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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사업 중단의 결의
자유당 시절. 정치 사회 모든 분야는 부정과 부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군대가 그 영향을 받지 않는 성역도 아니었다. 당시 군은 각급 부대가 이른바 후생사업이라고 해서 상 행위를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 후생사업이란 한마디로 각 부대에서 군용트럭을 후방으로 보내 돈벌이하는 것을 말한다. 군용차량을 도색하여 가짜 번호판으로 위장한 뒤 운송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차량뿐만 아니었다. 심지어 일부 부대는 병력을 산판에 보내 벌목작업 등으로 벌어들인 인건비를 지휘관이 착복하기도 했다. 거기에서 나온 돈으로 흥청망청 유흥비로 쓰기도 하지만 상부에 상납하여 진급을 돈으로 사는 경우까지 있었다.
당시 군단은 물론 거의 모든 사단들이 사령부 안에 나이트클럽 영업장을 차려 놓고 여자와 술로 향락을 즐겼다. 거의 모든 장군이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일부 강직한 장군을 제외하고는 그런 부정부패가 당연한 것으로 알고 그 행위를 잘못으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강직한 장군은 진급에서 누락되거나 도태되기 마련이고 축재한 돈으로 요령껏 상납하는 장군은 승진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부정으로 모은 돈으로 상급자뿐만 아니라 국회나 수사기관 그리고 언론사에 입막음을 위해 흘러 들어가고 부정의 연결고리가 얽히고 설켜 이를 단절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였다.
"군대란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오, 그런데 후생사업으로 인해 전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장비가 모두 폐차가 되어가는 건 분명히 문제가 아닐 수 없소. 이러다가 다시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어찌 되겠소. 만일 전쟁이 나 장비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면 그건 내 책임이오. 그러니 우리 어렵지만 후생사업을 중지합시다."
정말 당시로서는 대단한 결심이었다. 야전군의 총사령관 송요찬 장군의 고뇌에 찬 목소리였다. 또한 일부 강직한 장군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어렵습니다. 그간 부대 운영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는데 후생사업을 그만둔다면 어떻게 부대를 운영합니까. 게다가 권력기관이나 육군본부,국방부 등과 상당한 마찰도 부를 우려가 걱정됩니다."
이 대화는 실제 1군사령부에서 나온 후생사업에 대한 고뇌에 찬 후생사업 관련 회의장에서의 군사령관과 참모의 대화 내용이었다. 바로 우리 전투력의 지휘탑인 1군사령관 송요찬 장군의 걱정하는 목소리고 또 다른 장군이 어렵다는 반론이었다. 이때 채명신은 장군이 되어 1군 작전참모로 있었다. 그자리에서 박정희 장군과 채명신 장군이 군사령관의 후생사업 중단의 편에 섰다.
"후생사업을 중단하면 부대운영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6.25전쟁에서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그 당시를 생각한다면 후생사업을 중지한다고 해서 우리가 굶어죽지 않습니다. 어려운 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조국을 보위할 수 없습니다. 후생사업은 중단해야 합니다."
채명신 장군의 이 말에 참모장 박정희 장군이 동조 발언을 했다.
"작전참모 채 장군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가 더 비참한 나락에 빠지기 전에 후생사업은 중단해야 합니다."
결국 갑론을박 끝에 1군사령관 송요찬 장군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1군사령부의 장군들은 후생사업을 중단할 것을 결의했다. 송요찬 1군사령관은 다음날 군단장과 사단장을 주요 지휘관 회의에 소집했다.
"앞으로 30일 이내에 후생사업에 투입된 모든 차량을 원대 복귀시켜 정비를 마치고 지휘검열 받을 준비를 하라."
1군사령부 회의장에 쩡쩡 울리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거구로 풍채가 당당한 송요찬의 이 명령은 누구하나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짜 사건은 이때부터 터졌다. 후생사업중지로 이권에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된 측으로부터 송 장군에 대한 모략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참모장 박정희와 작전참모 채명신을 비롯한 송 장군의 막료들은 그 바람을 막는데 힘을 모았다.
