎을 치게 만든다.
특히 합실골처럼 길이 거의 없는 골짜기를 따르다 예상지점이 지형도와 딱 맞아떨어지면 더욱 뿌듯해진다. 3년 전 하산길에 하룻밤 묵었던 심마니 모덤터는 그 후 아무도 묵지 않았는지 비닐은 한쪽으로 치워놓은 그대로이고 바닥은 비바람에 깎여나가 울퉁불퉁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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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더덕 한 뿌리로 약술을 담그는 일행. [우]7월 초인데도 아직 덜 센 곰취에 식은 밥과 고추장,김치를 얹었다.
- “오늘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간식 한 번 안 먹고 올라왔잖아.”
골짜기 풍광에 사로잡혀 오르다보니 어느 누구도 배고프다는 소리도 간식 먹자는 말도 꺼내지 않은 채 마지막 합수목까지 올라섰건만, 그제서야 볼멘소리가 나온다. 모두들 노영수씨가 모덤터에 닿기 전 따온 곰취에 식은 밥과 고추장을 얹어 맛있게 먹고, 끓여낸 라면까지 배불리 먹고 나서야 얼굴이 환해진다.
“어휴 장딴지에 쥐가 나.”
“무릎 다 나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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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멧돼지가 하도 비벼대 껍질이 벗겨져 나간 참나무 밑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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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수목에서 만월봉까지는 그야말로 코가 닿을 만큼 가파른 능선이다. 게다가 길은 중간중간 끊어지고, 날카롭게 날을 세운 바위가 나타나 애를 먹이는가 하면 멧돼지가 마구 파헤쳐놓은 지대가 나타나 등줄기를 서늘하게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땀은 비 오듯 하고 반면에 말이 점점 없어지다 2시간쯤 지나 경사가 죽어들자 겨우 얼굴빛이 돌아온다. 어느 샌가 머릿속까지 뒤흔들던 물소리는 사라져 버렸고, 대신 산새소리가 바람을 타고 숲을 파고들고 있다.
“그럴 줄 알았어. 이 일대가 멧돼지 목욕탕이라니까.”
산길 주변은 마치 포크레인으로 파헤친 듯 엉망이고, 소나무들은 밑둥치가 껍질이 벗겨진 채 빤질빤질하다. 그러다 아예 누가 밭을 일구기라도 하려고 다듬어놓은 듯 널찍한 터에 이르자 노영수씨는 소나무와 물이 솟아 진흙탕을 이룬 웅덩이를 가리키며 “송진이 많이 나는 소나무에 몸을 비비고, 진흙물에 뒹굴면서 몸을 씻어낸다”고 멧돼지 목욕습관에 대해 얘기해주며, “멧돼지가 너무 많아 생태계가 망가질까 걱정”이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