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내가 본 대구교회
신유길 박사(전 계명대 신학과 교수)
나는 3-4개월 전에 대구교회라는 이름의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나는 많이 흥분하고 열광하였다. 눈물을 자주 흘렸다. 콧물이 쏟아지기도 하였다. 아무도 나를 찾아와서 이교회를 소개하거나 인도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 이교회가 지닌 비밀의 양파껍질을 벗기면서, 혼자 경탄하였다. 이제는 많이 차분 해졌다. 함부로 울지 않는다.
연세대 신학과와 영문학과를 졸업 후, 미국 Berkeley에서 다시 유학을 한 후에 대구 계명대 신학과의 교수를 지낸 적이 있으나, 절대다수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도덕적 이중성과 평신도들의 왜곡된 신앙체계를 냉소하면서,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교회의 아웃사이더로 지내왔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제교회를 포함하여 잠시 동안 2-3개 교회의 문턱을 기웃거린 적이 있을 뿐이다.
지금 내 나이가 79세이지만, 모세의 “불타는 고목나무”처럼 나의 하루 생활이 뜨겁다. 평생 동안 아침 6-7시가 되어야 잠을 깰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3-4시 한밤중에 일어나서 노트북을 열고 교회 홈페이지를 방문 하거나 글을 쓰는 버릇이 생겼다. 학교를 떠난 지가 오래되었고, 글 한줄 써 본 것도 옛날인데, 요새는 하루도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해프닝과 드라마를 볼 때 마다, 내 머리가 “Brain Storm"(두뇌폭풍?)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교회가 나만의 전용 게시판을 만들어 주었다. 초등생 대상의 영어선교를 위해서 활동하는 공간이다. “사랑방 교통”이란 이름의 게시판은 국내외 모든 세계에 흩어진 교인들이 소식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는 사이버 공간이다. 날마다 분초를 다투면서 새 글이 올라온다. 여러 사람이 이곳에 글을 올리지만,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가장 많아졌다. 아직도 그 이유가 궁금하지만, 댓글들을 읽어보면 짐작이 간다. 그들의 공통적인 표현을 빌리면 나의 글은 그들에게 “신선한 바람”이기 때문이다. 수 십 년 동안 교회에서 들어오던 내용과 다르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들의 반응이 궁금하였다. 그들이 진노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교회의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자산으로 여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글이 그들에게 왜 신선한 바람일까? 이미 위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이교회의 아웃사이더가 아니지만, 인사이더도 아니다. 나는 그 한가운데 있는 양날의 칼이다. 경계 선상에서 “참여하는 관찰자”라는 뜻이다. 나는 수 십년 동안 이교회를 출석해 온 대부분의 인사이더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숨은 보화를 발굴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벗어나야 할 위험성을 알기도 하였으나, 침묵하거나, 부드럽게 표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을 쓰던 초창기에는 과민반응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나를 외부의 침입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나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듯하나, 이교회의 절대적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원로목사가 나를 두고 “신 교수는 적군이 아니라, 아군”임을 밝힌 터이라, 내가 이교회로 부터 추방당하게 될 일은 없을 듯하다.
대구교회 정도의 규모라면 1명의 담임목사와 10여명의 부목사, 그리고 다수의 전도사가 있어야 하지만, 이교회에는 부목사와 전도사가 전혀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교회출석을 하지 못하는 82세의 원로목사가 있고, 최근에 초빙 받은 1명의 후임목사가 있을 뿐이다. 그는 장로교 신학대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분으로 알고 있다. 그의 주요책임은 설교이고 교회행정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제가 없고, 모든 평신도들은 상호간 나이에 따라서 형제, 오빠, 언니, 동생, 삼촌 등으로 불리어진다.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가 없고, 주일예배가 있다. (여기서는 예배가 아니라, 집회라고 부른다) 보통 설교시간이 1시간 정도 소요된다. 국내외 모든 지역교회 신자들도 대구에서 진행되는 실시간 인터넷 화상예배를 시청한다. 전달방식은 큰 목소리의 설교라기보다 강론에 더 가깝다. 강론도중에 주로 여신도들이 한 목소리로 “아멘!”이라고 떼 화답을 한다. 설교 전에 교인들이 나와서 개인적인 간증을 하고, 설교 후에는 다시 10여명의 교인들이 설교내용에 대한 화답간증을 한다.
