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유섭 목사(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딤후 2:11-13 (구원상실의 경고에 대햐여)
[질의]
디모데 후서 2장 11절에서 13절 좀 풀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구원에 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구원받은 자가 설상 주 예수를 부인한다 하면 그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 말씀을 해주시면서 12절에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는 뜻이 우리가 주를 부인한다 하더라도 주는 우리의 그 말(주를 부인하는 그 말)을 부인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던데 그렇다면 성경에 번역한 것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이 틀린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은 자가 후에 믿음이 없어졌다 할찌라도(설사 주를 부인한다하더라도) 주님은 미쁘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시니 모든 구원은 같지만 상급은 다르다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들을 괴롭히는 마귀는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가요?
마귀는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니, 믿음이 떨어져 상급을 쌓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인가요?
아르케 아카데미의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답변]
질의하신 본문에 대한 해석은 의문을 품고 고민하면서 질의하신 내용 중에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성경해석의 원리를 가지고 함께 본문을 해석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성도라면 당연히 성경을 읽어야 하는데, 문제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해석하며 읽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배경에 근거를 두고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본래 주신 그대로 깨닫기보다는 자기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은 더 이상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역사할 수 없고, 자기의 생각이 반영된 인간의 말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르게 해석되어야만 하는데, 제일 중요한 요소는 문맥과 배경과 문법입니다. 문맥(context)이란 글의 전후관계에서 상호 관련된 흐름 속에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문맥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내용의 흐름과 전혀 관계없는 온갖 억측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배경을 아는 것은 해석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특히 서신서인 경우는 누가 왜 그러한 내용의 서한을 보내야했는지 배경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번역본의 한계가 있으므로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원문을 참고하여야 하며, 당연히 원어문법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를 함께 고려하며 성경을 해석해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딤후 2:11-13의 본문에 대해서도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하며 해석해보기로 합니다.
디모데 후서는 잘 아다시피, 전서와 함께 바울 사도가 양아들처럼 생각하는 디모데에게 목회를 잘 하도록 권면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입니다. 여러 가지를 가르치고 있지만, 말씀을 듣는 일차적인 대상은 우선 디모데 자신이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전서에서는 주로 교회의 감독으로서 경건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면서 성도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반면, 후서에서는 주로 진리를 수호하고 말씀을 바르게 전파하라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특히 후서의 1-2장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부름 받고서 고난 가운데 복음을 전파한 바울 사도의 고난의 본보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본문의 앞부분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었음을 가르치면서 현실적인 환경을 초월하여 바울 사도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바로 앞의 9-11절까지 그러한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12-28절까지는 고난을 거부하고 주님을 부인하는 거짓된 사역자에 대하여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본문을 해석해 봅시다. 먼저 11절 처음에 ‘미쁘다 이 말이여’라고 할 때,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9-10절에서 자신이 고난을 받지만, 그 고난을 받는 까닭이 자신과 성도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영광도 얻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고난은 고난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연합되어 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고난은 영광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음 11절에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는 말씀은 롬 6:3-5에서 소상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을 때,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것으로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장사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계속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1절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온전히 연합하는 것이며, 곧 고난과 영광에 동시적으로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다음 12절에서 ‘참으면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약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은 마 10:32-33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주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일차적 대상자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가서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 핍박과 환란이 올지라도, 고난을 이기고 참 믿음으로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바르게 증거하면 천국에 합당하지만, 고난에 굴하여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께로부터 거절당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롬 10:10을 인용하면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무조건 단번에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참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주님은 보충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구원 얻는 완전한 믿음이 되려면 이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성경에 참으로 구원을 얻는 길에 대한 주님의 말씀들이 많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님은 마 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마 18:3에는 누구든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고, 요 3:5에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 12:32에서 성령을 훼방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밖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많은 거짓된 믿음에 대해 경고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이 그렇게 간단한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을 얻는 온전한 믿음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가르치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본질이 ‘인내’라고 가르칩니다. 