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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간이 가면 용서가 되는가, 그냥 잊혀지는가?(22P)
♥ 일생의 무거운 짐, ‘容恕(용서)’의 문제 25-7 ♥
♥ <성령의군대> 선교 후원 ♥
배종부 농협 3560393-047263
배종부 <성령의군대> 지도목사
서울 새성교회(장로교 통합)
서울 노원구 노원로 26가길 25, 코롱상가 3층
010-2940-1717
배종부 목사의 글, 설교, 유튜브 동영상을 보시고 감동이 되시는 분은
너무나 어려운 주의 종들과 고통 당하는 선교사님들이 많음으로,
어려운 개척교회와 열악한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성령의군대>를 정성껏 후원해 주십시오.
1.容恕(용서)의 문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 2P
2.용서해야 하는가? - 15P
3.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 32P
4.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 – 47P
5.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지 않으실까? - 60P
6.용서하지 않으면, 내게는 무슨 일이 있을까? - 74P
7.시간이 가면 용서가 되는가, 그냥 잊혀지는가? - 83P
8.인생은 끝없는 용서의 과정이다. - 105P
9.한 인간 裵鐘富(배종부) 목사의 容恕(용서) - 117P
10.그래도 생각하면 또 화가 나고, 용서가 되지 않는다. - 140P
11.성경이 말씀하는 용서 - 159P
12.나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 174P
13.그들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201P
14.잘못을 빌면, 착한 나는 宜當(의당)히 용서하지! - 215P
15.배종부 목사를 배신한 자들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회개 촉구 편지 지시 – 229P
16.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잊혀진 사람들-목사 장로의 갈등의 문제 - 247P
17.“暴力(폭력)을 행하고, 激憤(격분)을 풀고 나면, 감정은 풀리지만, 평생 후회가 된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하고” - (284P)
18.진정으로 사랑한 만큼,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 296P
19.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그래서 살인,이혼,폭력,응징,이별...을 하게 된다 – 316 P
20.역대 잘못한 대통령 들을 전부 용서합니다!? - 331 P
21.잊혀진 것은 容恕(용서)가 아니다. - 365 P
22.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자도, 용서해야 하는가? - 375 P
23.잘못한 家族(가족)을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비공개 원본,33P)...399 P
23.잘못한 家族(가족)을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수정 전송본,14P)...432 P
24.그냥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라 - 446 P
25.容恕(용서)! 그 고난의 대행군에 다시 도전하다 – 458P
시간이 가면 용서가 되는가, 그냥 잊혀지는가?
우리는 대부분 시간 속에 그냥 잊혀지고 가슴 속에 묻혀 버리면, 용서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貧富(빈부)나 性的(성적)인 문제나, 暴力(폭력)성, 좌우 政治(정치)... 등의 특정 사안이나, 사람의 어떠한 행위를 볼 때에 지나치게 반응하거나, 부정적 반응을 민감하게 드러 낼 때에는 그 부분의 상처가 치유되지 아니하고 내 속에 가라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용서하지 못함’ 이란 다른 말로 말하면 시간 속에 묻혀지고 잊혀진 지나 간 나날들의 ‘내적인 상처’ 들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하나 하나 드러날 때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며 용서를 선포하고, 자기를 스스로 치유해 나아 가야 한다.
주님께 치료 받으러 오십시오
죄의 용서와 치료는 하나이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치료하시는 주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그저 믿음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치료의 능력과 역사와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오직 주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이러한 영육의 치료는 반드시 주님이 베푸시는 죄의 용서와 연관이 되어 있다.
주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네가 나았다” 하신 것이 아니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다. 우리가 받은 상처, 질병, 고통, 연약함 등의 뿌리는 다 죄악에 근거해 있다. 주님은 이것을 근원적으로 고치신다. 교회는 영육 간의 상한 질병을 고치는 곳이다. 그러나 교회는 전문적인 병원이 아니다. 교회는 근원적인 병의 뿌리인 죄악을 고치는 곳이다.
의사들의 말이 모든 질병의 약 80%는 약을 먹을 필요가 없는 병이라고 한다. 사실 외과적인 수술을 제외한 대부분의 질병은 저절로 자연 치유가 된다. 우리 마음의 죄책감, 불안감, 열등의식, 억눌림... 등이 질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질병의 원천이 되는 죄악의 근본 뿌리를 찾아 제거하는 곳이다.
우리 기독교는 훌륭한 철학과 사상, 윤리, 도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과 사상, 윤리, 도덕은 불교나 유교에도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뚜렷한 차이점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주님의 능력으로 근원적으로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잔정한 神癒(신유)의 권능이 있는 곳이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 지심으로 내 죄의 용서함을 받았다.” 는 이 엄연한 진리의 사실이 다른 모든 종교와 우리를 구분 짓는 것이다.
어떤 여인이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병원에 입원하여 영양주사만 계속 맞고 있었다. 의사가 아무리 X-Ray를 찍어 보아도 병명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병원의 원목이 우연히 병상을 지나다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어릴 때에 주일학교를 다니며 믿음생활을 잘 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목사님과 상담하는 도중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게 되었다.
