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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익은 글을 지난 1970년대, 1980년대 인도네시아 열대목 개발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렸던 한국의 산업 전사들, 특히 이역만리, 인도네시아 밀림 현장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들께 바친다>
나의 첫 직장
김영수
남자에게 있어 첫 사랑이 잊혀지지 않듯이, 첫 직장도 오래 기억되는 대상(對象)이 아닌가 생각 한다. 떠나 온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끔 꿈에서 그곳 경치가 나타나곤 한다. 그 곳은 다름이 아닌, 우리에게 보르네오(Borneo) 섬으로 더 잘 알려진 인도네시아 남부 칼리만탄(Kalimantan)이다. 학부 때 전공한 언어와 나의 첫 직장과 관련이 깊은 지역인 곳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회화(繪畵)와 미학(美學)을 전공한 후, 미술평론(美術評論)을 평생의 업(業)으로 생각하고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했었다. 그러나 한참 모자라는 자질 부족과 재능은 두 번의 실패로 이어졌다. 삼수(三修)를 고집했었으나 결국 택한 곳은 그 당시 후기 대학이었던 한국외국어대학교였다. 학과 명칭이 남다르게 길어 장난(?) 삼아 응시하게 된 말레이-인도네시아어학과와 인연이 그렇게 맺어지게 되었다.
학부 4년 동안의 끝 없는 방황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좌절된 고급(?)의 형이상학적인 미술평론의 길과 저급(?)의 형이하학적인 특수 외국어 공부간 갈등이 갈수록 깊어져 갔다. 미래에 대한 설계는 대학 졸업이 가까워 올 때까지도 ‘강 건너 불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고, 남의 일처럼 여겼었다. 인도네시아어를 평생 호구지책으로 삼고, 30년 간의 방송 제작과, 10년이 넘는 학교 강의, 그리고 석, 박사학위를 받을 줄은 그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시간만 있으면 당시 서울 미대(美大)가 있었던 지금의 대학로로 달려 가서 미대생이 되어 있던 화실(畵室)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을 큰 위안으로 삼을 뿐이었다.
취업(就業)은 우습게도 힘들지 않게 실현 되었다. 대학 4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학교 학과장실로 신입사원 추천 의뢰가 관련 회사들로부터 들어 오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서 이미 전공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 취업 인터뷰에 들러리(?) 봉사를 자의반 타의반 하게 되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남부 칼리만탄에서 원목(原木) 개발을 하고 있던 한국남방개발 (Korea Development Company, 약칭 : KODECO) 신입사원 취업 인터뷰에 친구 들러리를 서게 된 것은 4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며칠 전이었다. 인터뷰는 한국남방개발 본사가 있었던 서울역 앞, 대우빌딩 안에 있는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인도네시아어 기초를 갖추지 못한 나는 “안녕 하십니까? 제 이름은 김영수입니다.”라고 인도네시아어로 말한 다음, 인도네시아어로 쏟아지는 복잡한 질문에는 용감하게 묵묵부답으로 버텼다. 회사 취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 내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전공 공부를 잘한 친구는 입에서 침이 튈 정도로 열심히 인도네시아어로 인터뷰 답변을 했고, 나는 그 뜻을 몰랐다. 단지 귀에 들어오는 것은 간단한 인칭 대명사(人稱 代名詞) 그리고 몇몇 단순 동사(動詞)뿐이었다. 취업 인터뷰가 있고 며칠 후, 최종 합격자 한 명의 명단이 한국남방개발로부터 학교로 전달 되었다. 기가 막히게도(?) 내가 합격한 것이다.
