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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2014년 6월호) ‘이케다 다이사쿠 칼럼’
레프 톨스토이의 손자 세르게이와의 만남②
전쟁의 위선 통찰한 위대한 문호의 절규
러일전쟁의 부도덕성을 인류애 차원에서 고발…
비폭력주의는 관념론 아닌 위대한 정신의 발현
세르게이 톨스토이 (사진 가운데)와 만나 그의 조부 레프 톨스토이의 위대한 인류애의 인생 역정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맨 오른쪽).
평화로운 시기에 평화를 말하기는 쉽다. 톨스토이는 전쟁이 한창일 때 평화를 부르짖었다.
“다시 생각하라!” 러일전쟁에 대한 톨스토이의 일갈이었다.
자기 나라의 전쟁이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그러한 글을 용서치 않았다.
그렇더라도 톨스토이는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전쟁에 침묵하는 것은 찬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눈에는 모두 일제히 제정신을 잃어버린 듯 보였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당시 열아홉 살이던 딸 알렉산드라는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기독교는 살인을 금한다. 불교도 같다. 그런데 살인을 금하는 종교를 믿는 두 나라 국민이 증오에 불타 서로를 찌르고 죽인다. 실제로는 두 나라 모두 국가주의라는 새로운 종교를 신봉했다.
아버지는 신문을 읽으려 했으나 기사가 너무나도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에 읽지 못했다. 아버지는 ‘읽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국민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써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고상하고 훌륭한 일인 양 쓰는 것을 읽을 수 없다!’”
남의 일처럼 평론하듯 말할 순 없다!
전쟁을 선동하는 인간의 뻔히 들여다보이는 ‘궤변’과 ‘거짓’ 그리고 ‘억지’에 왜 모두 이렇게 간단하게 속아버리고 마는가?
개전(開戰)을 정당화하고자 정부가 얼마나 ‘거짓말’을 거듭하는지 왜 모르는가? 고등교육을 받은 인간까지도!
인류라는 가족끼리 살인하는 짓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는가? ‘어제까지 전쟁은 잔혹하다고, 무용하다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던 사람들’까지도!
톨스토이의 어조는 격하고 절박했다.
인류의 눈앞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죽음을 당하려 한다.
그러한 때 남의 일처럼 태평하게 평론이나 하듯 말할 수 있겠는가! 일흔다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백이 넘쳤다.
“세계 모든 나라에 평화를 호소하던 당시의 러시아 황제가 세계를 향해, 평화를 위한 진심 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실은 타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군대로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지만) 일본인에게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인이 우리에게 한 만큼 그들에게 하겠다는, 즉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는 것이다. 그것과 똑같은 일을 일본의 황제도 러시아인에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양쪽 모두 ‘방위를 위해’라고 주장했다. 쌍방의 국민에게 그렇게 주입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그 선전을 철저히 주입하여 대다수 일본 국민의 ‘주관’에서는 러일전쟁은 분명이 ‘방위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주 무대가 된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과 중국 동북3성(省)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싸운 제국주의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전쟁은 주로 중국에서 약 1년 반이나 이어졌다. 양국 모두 현지 중국인을 강제로 징용해 그 군사행동에 방해가 되는 성과 교량 그리고 가옥 등을 모두 파괴해버렸다.
이렇듯 당시 중국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주권도 처참하게 짓밟혔을 뿐 아니라 동북3성(省)에 거주하는 민중은 생명과 재산에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그리고 러일전쟁으로 1만 명을 헤아리는 중국인이 이유도 모른 채 죽거나 신체장애를 입기도 했다. 무수한 가옥이 불타버렸고 식량은 착취당했다. 그리고 수확 전인 농작물도 망쳐지거나 사료로 사용되어 수확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의 전투가 가장 격렬했던 뤼순 등에서는 ‘천리 사방,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만큼 황무지가 되었다.
또 전쟁 중에 일본군은 러시아의 스파이를 잡는다는 구실로 마음대로 중국인들을 살육하거나 강탈했다.
러시아 군대도 이에 질세라 가는 곳마다 ‘농작물을 불태워버리거나 여자를 겁탈하고 소, 말, 가축을 훔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것이 ‘정의로운 싸움’의 현실이었다.
톨스토이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먼저 ‘비참한 현실을 고상한 말로 속이는’ 일을 거부했다.
톨스토이는 전쟁을 ‘서로 죽이는 일’이라고 부르며 ‘무기’를 ‘살인 도구’라고 부르고 ‘군사시설’을 ‘살인을 돕는 시설’이라고 불렀다.