결혼 전에 잠깐 동안의 잘못으로 정절을 잃었는데, 결혼 이후 그것이 항상 마음 속에 고통으로 남아 自責(자책)하다가, 결국은 위장의 마비로 이제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사님이 그 자리에서 그녀의 고백을 듣고서 질문했다.
“당신은 지금 예수님을 다시 영접하겠습니까?”
“주님이 저 같은 여자도 용서해 주실까요?”
“그럼요!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주님 앞에 고백하는 담대한 용기입니다.”
“예! 목사님. 이 시간 제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습니까?”
여인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저는 예수님이 저의 해묵은 죄악과 그 동안 지어 온 모든 죄들을 다 씻어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몇 시간을 펑펑 울었다. 죄를 고백하자 말자, 그녀의 마음의 마비 상태가 풀리고,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죄의 용서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나의 죄악을 내 입으로 시인하고, 직접 주님 앞에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깊이 죄악의 뿌리를 잘라 내고 정리하는 것이다. 죄의 용서함을 받으면 영육의 강건함이 온다. 치료가 완성된다.
우리는 누구든지 영육 간의 질병을 안고 살아 간다. 인간은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 와 치료함을 받고, 영육 간의 강건함을 얻어야 한다. 주님의 용서함을 받을 때에 근본적인 삶의 치료가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
이제 몸 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 앞에 내어 놓으시기 바란다. 여러분의 손을 사랑하는 옆에 앉아 계시는 성도에게 내미시기 바란다. 그는 지금 가슴 속에 숨겨진 상처로 고민하고 있다. 바로 옆에 앉은 당신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여러분 모두 영육 간의 모든 짐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근본적인 치료를 받으시기 바란다. 이 聖典(성전)에 들어 왔을 때에는 답답함과 무거움과 괴로움이 있었을지라도, 이제 이 성전 문을 나설 때에는 놀라운 평안과 희망과 담대함이 여러분의 가슴에 차고 넘치시기를 바란다.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치료하신다. 인도하시고 축복하신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주님의 치료하심과 영혼육의 축복하심에 “아멘” 으로 응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란다.
분노에 대한 치유 상담
분노와 화는 결국 스스로 용서하고, 풀어야 사라진다. 분풀이로 분노가 해결되는 법은 결코 없다.
1.화를 내야 할까?
얼마 전 차를 운전하고 지나 갈 때였다. 그 때 갑자기 골목에서 중형 승용차 한 대가 쏜살같이 나오는 것이었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다행히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표시만 보여 주면 지나 갈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건장한 사내가 차에서 내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 죽을래? 쥐방울 만한 차를 타고 다니면서, 다른 차를 살펴보지도 않아! 내려 와! 한번 붙자."
이 말은 내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나왔던 말이다. 나에게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그래 소형차 몰고 다닌다고 업신여기는 거냐? 내가 직진이고 너는 골목에서 조심도 없이 튀어 나왔는데 말이야! 그리고 너 싸움꾼이냐? 무조건 치고 박는 게 직업이야?"
이 말은 즉시 나온 것이 아니라, 차를 몰고 지나 간 후 한참 이따가 화가 나서 스스로 한 말이었다.
"에이! 목사만 아니었다면... 그런 썩어 빠진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가만 두지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화가 풀리지 않았다. 서로 화를 내고 해결했다면 분노가 쉽게 가셨을 텐데, 목사라는 틀 때문에 말 한 마디 못하고 온 것이 두고 두고 분노를 가지게 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로서의 삶을 살아 가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 화를 내지 못하여 자기 속에 분노를 쌓아 둘 때가 많다.
그렇다면 성스런(?) 기독교인들은 화를 참아야만 하는가?
아니면 분출해야 하는 것일까?
2.그렇다면 분노의 원인은?
분노는 인간의 회노애락 중의 하나인 怒(노)에 연루된 하나님께서 주신 감정이다. 특히 믿는 사람에게 까지도 당연하게 생각되는 감정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일반적 감정인 '怒(노)'가 '忿怒(분노)'로 변화되는데 문제가 있다.
이런 분노로 나타 나게 되는 요인은 복합적이다. 각 개인이 분노하는 성향이나 방법이 다르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1) 왜곡된 지각 때문에 분노가 야기된다.
사람들이 주위 환경을 잘못 판단하여 자신의 행동을 엉뚱하게 곡해하고 부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분노케 되는 가장 흔한 경우이다.
2) 위협이나 해를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부당하다고 생각될 때, 분노하게 된다.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마땅한 일을 다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존감이 상해 있고,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외부에서 공격을 받게 되면 분노하게 되는 경우이다. 이 때는 내가 약하여 위협을 받는다고 인식함으로, 반격의 수단으로써 화를 내고 공격하게끔 분노하게 된다.
3) 갑작스런 좌절감에 빠질 때 분노하게 된다.
설정한 목표를 향해 가지 못하게 하는 급작스러운 장애물을 만나게 될 때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엄청난 분노가 나타 나게 된다.
목사 두 사람이 미국 비자 신청을 했다. 그런데 함께 갈려고 비자를 신청한 목사에게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냥 '목사' 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목사는 못 믿겠다’ 라는 것이다. 마 치 은행에서 ‘목사라면 무조건 대출을 해 주지 않는 것’ 과 같은 이치이다.
