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김동리의 <바위>,<무녀도>,<역마>등의 작품에는 인간의 운명에 순응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것과 그의 ‘순수문학(본격문학)’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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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본격문학)은 무엇인가? 해방 이후 ‘계급문학’과의 대결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의해 순수문학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순수문학은 ‘반(反) 계급문학’이라 할 수 있었다. 정치적 상황이 바뀜에 따라 계급문학이 그 존재 기반을 상실하게 되자 순수문학도 스스로 의미를 재구성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순수문학이란 말 자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고 활용되었다. 우리가 이야기할 김동리는 ‘세계사적인 시각에서의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을 내포하는 것이 순수문학의 문학정신’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또한 순수문학 득의의 개념인 ‘구경적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구경적 삶’이란 삶의 궁극적 의의로 절대적 진리의 깨달음을 탐구하고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즉 운명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김동리는 운명을 자각하는 삶을 중요시하면서 운명을 극복하고 이겨내려는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대립, 비극이 있음을 알리고 운명을 이겨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운명에 수긍하며 살아가는 것도 인간의 삶이라 생각했다. 김동리의 세 가지 작품을 통해 그의 가치관과 연결해 보자.
<바위>에서는 문둥병에 걸려 인간사회로부터 추방되고 불행하게 죽은 여인을 통해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소외당한 여인의 절망을 통해 생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 작품 속 여인은 바위에 늘 아들과 재회하게 해달라며 빌었다. 어느 날 장터에서 절도범으로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였던 아들을 소원대로 잠시 만났지만, 그 아들은 감옥에 가게 된다. 여인은 이후 죽게 되고, 그녀가 살던 토막은 불에 타게 된다. 사람들은 그녀를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침을 뱉고 그녀를 모욕한다. 이 소설을 통해 당대 우리나라의 현실 즉, 우리 민족이 살았던 비극적인 삶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을 강조한 김동리의 순수문학적 요소를 볼 수 있다. 나는 운명 같은 가난, 병, 구박 속에 살던 여인이 바위를 운명이라 믿고 매달리는 행위를 통해 운명을 자각하고 나름대로 이겨내려는 모습이라고 생각 한다.
<무녀도>는 전통 즉 토속신앙의 ‘모화’와 외래문화와 기독교의 대표가 되는 양자 ‘욱이’의 대립과 갈등이 주 이야기가 된다. 전통과 외래문화는 양립할 수 없고 그것이 운명이다. 그러나 모화와 욱이는 계속된 갈등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끝은 비극이다. 모화의 칼날에 욱이가 앓다가 죽고, 모화도 굿을 하다가 결국 죽게 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김동리가 둘 다 죽음을 맞게 되었음으로 ‘실패’했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욱이는 전통적 세계관의 배척으로 죽게 되었지만, 모화는 자신의 세계(전통적 세계)의 안에서 죽게 되었다. 결국 모화의 죽음으로 전통가치가 소멸 되었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가치가 옳고 그른지 소설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나는 김동리가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을 통해 운명을 거스른 자들의 삶과 죽음을, 인간의 허무적인 운명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역마>속 ‘역마살’은 한국적 운명이다. 소설 속 옥화(주모)는 떠돌이 중과 하룻밤 사이로 아들 성기를 낳는다. 옥화와 성기는 단둘이 사는데 어느날 옥화의 아버지 체장수가 계연이라는 처녀를 데리고 와 옥화에게 맡긴다. 성기와 계연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계연은 체장수가 옥화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었다. 옥화와 계연은 의붓 자매가 되고 성기와 계연은 이모-조카 사이가 되는 것이다. 이를 안 성기는 앓아눕고 계연은 구례로 떠난다. 시간이 흘러 성기가 엿장수가 되어 어머니 곁을 떠날 때 그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는 ‘역마살’이라는 운명에 순응하고 구례도, 정착의 의미를 띠는 쌍계사도 아닌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하동을 향해 나아간다. 성기는 운명에 순응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 성기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행복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나는 운명에 따르며 사는 것도 인간 삶이라는 김동리의 가치관이 잘 드러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2.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의 ‘사반’과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민요섭’에 대해서 비교하여 설명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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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반의 십자가>에서 사반은 야망을 가진 현실주의자이며, 많은 결점을 가진 영웅으로 묘사된다.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면서 그에 대한 회개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거나 신앙적인 인물이 아니다. 유대인의 아픔과 절망을 송두리째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반은 유대인이 로마에게 벗어날 수 있을 방법을 궁구한다. 유대 나라의 독립을 외치고 ‘혈맹단’을 조직하고 싸우면서 메시아 예수님의 힘을 빌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예수님을 반로마 해방 투쟁의 지도자로 삼지 못하고 오히려 비폭력적으로 상황이 흘러가자 결국 예수님이 유대 민중의 적이라고 이야기 한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라는 혈맹 당원에 의해 팔리게 된다. 자신도 예수님의 좌편에 매달리게 되는데 매달리는 순간에도 “유대인의 왕이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고 하며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지도자로 삼으려 한다. 예수님의 이적이 사반 자신의 구원과도 통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소설 속 사반이라는 인물은 끝까지 예수님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고 있다.
<사람의 아들>에서 민요섭은 부유한 외국 선교사의 양아들로 나중에 큰 교회를 물려받을 수 있지만 중간에 기독교를 부정하고(무기력함,회의감) 빈민촌에 들어가서 산다. 아하스 페르츠가 새로운 신을 갈망하며 고행하는 이야기가 민요섭의 일기를 통해 나오는데, 소설 속 민요섭은 아하츠 페르츠가 진정한 사람의 아들(인자)라고 생각한다. 조동팔은 민요섭의 제자로 그의 사상을 따라다니며 부유한 사람들의 것을 강도질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민요섭은 그를 반대하며 나중에는 생각을 고치고 기독교로 다시 돌아온다.
두 소설의 인물은 기독교에 반대하고 일어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띠지만 사반은 끝까지 적대적으로, 민요섭은 후에 다시 기독교에 돌아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3.‘아하츠 페르츠’에 대해 TV 문학관에서 어떻게 형상화 되었는지 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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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문학관에서 ‘아하츠 페르츠’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두 형사가 수사를 진행하며 “아하스 페르츠, 난 그가 민요섭 자체가 아닐까 생각하네.”라고 언급한 것뿐이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는 이 작품을 나타내는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이다. 아하스 페르츠는 유대를 떠나 다른 신들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40일 기도를 마친 예수님께 나타나 시험하는 사람도 아하스 페르츠로 나온다. 즉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는 반대되는 존재인데 작품 속 민요섭은 기독교를 떠나면서 아하스 페르츠가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형사들과 마찬가지로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도 민요섭이 아하스 페르츠와 같은 특징의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하츠 페르츠는 유대로 돌아온다. 민요섭도 결국은 기독교로 다시 돌아온다. 민요섭은 스스로 창조한 신에 대해 시간이 지날수록 회의감을 품고, 고아원에서 아끼던 소년에게서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발견하며 다시금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가려 한다. 조동팔에게 자신의 신은 허망이라며 기독교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한 민요섭은 조동팔에 의해 살해 된다.
아하츠 페르츠가 직접적으로 언급된 횟수는 적다. 그러나 아하츠 페르츠가 유대로 다시 돌아왔다는 점, 사람들은 그를 사단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나는 아하츠 페르츠가 자신의 목적도 무엇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하츠 페르츠가 영상에 언급되고 나온 시점부터 민요섭의 끝도 비극일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복선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