주님은 마 10:22에서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도 눅 8:15에 보면 좋은 밭이란 말씀을 듣고 지켜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눅 21:29에서도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계시록 2-3장에도 끝가지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고난이 올 때 주님을 부인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거짓 가르침으로 주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하는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편지를 보면,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엄히 경고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 사도는 요일 2:22-23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하였고, 예수님 동생으로 알려진 유다 역시 유다서 1:3-4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과 힘써 맞서 싸우라고 권하고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함을 성경은 곳곳에서 가르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가 인내를 많이 강조하였고, 바울 사도는 그의 편지 곳곳에서 인내를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히브리서는 믿음은 곧 인내라고 가르치는 책입니다. 히브리서는 당시에 이미 많이 존재한 배교자들을 경계하면서 성도들이 미혹되지 말도록 쓴 편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 11:1에서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면서, 보지 못하고 바라기 때문에 이루어질 때가지 인내가 필요함을 역설(力說)합니다. 히 11장에서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이라는 인내로써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으로 돌아와서, 바울 사도는 고난을 참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참 믿음이 아니며, 그는 주님으로부터 거절된다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만일 우리가 주님을 부인한다면’이라는 직설법 형태의 가정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이 아루누메다( )는 직설법현재 1인칭복수로서 ‘다른 사람들이 아닌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 당사자인 바울과 디모데 자신들을 지칭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이 그럴 수도 있는 현재적으로 가능한 가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주님이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는 표현은 ’카케이노스 아르네세타이 헤마스( )입니다. 이는 직역하면 ‘그리고 그 분은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가 됩니다. ‘헤마스( )’는 1인칭복수목적격 대명사로서 ‘우리를’이라는 뜻이므로 만일 우리(바울과 디모데)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바울과 디모데)를 부인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부인하는 것이 말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 말을 부인하신다고 해석한다면 ‘문법’도 ‘문맥’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완전히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전 존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잘못된 성경 해석은 사람의 운명을 멸망으로 가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마음대로 해석하여 신앙생활 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게 될 때 누가 그의 운명을 보상해 줄 수 있습니까?
마지막 13절에서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라는 말은 인간의 한계와 주님의 영원성을 대조하여 말한 것입니다. 즉,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실하지도 못하여 변할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원히 변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은 주님께서 시인과 부인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스스로 부인하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성풍으로 인하여 주님의 하신 모든 말씀도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도 오해해서, 사람이 믿지 않을지라도 주님은 인간을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요모조모로 뜯어보면서 자꾸만 빠져나갈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있는 인간의 마음에 죄의식을 없애주는 것처럼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천국까지 보장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오늘날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구원이 상실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잘못된 사상이 누룩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원파의 신앙입니다. 그들의 가장 큰 미혹은 기독교인들을 그들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죄책감을 없애고 죄를 무서워하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구원의 안도감을 주고, 적당히 살도록 만드는 사상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빠져가는 것은 인간의 약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다고 믿으면서 회개도 하지 않고 마음 편히 살고 있는 것이죠. 주님과는 관계없이 그들 나름의 신앙관을 가지고서 말이죠.
죄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이 되신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 대신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미워하고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면서 신앙생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해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시기 까지 사랑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또 천국을 누리면서 기뻐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짓지 않도록 죄를 미워하고 버리면서 살라는 뜻이죠.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믿음이란 한 번 믿으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잘 믿어야 하는 것은 하늘에서 상급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잘못된 상급론은 성도를 이기적인 신앙으로 유도합니다. 하늘에 복을 쌓는다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더 좋은 것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곧 천국의 길을 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귀는 성도가 천국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할 뿐 아니라 택한 성도라도 미혹하여 멸망 길로 가도록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24:24에서 택한 자라도 미혹될 수 있다고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벧전 1:10에서 우리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하라고 권면하면서, 벧후 3:17에는 무법한 자들이 미혹에 끌려 굳센 데서 떨어질까를 걱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단 한 번의 믿음과 연합으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계속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포도나무이신 주님께로부터 떨어지지 말고 계속해서 단단히 접붙은 가지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인내며, 인내는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끝까지 인내하여 반드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영광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죤 칼뱅의 구원 예정론교리가 미흡한 교리인가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