“아니! 목사를 못 믿으면 누구를 믿겠다는 것인가?”
그 뒤의 분노와 서글픔은 엄청난 것이었다.
4) 자신의 불완전성을 깨닫게 되거나, 자기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 나게 됐을 때 분노하게 된다.
이 때의 분노는 자신감의 결여나 열등감에서 기인되는 수가 많다. 이런 사람은 습관적으로 쉽게 화를 내며 조절하지 못함으로써, 분노하기도 한다. 분노하는 것이 힘을 가진 것처럼 생각해서 나타 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분노하는 경우이다.
5) 분노는 영적인 관계와도 밀접하다는 사실이다.
에베소서 4장 26-27절을 보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분노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화를 내면서 영적으로 겸손하게 신앙생활 하기는 어렵다. 분노한다는 것은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 신앙의 성숙과 반비례 한다.
그러므로 빨리 분을 풀어야 한다. 그 이유는 분노하는 사이에 마귀의 공작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귀가 그 틈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엡 2:3을 보면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마귀는 화를 내서 죄를 짓기를 원하고, 다시 자신에게 돌아 오기를 원하고 있다. 실제로 화를 내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과 분노는 함께 공존 할 수 없는데, 분노가 일게 되면 사랑은 소멸되기 때문이다.
3. 당연한 감정인데...
여하튼 분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감정 중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아졌다고 해서 화를 자주 안 낼 것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할 위험이 많다. 그러므로 분노는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분노를 치유하는데 있어서 선결되는 조건이다.
에베소서 4장 26절 말씀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분노는 누구에게나 있고, 단지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사실 분노는 누구에게나 있고, 당연히 화가 나는 것은 정상적인 감정이다. 문제는 화가 나는 것을 참아서 무의식 속에 억지로 넣느냐, 아니면 바로 화를 내느냐에 대한 차이이다.
사실 화 나는 것을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해 온 것은 사실이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특히 화를 내는 것은 커다란 악행이라고 여겨 왔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라는 등의 말이 미담으로 전해져 왔다.
이런 사회 구조의 영향으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홧병"이 있다고 한다. 이 병은 화가 나는데 계속 참아서 결과적으로 가슴이 뛰고 손이 떨리며 밥맛을 잃게 되는 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당연한 감정을 숨길려고 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분노는 정당한 감정이다. 따라서 드러 내고 해결책을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
4.필요한 분노도...
그렇다면 누구든지 분노할 수 있다면, 신앙인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초점이다. 화를 낼 수 있다고 해서 개인적인 이유로 화를 내는 것은 성경에서 원하는 분노가 아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거룩하고 건설적인 분노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습은 모세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 하면서 크게 2번 화를 내게 된다. 한번은 건설적인 분노요, 또 하나는 파괴적인 분노였다.
건설적인 분노
모세는 어렵게 바로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 도착하게 된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도착했을 때 불평하기 시작한다.
"네가 우리를 잘 살던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이려고 하느냐?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느냐? 하면서 모세에게 대항하게 된다. 모세도 꽤나 화를 잘 내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민수기 10장 15절을 보면 "모세가 심히 노하여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는 사람들의 예물을 돌아 보지 마옵소서." 라고 무지하게 화가 난 상태에서 기도를 드렸다.
문제는 하나님이셨다. 그저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그렇게 화를 내면 오히려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실 일인데, 더 화를 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이 회중에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여기서 모세의 분노는 정당했으며, 건설적인 분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파괴적인 분노
그런데 모세가 화를 내는 또 다른 모습이 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목마르게 되어 모세에게 화를 내게 된다. "아니! 우리를 애굽에서 죽일 것이지, 하나님께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할려고 하느냐? 여기에는 무화과, 포도, 석류도 없고 더구나 마실 물도 없도다."
그러자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다가 가서 분노를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못된 백성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번엔 자기 편이 아님을 안 모세는 화가 나서 아론과 합께 총회를 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패역한 사람들아. 들으라! 우리가 이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겠다." 라고 하면서 화가 나서 반석을 2번 치게 되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된다.
이 잘못된 분노로 모세는 그렇게 원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 가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개인적인 분노는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모세의 삶을 통해서 볼 때 분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노는 개인적인 죄를 해결하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으로 써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문제는 화를 낼 때 어떤 시기에,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이유로 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분노는 당연하게 일어 날 수 있다. 예수님도 바울도 화를 내셨다. 문제는 건설적인 분노였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에덴에서 알지 못하는 신들을 섬기는 것에 분노하였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인을 섬긴다는 것에 대한 건설적인 분노였다.
예수님의 분노도 마찬가지이다. 공생애 동안 발하신 분노는 우리와 전혀 다른 분노였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화를 내셨을 때,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는 생각 때문이셨다. 개인적인 분노가 아니었다. 후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도 많은 화를 내셨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무서워 했고, 결국은 못 박게 하는 중추적인 입장이 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내셨는가?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많은 양들을 이끄는 잘못된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운 침을 뱉을 때 아무런 변화가 없으셨던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분노는 결코 이기적인 일로 인해 나타난 것이 아니요, 건설적이며 필요한 것이었다.