그 후, 회사에 출근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튼튼하게(?) 보이는 내 신체 조건이 합격의 열쇠였다는 것이다. 취업 인터뷰에 참여한 학생들 중 내 체격이 열대 우림(雨林)의 험악한 남부 칼리만탄 현지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회사 임원진들의 현명한(?) 판단이 그 배경임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적 ‘우량아’로 뽑힌 든든한 기본 체력이 첫 직장을 얻는데 큰 힘이 된 것이다. 똑똑한 머리로 얻은 첫 직장이 아니라 부모님이 물려주신 체력으로 취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대학 4학년 여름방학부터 한국남방개발 본사 총무과로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을 하자마자 나는 인도네시아 행, 비행기를 김포공항에서 탑승했다. 당시에는 한국과 인도네시아간 직항 노선이 없어 홍콩(Hongkong)이나 방콕(Bangkok) 아니면 싱가포르(Singapore)를 경유해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Jakarta)로 갔다. 나는 홍콩에서 1박을 한 후, 인도네시아 국적기인 가루다(Garuda)를 타고 자카르타, 할림(Halim) 공항에 도착했다. 그렇게 인 도네시아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한국남방개발은 충청북도 면적만한 지역의 벌채권을 갖고 남부 칼리만탄에서 원목을 채벌하여 한국을 포함한 해외에 판매하는 회사였다. 1969년 우리나라의 해외 투자 1호로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남방개발은 한국의 건축 붐과 함께 사세(社勢)를 크게 확장 시켰다. 한국으로 수출된 원목의 대부분은 나왕목(羅王木)으로 제재목이나 합판의 주 재료로 활용되었다. 당시 한국의 아 파트 건설에 있어 한국남방개발의 나왕목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험난한 열대 우림과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현지 풍토병 등, 말 그대로 산판을 운영하기 위해 한국남방개발의 초창기 요원들은 강인한 해병대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생산본부가 설치될 남부 칼리만탄, 바뚜 리친(Batu Licin) 지역 현지에 최초로 중장비를 투입할 때의 흑백 사진을 보면 흡사 해병대 상륙작전을 방불케 하는 긴박감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군대식 상명하복과 엄격한 규율이 회사의 전통이 되었다.
한국남방개발 남부 칼리만탄 반자르마신(Banjarmasin) 출장소 소장 대리가 내게 주어진 첫 직책이었다. 반자르마신은 남부 칼리만탄 주도(州都)로서 바리또(Barito)강 하구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다. 적도(赤道) 아래, 남반부에 위치한 반자르마신은 연중 우리나라 복더위처럼 무더웠으며 계절은 건기와 우기로 나타났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아체(Aceh)와 함께 이슬람 세력이 타지(他地)와 비교해서 강하기로 유명했다. 출장소 사무실은 숙소를 겸하고 있었는데 이층 집이었다. 아래층은 사무실로 사용하였고 이층은 한국인 직원들이 출장 나올 경우 숙소로 사용하였다.
사무실과 골목길을 하나 사이로 이슬람 사원이 있었는데 하루에 다섯 번 확성기를 통해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Adhan)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잠을 설쳤는지 모른다. 출장소 현지인 직원은 아홉 명이었고 운전수가 두 명, 음식과 세탁을 담당하는 가정부가 두 명 그리고 사환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직원들 이름과 얼굴이 아직도 기억 나는데, 그 중, 김치를 잘 담갔던 할머니 가정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생각한다.
출장소 주요 업무는 현장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인력과 물자공급, 관청 업무와 은행업무 등이었다. 이중, 최소 한 달에 한 번 정도, 약 3천 명을 헤아리는 현장 인력들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수출한 원목 대금을 은행에서 현금으로 인출하여 현장까지 운송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월급 전 날, 은행에서 인출한 현금 지폐와 동전을 사무실 금고에 넣어 보관한 다음,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반자르마신 공항으로 나가, 현장 근처 ‘바다 섬’(Pulau Laut)에 있는 스타겐(Stagen)이라는 간이 공항으로 10 인승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도착. 스타겐에서 다시 현장까지 스피드 보트를 타고 들어가 현금을 넘기고 반자르마신으로 돌아 나오는 과정이었다. 사무실 금고에 다 집어 넣지 못할 경우, 현금을 침대 밑에 깔고 잔 적도 몇 번 있었다.