톨스토이에게는 ‘자랑스러운 군함’은 ‘잔인하고 어리석은 살인 기계’로, ‘무공을 세운 장군’은 ‘살인의 명인’이었다.
국가 간 전쟁이 과연 ‘정의로운 집행’인가
쉽게 전쟁 운운하지만 그것은 민간인도 포함한 대량 살인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톨스토이는 주의하라고 촉구했다.
또 국가가 아닌 집단이 일반인을 폭사시키면 큰 범죄지만 국가는 일반인을 폭격으로 죽여도 ‘정의로운 집행’이라고 말한다.
‘국가’라는 말의 허구에 속으면 학살이라는 ‘현실’이 학살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지금의 현실’을 은폐하는 이 ‘말의 속임수’를 폭로하려 했다.
법률학자들은 ‘이 전쟁은 절차상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톨스토이는 “절차라고? 어떤 절차를 밟아도 살인은 살인이 아니냐” 하고 의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톨스토이에 따르면 일본의 문명개화도 ‘유럽의 추악한 모습을 흉내 내다가 길을 잃고 만 일본인이 살인 기술을 배운 것으로 마치 더 문명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 도덕적 타락이었다.
그것은 많은 서양인의 관점과는 반대였다. 이에 대해 오카쿠라 덴신(일본 메이지시대의 사상가)은 “서양인은 일본이 평화로운 문예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야만국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일본인이 만주 전쟁터에서 대학살을 저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문명국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대문호의 손자 세르게이 톨스토이의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문명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는 ‘비폭력’이 바로 문명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힘과 힘의 충돌은 야수의 법칙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비폭력의 세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도 폭력의 불합리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그는 톨스토이가 서거하고 몇 달 뒤에 태어났다.
1911년이었다. 여섯 살 때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아버지 미 톨스토이는 동란을 피해 가족을 카프카스로 보냈다. 그러나 혁명은 카프카스까지 혼란에 몰아넣었다.
식량난으로 빵은 볼 수 없었다. 몇 시간이나 줄을 서야 겨우 검은 빵조각을 손에 넣었다. 살기 해 사람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느 날 복장이 흐트러진 적군(赤軍, 옛 소련의 정규군) 병사들이 가택을 수사하러 왔다. 그들은 취해 있었고, 총검을 갖고 있었다. 병사들은 침대의 매트를 뒤집고 옷장까지 열어 보았다. 아버지를 ‘황제 측사람’이라고 보고 체포하러 온 것이다.
정보를 얻기 위해 병사들은 인질을 잡거나 고문을 거듭했다. 붙잡혀 총살당한 집안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세르게이 소년이 혼자서 길을 걸어가는데 병사 하나가 난폭한 목소리로 “어이! 아버지는 어디에 갔냐!”며 목덜미를 잡았다. 더듬거리며 “모른다”고 대답하자 병사는 소년을 내팽개쳤다.
며칠 뒤 병사 대여섯 명이 다시 집에 찾아왔다. 그들은 어머니를 마당으로 떠밀더니 벽에 밀어붙이고는 “어디에 있나? 대답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어머니는 똑바로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모릅니다!”라고 하자 “또 올 거야. 빌어먹을 년!” 하고 상스러운 욕설을 하며 어머니와 아이의 뺨을 때리고는 돌아갔다.
1919년 소년의 할머니이자 위대한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야가 사망했다. 아버지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해 비통해했다. 황제 집안도 참살 당했다. 소년의 가족은 망명을 결단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부모 그리고 사촌이 북적대며 화물열차에 탔다. 열차 빈번히 정차하면서 천천히 달렸다. 배에 갈아탄 뒤에도 폭풍우에 시달리며 굴욕적인 대우를 참아내야 했다.
각지를 떠돌다 1921년 말 친척이 사는 프랑스에 도착했다. 세르게이 소년은 열 살이 되었다.
1905년 1월 5일 여순에 있는 호두산 203고지(러시아군의 요새)에서 일본군에게 투항하는 러시아 군인들. 러·일 양국은 러일전쟁을 통해 자국민뿐만 아니라
중국 등 인접 국가의 국민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나는 항상 인간의 편에 선다”
“폭력은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 어떤 것도 말입니다. 문화와 교육으로 인간 스스로 향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의미에서도 저는 이 ‘빅토르 위고 문학기념관’을 개관해 기쁩니다.”
세르게이 씨와 대화하는 동안 창문으로 6월의 신록이 보였다. 이곳은 위고가 즐겨 찾으며 시상을 다듬던 곳이다.
위고도 톨스토이와 같이 전쟁으로 ‘죽음을 당하는 쪽’에 섰다. 대혁명 시절의 프랑스를 그린 장편소설 <93년>에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처참한 내전이 묘사된다.