5. 이렇게 해결하자
분노는 처리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그 화를 참아야 하는가에 대해 즉각적인 기술 방법과 평소 쌓아야 할 장기적인 방법이 있다.
즉각적인 분노에 대한 훈련
1) 분노가 야기되기 전에 자신을 노하게 만든 그 상황을 무조건 잠깐 떠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즉 시선을 잠깐 하늘이나 먼 산으로 돌려 보거나, 크게 긴 한숨을 쉬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가능하다면 잠깐 대화를 멈춘 다음 몇 걸음을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떠남'이 순간적으로 폭팔하려는 분노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상대방과 이야기 하다가 분노가 일게 되면, 모든 행동이나 말, 몸짓 등을 정지하고 조용히 묵상한다.
이것은 원색적인 반응에 본인이나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 하나님께 마음에 끓고 있는 분노를 그대로 토로하고 기도한 후에,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이런 모습은 상대방에게 있어서도 서로 참는 모습과 기도하는 모습이 보여지게 되어 노력하는 진실된 면이 나타 나기 때문이다.
3) 화 나는 상황만 바라 보지 말고, 그런 상황에까지 오게 된 동기를 긍정적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문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 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은 이유가 있는 법이다. 분노가 일게 될 때는 복합적이어서, 어제 일로 그 분노가 쌓여서 나타날 수도 있고, 다른 일이나 다른 삶으로 분노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러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 보는 것이 중요하다.
4) 자신을 노엽게 한 행동이나 말을 가능한 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 영적 배후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나에게 고통스런 말을 준 사람은 그 바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광명의 천사 모습을 하고 온 마귀라는 사실이다. 이런 영적 원리를 알게 되면 그들이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 스데반과 같이 용서 할 수 있는 기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에 나타난 말과 행동보다는 그 밑에 숨어 있는 영적 존재를 살펴 보아야 한다.
장기적인 분노에 대한 훈련
1) 다른 사람들이 “왜 화를 내느냐?” 라고 한다면, 자신이 분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 내는 것이 또 다른 분노를 야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으면 좋고, 화나면 화난다.' 라고 솔직한 감정을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Message"가 중요하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감정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나는 것이 보이는데, 화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화나게 만드는 경우가 없다.
그래서 스피로스(Spiros Zdhdiates)는 '행복의 추구'라는 저서에서 오히려 "분을 낼 수 없는 사람은 자기 개선에 필요한 힘이 결핍되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2) 평소에 자신이 민감하게 분노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고,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령 어떤 일이 나에게 화가 나게 만드는지, 내 분노가 참으로 정당한 것인지, 그렇다면 왜 내가 유독 이 부분에 민감해서 분노를 터트리는 것인지 분석하고 추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 대한 방법론에 있어서 먼저 화나는 것에 대한 목록을 작성한다. 만약 하나님께서도 노하실 것이라면 A를 하고, 스스로만 화나는 일이라면, B로 기록한다. 그리고 A항목이 있는 곳은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B표가 있는 것은 감사할 수 있는 조건과 긍정적인 방법을 생각해 본다.
3) 절제하는 습관을 갖도록 훈련해야 한다.
이미 분노한 후에는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다. 절제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절제는 훈련이라는 사실이다.
연세 드신 분들은 그다지 화를 자주 내지 않으신다. 그것은 세월이 흐르게 되면 자동적으로 분노가 수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좌절과 부딪침이라는 방어벽을 통하여 절제라는 훈련을 쌓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분노는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바른 생각을 가지고 바른 행동을 해야만 바른 분노가 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 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잠 29 : 11)
4) 자신의 성격에 대한 자존감, 자신감을 길러 나가야 한다.
계속적인 분노는 자신에게 있어서 자존감, 자신감 결여로 나타 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열등감 때문에 도리어 화를 내고, 우윌감을 인정해 주지 않음으로 분노를 자아 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해야 한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감정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5) 분노에 대한 최고의 해방은 말씀과 더불어 기도하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인격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 분노를 내가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미워질 때
로마서 12:17-21절
(17)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람은 대인관계 속에서 살아 간다. 힘들고 괴롭고 어려운 세상! 서로 위하고, 사랑하고, 아껴 주고, 도와 주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간관계란 것이 그렇지 못함으로 문제이다.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원수가 생기고, 미운 사람이 생기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정말 욕을 해 주고, 두들겨 패 주고, 응징을 해야만 할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여러분은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해 본 적이 없는가?
어떤 어린 초년병 목사가 장로가 너무 너무 자기를 부당하게 괴롭히고 억울하게 하며, 목회를 훼방하자 2년 가까이 “저런 인간은 죽어야 해!”라고 늘 혼자 저주의 말을 했다. 이 목사는 마침내 장로에게 쫓겨 나 서울의 부목사로 가게 되었다. 하나님이 악한 장로 부부를 데려 가시는 것이 뜻이었는지 그 두 부부가 3개월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 버렸다. 아내는 암으로, 남편은 교회 담장이 무너져 깔려 죽어 버렸다.
목사는 얼마나 한이 맺혔든지 두 사람이 죽고 나서도 수 십년 가까이 미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좀 더 성숙해야 하지 않았나? 그런 사람도 품고 포용했더라면......”