원목은 험난한 작업 과정을 거친 후, 현장 근처 바다에 정박해 있는 원목선에 선적 되었다. 경제목을 벌채하기전 팀버 크루징(timber cruising)이라고 하는 벌채 가능목에 대한 넘버링(numbering)을 하는 작업이 우선 이루어졌다. 헬기를 띄워 촬영한 사진과 지도를 중심으로 팀버 크루징은 진행 되었다. 대략 7명에서 10명 정도로 팀이 구성 되어 밀림 속을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걸어 다니면서 경제목 표시를 함과 동시에 나무의 경위도(經緯度) 위치를 지도에 표기하는 작업이 그것이었다. 남방개발의 신입사원들은 거의 의무적으로 최소 한 번 이상은 팀버 크루징에 투입되었다. 나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열흘 간, 밀림 속에서 숙식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얻었다. 지긋지긋했던 산 거머리, 전갈의 공격, 어둠 속에서 이글거렸던 야생 소의 붉은 눈, 극락조(極樂鳥)의 아름다운 날개 짓, 야생 열대 난초의 향기, 칠흑 같은 밤, 밀림 속에서 바라 본 남십자성(南十 字星)과 은하수는 아직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벌채는 전기톱(chain saw)을 이용했다. 원목 개발 초창기에는 나무 밑에 비계(飛階)를 설치한 후, 사람들이 일일이 도끼를 이용하여 벌채했다고 한다. 그렇게 벌채하는 흑백 사진이 한국남방개발 본사 사무실 벽에 걸려 있었다. 수고(樹高)가 보통 10미터가 넘고 직경이 1미터 내외의 벌채목이 전기톱에 의해 잘려 나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큰 나무가 넘어 갈 때 주위에 있는 작은 나무들을 같이 안고 넘어 갔다. 나무가 평탄한 지대에 서 있을 경우, 벌채 작업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진행되는데, 산세가 험한 지역일 경우, 종종 크고 작은 사고로 이어졌다. 급 경사 지역 나무를 벌채할 경우, 종종 윈치(winch)를 이용하여 불도저의 와이어(wire)를 나무에 걸고 접근하는데, 어떤 경우 와이어가 터져 나가, 불도저가 구르는 안전사고가 일어나, 인명 피해가 났다.
나무가 넘어 가면, 제일 먼저 박피공(剝皮工)들이 달려들어, 나무 껍질을 벗겨냈다. 나무 껍질을 조금이라도 늦게 벗길 경우, 껍질 안에 서식하고 있던 벌레들이 나무 목질 부분에 파고들어 구멍(pin hole)을 내기 때문이다. 이런 원목을 갖고 제재목이나 합판을 만들었을 경우, 제품의 품질이 떨어졌다. 간혹 아파트나 주택에서 나무 기둥이나 나무 벽이 훼손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벌레들 때문인 것이다. 박피를 하기 위해 인력들이 나무에 붙을 때, 큰 나무 밑에 깔려 있던 같이 넘어 갔던 나뭇가지들이 다시 튕겨져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그 나뭇가지에 맞아 사람들이 다치는 안전 사고도 가끔 일어 났다. 껍질과 가지가 정리돠면, 나무는 트레일러에 실려 임도(林道)를 이용, 원목 저장소(log pond)로 운반되었다. 당시 한국남방개발 현장은 나무가 나오는 현장과 원목 저장소가 있는 해안까지 거리가 짧게는 수십 킬로미터에서 길게는 백 킬로가 넘는 임도로 이어졌다. 임도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경비가 투입되었고, 깊은 밀림을 뚫고 길은 만들어 졌다.
주로 벌채하는 나무는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나왕목인 머란띠(Meranti)와 철목(鐵木)인 꺼루잉(Keruing)이었다. 열대목의 특징 중 하나는 씨앗이 발아(發芽)하여 싹이 트면, 우선 수직(垂直) 성장을 시작하고, 나무 잎이 햇빛을 받기 시작하면 비대(肥大) 성장을 하였다. 그 다음 특징으로는 열대 우림(雨林) 기후에서 뿌리는 깊게 땅으로 파고 들지 않고, 얕은 상태로 지표면 가까이에 넓게 퍼지는 상태를 보이고 있다. 밀림의 상황은 높은 수고의 나무들 때문에 지표면까지 햇빛이 들어 오지 않아 어두우며, 바람이 통하지 않아 무더운 습기가 땅으로부터 올라 왔다. 땅 위에는 넝쿨 가지에 날카로은 가시가 돋아난 로탄(rotan)이라는 등나무과 식물이 넓게 분포되어 있고, 관목 숲이 덮고 있었다. 남부 칼리만탄 밀림 속에 사는 동물로는 야생 소, 곰, 멧돼지, 사슴, 뱀, 오랑우탄, 원숭이, 야생 개 등이 있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는 주둥이가 뭉툭한 악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원목선의 선적 기일을 맞추기 위해 나무는 24시간 쉬지 않고 임도를 따라 원목 저장소로 운반되었다. 선적 기일을 지키지 못할 경우, 데머리지(demurrage)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원목선 대부분은 선령(船齡)이 오래된 배들이었는데, 다른 선박들 보다, 항해할 때, 사고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았다. 그 이유는 원목을 실을 경우, 배의 무게 중심이 아래에서 위로 이동하여, 전복 위험성이 그 만큼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내가 겪은 사고 중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삼익상선(三益商船) 소속인 원목선 ‘삼동호’가 우리 현장에서 원목을 싣고, 인천항으로 항해하다가, 필리핀과 대만 사이의 해역에서 삼각파도를 맞아 침몰한 사건을 들 수 있다. 그 사고로 조리장이 실종 되었고, 나머지 선원들은 마침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었다.
