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동새>는 설화에서 소재를 취하여 5연으로 구성된 시이다. 이 시는 지금까지 설화를 소재로 하여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표현한 단순한 내용을 지닌 것으로 논의되어 왔다. 시의 소재적인 측면에서 설화를 차용하였다는 의의를 지녔다는 점과 새의 울음을 기발한 착상으로 형상화하였다는 점이 주목 받아왔다. 그러나 이 시의 내용을 분석하여 작가가 시대적인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며 대항해 가는 모습을 살펴보는 작업은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접동새>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으로 <접동새>에 담겨 있는 시인의 인식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접동새> 설화는 널리 알려진 설화이다. 이 설화는 계모에게 학대받던 처녀가 죽어 접동새가 되었다는 내용을 가진 동물 유래담에 속한다. 이 시 <접동새>에는 등장인물이 계모, 누나, 오랩동생이다 그런데 전래설화에서는 계모, 누이, 아홉오라버니이다. ‘접동새’가 된 처녀는 시 <접동새>에서는 아홉 명의 남동생을 둔 누나이나 민간에서 채록된 ‘접동새’설화에서는 아홉 명의 오라버니를 둔 동생이다 이점이 시 <접동새>와 설화 ‘접동새’설화의 등장인물간의 차이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채록된 ‘접동새’ 설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부인이 아들 아홉과 딸 하나를 낳고 세상을 떠났다. 후처로 들어온 부인이 딸을 몹시 미워하여 늘 구박하였다. 처녀가 장성하여 시집갈 때가 되었으므로 많은 혼수를 장만하였는데, 갑자기 죽어버렸다 아홉오라버니가 슬퍼하면서 동생의 혼수를 마당에서 태우는데 계모가 주변을 돌면서 아까워하며 다 태우지 못하게 말렸다. 화가 난 오라버니들이 계모를 불 속에 넣고 태우니 까마귀가 되어 날아갔다. 처녀는 접동새가 되어 밤만 되면 오라버니들을 찾아와 울었다. 접동새가 밤에만 다니는 이유는 까마귀가 접동새를 보기만 하면 죽이므로 무서워서 그렇다고 한다.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19, 한국정신문화원, 1991, 684-685)”
위 설화의 내용을 기준으로 보면 시<접동새>에 나오는 구절인 ‘아우래비 접동’에서 ‘아우래비’가 ‘아홉 오래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접동새의 울음은 ‘아홉오래비’를 잊지 못하여 부르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아우래비 접동’을 ‘아홉 오래비’가 활음조 현상으로 인하여 변형된 모습으로 생각한 정한모의 의견을 정설처럼 수용하였다. 그러나 김소월의 <접동새>에 관련된 설화는 위의 설화와 조금 다른 내용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정희성,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 87쪽 1993 문원각)
“옛날 진두강 가에 10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계모를 들었다. 계모는 포악하여 전실 자식들을 학대했다. 소녀는 나이가 들어 박천의 어느 도령과 혼약을 맺었다. 부자인 약혼자 집에서 소녀에게 많은 예물을 보내 왔는데 이를 시기한 계모가 소녀를 농속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재속에서 한 마리 접동새가 날아 올랐다. 접동새가 된 소녀는 계모가 무서워 남들이 다 자는 야삼경에만 아홉 동생이 자는 창가에 와 슬피 울었다.”
위 설화의 내용으로 보면 ‘아우래비 접동’에서 ‘아우래비’가 ‘아우오래비’를 부르는 접동새의 울음으로 설명도니다. 시의 내용으로 보면 ‘아우래비 접동’은 ‘아홉 오래비 접동’보다는 ‘아우오래비 접동’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제 5연의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이란 표현은 ‘접동새’가 된 처녀는 오라비를 두고 있는 동생이 아니라 아우들을 두고 있는 누나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우래비’는 ‘아우오래비’를 부르는 접동새의 울음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성을 지니려면 ‘오래비’라는 단어가 ‘동생’에게도 쓰였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오래비’는 손아래 여자 동생이 손위의 남자 형제에게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제의 언어 습관으로 과거의 작품을 속단하는 것은 아닌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시는 시가 창작된 시대의 언어가 지닌 의미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시가 창작된 시대의 단어의 의미를 확인하는 작업은 시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작업은 김완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김완진은 ‘오래비’가 과거에 손아래 남자 형제에게도 쓰였던 단어임을 입증하였다.
이상으로 ‘아우래비 접동’이라는 구절에서 ‘아우래비’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충분히 논의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시<접동새>가 단순히 설화를 시화한 것이 아님을 논의 하고자 한다.
