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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경기도 의왕 청풍 김문의 묘역 간산
아래는 소산 장동익 선생님이 쓰신 의왕시에 있는 청풍김씨 부인 안동권씨 묘를 간산하고 올린 글로 보이는데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우리 풍수학도들이 풍수지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듯하여 한번 옮겨 봤으니 참고해 보시고 의견을 올려 토론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素山-張東益...2008. 06. 05 23:19
義王 淸風金門의 墓域 看山 2008년(戊子) 5월 29일은 아마도 시생에게는 平生 잊을 수 없는 하나의 大事件으로 기록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29년 忍苦의 風水歷史上 굵은 획을 긋는 일을 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름아닌 선생님을 뫼시고 통맥법에 의한 격룡과 재혈, 消砂와 納水를 직접 재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입니다. 京畿道 義王市 古川洞에는 옛부터 조선 8代명당중의 하나라고 까지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 유명한 묘가 있는데 이가 곧 淸風金氏 贈 吏曹判書 仁伯 公의 配位 貞夫人 安東權氏의 묘입니다. 이 묘는 후손이 1대제학에 6정승이 그것도 連出로 發하는 바람에 古今을 막론하고 地理家들이 으례이 찾는 곳입니다. 그런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지만 최근에는 이 혈장을 놓고 穴의 大小를 넘어 非穴之地라는 異論이 있는바, 全州에서 世居하시는 銀川 李貴洪 스승님께서 侍生에게 看山을 吩咐하시어 뫼시고 가게 되었습니다. 全州에서 고속버스를 이용하여 강남터미널에 도착하시는 관계로 水原에서 아침일찍 출발하여 가면 되겠다 싶었는데 현지준비도 있고해서 마침 鼎巖 吳선생께 선생님을 모셔주십사 부탁하였더니 欣快히 應諾, 그 덕분에 侍生은 現地에서 迎接하는 便宜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점심식사 장소인 “一品香”을 들려서 확인후 묘소에 도착하여보니 첫인상은 비교적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점과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것 같은 形勢가 特異하여 만두에 올라 살펴보니 횡낙혈 비슷한데 入首處가 보이질 않아 뒤쪽으로 더 올라가며 유심히 보고있는데 작지않은 두 개의 바위를 만났습니다. 얼핏보면 鬼星으로 착각할 砂인데 만두로 들어가는 脈이나 撑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데 선생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만두로 안내하니 일성이 “와혈,그것도 넓직한 활와에다 토판혈의 혼합형이구먼? 괴혈이라구 할 수 있지, 이런혈은 재혈하기가 힘들어! 道眼도 안되고 神眼級은 되야 알아볼 수 있어 ! 이혈을 누가 혈이 아니라구 혀? 참! 내원...” 사투리를 섞어가며 계속 설명하신다.
“이봐! 素山! 이 후각을 한번 봐바! 중요 포인트가 여기에 있어! 이 후각을 중심으로 저렇게 양쪽에 보호사도 있잖여! 저쪽 만두처에서 여기 후각을 한번 재봐! 무슨방이여?” “예! 亥方입니다. 선생님!” “이 바위는?...” “ 예! 乾方입니다.” “이 바위가 鬼星처럼 생겨서 乾亥入首로 착각하게 되있구먼?... 아무 의미도 없는데... 지관들 눈만 흐리게 할 뿐이지... 入首處는 예가 아니여!” 그러시면서 坤方쪽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도둑한 부분에 서시면서 “예가 入首구먼! 자! 내룡 한번 재봐!” 吳先生이 바쁘다. 여기로 갔다. 저리로 갔다... “예! 辛戌...., 辛 入首입니다.” “분지각 재봐!” “예! 坤申,壬子입니다.” “그려! 이제 됐어! 여기 봐!” 하시며 땅에 그림을 그리신다. “내가 늘 강의때 말허잖여? 토판혈장 같은것은 뒤에 붙은 후각에 의하여 재혈을 해야 된다고... 