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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 니코폴리스와 아얄론 골짜기를 떠나 차는 다시 서북쪽을 향해 달려갑니다. 오늘의 두 번째 목적지는 가이사랴입니다. 참고로 지도 한 장을 붙여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가이사랴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그림: 경로. 출발지점이 예루살렘. 중간 들른 곳이 엠마오와 아얄론 골짜기. 위쪽 바닷가가 가이사랴]
아름다운 지중해 해변에 세워졌던 도시 가이사랴.
가이사랴는 구약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도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헤롯 1세가 건설한 항구 신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왕으로 임명되어 유대 땅을 다스리게 된 헤롯 1세.
그는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주전 22-10년에 걸쳐 가이사랴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스트라토스 타워(Stratos’s Tower)’라고 불리우던 작은 마을에 인공 방파제를 만들고 멋진 항구도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을 뿐 그 위용을 알 수 없지만, 헤롯이 건설한 방파제는 길이 500미터, 넓이 6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약 300여척의 배를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항구 시설 이외에도 헤롯은 원형극장, 전차경기장, 궁전, 신전, 물을 끌어오기 위한 거대한 수로 등을 건설하였습니다.
멋진 계획도시 가이사랴.
그 가이사랴의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본 그림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림: 이 그림들은 구글 검색하여 찾아보았습니다.]
과거 항구의 모습이 대단하지요?
헤롯은 거대한 방파제를 만들기 위해 콘크리트로 15미터의 바위를 만들어 바다에 넣아 방파제를 쌓았다고 합니다.
당시의 기술과 장비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시를 완성한 헤롯은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며 도시 이름을 가이사랴라고 불렀습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는 성경에 가이사 아구스도로 나오는 인물입니다.
[눅2:1-5]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안토니우스와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가 바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입니다.
헤롯은 처음에는 안토니우스 편에 섰다가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왕으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그 정치적 수완이 남달랐던 인물인 듯 합니다.
헤롯은 이름만 가이사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아예 항구에서 들어오는 배들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신전을 지어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하였습니다.
최선의 충성을 보인 것이지요.
또한 도시를 건설함에 있어 모든 공공시설, 건축들은 로마 황실의 건축 양식을 따라 지었다고 합니다.
신도시로 건설된 가이사랴는 헤롯 1세가 주전 4년 죽은 후, 그 아들 헤롯 아켈라오스가 다스렸습니다.
아켈라오스는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결국 주후 6년 왕위에서 쫓겨났지요.
이후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이 주둔하며 직접 다스리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총독의 관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이사랴에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가이사랴는 로마 10군단의 본부이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가이사랴가 유대땅의 수도가 된 것입니다.
가이사랴는 당초 항구도시, 교역도시, 로마를 위한 헤롯의 충성의 도시로 건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건설된 가이사랴는 이후 복음의 관문도시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가이사랴를 거쳐 로마제국의 수도에까지 이르는 구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구도에서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도시가 바로 가이사랴입니다.
가이사랴는 그리스도 복음의 전진기지로서 그 의미가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지요.
이런 가이사랴의 역할은 성경시대는 물론 이후에도 길게 이어졌습니다.
2-4세기 가이사랴의 인구는 5만명까지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때 많은 유대교 랍비들과 기독교 교부들이 가이사랴에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오리게네스는 231년 가이사랴로 이주하여 이 도시를 기독교교육의 중심지로 만들어 나갔다고 합니다.
모여드는 기독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며, 거대한 도서관도 설립했다고 하는군요.
가이사랴 교회 감독이었던 유세비우스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유세비우스는 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던 기간 중 「교회사」를 저술하였고, 이후 311년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에 대하여」도 저술하였는데, 그로부터 2년후 기독교가 공인되었지요.