송 장군은 후생사업 중단뿐만 아니라 군 내무반의 모포도 조사했다. 당시 병사 한 명당 모포는 장부상 6매씩 지급된 것으로 되어있었는데 실제는 한 명 당 한 장꼴이었다.이를 조사해서 밝혀내고 모포수를 현실화 시켜버렸다. 그러니 모포 수십만장이 사라지게 되었다. 파문은 의외로 컸다. 송 장군은 구설수에 오른데다 다시 구설수가 덧씌워졌다. 그러나 그 세찬 바람을 송 장군의 막료인 박정희 소장과 채명신 준장에 의해 막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부정 부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 군이 다시 희망을 찾는 길로 향하게 되었다.
◇3.15 부정선거의 여파
채명신은 1959년 2군 관할 38사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간 1군사령부에서 의기 투합에 열심히 일했던 송요찬 장군, 박정희 장군 등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러웠던 것은 소속만 2군으로 다를 뿐 38사단은 1군사령부가 있는 같은 원주에 있었기에 가족이 이사하지 않아도 된 점이었다. 그러나 이곳 38사단장 시절 그 악명 높았던 3.15 부정선거를 맞았다. 채명신은 군대가 정치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다. 당시에는 각 지휘관들이 앞장서서 부정 선거를 치르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면 각 정당인들이 사단에 들어와서 선거 연설을 할 때에도 채명신은 야당 선거인들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물론 상급 사령부에서는 야당 선거인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채명신은 이를 거부했다.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신망을 받아야 하는데 어떤 정당에 편파적인 지지를 한다면 부하 통솔에 지장이 있다" 며 반대했다.
채명신 사단장이 워낙 강하게 버티자 육군본부에서까지 압력이 들어왔다. 그래도 채명신은 굴복하지 않았다. 선거일이 다가오자 압력은 더욱 심해졌다. 이젠 사단에 파견돼 있는 CIC요원들이 불안해 했다. 자칫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소신껏 알아서 자유롭게 찍어라."
그 말이 선거에 앞선 채명신의 지시였다. 그리고 투표가 끝나고 투표함을 가져가며 온갖 압력이 가해졌지만 선거가 끝났다. 그런데 분명히 채명신의 부대만큼은 공정했다고 믿었는데 나중에 부대에 파견돼 있던 CIC대장이 채명신에게 실토했다.
"사실은 저희들이 불안해서 바꿔치기 하려고 투표함을 몰래 열어봤는데 놀랍게도 자유당 지지 표가 80% 가까이 나와 그냥 그대로 가져갔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채명신은 크게 노했다.
"뭐야!. 그럼 투표함을 열어봤단 말이야.이 죽일놈의 새끼들."하고 채명신은 소리쳤지만 이미 때는 지나간 뒤였다.
채명신의 부대에서 여당 지지 표가 많이 나온 것은, 만일 야당 지지 표가 많이 나오면 사단장이 문책 받을 것이 뻔할 것이기 때문에 장병들이 사단장 생각해서 찍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그러나 CIC에서 바꿔 치기 해놓고 딴소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하건 투표함을 열어봤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으므로 채명신은 대노했던 것이다.
채명신은 만일 부하들이 사단장이 염려되어서 80%의 지지율을 보였다면 장병들에게는 감사할 일이지만 투표함이나 투표용지를 바꿔 치기 하는 등의 불법이 자행되는 마당에 그 선거 결과를 국민들이 수용할까 하는 걱정을 했다.
선거가 끝나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회가 극도로 혼탁해 가고 부정선거를 항의하는 학생,교수,언론인, 지식인 할 것 없이 연일 격렬한 시위가 전국 각 도시에서 벌어졌다.