入首는 비록 이 쪽이지만 혈은 저쪽 亥方으로 나간 후각과 운각의 대칭점에 만두가 있는거여! 그래서 재혈하기가 어렵다는거구... 자! 여기를 봐바! 입수처 아래에 미미하지만 와혈의 형체가 보이잖여! 이 와의 좌측운각(좌측 우각사)이 일자로 늘어져 나가서 토판혈장을 겸하게 되어 길쭉하게 됬을 뿐이지 정낙와체중 활와란 말여! 와는 운각이 분명해야 허는디, 운각이 겹으로 되었잖여? 그러니 됬지뭐! 그런데 이 혈은 횡작혈은 같은데 횡작혈도 아니구, 횡낙혈 같은데 그 횡낙혈두 아니여! 왜냐? 횡작혈이나 횡낙혈은 과룡에서 생기는데 뒤가 과룡이 아니고 용이 옆으로 제대로 틀었잖여? 또 입수의 흔적이 없잖여! 그럼 뭐냐? 와혈, 그것도 넓직한 와혈에다가 토판혈이 혼합된 그런 혈이여! 이런 혈을 알아보려면 우선 횡작혈과 횡낙혈이 무언지 통달하여 아는 사람이어야 허구, 또 토판혈이 무언지 맥혈이 무언지 아주 잘 아는 사람만이 재혈 할 수 있단 말이여! 그래서 道眼도 어렵구 神眼級 이상의 안목을 가진자가 알아 볼 수 있다는 거지!” 하십니다. 侍生이 吳先生과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니 와혈의 형체가 뚜렷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저라면 여기도 버리지 않겠습니다."하니, "그렇지! 써도 되지... 그러나, 정혈은 지금 쓴 자리여!" 하신다. “저거 봐! 저렇게 생긴게 雙宰相砂여! 저런 사격은 晝夜로 마주보고 있잖여! 인생사에서 맨날 마주보고 사는게 부부간, 부자간, 형제간 아녀?, 그럼 뭐여? 父子間이나, 兄弟間에 政丞이 나오는거지! 무슨 方인가 봐! ” “예! 乙辰方입니다.” “저 貪狼, 3天馬砂, 巽,丙,午方 다좋고, 案前이 그래도 이 정도는 되야지! 거기다가 회룡고조이구먼? 금상첨화여! 그런데 坐向이 뭔가 봐! ” “戌坐인데요!” “됬어! 戌坐를 놔두 되어! 하지만 천덕좌를 놓으면 좋을텐데....”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외양상으로는 분명 戌坐로 보이는데 족보를 확인하니 酉坐였습니다. 그건 外入首가 坤이고 보니 卯通坤하여 向通龍法 천덕좌로 통맥법 좌향법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그런 설명을 들으며 자세히 알려주심에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侍生은 한편으로는 솔직히 창피함에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동안 지리공부를 꽤나 했다고 내심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도 구분 못하고 입수처 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 하는 自愧感 때문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내룡을 타며 입수뒤 결인처에 다달았는데 “선생님! 여기 騎龍穴 같은데요?” “그려! 쬐끄만거지만 그래도 騎龍穴이구먼!!” 吳先生이 어디냐구 해서 간단히 설명해주고 계속 내룡을 따라 올라가는데 外入首處에 다달아 격룡하니 坤入首인바 다시 올라가며 용을 재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용을 재보는 吳先生이 이리저리 분주히 고생 좀 하며 현무봉 정상에 이르렀는데, 선생님께서 “여기구먼! 용이 이리로 들어왔단 말여, 자! 저 아래에 가서 여기를 향해 재어봐바! 무슨방이여?” 吳先生이 “午方, 午起頭입니다”하니 “여기 재봐! 뭘로 내려갔나!” “예! 酉 로 내려갔습니다.” “응! 90도 박환이구먼! 알았어!” 그리고 정상에 서서 주위를 망세하니 날씨마저 쾌청하여 참으로 시원했습니다. 아래에서 본 오봉산과 여기 정상에서 보는 오봉산은 완전 판이했습니다. 비록 작지만 주위의 모든 산들이 이쪽을 옹호하는 격이었습니다. 다시 정상에서 四方, 八方을 格針해 보니 대혈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한남정맥이 지지대고개를 지나 오봉산 뒤로하여 베네스타 골프장을 거쳐 수리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아주 그림 같았습니다. 선생님께서 "한남정맥이 이렇게 참 미끈미끈허게 아주 잘 빠졌단 말여! 금북정맥이나 호남정맥보다 잘생겼어! 그러니께 우리나라 인구의 대다수가 살고있는 수도권을 만들지..." 하신다. 