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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료 스크랩 일본 오이타현 유후인마을 (지자체 혁신 해외 성공사례) 1편
조창연 추천 0 조회 260 13.06.14 07: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본 오이타현 유후인마을 (지자체 혁신 해외 성공사례)

 

오늘부터 지자체의 혁신 사업과 해외도시의 벤치마케팅 사례를 통해 철저 하게 지역을 연구 하는 방법과

혁신의 사례를 통해서 해외지자체의 사례를 통해 하루 1편씩 올려 드리겠습니다.

 

이제 부터 하동네트워크의 인터넷 마케팅의 유력을 발휘해 보겠습니다. 

제가 아마 이곳에 100편의 도시마케팅 사례를 올리는 순간 우리 하동네트워크는 전국 1위의 지자체

네트워크 마케팅 대상이 될것으로 생각 하고 큰 마음 먹고 이제 부터 시작을 합니다.

뭐든지 정성과 노력이면 안되는 것이 없더군요

 

오늘부터 하동네트워크의 마케팅 방장으로서 사랑하는 우리모임의 방장으로 혁신 사례와 창조도시, 혁신도시

신활력 사업등으로 나누어서 올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읽어 주시고 댓글도 달아 주세요

 

먼저 일본의 오이타현에 대한 공부가 우선입니다.

 

 

 

풍요로운 자연의 혜택에 둘러싸인 오이타(大分)

 

일본 열도의 남단의 규슈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산지가 많고 기복이 다양한 지형이다.
넉넉한 푸른산과 웅대한 자연경관의 벳부만에 둘러싸인 오이타(大分)에는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오이타(大分)강, 오노(大野)강이 흐르고 있다.
넉넉한 자연과 역사를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쾌적하고 온화한 매력이 넘치는 도시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1300년에 걸쳐 현수도를 담담해 온 오이타시에서는 거리 여기저기에 남겨져 있는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온화한 기후와 넉넉한 자연의 오이타시는 상쾌하고 활기가 흘러 넘친다.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비옥한 농지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농업이 경영되어지고, 야채, 꽃, 과수, 축산도 크게 진전되고 있어 맛있는 오이타의 맛을 즐길 수 있다.

"도요노쿠니(豊年의 나라)"라는 호칭은 오이타을 가리키는 옛 호칭이다.
큐슈의 동북부일대를 차지하는 오이타는 풍요로운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 현내에 2군데 국립고원과 3군데 국정공원이 있으며, 바다에서 가져오는 신선하고 맛있는 해산물과 산이나 들에서 채취되는 맛있는 농산물이 산출된다. 분고스이도(豊後水道)는 수산물이 풍부하기로 유명한데 여기서 잡히는 세우 및 생선류의 맛은 유명하다.
세계 굴지의 벳부도 오이타현의 한 도시이다

 

 

 

 

(1) 지역의 특성
유후인은 오이타현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인구는 1만 1,000여명이고 관광객 수는 연간 400만 명이다. 관광객의 대부분은 개인이나소그룹으로 유후인을 방문하며 약 65%의 사람들이 재방문한다. 연간소득 250억 엔 중 관광소득이 225억 엔, 농업소득이 25억 엔으로 전형적인 농촌 관광지이다. 또한 일본 여성의 70%, 남성의 30%가 제일 선호하는 온천지이다.

 

(2) 혁신의 계기
보양온천지로서의 방향성이 정착되기까지는 약 40년이 걸렸다. 그이전에는 농업이 주산업인 작은 온천지였다. 1952년,

마을 중심부인유후인 분지에 댐을 건설한다는 계획이 갑자기 대두되었다.

오이타 강을 분지의 남단으로 모아서 거대한 댐을 만들고, 전력을 공급하고, 호반을 중심으로 하는 리조트 관광지로 하며,

댐 때문에 침전되는 토지소유자에게는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전후 유후인은 그 이름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은 가난한 땅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마을집행부는 계획을 추진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활동했고, 의회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마을은 두 파로 갈렸다. 반대 입장의 선봉에 는 마을의 청년들이 있었다. 반대집회를 열고

강력한 반대행동을 나타냈다.  결국 댐 건설은 다음 해 물거품이 되었고, 이 일련의 운동은 마을만들기(마치즈쿠리) 운동의

기초가 되었고 주민이 마을의 중심이 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1955년 2월 인근의 정(町)과 촌(村)이합하여 유후인정(町)이 탄생되었다. 초대 정장 선거에서 선발된 사람은 36세의 청년의사로 마을의 청년회장이었고, 댐 건설 반대 운동을  이끌던 이와오

 히데카즈씨였다.


