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는 ‘명예 (Noblesse) 만큼 의무 (Oblige)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 지도층에게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높은 도덕성을 강조하는 말이며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일부를 점령하여 왕위계승을 결정하자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백년전쟁이 벌어졌다. 백년전쟁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공격하자 항구도시 칼레 시민들은 1년을 넘게 거칠게 저항했다. 칼레 시민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굶주림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항복했다. 잉글랜드는 시민대표 6명이 처형 받지 않으면 칼레시민들을 모두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처형을 자청했고 이어서 귀족 5명이 처형에 동참했다. 잉글랜드 국왕이 여섯 명의 희생정신에 감동받아 모두를 살려줬다. 그 뒤로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다
300년 전통의 최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진립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에 1700년 ‘경주교동 최씨 고택’을 지었다. 99칸 대저택은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50칸만 남아 있다.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이 되어 참여했고 정유재란 때 무과에 급제해 군인으로 참전했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가 순국했다. 최진립은 죽기전에 후손들에게 6가지의 유훈을 남겼다. 첫째,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1만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 셋째,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논밭을 사지 마라. 다섯째, 며느리가 되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그리고 최진립의 후손들이 유훈을 지켰고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해방이 되자 인재양성을 위해 전 재산을 떨어 영남대를 건립했다. 옛말에 부자는 3대를 넘기기 어렵다고 했지만 최부잣집은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모범을 보이며 12대 300년의 전통을 지켰다. 그리고 경주 최부잣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모범으로 영원히 기록됐다.
춘향전의 신관사또 변학도와 동학란의 고부군수 조병갑은 조선 최고의 탐관오리로 쌍벽을 이뤘다.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이완용과 박제순은 을사오적이 되어 조선 최고의 역적이 되었다. 하지만 호남에도 솔선수범과 인재양성을 주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 모범으로 역사에 길이 남은 집안이 많이 있다.
명문가는 조선시대에는 대학자를 배출했거나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을 했거나,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목숨을 바쳐 싸운 집안을 명문가라고 한다. 대표적인 명문가로 창평 고씨를 빼놓을 수 없다. 고경명은 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더불어 ‘식영정 4’선 이라고 칭송을 들었을 정도로 호남 최고의 선비이자 문장가였다.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돌리고 장남 종후, 차남 인후 등 삼부자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해 조선에서 유일하게 삼부자 불천위가 되었다. 고경명의 격문은 최치원의 황소격문, 제갈공명의 출사표와 더불어 3대 격문으로 비견되고 있다. 고경명의 후손들은 일제가 침략하자 다시 의병이 되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고경명과 후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배고픈 자 누구든 쌀을 가져갈 수 있어
1776년 영조 때 낙안군수 유이주가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구례군 토지면에 99칸짜리 목조기와집을 지었다. 운조루는 금가락지를 빼 내려놓은 ‘금환낙지’ 금거북이 진흙으로 들어가는 ‘금귀몰니’ 다섯 가지 보물이 모인 ‘오보교취’ 등 3대 명당의 터가 모여 있어 최고의 명당이라 한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으로 운주루라고 했고 지금은 60여 칸이 남아 있다. 운조루는 특색으로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쌀 2가마 반이 들어가는 뒤주가 하나 놓여 져있다. 쌀뒤주 밑에는 조그만 구멍과 함께 타인능해(他人能解) 라는 글씨를 새겨 놓아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이 뒤주에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운조루 덕분에 구례 근처에는 배고파 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은 동학,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 수많은 참화에도 전혀 피해가 없었다.
서일환<우리들병원 행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