내려오면서 棠林선생을 만났고, 다시 入首處에서 王博士님과 합류하였는데 묘소에 다시 서신 선생님께서 侍生에게 “아까 정상 현무봉에서 보니 辛方에 貪狼이 있었는데 그게 무슨 산이여?” 하신다. “예! 수리산하에서 안산쪽으로 가는 무슨 산인데요. 마재인가? 그렇게 들은거로 기억되는데요? ” 하니 “巽,辛相望했으니 科甲이 나오겠네!”하신다. “내룡이 文臣龍이니 文官이 많이 나올것이며, 이묘는 水姓이나, 木姓이 주인이여! 뒤에 6봉이 병장하니 6정승이 그것이고, 乙辰 쌍재상사도 을진6이고 입수도 坤6이니,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꼴이니 더욱 확실허지! 내 책에 나와 있잖어?” 하신다.(나중에 확인하니 은천 선생님께서 지으신 책 '도선국사 풍수비법' p513,514 발복추산 보조에 나와 있었음)
시생이 “주인이 어째서 水,木姓인가요?” 여쭈니 “현무봉(오봉산)이 멀리서 보면 金星으로 보이니 水姓이 들어가야 맞고 또 6봉이니 水體 아녀? 그러니 木姓도 主人이지!” 확인해 보니 權氏가 水姓이고, 金氏는 木姓이었습니다.. “제대로 主人이 들어 갔구먼! 이거 봐 이렇게 우리 통맥법이 정확혀!”하십니다. 발복 代數도 후에 선생님께서 내룡을 계산해 보시고14대와 21대를 합하여 총 35代 장상지지라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른 바쁜일이 있으면서도 잠시라도 만나고 가야겠다 하시며 식사장소에서 미리와 기다리고 있던 淸風金門의 後孫인 영식 先生이 미안스러워 부랴부랴 가면서 선생님께 後孫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 보고드리니 선생님께서는 “어! 그려, 참으로 고맙고 미안허구먼, 그러면 그 후손에게 내가 먼저 모든 것을 말한 다음에 말씀하시라고 혀! 왜냐면 우리가 하고있는 이 학문이 맞는지 안맞는지 맞혀 봐야 헐게 아니여?” 하십니다. 일품향에서 修人事가 끝나고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後孫께서 다음 일정이 약속되어 시간관계상 장시간 대화가 어렵기 때문에 소상히 들을 수는 없었고 이 권씨묘를 취하게 되는 계기가 중국 尙書의 젊은 자제가 조선으로 귀양왔는데 이 댁에서 잘 보살펴 줌에 보은하는 뜻으로 이 혈을 점혈해 주었으며 처음에는 이곳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집이 불이나서 전소되는 바람에 권씨부인의 자제인 극형公이 매입하여 묘를 쓰게 되었다는 사실과 이장을 할때 땅을 파니 광중자리에서 넓은 돌이 나와 일하시는 분들이 들썩들썩하여 들어보니 그 아래에 금부처가 가득하여 놀래서 내려놓게되니 쩍 갈라지면서 바닥에 꼭 맞게 저절로 맞춰져 묘를 쓰게 되었다는 설화를 알려 주었습니다. 은천 선생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葬後 2代부터 發福하기 시작하여 7-8代內에 連出이고, 父子間, 兄弟間 정승이 나올것이며, 내당이 관평하여 자손들이 관평지인이 출하고 山下자손이 受陰을 주로 하게되니 혈에서 100여리내에 자손들이 잘 되겠습니다. 그후는 휴식기간을 거친후에 간간히 發福할 것입니다.” 말씀하시니 후손께서 “맞습니다! 1대제학,6정승이 나오고난 후에 조선조 후기부터는 잠잠하다가 이제는 서서히 나오는것 같습니다. 市議員도 둘이나 나오고 시청국장도 나왔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묘의 受陰子孫은 長孫집이고,다음은 次孫집이며, 坤壬乙申子辰生이 先發이고,巳酉丑生이 次發이며, 寅午戌生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하시니 후손이 “맞습니다. 우리 직계 선조는 忠伯公인데 5대 봉군을 하였고, 이 권씨 할머니는 작은댁 仁伯公의 부인이신데 이 묘소로 봐서는 長孫집이 더 發福했습니다.”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족보를 가지고 나왔지만 시간관계로 확인을 못하였는데 후에 후손께서 연락 하시기를, 이묘를 쓸 당시에는 권부인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이미 죽고 막내인 극형公만이 있었는데 이 극형公은 아들을 5명을 두었으며 큰 아들 澄公이 전라도 관찰사에, 또 澄公(癸亥生)의 두 아들중 장자인 構公(乙丑生)이 우의정, 차자인 楺公(癸巳生)이 대제학,構公의 아들 在魯公(壬戌生)이 영의정, 그의 아들 致仁公(丙申生)이 영의정하여, 父子 領議政이고, 그의 從姪 鍾秀公(戊申生)이 左議政인바, 構公의 曾孫입니다. 