기독교가 공인되고 비잔틴 시대가 열리며 가이사랴는 더 중요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가이사랴는 기독교의 중심지로 역할을 감당했지만, 대부분의 성지들이 그랬듯이 이슬람에 의해 정복되었다가 십자군에 의해 탈환되는 과정이 반복되며 기독교 중심지로서의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작은 마을로 남아있던 가이사랴는 고고학 발굴을 통해 유적들이 드러나게 되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일반에 과거의 영화로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성경의 사건들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은 백부장 고넬료 이야기이지요.
로마군 백부장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는 로마군 초급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로마군 백부장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기도중에 고넬료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베드로의 가이사랴 선교가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사건은 사도행전 10장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올리기엔 너무 길어 서두의 몇 절만 올립니다.
[행10:1-6]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가이사랴에서 벌어진 또 다른 중요한 성경의 사건은 빌립 집사의 선교활동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게되어 빌립은 예루살렘을 떠났지요.
사마리아에 가서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하던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고대 블레셋 지역의 가사를 향해 가는 길에서 이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신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어서 아스돗과 여러 성읍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가이사랴에 정착하게 되었지요.
빌립은 여기서 정착하여 세월이 흐른 뒤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가이사랴에 들렀을 때 만나게 됩니다.
[행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행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바울과 관련하여서도 가이사랴는 의미가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갈 때 경유한 적이 있습니다.
[행18: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또, 바울이 2년간 갇혀지내야 했던 곳이기도합니다.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주위에서 모두가 만류하였지만 중요한 사명이 있었기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큰 위기에 처했을 때 로마군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바울을 연행함으로 결과적으로 유대인들로부터 구출하게 되었지요.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유대인들이 로마시민인 바울을 집요하게 살해하려고 하자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에게 급히 호송하여 보내게 되지요.
바울은 헤롯궁의 감옥에서 로마로 보내어질 때까지 2년 동안을 가이사랴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행23:33-35]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행24:27]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가이사랴는 헤롯 아그립바1세가 죽은 곳이기도 합니다.
[행12:19-23]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가이사랴는 1950-1960년대에 대대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져 여러 유적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발굴을 통해 인위적으로 방파제를 쌓아 만든 항구 시설은 물론, 원형극장, 전차 경기장, 수로를 포함한 주거지, 십자군 시대의 요새 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주요 유적들 사진을 좀 보겠습니다.
[사진: 가이사랴 국립공원 입구 매표소]
유적들을 보겠습니다.
먼저 원형극장입니다.
많이 무너졌지만 얼마간의 보수를 하여 지금도 연극이나 음악 공연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가이사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관객들이 바다를 바라보도록 지어졌습니다.
좌석은 약 3,500석이라고 합니다.
[사진: 입구를 지나 원형극장에 이르는 길 이모 저모]
[사진: 원래는 이렇게 생겼었다고 하는군요.]
[사진: 원형극장 객석에서 무대쪽, 바다를 바라보며]
[사진: 기념촬영 안 할 수 없지요?]
이 극장에서 중요한 비석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비석에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비석에서 이 이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성경에 나오는 빌라도가 정말 이 지역을 다스리던 인물인지 증거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빌라도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여부에 대해서도 이의가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문제 제기인 것이지요.
이런 문제제기들을 잠재우는 중요한 유적이 바로 이 석비입니다.
이 극장에서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비석이 발견됨으로서 빌라도가 실존 인물이고 성경의 사건이 사실임이 명확히 입증되게 된 것이지요.
[사진: 빌라도 석비]
이 비석에는 네 줄의 글이 남아 있는데, 지워지지 않은 글자만 추려 보면,
(**************)S TIBERIVM
(******)TIVS PILATVS
(**********)ECTVS IVDA(****)
(********** **) E(************)
이렇게 글자가 남아 있습니다.
이를 대략 우리 말로 옮겨보면,
(*****) 디베리우스
(*****)오 빌라도
(***)대 총독
헌(***) 되었다
위 글자들의 지워진 부분을 채워보면 ‘유대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티베리우스를 기념하여 헌정하였다’는 문장이 될 것이고, 본디오 빌라도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위해 뭔가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마차경기장입니다.