이 일이 있은 뒤 채명신은 1군 예하의 5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전방 사단장으로 배속 받은 것이었다.
3.15 부정선거 이후 사회는 극도의 혼란과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특히 사이비 기자들의 횡포는 말도 못할 정도였다. 당시 5사단 주둔지인 연천 지역에만 신문 잡지사 등의 기자라는 자들이 40여 명이나 있었다. 아무튼 얼마나 기자들이 많았던지 수첩과 연필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기자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정말 귀찮아 죽겠습니다. 입막음하려면 점심도 사줘야지요,용돈도 줘야죠"
예하부대 지휘관들은 회의 때마다 투덜댔다. 물론 채명신은 선거를 치른 다음에 부임했기 때문에 선거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는 전군에 걸쳐 자행됐기 때문에 만일 예하부대장이 기자에게 꼬리가 잡히면 전임 5사단장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그래서 전임 사단장은 안절부절 날마다 전화를 걸어 채명신에게 당부했고, 채명신은 걱정말라고 타이르고 있었다.
사이비 기자들의 괴롭힘이 극에 달했다고 본 채명신은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을 모아놓고 선언했다.
"앞으로 우리 5사단에서 어떤 부대던지 부정선거를 했다는 보도가 있으면 전적으로 사단장이 책임지고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대신 만일 그 사이비 기자들에게 금품이나 식사 등을 제공했다는 말이 내 귀에 들리면 모조리 처벌하겠다."
그러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상황이 반전돼 사이비 기자들이 협박하면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기자들에게 빨리 신문에 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공갈협박이 통하지 않자 결국 어느날 기자단 대표 서너 명이 사단장을 찾아와 굴복했다.
"솔직히 저희들은 월급받는 기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저 지사에서 기자증을 주어서 그런 짓을 했는데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대신 사단에 서 저희들에게도 어떤 대책을 강구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채명신은 코웃음치며 기자들을 돌려 보냈다.
사이비 기자들의 공갈협박을 부른 3.15 부정선거는 결국 한 달 뒤 4.19를 불렀다.
◇사회 불안과 '군 인력 감축 안'
조직적으로 강행된 3.15 부정선거는 마침내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4월 19일. 각계 각층을 막론하고 대다수 국민들이 일어섰다.
1군사령관 송요찬 장군은 사태수습의 중책을 띠고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송요찬 장군은 슬기롭게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4.19 이후에도 사회혼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이기붕 일가가 자살했으며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권이 사태수습과 함께 새로운 장면 정권을 탄생시켰지만 혼란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군은 이런 혼란기에 자칫 흐트러지는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더 강력한 경계태세와 군기확립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4.19 이후의 현상은 방종과 무질서로 나타났다. 갑자기 자유를 만끽하게 된 민중은 제멋대로 떠들고 행동하면서 욕구 분출을 위한 탈선이 사회 곳곳에 퍼져가고 있었다. 물가는 폭등했고 사이비 기자들의 횡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채명신의 5사단에서도 이런 바람은 예외없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당시 사단 장병의 부식은 중앙조달이 아닌 사단별로 구입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하루는 사단에서 입찰하는 소에, 업자들이 강제로 물을 먹여 판다는 소문을 들었다. 채명신은 크게 화를 냈다. 당시의 군 예산 실정으로는 한 달에 2.3회 정도밖에 쇠고기를 먹을 수 없었는데 이것을 속이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채명신은 그 해결책을 생각 끝에 일부러 입찰을 최대한 늦추었다. 그 전엔 오전 10시 경에 입찰에 들어갔다. 그러나 5사단에서는 10시에 시작하는 입찰을 미루고 입찰에 나온 소들을 모두 나무에 붙들어 매어 놓았다가 오후 늦게 입찰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소들은 그 사이 먹은 물을 다 배출해 버려 실제 입찰에 들어갈 때는 무개가 상당히 줄어든 것이었다. 그래서 수입이 줄게 된 업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뉘우칠 줄 몰랐다.