또 次子인 揉公의 4男 若魯公(辛戌生)이 좌의정,尙魯公(壬午生)이 영의정하여 1 대제학, 6정승에 父子 영의정, 형제정승의 진기록을 出하였는데 큰집에서 4명, 둘째집에서 3명이 나왔다 말해줬습니다. 여기서 더욱 신기한 것은 受陰子孫의 生을 다 알아 맞췄다는 겁니다. (뒤에 선생님께 조용히 여쭈어 봤습니다. "선생님! 2대부터 8대 대발이 어떻게 나와요? 그 입수와 후각 때문이여!" " 예! 辛이 2니까 그렇구, 亥가 8이니 그런가요?" " 그렇지! 그러나 옛 선사들께서는 항상 여지를 두었어! 그래서 나도 그 법을 따르지! 그래서 7-8代라 한 거여!" 하셨습니다) 앞으로 더 증험을 해 봐야 하겠지만, 통맥법이 이토록 정확하다면 앞으로 이 학문을 더울 심도있게 연구하여 확실한 풍수학으로 정립하여 한 가정이나 한 가문을 위한다기 보다는 이 민족 이 나라를 위하여 人物을 내는데 도움을 받아야 겠다는 절박한 심정입니다. 이렇게 하는것만이 훌륭한 인물이 出하기를 고대하는 現時代 모든 국민의 여망에도 부응하는 길일 것입니다. 점심 식사가 끝난후에 後孫께서 바쁜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소까지 안내만이라도 해드리고 가야한다며 해 주시고 급히 가심에 감사함이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해도 아직은 양반의 자식은 따로 있다고 하는 행동을 보면 안다고 늘 말씀해 주시는 할아버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선 권씨 할머니의 큰 손자인 澄公의 산소를 찾아 건너편 왕곡동 백운산下 깊숙이 들어가니 작은 산길 삼거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경험상 이럴 경우 자칫 헛수고를 해본 적이 있어 한 길은 吳先生한테 비석이 ‘全羅道觀察使 金澄之墓’라 써있는지 한번 가보라하고 侍生은 다른 한길로 가서 맞으면 소리를 지르기로 하였는데 잠시후 吳先生이“여깁니다!!”하는 소리에 선생님을 뫼시고 올라가 보니 이곳 또한 혈장이라, 주위를 둘러보니 혈장으로서의 具備條件도 갖췄고 餘氣마져 충분하고 국새가 쌓인 격이 아주 알뜰하게 생겨서 보기에도 참 좋았는데 내려오며 合水處를 살피니 맑은 물이 양쪽에서 내려와 졸졸 흘러내려 갑니다. 선생님께서는 “참 좋구먼!! 헌데 아까 그 산소만치는 어림없고 후손에게 다소 도움은 되겄지!” 하셨습니다. 묘앞에서 순전의 소복하게 생긴 餘氣를 보며 吳先生이 “선생님! 마치 소라같이 생겼는데요? 영라하수 격인거 같은데요?”하니 선생님께서 “鼎巖이 상상력이 좋구먼! 그럴듯 해!”하셨습니다. 시간 관계상 용맥을 잴 수는 없고 다음 묘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이어서 대제학 金楺公의 幽宅을 가게 되었는데 좌판도 좋고 무엇보다도 案前이 시원하여 이 또한 혈장인것으로는 보이지만 입수맥이 약하고 길며, 무력한것이 흠결이었습니다. 뒤쪽으로 올라가니 권씨부인의 부군인 仁伯公과 그의 둘째아들 극부公의 묘소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분이 이 묘를 쓰고 둘째아들이 일찍 죽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시간이 許했으면 발복추산을 해봤으면 좋을텐데 또 수리산하 동래정씨 政丞出地를 가야하니 이는 6월 14일 공개간산시 추산해보기로 하고 다음 입향조인 友曾公이하 3代의 묘소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後에 後孫을 통해 들은 얘기인데 어느 풍수인들이 대제학 金楺公의 묘소에 와서 말하기를 “이게 무슨 혈이냐? 자리도 아니다!”하는 소리를 듣고 후손인 입장에서 민망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後孫입장에서는 風水는 모르지만 當代 대제학이라면 최고의 文人인데 자리도 보고서 썼을거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옛 先人들은 전문 풍수사가 아니더래도 기본적으로 웬만큼 修學한 선비라면 地官 뺨치는 풍수실력을 갖고 있던 것으로 알고있는데 현재 風水人이라고 하는 사람들중 開眼이 된 者가 몇이나 될른지... 그럼에도 함부로 말들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이 없는 일입니까?