이후 독일 등 선진 농촌과 관광지를 둘러본 마을 대표들은 이곳을 건전한 보양온천지로 개발하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의 온천은 유곽과 어우러진 퇴폐적 이미지가 강했고, 난개발도 심각한 수준이 었다.‘ 누구나 편하게 찾아와 쉬고 갈 수 있는 온천 조성’을 목표로 시작된‘마을가꾸기 운동’이 계속되면서 유후인은 서서히 건전한 온천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후에도 몇 차례 위기가 있었다. 1970년에는 골프장 건설계획이 발표됐고, 1975년에는 규슈 대지진으로“유후인이 완전히 망했다”는소문이 돌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 거품경제의 영향을 틈탄 대규모 리조트 건설계획이 발표됐다. 이런 위기 돌파의 계기는 항상 유
후인 주민들로부터 나왔다.‘ 유후인의 자연을 지키는 회’가 결성돼 골프장 건설계획을 무위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만들어진‘유후인의 장래를 생각하는 회’는 들판의 황폐화 때문에 개발계획이 잇따라 발표된다고 판단, 들판을 살리기 위해‘소 한 마리 목장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75년 대지진의 피해는 유후인음악제와 영화제, 미술관 유치 운동 등으로 극복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음악제와 영화제는 올해로 30주년을 맞기에 이르렀다.

 

가장 큰 위기랄 수 있는 1980년대‘개발 붐’은 유후인 자치조례 제정을 통해 극복했다. 1988년‘리조트법’시행에 따라 유후인 같은 관광지에 대규모 리조트나 맨션을 건설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투기꾼이 몰려든 것이다. 땅값이 평당 10만 엔을 호가하자 유후인 주민들은 1990년“건평 1,000평을 넘는 건물 신축 시에는인근 주민들의 동의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내용의 자치조례를 제정해 맞섰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개발 붐이 이는데도 유후인에는 5층을 넘는 건물은 들어서지 못했고, 유후다케의 스카이라인도 그대
로 보존할 수 있었다.

 

 

 

(3) 지역혁신 방법
‘내일의 유후인을 생각하는 모임’은 1971년 4월에 각계각층의 주민으로 구성되었다. 이 모임은 점점 새로운 사고와 사상을

도입하게 되었고, 주민들은 처음으로 마을의 장래를 위한 정보 도입의 창을 열게 되었다. 이질적인 문화에 대해서도 마을의

내면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주민이 직접적으로 마을을 이끄는 네트워크를 형성했으며 이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마을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한 협의기구가 생긴것이다.

 

자발적 조직은 마을의 비전을 주축으로 개발론적 발전보다 보전론적 발전을 중시하여 리조트 사업 및 골프장 사업과 같은 발전

계획을 봉쇄했다. 이러한 노력이 지금의 유후인을 있게 한 근본 조건이다.


(4) 혁신과정 후 변화
현재의 유후인은 방문형 관광지가 아닌 체류형 관광지로 거듭나 막대한 관광소득을 올리고 있다. 실제로 이곳을 찾는 400만 명

중 100만 명 정도는 하루 이상 숙박을 한다고 했다.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유후인은 농촌마을임에도 1차산업 비중이 20∼30%

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음식·숙박·서비스업 등 관광업이 80%를 차지한다. 이곳 업소들은 모두 주민들을 고용하고, 필요한 농축산물도 이 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쓰도록 마을 자치단체가 정해놓고 있다.

 

외부인이 투자한 업소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지역주민들의 고용 창출과 농가소득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 소득이 높아지고 일자리가 많아지면서 도시로 나가기만 하던 젊은이들이 돌아오고 있다.

 

우리가 주목 해야 할 부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역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고민 하는 지자체가 이부문을 집중 해서 봐야 한다

농가의 소득과 고용 창출을 통한 지역 혁신을 통해 세계적인 도시로 거듭 나는 지역 유휴인 이 마을의 군과 지역주민 정부의 관심과 내지역에 대한 사랑과 지속적인 마케팅의 선택과 집중을 통한 마을 만들기등이 바로 마을을 부자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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