소설에는 “너는 어느 편인가?” 하는 질문에 한 어머니가 “나는 어린이들의 편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의 신문기자가 “당신은 러일 중 어느 편입니까?” 하고 묻자 톨스토이는 “어느 편도 아닙니다. 정부에게 속아 자신의 양심에 반하고, 자신의 종교에 반하며, 자신의 행복에도 반하는 싸움을 강요당하는 두 나라의 노동자 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프랑스 신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내게 민족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는 인간을 위해 서 있습니다.”
그 무렵 젊은 루쉰도 일본 센다이에서 공부하며 일본·러시아 어느 편도 들지 않고 톨스토이에게 공명했다.
톨스토이도 위고도 루쉰도 모두 ‘죽음을 당하는 쪽의 현실’에 섰다. 같은 현실주의라도 ‘죽이는 쪽’의 현실주의와 상극에 있었다.
그렇기에 톨스토이를 잇따라 비난했다. 그러나 톨스토이에겐 어느 나라의 전쟁이라도 ‘가족의 죽음’을 의미했고, 가장 통절한 현실의 문제였다.
그럼 왜 ‘타국인의 생명은 자국인의 생명보다도 가볍다’고 여길까? 톨스토이는 ‘그것이 국가주의라는 사교(邪敎)의 해독(害毒)’이라고 말한다.
톨스토이는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어떤 사람이 강 건너편에 살고 있다고 하자. 저쪽 나라의 임금이 우리나라 임금과 다투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털끝만큼도 그 사람과 싸울 마음이 없는데 그 사람에게 나를 죽일 권리가 있다면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톨스토이는 “영원한 ‘생명의 본원’을 자각하자. 인간이 만든 국가의 명령보다도 절대적인 ‘생명의 법’의 명령에 따르라.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신중히 생각하자. 누구나 그렇게 한다면 전쟁 따위는 일으킬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런 인류의 의식 변혁이 없이는 어떤 기구를 만들어도 잘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톨스토이주의를 시비할 생각은 없다. 그럴 지면도 없다. 단지 톨스토이의 군사력 부정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나는 무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무력이 사악(邪惡)임에는 변함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언제부터인가 “무력은 사악일지 모르나 필요하다”에 방점이 옮겨져 결국 “무력은 필요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은 사악이 아니다”로 비약해 바뀌어갔다.
톨스토이의 러일 반전론(反戰論)을 읽은 이시가와 다쿠보쿠(일본 메이지 시대의 천재 시인)는 “훌륭하다. 그러나 실행불가능하다”고 썼다.
그러나 여기에 “실행은 가능하다. 아니 이 방법밖에 없다”고 확신한 사람이 있었다. 간디였다.
그리고 간디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는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한 마틴 루터 킹 박사가 일어섰다.
간디도 킹 박사도 극히 현실주의적인 지도자였다. 그렇기에 정신의 힘이라는 ‘실재하는 최강의 힘’을 끄집어내어 사회를 일변시켜 보였다.
그 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비폭력 따위는 관념론이라고 비웃었다. 그것은 예전에 톨스토이의 목소리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오만함이었을 것이다.
야스나야폴랴나 생가 근처에 조성된 레프 톨스토이의 소박한 묘소.
톨스토이는 죽기 직전까지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길을 모색했다.
‘진정한 문명’과 ‘야만’의 전쟁
세르게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연구차 미국을 방문했다가 ‘알렉산드라 고모님’을 만났다. 감격스러웠다. 약 2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미하일)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팔짱을 낀 고모의 모습은 사진으로 본 할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했다! “고모는 검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60대에 머리는 이미 백발이었다. 그러나 활기차고 자신감이 넘쳤다. 고모에게서 품격을 느꼈다.”
직접 만난 적이 없는 할아버지 톨스토이의 향기가 고모에게서 풍겼다. 톨스토이의 이상이 고모의 모습 속에 살아 숨 쉬며 노래하고 있었다.
아버지, 저는 잊지 못합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당신의 꿈을….
그 맹세대로 살아온 알렉산드라의 선혈 속에 톨스토이가 있었다.
톨스토이는 알렉산드라를 통해 외쳤다.
“현재 일어나는 큰 싸움은 지금 일본인과 러시아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도 아니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백인종과 황인종의 싸움도 아니며 지뢰와 폭탄 그리고 총탄을 사용하는 싸움도 아니다.
인류는 하나의 동포라는 성스러운 의식과 인류를 박해하는 암흑의 고뇌가 벌이는 싸움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문명’과 ‘야만’의 싸움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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