또 한 번은 하나님의 일을 너무 훼방하는 권사가 생겨, “저 인간을 징계하셔서, 치십시오.” 라고 기도했더니, 그 다음 날 넘어져 코가 깨져 버리고, 얼굴이 보도 블럭에 깨어져 피떡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권사의 목사를 욕하는 범죄의 입을 하나님이 묶어 버렸다. 그 후 그 권사는 계속 입에서 침이 나지 않아, 말을 잘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목회를 계속하다 보니, 또 모함하는 사람이 생겨 너무나 분개했다.
“하나님! 저 인간을 징계하사, 깨닫게 해 주옵소서.”
그러나 이내 기도를 철회했다.
과거의 무서운 기도 응답의 결과가 심히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목회란 끝없는 성도에 대한 용서의 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목사는 결국 목회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여러 부분에서 우리들이 형제 자매를 미워해서는 아니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 하셨다.
“욕하지 말라.” 하셨다.
“비판하지 말라.” 하셨다.
심지어 “옳다 그르다, 판단도 하지 말라.” 말씀하셨다.
예배를 드리다가도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화해하고 다시 와서 예배를 드리라.” 고 까지 하셨다.(마5:22-24)
또한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를 못 살게 구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셨다.(마5:44)
“우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시지만, 우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 고 잘라 말씀하셨다.(마6:14-15)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 자신이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 자신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하셨다.
“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 질책하셨다.(마7:1-4)
형제 자매의 조그마한 허물 하나 용서하지 못하고, 긍휼을 베풀 줄 모르는 우리에게 주님은,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말씀하신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이 주님의 천둥 같은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교만한 사람,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 없는 사람, 스스로 의롭지 못하면서 의로운 체 외식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신이 주님과 아무 상관 없는 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형제 자매가 죄인이라고, 잘못했다고, 실수 하나 했다고 끊임없이 미워하고 비방하고 정죄해 왔다. 그런데 주님은 이 죽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내놓으셨다.
너무나 반대가 아닌가?
나는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질 않은가?
목회자 세미나에서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교인 때문에 열 받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맙시다.
우리가 사람을 고치려고 하지 맙시다.
예수님도 고치지 못한 사람을 내가 어찌 고칩니까?
그냥 십자가까지 데리고 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같이 죽어 버립시다.
내가 죽으면 됩니다.
내가 포기하면 됩니다.
내가 없어지면 됩니다.”
주님은 형제가 죄를 범하면 한없이 용서하고, 권고하고, 돌아 보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형제를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다.(마18:15)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이요, 용서 받을 수 없는 자임을 우리 자신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롬3:10-12)
양심이 올바른 사람은 솔직히 이러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어떤 사람에게서 범죄한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러한 자를 헐뜯고 비방하기에 앞서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고, 자신을 돌아 보며, 나 자신은 저러한 죄에 빠지지 않을까 경계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용서할 줄 알고, 스스로 근신할 줄 알아야 한다.(갈6:1-2)
형제 자매를 보면서 함께 아파 하고, 함께 그 무거운 짐을 서로 져 주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
롬12:17-21절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 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씀이 이 시간 우리 가슴에 예리한 창이 되어 심한 가책으로 다가 온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사소한 일들로도 시기, 질투하며, 형제 자매를 미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잘못도 그냥 넘어 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왜 마음 속에 ‘미움’ 이 생겨 날까?
1.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거나, 잘 될 때, 인정이나 사랑을 받을 때 본능적으로 미움과 시기심이 일어 나게 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 나고, 인기가 있고, 유능하고, 훌륭하고, 사랑을 받으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 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부패한 우리의 인간 본성의 사악성 때문이다.
남에게 거부감을 유발하는 사람이 있다.
누가 거부감을 일으키는가?
날카로운 사람, 모난 사람, 성질이 팩팩거리는 사람,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 설치는 사람, 체 하는 사람... 등 등은 필히 남에게 거부감을 유발하고, 미움을 받는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잘 앎으로 고쳐 가야 한다. 정말 고쳐야 아름다운 교회생활, 대인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상대방이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이유도 없이 괜히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사람은 자기 마음이 잘못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마음부터 바로 뜯어 고쳐야 한다. 그러한 사람의 기도나 교회 충성이나 양심은 주님 앞에 인정 받지 못한다. 자기 마음 하나 바로 다스리지 못하고서 무슨 교회에 다니고 사랑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주님은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용서하지 않겠다.” 고 경고하셨다.
사람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처음에는 좋아서 마치 간을 빼 줄 것처럼 하다가 얼마 못 가면 그만 달달 볶고 괴롭히는 사람이다.
여러분! 사람 잘 만나게 해 달라고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직장 상사, 교회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친구, 친지, 가정의 부모...
부모야 잘 만나고 어쩌고 할 수 없으니, 변화 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애매하게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한 죄를 반성하고, 돌아 보아, 회개해야 한다.
1>.지금 나는 누구를 애매하게 미워하고 있지 아니한가?
2>.미워한다면 그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가?
3>.나는 그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가?
4>.그렇다면 사랑할 방법은 무엇일까?
사랑하고 살아야 마음의 평안이 있고, 마음의 평안이 있어야 믿음의 성장이 있고, 믿음의 성장이 있어야 삶의 축복이 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이웃을 헐뜯으며 사는가?