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입니다. 다시한번 地理學을 硏究하는 學人의 첫째 德目인 愼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일이라고 봅니다. 자리를 옮겨서 入鄕祖 友曾公以下 3代 墓所에 도착하니 아담한 齋室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齋室을 보는 순간 名門閥의 齋室치고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지만 侍生은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옛 우리의 先人들께서는 제대로된 儒家의 傳統은 富와 華麗함을 부끄러움으로 알았습니다. 이 宅 또한 儉約의 精神은 朝鮮朝 18世紀 野談集‘東稗洛誦’에서 이미 前에 接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대충 줄거리를 論하고 넘어가지요. ‘東稗洛誦’에서 朝鮮朝 仁祖때의 文人 白川 趙門의 樂靜齋 趙錫胤公과 金仁伯公의 얘기입니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眞理를 우연히 발견하여 인용했을 뿐이지만 趙公은 淸陰 安東 金尙憲公과 谿谷 德水 張維公의 文人이었는데 이 분이 金仁伯公의 행실을 보고 ‘積善之家 必有餘慶’을 예언했던일인데 후일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습니다.
원래 이곳 청풍김씨들은 始祖 大猷公부터 12世인 繼公까지는 청주에서 살았는데 繼公은 9세때에 11世인 그의 養父 汝光公의 喪을 당하였고 祖父의 功(중종반정 3등공신)으로 종3품 執義를 하였는데 38세의 나이로 단명하였지만 忠伯,孝伯,仁伯,禮伯 4兄弟를 두었고 16세기 중엽부터 이곳 왕곡동(당시는 廣州 沙斤村)에서 世居를 시작 이중 첫째인 忠伯公과 셋째인 仁伯公이 계속 世居하게 된것으로 전합니다. 이들은 아주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이 仁伯公은 趙錫胤公(樂靜齋)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어느날 樂靜齋가 서울집에 있는 綱目(자치통감)을 가지고 오지않아 仁伯公의 집에 綱目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빌려주기를 청하자 仁伯公이 여러번 그러겠다고 했지만 끝내 빌려주지않아 괴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차 樂靜齋의 여종이 仁伯公과 이웃하고 있었는데 마침 단오날 김씨가에 다녀왔다하며 안(內)상전에게 告하기를 “갑자기 김씨댁에 가서 한결같이 정성스럽게 제사 지내는것을 보았는데 상전댁에서 알던것과는 비로소 다른것을 보았습니다. 상전댁 제사는 비록 제수가 풍성하지만 정성이 부족하여 神이 반드시 흠향하지 않을 것이니 아마도 虛祭일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樂靜齋의 부인이 “김씨댁의 제사는 과연 어떠하더냐?”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뜰과 집안을 깨끗하게 쓸어서 조금도 티끌이 없었으며 金生員 內外는 비록 衣服은 낡았으나 정갈하기가 雪과 같이 풀을 먹여 곧게 다림질하였고, 머리를 감고 몸의 때를 깨끗이 씻어냈습니다. 祭需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蔬果와 香을 정결하게 하였고 제기가 지극히 적은 까닭에 마른것(乾者)은 모두 새 책위에 놓아 冊面에 進饌하고 焚香하였습니다. 경건하고 또 정성을 다하여 夫婦가 拜奠하는 禮를 여러차례 올렸습니다. 이는 우리 상전댁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한 것입니다. 