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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찻집에 앉아
우 승 순
커피는 향(香)으로 마신다. 계절의 향도 있고 그리움의 향이나 사랑의 향도 있겠고 철학과 인생의 향도 있을 것이다. 커피는 정신을 맑게 해주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영혼의 물이고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해내는 특별한 음료다. 커피의 시작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에티오피아부근에서 자랐던 열매를 처음 수도원에서 볶아 음료로 마시면서 음주가 금지되었던 이슬람문화권으로 퍼진 것으로 추측된다. 커피가 처음부터 대중들의 찬사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의 음료에서 유럽의 기호품으로 전파되는 과정에는 ‘아라비안 와인’이라 불렸고 ‘악마의 음료’, ‘사탄의 음료’로 취급되며 한 때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유럽으로 전래된 후에도 19세기이전까지는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성들은 커피하우스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었다. 집에서 몰래 커피를 마셨던 여성들로 인해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바흐의 ‘커피칸타타’에도 그 상황이 잘 묘사되어있다.
커피를 판매하는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이슬람국가인 오스만 트루크에서 1530년대쯤 생겼다고 하는데 지금의 터키지방 항구도시인 이스탄불이다. ‘카페’란 말은 커피하우스에서 유래된 말로 이슬람의 음료가 유럽의 카페문화로 발전된 것이다. 서양의 카페문화가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한 것이 소위 다방(茶房)문화였다. 1920년대를 전후해 지식인들의 해외유학을 통해서 신문명에 대한 열망이 싹텄고 신소설 등 문학작품을 통해 커피가 상류계층이 누리는 이국적인 기호품으로 소개되었다. 유럽의 카페가 그랬듯 우리나라의 다방도 처음엔 주로 유명 문인들이 드나드는 예술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다방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를 전후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한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최초의 다방은 ‘까까듀’였고 천재시인 이상도 ‘제비다방’을 운영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예술가들이 운영했던 다방이 많았는데 극작가 유치진은 ‘플라타너스’, 여배우 복혜숙은 ‘비너스’, 영화배우 연학년은 ‘트로이카’를 운영했다고 전한다. 당시만 해도 문인(文人)들 사이에는 마치 지금의 조직폭력계파와 같이 ‘문예살롱파’, ‘모나리자파’, ‘동방살롱파’가 있을 정도로 예술인들이 다방을 중심으로 인맥을 형성하고 활동하던 시기였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개발과 더불어 미국의 대중문화가 쏟아져 들어왔고 다방도 상업적으로 변해가면서 일부에서는 퇴폐적공간이라는 비판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대학문화와 접하면서 동숭동, 신촌 등의 음악다방, DJ(Disk Jockey), 통기타, 청바지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 시위, 최루탄 등이 오버랩(overlap) 되면서 젊은이들의 낭만과 고뇌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다방과 관련된 대중가요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쯤이었다. 1968년에는 펄시스터즈의 ‘커피한잔’이란 노래가 공전(空前)의 히트를 쳤다. “♬ 커피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8분이 지나고 9분이와요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내 속을 태우는 구려~ ♫” 노랫말에서 보듯 당시에는 사랑하는 남여의 기다림에 대한 자존심이 10분이었던 모양이다. 1972년쯤에는 나훈아의 ‘찻집의 고독’이란 노래가 발표된다. “♬ 그 다방에 들어섰을 때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로 시작되는데 많은 가수들이 리바이벌할 만큼 인기가 많았던 가요다. 1979년쯤에는 “♬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로 시작되는 노고지리란 예명의 가수가 불렀던 ‘찻잔’이란 노래가 널리 애창되기도 했다.
그 무렵쯤 나에게도 다방문화를 누릴 기회가 왔다. 1975년에 드디어 빵집을 누비던 고교시절을 아듀하고 다방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춘천에도 몇몇 다방이 꽤나 성업 중이었는데 명동의 ‘설파’, ‘돌체’, ‘전원다방’이 그랬고 공지천의 ‘이디오피아’, ‘에메랄드’ 등이 인기 있었다. 베이비부머세대 중에는 커피문화를 처음 접했을 때 나름대로 잊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새내기 대학생시절인 1976년 11월 17일 첫눈이 오던 날 DJ가 있는 서울 전농동의 ‘은전다방’이란 곳에서 첫사랑을 만났다. 그 러브스토리는 다른 기회에 걸 맞는 글속에서 소회를 풀어헤칠 요량이다. 음악 감상과 더불어 기다리고 만나고, 웃고 떠들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했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벌써 40여 년이 훨씬 지난일이 되었다. 목마를 타고 떠난 그 여인도 할머니가 되어있겠지. 지난시절은 언제나 찰나와 같다.
늦가을 낙엽이 수북이 쌓여갈 때쯤 경춘선 열차를 타고 저녁 무렵 춘천역에 내리면 온통 안개도시였다. 뿌옇고 희미한 강변찻집에 앉아 그윽한 커피 향과 함께 파안대소하며 듣던 John Denver, Beatles, Carpenters, Patti Page 등 주옥같던 그 멜로디들. 그땐 친구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고 포장마차에서 어묵국물에 소주한잔이면 마음은 부자였고 행복했다. 어느 듯 청춘도 빛이 바랬고, 사랑과 우정도 아득해졌다. 너무도 많은 인연과 얽히고설켜 상처를 주고받았고 지치고 때 묻고 헐었다. 그 때 그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가을 강변이 보이는 조용한 찻집에 홀로앉아 그 시절을 더듬어본다. 커피 향의 마법에 걸려 깊은 그리움을 만난다. (202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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