야간에 나무를 실은 트레일러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속도를 높힌 채, 임도를 내려 오다가 차 불빛에 이끌려 숲에서 길 가운데로 나오는 야생동물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급 브레이크를 밟을 경우, 뒤에 실은 원목이 앞으로 쏠리면서 운전석 뒤를 치는 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 잘 아는 트레일러 운전수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차 앞에 있는 야생동물을 그대로 치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한국남방개발 최계월(崔桂月) 사장은 현장에서의 동물 살생을 엄격히 금지했으나, 트레일러 운전사들은 그들이 살기 위해 야생 동물을 타고 넘었다. 가끔 현장 사업소까지 들어 갈 경우,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야생 소, 멧돼지, 사슴, 뱀 등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한국남방개발의 남부 칼리만탄 바투리친(Batu Licin) 현장은 생산본부가 있는 베이스 캠프(base camp)와 나무가 나오는 사업소로 구분 되어 운영되었다. ‘미끄러운 돌’이라는 뜻의 바투리친에는 땅속에 석탄이 많이 매장 되어 있었다. 원목개발과 함께 석탄도 개발하자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열량이 낮은 탄(炭)이라 개발 가치가 없어 진행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그 후,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 때, 저 칼로리 석탄도 각광을 받게 되어, 바투리친 석탄도 불티나게 채광, 수출 되고 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게 되었다. 현지 화전민(火田民)들이 놓은 불이나 번개 때문에 밀림에 불이 나, 그 불이 땅속 석탄층에 옮겨 붙어, 장기간 타고 있다는 소식을 현장 사람들로부터 들은 경우도 있다.
베이스 캠프나 사업소에서는 매일 아침, 인도네시아인들 인력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조회(朝會)를 했다. 태극기와 인도네시아 국기에 대한 의례와 애국가 제창이 진행 되고, 그 다음으로는 현장 소장이나 사업소 소장이 연단에 올라 그 날의 작업 지시를 인도네시아어, 한국어, 그리고 몸짓을 섞어 가면서 했다. 신통하게도 인도네시아인들은 그 내용을 잘 알아 들었다. 한국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유격대 조교들의 빨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손을 허리춤에 얹고 목청 돋구며 하는 작업지시는 보기에는 우스웠으나, 듣는 인도네시아인들은 매우 진지했다.