<접동새>의 1연은 접동새가 동생들을 부르는 슬픈 감정을 접동새의 울음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2연에서는 ‘접동새’ 설화의 공간적 배경을 3연은 접동새에 설화가 요약 제시되어 있다. 4연에서는 시적 전환이 일어나는 중요한 연이다.
4연에서 서정적 화자는 설화속의 접동새가 된 오랩동생의 누나를 자신의 누나로 삼고 싶어 하는 생각을 비추고 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의 구절에서 접동새가 자신의 친누나가 아님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 서정적 화자는 설의법을 사용하여 접동새가 된 오랩동생의 누나를 자신의 누나로 삼고 싶어 한다. 그리고 3연 4행에서는 ‘우리 누나’가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다고 진술하여 자신을 누나의 동생으로 확정하고 있다. 누나의 동생이 되는 순간 서정적 화자는 억울하게 죽은 누나의 한을 자신의 한처럼 생각하고 ‘불설워’ 하고 있다.
4연은 시행의 의미를 치밀하게 보지 않으면 단순히 서정적 화자가 설화 속의 동생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서정적 화자와 오랩동생은 같은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제 2연에 누나가 죽어서 접동새가 된 시기가 ‘옛날’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 <접동새>는 현재의 모습으로 형상화 되기 이전에 아래와 같은 다른 시연들이 있었다. 아래의 시 제 4연에서 누나의 혼인 ‘접동새’가 ‘ ’ 동생들이 다 죽고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울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 3연의 ‘누나라고 불러보랴’라고 말하는 서정적 화자가 오랩동생이 아님은 분명하다.
<접동새>의 원시는 123연과 567연이 거의 다른 내용이 없고 단순한 반복일 뿐이다. 이러한 반복은 시적 긴장미를 떨어드린다. 그렇다고 567연을 생략하고 8연을 4연 뒤에 첨가하는 것도 시의 의미가 중복되므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3연을 통하여 서정적 화자가 오랩동생과 다름을 충분히 알 수 있으므로 8연은 생략해도 시를 자세하게 읽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되다. 또한 5678연을 생략함으로 인하여 시에 긴장미와 함축적인 의미를 더하는 효과가 생기므로 원시 자체가 현재의 모습으로 정리되었다고 생각된다.
<접동새>의 화자가 ‘오랩동생’이 아니라는 것은 시인이 <접동새>를 단순히 설화를 시로 형상화한 것에 그치지 않는 것임 알 수 있다. 서정적 화자는 ‘접동새 설화’를 제재로 하여 무언가 자신의 뜻을 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서정적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살펴보기로 하자
서정적 화자는 왜 전설을 담고 있는 접동새를 자신의 누나로 삼고 싶어 했을까? 이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를 원시의 제 4연과 8연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접동새’가 된 누나는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에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슬피’ 우는 존재이다. 동생들이 의븟어미에게 고통을 당할까봐 죽어서도 저승에 가지 못하고 접동새라는 동물이 되어서라도 그 동생들을 지키려는 마음을 가진 존재이다. 즉 접동새는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동생들에게 직접적인 의지처가 되지는 못하지만 심정적인 의지처의 구실을 하는 존재이다. 동생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을 가진 접동새는 동생들이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이미 동생들이 모두 죽은 후인 지금에도 동생들을 걱정하며 ‘남 다 자는 밤’에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울고 있는 존재이다. 이렇게 동생에게 의지처가 되는 접동새를 서정적 자아는 자신의 누나로 삼는다. 누나를 삼음으로서 자신은 접동새의 동생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고 접동새는 전설상의 존재에서 이제부터는 동생인 자신을 위하여 보호하려고 애를 쓰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서정적 자아는 의지할 곳이 없어 접동새 전설에 의지하여 심정적으로나마 의지처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접동새>를 시인의 살던 시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해석한다면 서정적 자아는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보호자(나라)를 잃고서 계모(일본)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의지할 때 없는 오랩동생(우리 민족)의 처지와 같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 야삼경은 아무도 우리 민족을 돌봐주지 못하고 희망이 없는 암울한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정적인 자아는 의지할 곳이 현실적으로 없으므로 정신적인 곳에서 찾는다. 그 정신적인 곳이 우리 민족 정신인 담긴 설화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고 민족 정신이 담긴 설화 중에서도 일제의 감시에 걸리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설화를 찾아 시로 형상화한 것이 <접동새>라 할 수 있다. 민족의 희망을 설화를 차용하여 나타낸 것은 김소월이 지닌 탁월한 시 형상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접동새>는 단순한 설화를 차용한 시가 아니라 나라를 빼앗겨 어려운 상황에 처한 우리 민족에게 민족정신에 의지하여 이겨나갈 것을 노래한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