小人이 우연히 들어갔는데 床卓전에 머리카락을 씻어 놓아서 마치 귀신이 올듯이 한 것은 오늘 비로소 남의 집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지극한 효자가 이와같이 하는것이 곧 제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祭需를 써서 풍성하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른 祭需를 풍성하게 올려 놓았던 책은 곧 趙公이 빌려보기를 원하던 綱目으로 제기를 대체해 사용한 까닭에 책을 빌려주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趙公이 이를 듣고는 기이하게 여겨 그날 저녁에 지팡이를 짚고 仁伯公宅에 가서 축하해 말하기를 “들으니 그대가 천거할 만한 행동을 하였으니 餘慶(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한 보답으로 훗날 그의 자손이 받는 慶事)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欽歎하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고 傳합니다. 뒷날 이 趙錫胤公은 兩館(홍문관, 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었고, 도산서원, 옥동서원에 제향되실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이런 인연이었던지 仁伯公의 아들 克亨公이 後日 趙公으로부터 修學하게 되었고, 장성하여서는 潛冶(잠야) 朴知繼의 文人이 되어 學行으로 천거되어 현감이 되었으며, 孫子 澄公이 全羅觀察使로 나가니 비로소 發福이 시작되어 曾玄孫에 이르러서는 크게 번창하게 됩니다. 3世 5公으로 세상을 놀라게하여 大家가 된 福慶의 배경에는 바로 이런 지극한 정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풍, “祭需는 많지 않아도 蔬果와 香을 정갈하게 하라!”는 傳統은 오늘날에도 淸風金門의 時祭에서 지켜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가서에 나와있는 명혈의 주인이 되는 법을 여기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다시 入鄕祖이신 友曾公이하 汝光公,繼公의 묘소에 이르러서 주위의 국세를 살펴보신 선생님께서는 “ 아하! 여기 또한 大穴이구나! 결국 여기서부터 발원이 되어 권부인 묘소로 꽃을 피웠구나!”백운산에서 내려온 낙맥도 좋고, 龍虎 특히 靑龍쪽의 쌍전고사, 일자문성의 안대, 獅子形으로 보이는 朝山, 관쇄된 수구등, 대혈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福받은 집이라는 結論을 내리고 下山하는데 선생님께서 “오봉산으로 다시 가자! ” 하십니다. 연유를 여쭈니 鼎巖先生이 용맥을 처음 재다보니 실수를 한것 같다는 보고를 들으시고 지관은 절대 失手란 용납이 되지 않는 법이라고 좀 힘들더래도 다시한번 가봐야 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鼎巖先生이 속으로는 송구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었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재차 격룡을 하게 되었으니...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鼎巖先生을 위로하고 오봉산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공부를 다시한번 하는 기회를 가졌으니 행운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격룡을 끝내고보니 내룡이 長孫龍이 많아 長孫이 先發이고 다음 次孫 後發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려오시면서 선생님께서 혼잣말로 "일우가 거기서 간과했구먼! " 하시길래 시생이 " 어디서 실수했는데요?" 하니 "왜 아까 그 내가 잴까? 말까? 했던 坤申龍말여? 그걸 일우는 그대로 쟀나벼! 크고 확실헌것만 재야 허거던? 그리고 걔가 입수를 착각하여 乾亥횡입수로 봤나벼! 그거, 참!!" 하셨습니다. 뒤를 따라가던 侍生이 느낀것은 情이 많으신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애끼던 제자 일우의 실수가 못내 여간 아쉬우신게 아닌듯 안타까워 하시는것이 역력하셨습니다.
下山하여 시간을 보니 東來鄭氏네 墓所에 가기는 늦었고하여 그곳은 다음에 다시 시간을 내어 看山하기로 하고 서울강의장으로 향했습니다. 老來에 너무 애를 쓰신 선생님께 송구한 마음이 죄스럽지만 수행했던 우리는 풍수공부는 확실히 했습니다. 기분좋은 날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