현장에는 한국인 직원들이 약 삼십여 명 있었고 주로 중장비 기술자 그리고 임업직(林業職) 인력들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업무와 여가를 보낼 수 있는 시설이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일과 후에는 주로 화투나 트럼프를 이용한 노름이 성행했다. 어떤 한국인 직원은 노름을 할 때마다 매번 돈을 잃어, 몇 년씩이나 본국 휴가를 가지 못해, 결국 회사에서 그 부인을 현장 식당 조리사로 취업 시켜 보냈을 정도로 노름이 유행했다. 대부분의 한국 인력들은 가족 동반을 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근무를 했다. 세탁이나 청소 등 일상 생활의 도움을 받기 위해 현지 인도네시아 여자들 도움을 받았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임시 동거(同居)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을 회사는 암묵적으로 묵인해 주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외국 기업의 현장을 찾아 다니면서 노력 봉사(?)를 해 주는 인도네시아 여자들의 집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다 보니, 한국 인력과 인도네시아 여자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기 시작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고 한국 인력이 계약 기간이 끝나 본국 귀국이 이루어질 경우, 한국 남자는 야반 도주 하다시피 도망쳤고, 여자와 자식들은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회사가 돌보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특이한 것은 한국 남자와 인도네시아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현지 아이들 보다 생긴 것도 잘 생겼고 똑똑했다는 것이다. 그 중, 1 세대에 속하는 아이들이 이제 40대 중반을 바라보게 되었다. 전쟁이 남긴 ‘라이 따이한’이 베트남에 있다면, 원목 개발에 따른 혼혈 2세의 문제가 칼리만탄에 남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남방개발 반자르마신 출장소에서 당시 29세)
내가 근무했던 반자르마신은 지금도 그렇지만 이슬람 색채가 다른 인도네시아 지역보다 더 강하게 남아 있는 지역이었다. 당시 반자르마신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나 혼자였고, 가끔 원목 검수를 하러 들어 오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따라서 하루 중, 한국어를 쓰는 경우는 생산본부와 무전(Single Side Band : SSB)을 할 때나 자카르타 지사, 서울 본사와 전화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업무 후, 방충망에 붙어 있는 도마뱀과 이야기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학부 때 포기했던 전공인 인도네시아어가 그 때 만큼 절실했을 때가 없었다. 회사에서는 인도네시아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나를 받아 준 것인데 인사말 정도만 겨우하는 내 실력으로는 회사 업무를 처리할 수 없었다. 피나는(?) 독학(獨學)이 시작되었다. 우선 유치원에 다니는 인도네시아 아이들을 위해 매주 나오는 만화책, 보보(BoBo)를 구독, 거기에 나오는 아이들이 쓰는 간단한 인도네시아어를 모조리 암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업무 후, 거의 매일처럼 시내에 있는 극장 (극장 이름이 리아<Ria>로 기억)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주로 인도네시아 영화를 상영했던 곳인데, 표 파는 사람이 내 지정석을 준비해 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생활을 1년 넘게 했다. 차츰 귀가 열리기 시작 했고,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내 책상 위에 올라오는 결재 서류를 볼 때, 까만 것은 글자이고 흰색은 종이라는 느낌에서 차츰, 서류 내용을 사전의 도움 없이 파악하게 되었다.
반자르마신에서의 생활 중,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한국인 커플 최초로 결혼식을 자카르타에서 한 후, 신혼 살림을 반자르마신에서 차렸는데, 집 사람이 적응을 하지 못하고 귀국한 것을 들 수 있다. 기후, 음식, 언어 등 모든 것에 적응하지 못했는데, 특히 거의 매일 밤, 집 마루 아래, 빗물과 하수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 쥐들이 뛰어드는 소리에 진저리를 쳤다. 결국 집 사람은 귀국하게 되고, 내 홀아비 생활은 계속 되었다.
이외에도 반자르마신에서의 추억 중, 주로 사건, 사고에 얽힌 것들이 많다. 현장에서 차량 전복 사고가 발생하여 한국인 직원 몇 사람이 크게 다치는 일 이 있었다. 그 중 상태가 중한 직원 두명이 반자르마신으로 긴급 후송 나왔었다. 의식이 없었던 중상자, 한 사람을 급하게 자카르타로 보내야 했었는데 그날 반자르마신에서 자카르타로 나가는 비행기는 더 이상 없는 상태였다. 반자르마신 공항 책임자에게 통 사정을 해서, 동부 칼리만탄 발릭빠판(Balikpapan)에서 자카르타로 비행 중이었던 여객기를 반자르마신 공항에 거의 강제 착륙 시키다시피해서 승객 3명을 내리게 한 후, 병상 침대를 부착해서 후송 시킨 일이 있었다.
자카르타로 후송된 직원은 몇 개월 후에 완쾌 되어,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반자르마신에 있는 필리핀 수녀회(修女會)에서 운영하던 종합병원인 수아까 인산(Suaka Insan)에 입원한 다른 한국인 직원은 입원, 하룻만에 사망했다. 장파열이었는데 응급 처치가 늦었는지, 운명하였다. 내 손을 꼭 잡고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는데, 이역 만리에서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유해를 한국으로 봉안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반자르마신 옆에 흐르는 바리또 강가에 임시로 마련한 화장장(火葬場)에서 화장을 했다. 그 옆을 밤새 내가 지켰고, 유골을 수습 했다.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김영수 실종 사건이다. 반자르마신 출장소와 현장간 업무 연락은 정해진 시간에 무전으로 했다. 특히 한국인 직원들 이동 상황 보고는 중요시 했다. 그 날도 현장 직원들 급여 지급을 위한 현금을 전달하고, 현장에서 간이 비행장이 있는 ‘바다 섬’으로 새벽에 스피드 보트를 타고 출발했다. 배에는 보트를 운전하는 인도네시아인 직원과 나만 승선했다.