그것이 스스로의 축복을 허물어 뜨리는 저주임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2.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을 때 마음의 미움과 증오가 생겨날 수 있다.
나를 괴롭히고,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고, 나를 억울하게 하고, 내 가슴에 도무지 지울 길 없는 스트레스와 무거운 짐을 자꾸만 지우는 사람이 있을 때 그럴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바보는 얄밉지만, 그런 대로 또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정말 악하고 미운 사람이 있다. 누가 봐도 잘못하는 사람이 있다. 누가 봐도 미움을 받을 사람이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해답은 분명하다. 신자는 이러한 경우에도 미워하면 아니된다. 주님의 대원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형제 자매가 나에게 잘못하여 마음으로 미워질 때 그 이유를 잘 생각하여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면,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먼저 자기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은 마귀의 마음이기 때문에 성령이 그 속에 계시지 않는다. 죄도, 잘못도 없는 형제 자매를 애매히 미워하는 일은 바로 살인하는 일과 같다.
그러나 미움의 원인이 그 형제 자매에게 있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그 사람이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하여 문제를 유발하면서, 이웃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때에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오래 전에 군대에 있을 때에 야전훈련 때문에 행군을 자주 했었다. 우리 부대가 지나가는 길목에 댓박고개라는 높은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의 길가에는 재소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사형수들의 무덤이 수 십여 기 안치되어 있었다. 말이 무덤이지 땅을 30여 Cm 파고 그냥 평토장한 무덤이다. 그리고 말뚝에 이름을 써서 그냥 푹 꽂아 놓았다. 그 무덤들을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이 가슴을 져며 왔었다.
“왜 저 사람들은 이 한 많은 세상에 와서 저렇게 그늘진 곳에서 살다가 강제로 목숨마저 빼앗겨야 했는가? 누가 저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한이 있단 말인가?”
간음한 여인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주님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나도 너를 정죄치 않겠노라. 그러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주님은 죄를 증오하셨다. 죄를 너무나 증오하여 그 죄를 끌어 안고, 그 죄를 없애시려고 당신의 목숨까지 던지셨다.
그러나 주님은 죄를 지은 사람은 미워하시지 않았다. 미워하시기는 커녕 죄인을 사랑하여 당신이 그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희생을 당하셨다. 죄는 한없이 미워하시면서도 그 죄인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온유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여기에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할 삶의 지침이 있다.
우리는 악하고, 깨닫지 못하고, 한없이 한없이 문제를 유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그를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심판하는 권한은 내 영역 밖의 일이다.
문제를 유발하고, 나에게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우리는 보복하거나, 대응하거나,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증오하고 미워하면 주님의 축복도, 내 마음의 평안도 다 사라져 버린다. 마음의 평안이 없는 그 곳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없다.
미움과 원망을 인간적으로 풀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까지 나는 그저 인내할 뿐이다. 인내를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길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그가 깨닫지 못한다고 나는 깨달았다고 말해서는 아니된다. “죄인 중의 괴수가 자신” 임을 아는 사람 만이 십자가 은총 앞에 설 수 있다.
1>.우리에게 범죄한 형제 자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용서할 줄 알아야 참 신자이다. 이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실천해야 한다. 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 감정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죄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지만, 그 죄를 단죄하고 심판을 집행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우리는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감정을 이기고 용서의 큰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일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 주님은 강력하게 명령하신다.
2>.잘못을 범한 형제 자매를 깨우쳐 돌아 서게 해야 한다.
충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충고는 아무나,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충고의 4가지 원칙이 있다.
1>.먼저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한다.
자신에게 자책할 만한 허물이나 잘못이 있으면 절대 충고하지 말아야 한다. 충고해 봐야 헛 일이 된다.
2>.온유하게 충고해야 한다.
충고는 정죄하는 마음으로 꾸짖거나 호되게 질책하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부드럽고 온유하게 충고해야 마음을 열고 받아 들인다.
“인격 대 인격” 만이 사람을 진실로 사로 잡을 수 있다.
3>.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 충고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만이 충고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아무런 감정의 교류도 없는 사람이라면 충고하지 말아야 한다. 소용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4>.돌이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람의 잘못된 마음이 하루 아침에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파란과 시련과 역경을 통하여 서서히 고쳐진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기다리는 삶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3>.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완악한 형제 자매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형제 자매가 나에게 악을 행할 때에 처음에는 내 마음의 아픔과 분노를 자제할 수 없어서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형제 자매의 잘못과 허물이 진한 아픔으로 다가 온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마음의 적은 나를 비방한 상대를 무시하고 그냥 버리는 일이다. 마음이 끊어지고, 너 같은 것은 상종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 밖으로 몰아 내는 것이 가장 무서운 단죄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본성은 나에게 악을 행한 자를 내버리고, 인간 이하로 정죄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신다. 이 주님의 명령을 들어야 축복이 온다.
잘못한 형제 자매가 돌아 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이 바로 기도하는 기간이다. 필사적으로, 강렬히 기도하면 그 시간이 단축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신앙은 곧 인내의 싸움이다.
