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에서는 최선의 정치질서가 만들어지고 유지되기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그는 최선의 정치질서란 개인의 최대의 행복을 보장하는 지원적 성격이 있음과, 국가의 존재 목적과 개인의 행복 추구가 일치한다는 전제를 갖고 최선의 정치질서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논의를 전개한다.
개인이 행복한가의 문제는 1) 재산이나 권력등과 같은 외부적 선, 2) 건강과 외모 등과 같은 육체적 선, 3) 지혜, 기개, 도량, 정의관 등과 같은 영혼의 선에 의해 규명되어 진다. 세 가지 선들은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을 것이다. 셋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선을 꼽으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연 영혼의 선을 지적할 것이다.
또한 에우다이모니아로 표현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은 실행을 항상 동반하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관념상의 행복(happiness)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이런 행복관은 대단히 현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등에서 말하는 내세관, 곧 죽고나서 얻는 행복의 상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는 부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극단적인 현재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7권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교육관련 논의에서는 발달단계에 맞는 교육방식이 제시되어 있으며 이에는 장래에 필요하기 때문에 어려서는 고통을 감수하고 유혹을 참아내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예컨대 절제, 지혜, 정의를 추구하는 국가적인 이념과 사회 분위기는 개개인이 영혼의 선을 추구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국가는 시민들에게 여가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가를 짐승처럼 쓰는 사람도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고상한 여가선용은 정치적 공적생활과도 관련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면에서 생산활동이나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천박한 활동으로 규정하였다. 정도전이 농사를 지으면서 <맹자>를 읽고 그러는 동안 '조선'의 통치 기반을 이론적으로 확립하였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산 및 상업활동을 천박한 활동으로 규정한 것으로 보아 대단히 계급의식에 충실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부분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여자라도 능력이 있으면 왕도정치가가 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사상을 전개한 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적인 국가의 건설과 유지는 유산계급(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또한 <윤리학>에서 보이는 '중용'의 사상이 곳곳에서 보인다. 영토도 자급자족이 되며 외적의 침략을 물리칠만큼의 적당선을, 인구도 질서가 잡힐 만큼의 너무 많지 않은 그러면서도 자급자족이 될만큼의 너무 적지 않은 정도는 확보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상하고 있는 국가의 운영은 자연적인 발달을 존중하고 있다. 예컨대 사법적인 판단, 종교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험과 경륜이 쌓인 노년층이 적당하며, 군사적인 일은 청년층이 더욱 적합하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처럼 이상적인 국가 건설과 경영방법을 제시하였는데 그 역시 그러한 국가가 유지 존속되기 위해서는 교육의 힘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7권의 후반부와 8권에는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한 교육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하고 있다. 7권에서 보여준 것에는 교육의 방향이 저차원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전문성과 실용적인 것보다는 간학문적이며 통합적이고 안목을 넓고 깊게 형성할 수 있는 것으로서 무엇을 교육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20세기 미국 시카고대학교 총장 허친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것이다. 허친스는 당시 미국 고등교육이 너무나 과학주의, 합리주의, 실용주의, 물질주의에 지배받고 있음을 개탄하였는데 이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