순조롭게 출발했던 스피드 보트가 ‘바다 섬’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엔진에 문제가 생겼다. 연료에 물이 섞인 것이다. 엔진 시동을 걸고, 잠시 움직이다가 다시 멈추기를 몇 번하다가 결국 엔진은 꺼졌다. 그때부터 현장이 있는 바투리친 지역과 ‘바다 섬’ 사이에 있는 해협에서 스피드 보트가 표류하기 시작했다. 배는 점차 자바(Java)해 방향으로 물결 따라 흘러 갔다. 정말 망망대해에 작은 보트를 타고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은 흘렀고, 태양은 점점 머리 위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배에는 햇볕을 피할 그늘이 없었다. 같은 시간, 반자르마신 출장소 인도네시아 운전수는 반자르마신 공항에서 나를 마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바다 섬’에서 온 비행기 승객 중에 나는 없었다. 현장에서도 나를 태우고 나간 스피드 보트가 복귀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반자르마신 출장소와 현장, 서울 본사, 자카르타 지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김영수가 실종된 것이다. 현장에서 가동할 수 있는 모든 배들이 수색을 나섰고, 현지 경찰들도 구조선을 바다에 띄웠다. 자바 해에서 표류하길 7, 8시간 정도, 시간은 이미 늦은 오후가 되었다. 스피드 보트 운전수와 나는 갈증과 햇볕 화상(火傷) 때문에 기진한 채, 배 위에 주꾸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끌로독(kelodok. 작은 동력선)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천신만고 끝에 그 끌로독에 의해 우리는 구조 되었다.
그리고 기억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사건으로는 헬리콥터 비상 착륙을 들 수 있겠다. 최계월 사장께서 현장을 방문할 경우, 임대한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을 하늘에서 둘러보곤 했다. 이를 위해 사장 도착 전, 현장에는 반자르마신에서 공수한 항공유(航空油)가 준비되어야만 했다. 그 날도 사장께서 현장 방문이 계획되어 있어, 항공유를 헬리콥터에 싣고 반자르마신 공항을 이륙,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반자르마신으로 돌아 나오기 위해 이륙 준비를 하고 있는데, 현장 직원들이 반자르마신 쪽 하늘을 보더니 폭우가 올 것 같으니 출발을 지연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조정사는 문제 없다고 자신을 했고, 결국 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반자르마신으로 출발했다.
반자르마신과 현장 사이에는 동부 칼리만탄에서 남부 칼리만탄으로 이어지는 높은 산맥이 가로 질러 있는데, 경비행기를 포함한 고정익(固定翼) 비행기는 산맥 위로 비행했고, 헬리콥터는 계곡을 타고 비행을 했다. 헬리콥터가 계곡에 진입하기 시작하자 먹구름이 몰려와 순식간에 시야를 가렸다. 설상가상으로 번개가 쳤다. 난생 처음 번개를 가까이에서 보았는데, 하얀 섬광(閃光) 기둥이 땅으로 순간 내려 꽂혔다.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 때 알게된 사실은 고정익 비행기가 난기류(亂氣流)에 들어가면 상하(上下)로 요동을 치는데, 헬리콥터는 좌우(左右)로 흔들린다는 것이다. 심한 요동을 치며 비행은 조심스럽게 진행 되었다. 결국 반자르마신 공항에 내리질 못하고, 그 인근, 반자르바루(Banjar Baru)에 있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합판공장 마당에 비상착륙을 했다. 그때도 김영수가 실종 되었다고 회사가 혼란에 잠시 빠졌었다.