죠지 뮬러에게는 친한 친구가 3 사람 있었다. 뮬러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한 친구는 즉시 주님을 영접했다. 다른 한 친구는 3년 후에 영접했다. 마지막 친구는 뮬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님을 영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주님을 영접한 것은 뮬러의 장례식 때였다.
기도의 사람은 세상을 떠나도 우리가 주님께 올린 기도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기도는 응답되기까지 영원히 살아 역사하는 것이다. 형제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데는 기도의 인내 이외에 다른 처방이 없다.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 버리는 수 뿐이다.
오래 전에 어떤 목사님이 제게 참으로 귀한 금언을 주셨다.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 마지막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내입니다.
한 번 참아 안되면, 두 번 참으십시오.
한 달 참아 안되면, 두 달 참으십시오.
1년을 참아 안되면, 2년을 참으십시오.
그래도 안되거든, 10년을 참으십시오.
마지막까지 안되면, 포기하고 평생을 참으며 목회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끝까지 내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용서해 주시기를 빌며, 기도하는 자 만이 끝까지 참으며, 인내의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그가 진정한 승리자이다.
4>.나아 가 우리는 잘못한 형제 자매를 용서한 다음, 사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
처음에는 분노로 기도하고, 나중에는 포기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마지막에는 그 영혼이 불쌍하여 가슴에서 북바치는 사랑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용서하고, 사랑으로 문제를 완전히 덮어 버려야 비로소 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을 내 가슴으로 깊이 체험한 사람 만이 이 위대한 일을 감당 할 수 있다.
교회 안에는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인간 이하의 상식이 되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예전에 제가 섬겼던 부산 수정교회의 관리집사는 23년 동안 교회에서 일반인의 평균 임금의 1/5 수준만 월급을 받고 일을 해 왔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23년 간 봉직한 그 충직한 종에게 퇴직금이라고 드린 돈이 300만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 혼자 다시 교회가 떼어 먹은 그 집사님의 임금과 퇴직금을 계산해 보았다. 1억 9,400만원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교회 내에서 ‘상식’ 을 찾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주의 종은 피눈물로 걸어 가는 길이다. 댓가를 바라지 않는 길이다. 비상식을 보아도, 얼토당토 않는 일을 보아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2020년 지금 정치를 보는 우리의 분노는, 불의한 정권자들이 너무나 비상식적인 억지를 부리며 정치랍시고 해대는 일이다. 국민의 정서와 일반적인 정서와 상식에 너무 맞지 않는 억지를 부리는 일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지금 내가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 아는가?
얼마나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아는가?
지금 나는 무슨 일을 자행하고 있는지 아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의와 진리’ 위에 서 있다. 성도는 이 ‘하나님의 말씀의 정의와 진리’ 위에 자신의 良心(양심)을 비추며 살아야 한다. 날마다 그 말씀 앞에 자기를 거울을 들여다 보듯 비추어 깊이 깊이 自省(자성)하며 실천하는 삶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 가야 한다.
말씀을 태연히 짓밟고 행치 않는 수 많은 목사와 교인들이 지옥에 갈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잘못을 범하고, 죄악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종 결론이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다.
주님은 원수된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죄 없으신 당신이 십자가 상에서 온갖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다 당하시고 돌아 가셨다. 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자기도 반드시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어 있다.
나 서울 새성교회 배종부 목사는 2020년 9월인 오늘날, 교회의 ‘성수주일 폐쇄, 예배 폐쇄, 각종 모임을 폐쇄’ 한 문재인 정권의 탄압을 두고 침묵하는 오늘날의 교단장, 총회장, 노회장,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는 원로목사 들을 ‘배교자’ 라고 부른다.
그제, 어제 저를 잘 아는 친구 선교사님, 목사님이 이런 편지를 보내 왔다.
2020.9.23.배목사님! 하나님의 震怒(진노)를 풀, 한국교회 미스바 교단을 창설해 주세요
1>.김00 목사
[김00목사‥00순복음교회] [오후 9:54] 존경하는목사님!
그래도한국교회의정직하고신실한주님의충성된일꾼인줄압니다
시대적상황에한국교회를재편성하는막중한사명을짐어질분이계셔야하는데,
WCC, WEA, NCCK, 기복신앙 문제를 해결할 분은 목사님이라고 생각되는데,
교단을재편성해서헤쳐모이면어떨런지요?
*WCC 세계 교회 협의회(普世敎會協會, World Council of Churches)
*WEA 세계복음주의연맹(The World Evangelical Alliance)
*NCCK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韓國基督敎敎會協議會)
이문제가해결되지않고는
주님의진노가풀어지지않을것같은데,
주님께여쭤보면어떻습니까?
진실무망하고,
사심이없는목사님이
적격자라고생각됩니다.
그힘으로
준비된성령께순종된
복음의메세지를펼치면
효과적이지않을까생각됩니다
지금까지수만명에게
말씀으로영향력을행사하셨으니,
실질적인주님을대신해서,
일이진행됐으면하는바램입니다.
꼭여쭤보시기바랍니다.
00에서
작은 종 김00 목사 올립니다
이모든것은
문통때문에일어난일이아니고,
주의종들이잘못했으니,
속아서그리됐으니,
주님편에서恨(한)을가진사람,
분노하는사람들이
모여새로운장을써야합니다.