"앞으로 5사단에는 쇠고기를 납품하지 않겠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그래 봤자 업자들만 손해일 뿐 끝까지 사단이 굴복하지 않을 것을 업자들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 잘됐다. 그럼 우리들은 쇠고기 대신 딴걸 먹겠다."
사단이 강력하게 나오자 앙심을 품은 업자들이 엉뚱한 제보를 해 조사에 시달리게 했다. 사단장이 바른 길을 가기 위해 구태를 벗고 밀고 나갈수록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조사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이게 진정 4.19로 얻은 자유의 참모습이란 말인가. 3.15 부정 선거 이전과 무엇이 달라진 게 있는가."
채명신은 조국의 앞날에 대해 근심과 불안을 느끼기 사작했다.
그해 여름 5사단은 자체적으로 채소 등을 자급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의 부식비가 형편없이 적어 부식비로 조달된 것만으로는 영양실조 걸리기에 십상이었다. 그래서 부대 근처에 남아도는 땅에 밭을 만들어 신체가 허약안 병사를 그곳에 보내어 채소밭을 가꾸게 했다. 신체 허약한 농장 관리병은 휴양도 겸하고 있었으니 반응이 좋았다. 그런데 이 일이 또 문제가 됐다. 누가 투서를 한 것이었다.
"그거 채소 재배해 장사하는 거 아냐?. 가서 당장 조사해 봐!."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은 5사단에 대해 특별조사를 명했다. 군사령부에서는 1군 감찰참모가 나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감찰참모는 채명신과 육사5기 동기생인 박영석 대령이었다.
"그런데 이거 정말 잘하는 건데.., 허약한 장병들한테 휴양을 보내서 맡기니 전력에 손실도 없고 아주 좋은 착상이야. 정말 잘 하는 것 같아요"
감찰참모는 조사를 마치고 오히려 사단장을 칭찬하고 돌아 갔다.
원리원칙을 준수하며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기로 이름난 감찰참모는 군사령부로 돌아가 그대로 정확하게 군사령관에게 보고 하였다.
"아니 뭐라고?. 너 말이야 5사단장하고 동기생이라고 봐주려는 거야?."
"아닙니다. 저는 제가 보고 확인한 내용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말 다른 부대도 본받아야 합니다."
당시 군의 기풍도 사회를 닮아 불신풍조가 극에 달해 있었다. 때문에 채명신은 장면 정부가 너무 서둘러 '자유와 민주' 를 실행하는게 아닌가 하는 회의를 하게 되었다.
당시 사회는 혼란의 극치였다. 상이군인이 떼지어 국회를 점령해도 장면 정부는 손조차 대지를 못하고 있었고 대학가는 다시 좌익이 날뛰기 시작했다.
육군에서도 변동이 빈번했다. 4.19가 수습된 후 송요찬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났고 최경록 장군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 역시 얼마 안돼 미군과의 불화로 경질되고 장도영 장군이 뒤를 잇게 되었다. 그러니 다시 군 인사가 술렁거렸다.
그 무렵 가뜩이나 사회혼란으로 불안한 심경에 불을 지른 건 장면 정부의 '군 인원 감축안' 이었다. 휴전이 되었으니 군도 양보다 질의 시대로 가야 한다는 명제 아래 추진되고 있는 그 감축안은 불과 6.7년 전만 해도 전쟁을 직접 겪었던 군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북한에서는 전투력 증강에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데도 군축을 하겠다니 채명신은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분노의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첫댓글 망한 중국 장개석 군대의 부정이 천하다 아는것으로 결국 부패로 모택동이에게 나라를 내주웠지만 우리나라도 호형호제하는 부패 공화국이였다 군 관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상이 썩을대로썩어 5.16 구태타가 일어나게된 원인중에 하나엿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대로 사회가 이루워진다면 자채 분게로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지않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생각됨니다. 글로보면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지 않을수 없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