(반자르마신 공항에서. 좌로부터 이명화 소장, 서기석 본부장, 최계월 사장, 한 사람 건너 김세영 본부장, 한 사람 건너 김영수)
이외에도 반자르마신 생활 2년여 동안 이러저런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 현장에서 강제 퇴직된 현지인이 반자르마신 출장소에 와서 내 목에 칼을 드리대고 돈을 요구한 일이라든지, 현장에 있었던 화장실 안에서 전갈에 물릴 뻔한 순간 등, 여러 일들이 아릿한 기억으로 아직 남아 있다.
무엇 보다도 반자르마신에서 생활하면서 말라리아에 두 번 걸렸던 일, 그리고 한번 걸렸던 뎅기열(Dengue fever)은 아직도 아픈 기억이다. 처음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모든 직원들이 퇴근한 숙소에서 혼자 견디다가 이러다간 죽을 것 같아, 인력거 (베차-beca라고 함)를 불러 수아까 인산 병원 문턱을 기다시피 넘었었다. 그 날 ‘하늘이 노랗다’라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 리고 인도네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매일 찾는 극장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소매치기와 친해져서, 낮에 일(?)이 없을 때에 그 녀석이 가끔 사무실로 찾아와 점심을 같이 먹은 것은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때 당부한 말이 ‘한국 사람 지갑은 노리지 말고 일본 사람을 노려라’였다. 물론 친절하게 한국사람과 일본사람 구분하는 방법을 그 소매치기에 알려 주었다.
한국남방개발, 반자르마신 출장소에서 근무를 끝내고 자카르타 지사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 돌이켜 보면, 3년 넘는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남부 칼리만탄 반자르마신에서의 생활은 내게 있어 큰 자산과 경험이 되었다. 무더위와 외로움 그리고 질병과 싸우면서 견디어낸 기간이었지만, 한국의 해외 원목 개발에 작은 일조(一助)를 했다는 자긍심은 지금도 남아 있다.
끝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월남이나 중동지역처럼 우리에게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열대 원목 개발에 참여한 산업 역군들의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내용을 한국 경제 발전사에 당당히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반자르(Banjar) 족(族)의 속담에 따르면, “바리또 강물을 마신 자는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바리또 강가를 꼭 찾는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도 가끔 꿈 속에서 반자르마신 인근의 지역 경치가 나타나곤 한다. 그 지역은 ‘꽃 섬’ (Pulau Kembang), 쁠레이하리(Pleihari), 타끼송(Takisong), 반자르바루, 리암까난(Riam Kanan) 그리고 킨탑(Kintap) 등이고, 반자르마신 공항 근처, 삼거리에 서 있던 미원(味元) 간판이 그것이다. 끝.
첫댓글 와~~ 무지 재밌게 읽었습니다.
지적 실력보다 신체튼튼 인재를 뽑은 중역들의 혜안(?)이 ~~!
2년이란 기간에 참 많은 일을 경험하셨네요. 또 그걸 빼놓지 않고 생생하게 엮어 기술해 주셔서 술술 소설책 읽듯 읽었습니다.
반자르마신,
바리또 강,
기억에 남는 지명과 강이름이네요
엉성한 글을 재미 있게 읽으셨다니 오히려 감사합니다.
사실 세상에 많은 직업이 있지만 남자 녀석이라면 열대 밀림에 도전하는 직종도 한번 해 볼만한 대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확실한 것은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칼리만탄 오지에서 피땀을 흘렸다는 사실입니다.
반자르마신, 바다의 짠물이 넘친다는 의미의 도시인데 제가 인도네시아에 처음으로 정주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인연은 다음 달에 번역 출간 예정인 인도네시아 '위안부'의 비참함을 그린 책의 13살 주인공이 끌려와 있던 위안소가 반자르마신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제가 반자르마신에 있는 동안 과거 위안소인줄 모르고 수시로 그 앞을 지나 다녔습니다.
윤미향? 정말 나쁜 여자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접근할 수록, 그 여자가 얼마나 야비한 인물인줄 알게 되었고 국회의원 뱃지가 한심스러울 따름입니다.
바리토? 저 칼리만탄 깊은 곳에서 발원하여 밀림을 蛇行을 하다가 반자르마신을 관통하여 Java海로 들어 가는 긴 강입니다.
어쨌거나, 칼리만탄 이야기보다 더 특이한 저의 군대생활 이야기는 다음에 말씀 드릴 기회가 있기를 희망합니다. 물론 여성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군대에서 족구)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