어차피십자가졌으니,
국민일보에
커다랗게광고를내면어떨까요?
주님의진노를멈출자는
미스바교단으로모여라.
나라와민족을위하는
한맺힌,
풀지못한한을가진사람은
광화문에서문통의정체를모여서알렸으니,
이제는성소를청소하고,
정결케해야합니다.
썩어빠진
교단장,
총회장,
노회장,
지방회장,
원로목사,
담임목사들 때문에...
5.18,
제2의 6.25와 같은
심판이오기전에,
바알에게무릎꿇지아니한
7,000명의선지자들이모여
미스바교단을만들어,
회개운동을일으켜,
주님의진노를멈추게해야합니다.
만약주님의응답이있으면,
이는사람으로부터난것이아니요,
하나님께로서난것일것입니다.
갈수록종들이
권력에아부하고,
삯군목자가늘어나고,
AI인공지능에놀아나고...
강제라도멈추어야합니다.
그리하면열화같이일어날것입니다.
사랑하는목사님!
이일에나아가길원합니다.
시작만하면,
일은주님께서일은하시리라봅니다.
제2의선교대국으로나갈수있는방법은
교단이헤쳐모일방법밖에없습니다.
부디기도해주시기바랍니다,
이저녁도건강을바랍니다.
사랑하는김목사드립니다.
2>.정00 선교사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번 코로나와 문 정권의 악한 몽둥이를,
WCC, WEA의 음녀에 입맞춤한, 배도한 한국 기독교의 징계의 수단으로 사용함에, 심히 겸손히 주님의 섭리에 무릎 꿇고 회개합니다.
바라옵건데 배목사님이 이번 한국 성소 심판(겔 9장)에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시고, 친히 계시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배목사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음녀인 WCC, WEA의 통합 교단에서 탈퇴 선언을 하시고, 나오시랍니다.
한달 전에 주님께서 에스겔 9장의 성소 심판을 주시면서, 한국 교회가 음녀인 WCC, WEA에 거의 다 입맞추었기에, 코로나와 문정권을 통하여 교회를 심판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헤쳐 모여... 하신답니다.
말씀이 있는 곳,
예수님 닮은 성령의 사람이 있는 곳으로...
계18:2.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행4: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배종부] [오전 9:28] 정선교사님의계시를주목하며기도하겠습니다.
저는이두단체를따르지않습니다.
진정감사합니다.
주님께받는계시를
제게개인적으로알려주셔서
기도하게
영감을주십시오.
[정00 중국 나환자 선교사 2남 승배] [오전 10:36] 아멘, 아멘, 아멘!!❤⚘🍇
[배종부] [오전 12:46] 김00 목사님이
나배종부목사를향하여,
한국교회를새롭게할
미스바교단을세우란다.
정00 선교사님이
나더러 새롭게 나아 갈 길을
기도하란다.
주님!
제가요?
하하하......
이 불의하고 악한 문재인 정권의 탄압의 대적 앞에
정작 스스로 내면의 무너진 영성을 풀지 못하여,
마침내 새성교회 목회와
<성령의군대> 사역을 모두 폐쇄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나아 갈 길을 물으며 방황하고 있는
목회와 성령사역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이 비겁한 제가요?
안팎의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그래서, 교인이 하나도 없는 제가요?
운동하지 않고,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제가요?
뒤에서 이 악하고 불의한 문재인 정권을 욕만 하지,
비겁하여 숨고 또 숨는 제가요?
이런 제가 제 2의 전광훈 목사를 하라구요?
스트레스를 받자 참을 수가 없어,
음식도 하나 절제 못하는 제가요?
아주 사소한 작은 일 하나도 결단 못하는 제가요?
김00 목사님,
정00 선교사님은 아직도 저를 믿고 있나요?
성질 부리고,
혈기 부리다가,
손목 동맥이 절단되고,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지금 주님께 얻어 맞고 있는 제가요?
제가 남들 앞에 진실로 내 놓을 만한 게 있으면, 알려 주세요.
제가 기적을 만들 수 있다면, 가르쳐 주세요.
제가 용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힘이 있다면, 보여 주세요...
주님의 이 뜨거운 희생과 사랑의 심정을 우리도 가져야 한다.
나를 괴롭히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인격을 모독하고, 매장시키고, 무시하고, 모함하고, 나에게 악하게 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것을 초월하는 것이 신앙이다.
나도 형제 자매에게 대하여 행동이 경솔했고, 예의가 없었고, 말이 험했고, 교만스러웠고, 남 앞에 잘 나섰었고, 고집이 세었고, 남의 충고를 무시하고 잘 듣지 않은 능히 미움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나도 남을 그렇게나 비방하고, 모함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입방아 찧었던 사람이었다.
남의 허물과 죄를 보면서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스스로 허물을 깨닫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상대방도 나를 용서하고 사랑할 것이다.
“대인관계” 란 우리의 살아 평생에 계속해서 풀어 가야 할 어려운 숙제 중의 숙제이다. 주님의 명령을 좇아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면 내가 가는 그 곳이 곧 천국이 되고,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창조될 것이다.
형제 자매의 잘못을 용서하고, 넘치는 사랑과 이해를 베풀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대인관계의 축복을 날마다 창조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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