10시 30분에 예배가 시작되면 보통 오후 1시가 지나야 끝난다. 대표로 기도하는 사람이 없고, 헌금순서가 없으며, 성가대가 따로 없고, 설교 전후에 누구나 앞으로 나와서 즉석 합창을 한다. 서양에서 수입, 번역된 일반교회의 찬송가를 부르는 일이 없고, 한국의 명곡이나, 심지어는 “서울의 찬가” 곡조와 교회가 생산한 가사를 붙여서 합창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수를 치기도 하고, 남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도 한다. 자리에 일어나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예배시간에 정신이상자, 정신박약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젊은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음료와 간식을 먹기도 하지만 아무도 이들을 제지하지 않는다. 예배도중에 들어오는 사람과 예배를 마치기 전에 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자유롭게 들락거린다”라고 표현 하는 것이 적당 할 것이다. 경건한 예배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성경과 찬송가 책을 들고 교회에 오는 사람이 없고, 교회 안에는 성경을 구경 할 수도 없다. 구내서점에는 이현래 목사의 이름이 소개된 책들만 판매되고 있다. 한쪽 구석에 손 바닥 만한 신약성경 책 6-7권이 진열 된 것을 보았다.
예배를 마친 후, 공동식사를 하고 (아무도 식사기도를 하지 않는다), 오후 1시 30분부터 평균 2시간 동안 10 여 명씩 흩어져서 순모임을 가진다. 이 시간에는 폐쇄회로의 개인적 간증을 한다. 은밀한 사생활 까지 이 시간에는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격의가 없어지고, 사회적 신분의 벽이 무너지고, 가족 이상의 친밀감과 유대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교회의 부속건물 2채에는 50개가 넘는 방이 있고, 나이에 따라서 교회가 정해준 순방에서 6개월씩 돌아가면서 성경공부와 교제를 한다. 부부가 함께 참가하는 경우가 없다. 특히 사회적 소외계층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신앙공동체이다.
교인들이 주일에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다. 매주 평균 2-3회 정도 교회 모임에 출석하는 듯 하다. 주중에도 소규모의 순모임이 있고, 전체 순모임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지역교회 끼리의 교류이다. 나 자신도 이미 서울, 부산, 경주, 구례, 문경등지의 교회들을 순방 하였다. 국제적으로도 유대관계가 잘 형성 되어 있다. 거의 날마다 스카이프와 카톡으로 가상순모임을 갖는다. 어떤 여신도는 하루생활의 상당부분을 카톡 순모임 운영에 바치는 것을 보았다. 60대 초반이 되면, 평신도들이 국내외 지역교회에 선교사로 파송 된다. 약간 명의 교인들이 후원하는 지원금이 나오는 듯하지만, 생활비는 자부담이 원칙이다. 미국, 일본, 중국 등지가 주요지역이다. 나 자신도 이교회에 출석한지 3-4개월을 넘지 않았으나, 교인들의 상당수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교회의 특이점이 여러 가지 이지만, 그 가운데도 내가 주목하는 것은 대구지역 중심으로 현장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부부들의 모임이다. 장로교, 순복음 교회, 성결교 등의 교단 소속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주중에 이 교회 목사의 말씀을 듣고, 간증하고, 친교 하는 모임이다. 자신들의 신분을 노출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매우 다양하다. 수 십 명의 의사, 한의사, 약사, 교수, 판사와, 수 십 명의 초중고 정규교사, 학원 강사들이 있으나, 이들은 전체교인들의 10%를 넘지 않고, 더러는 속칭 이단교회를 집단 혹은 개별적으로 나온 사람들도 있다. 대형교단 출신의 평신도들이 다수 있고, 심지어는 교단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목사가 되었으나, 이교회 때문에 목사직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업 때문에 얽힌 사람들, 친인척, 직장, 학교의 사제관계로 얽힌 교인들도 있다.
여러 형태의 가해자와 피해자도 있다. 매주 마다 왕복3시간을 운전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이 교회에는 가족관계,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사람들, 정신질환자, 정신박약자, 신체부자유자, 기초수급자, 범죄경력자들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존감을 누리면서 교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대구교회는 개체조직을 가진 하나의 교회가 아니고, 현재진행형의 신약성서 후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운동이고, 자연발생적 사건의 연속이다. 유대교의 질시 속에 초대교회 예수의 운동이 누룩처럼 번지듯이, 2000년 후, 한국의 중소도시로 축소된 대구에서 한국거대교단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현래 운동이 지난 40년 동안 이어져 왔다.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현래 목사의 능력은 그의 학벌, 건강, 조직력, 사업가 기질, 야망 등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이 가운데 어느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CCC 학생운동 시절에 그는 간부로 일하였으나, CCC에서 나온 후 20-30명의 대학생과 청년들이 따라 온 것이 이 교회의 모체이다.
나는 대구교회를 한마디로 “미완성 교회”라고 정의한다. 내가 처음부터 이 교회에 빠져들기 시작 한 것은 그것의 “미완성” 때문이다. 대구교회의 용어를 빌리면, “방목, 관용, 자유, 실험“과 ”울타리 없는 교회“ ”한번도 가보지 아니 한 길“ 등이 말해주는 가능성 때문이다. 다음세대에 어떤 모습으로 진화 할 지 예측하기가 어렵지만, 한국교회의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