혹 50미터, 길이 300미터, 헤롯 당시 수용인원은 15,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최대 일곱 바퀴를 도는 전차 시합에 12대까지 동시 출전이 가능한 규모였다고 하는군요.
[사진: 마차경기장으로 내려가는 입구와 경기장]
[사진: 구글 검색하다보니 항공사진이 있군요. 참고로 같이 올립니다.]
전차 경기장 한 켠에 얼기설기 전차 구조물이 있군요.
[사진: 기분 내보는 오주엽목사님.]
사도행전 12장의 사건, 헤롯이 연설하다가 벌레 먹어 죽은 곳이 바로 이 경기장이라고 합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원형극장에서 죽었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이 경기장일 것으로 보는 의견이 다수인 듯 합니다.
다음은 헤롯 궁전입니다.
바다를 향해 돌출된 곳의 벼랑에 세워진 이 궁전은 헤롯의 궁전이면서, 추후 총독들의 관저로 사용되기도 했었습니다.
이 헤롯 궁전의 지하 감옥에 바울이 2년여 감금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사진: 헤롯 궁전 상상 그림]
[사진: 가이사랴 전체 상상도 중에서 보면, B지점이 헤롯 궁전입니다. 참고로 A가 원형극장, C가 아우구스투스신전, D가 항구, E 등대, F: 수로, H: 전차경기장]
현재 남아 있는 헤롯 궁전터 유적 사진을 보실까요?
[사진: 헤롯 궁전 터]
[사진: 여기는 헤롯 궁전 내의 수영장 터라고 합니다. 헤롯은 바닷가에 궁전을 지으면서 궁전에 담수 풀장을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기행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진: 헤롯 왕궁터 옆에서 기념촬영하는 모습. 아빠가 딸 사진 찍어주고 있군요.]
[사진: 헤롯 왕궁터에서 십자군 요새쪽으로 가는 바닷가에서. 정겨운 모습]
[사진: 헤롯 왕궁터를 지나 십자군 요새 쪽으로 가다가 헤롯 왕궁을 바라보며 찍어보았습니다. 밑의 사진은 반대방향, 그러니까 십자군 요새 쪽이군요.]
다음은 수로입니다.
가이사랴는 바닷가이고 생활용수가 부족했습니다.
헤롯은 이 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갈멜산의 슈니(Shuni)샘으로부퍼 시작하여 13킬로에 달하는 수로를 건설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찬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 수로. 말 그대로 물길, 이 구조물 위로 물이 흐르는 길이 있습니다.]
헤롯이 건설한 항구.
항구의 상상복원그림을 보실까요?
구글 검색하여 찾아보았습니다.
[사진: 항구 상상복원도. 아래 사진은 항구 출입구 그림. 등대와 멀리 신전이 보이는군요.]
오늘날 가이사랴를 위에서 찍은 사진을 구글에서 검색하여 올려봅니다.
[사진: 가이사랴 항공사진. 물 색깔 진한 곳이 항구 방파제와 항구 시설이 있었던 흔적입니다.]
항구 유적 앞에 서서 항구를 바라봅니다.
[사진: 바닷가에서 바라본 현재의 항구 유적]
[사진: 아래 사진 세장은 항구의 모습을 한번에 찍을 수 없어 좌에서 우로 잘라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어설프지만, 위 세장의 사진을 합성해 보았습니다. 아담해 보이는군요.]
[사진: 항구 유적 앞의 찻집에서 망중한.]
[사진: 십자군 요새. 헤롯 왕궁 쪽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사진: 성채 방어시설. 해자입니다. 규모가 대단합니다.]
이상 가이사랴에 관한 글을 마칩니다.
2013. 8. 15,
여러분의 목사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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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이사랴에 관한 자료가 그냥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벤허를 글로 다시 보는 감흥이랄까요.
문자시대에 기록된 성서의 확신을 더해주는 자료입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모델들의 모습도 매우 좋습니다.
오주엽 목사님, 산수려 부부, 최은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