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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18권
9. 팔법품(八法品) ①
그때 사리자가 또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구수(具壽)들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8법(法)에 대하여 스스로 잘 통달하시고 등각(等覺)을 나타내신 뒤에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널리 설하시고 열어 보이셨다.
우리들은 이제 마땅히 한데 합쳐 결집(結集)하여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에 어기거나 다툼이 있지 않아야 하며,
장차 범행(梵行)에 따르는 법(法)과 율(律)로 하여금 오래도록 머무르게 해서 한량없는 유정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며,
세간의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어 훌륭한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해야 한다.”
8법이란 어떤 것인가?
올타남(嗢柁南)으로 말하리라.
도지(道支)와 삭취(數趣)와 보시[施]와
해태(懈怠)와 정진(精進)과 복(福)과
대중[衆]과 세법(世法)과 해탈(解脫)과
승처(勝處)이니, 각각 여덟 가지씩이다.
8도지(道支)ㆍ8보특가라(補特伽羅)ㆍ8종시(種施)ㆍ8해태사(懈怠事)ㆍ8정진사(精進事)ㆍ8복생(福生)ㆍ8종중(種衆)ㆍ8세법(世法)ㆍ8해탈(解脫)ㆍ8승처(勝處)가 있다.
[8도지]
[문] 8도지(道支)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바른 소견[正見]이요, 둘째는 바른 생각[正思惟]이며, 셋째는 바른 말[正語]이요, 넷째는 바른 행위[正業]이며, 다섯째는 바른 생활[正命]이요, 여섯째는 바른 노력[正勤]이며, 일곱째는 바른 기억[正念]이요, 여덟째는 바른 선정[正定]이다.
이 8도지는 앞에서 자세히 해설한 것과 같다.
[8보특가라]
[문] 8보특가라(補特伽羅)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증예류과향(證預流果向:須陀洹向)이요, 둘째는 증예류과(證豫流果:須陀洹)며,
셋째는 증일래과향(證一來果向:斯陀含向)이요, 넷째는 증일래과(證一來果:斯陀含)요,
다섯째는 증불환과향(證不還果向:阿那含向)이요, 여섯째는 증불환과(證不還果:阿那含)이며,
일곱째는 증아라한과향(證阿羅漢果向:阿羅漢向)이요, 여덟째는 증아라한과(證阿羅漢果:阿羅漢)이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보특가라는 『법온족론(法蘊足論)』에서 자세히 해설한 것과 같다.
[8보시]
[문] 8종시(種施)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따라와 있는 이에게 하는 보시[隨至施]요,
둘째는 두렵고 무서워서 하는 보시[怖畏施]요,
셋째는 은혜를 갚기 위하여 하는 보시[報恩施]요,
넷째는 보답을 받기 위하여 하는 보시[求報施]이며,
다섯째는 전에 하던 일을 답습하기 위하여 하는 보시[習先施]요,
여섯째는 이름이 나기 위하여 하는 보시[要名施]이며,
일곱째는 천상에 나기를 바라면서 하는 보시[希天施]요,
여덟째는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을 돕고 유가(瑜伽)를 돕고 통혜(通慧)와 보리(菩提)와 열반(涅槃)과 으뜸가는 이치[上義]를 얻기 위하여 하는 보시이다.
[문] 어떤 것이 따라와 있는 이에게 하는 보시[隨至施]인가?
[답] 어떤 한 무리가 가까이 이웃에 있는 이에게 보시하고 친족으로 매우 가까운 이에게 보시하며, 현재 곁에 와 있는 이에게 보시하는 것이니,
그는 생각하기를,
‘어떻게 구걸하는 이가 현재 여기에 와 있는데 보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이것을 따라와 있는 이에게 하는 보시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두렵고 무서워서 하는 보시[怖畏施]인가?
[답] 어떤 한 무리가 두려워함이 있기 때문에 보시하고, 무서워함이 있기 때문에 보시하며, 두려움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보시하는 것이니,
그는 생각하기를,
‘만일 보시하지 않으면 이러이러한 쇠손(衰損)이 있게 되리라’라고 한다.
이것을 두렵고 무서워서 하는 보시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은혜를 갚기 위하여 하는 보시[報恩施]인가?
[답] 어떤 한 무리가 생각하기를,
‘저 분은 일찍이 나에게 이러한 물건을 보시하였으니 나도 마땅히 그에게 이러이러한 물건을 보시해야겠다. 어찌 그의 은혜를 받고서 갚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한다.
이것을 은혜를 갚기 위하여 하는 보시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보답을 받기 위하여 하는 보시[求報施]인가?
[답] 어떤 한 무리가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이러이러한 물건을 그에게 보시하면 그도 역시 나에게 이러이러한 물건을 보시할 것이다’라고 한다.
다른 이가 보답할 것을 바라면서 보시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보답을 받기 위하여 하는 보시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전에 하던 일을 답습하기 위하여 하는 보시[習先施]인가?
[답] 어떤 한 무리가 생각하기를,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언제나 보시를 하셨으며, 우리 집은 오랜 세월 동안 보시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 믿음이 있는 집이요 보시하는 집에 태어났다. 우리 집은 본래부터 늘 보시하기를 좋아했으므로 내가 만일 보시하지 않으면 곧 종족(種族)의 전통을 끊는 것이다. 종족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하여 보시를 한다’라고 한다.
이것을 전에 하던 일을 답습하기 위하여 하는 보시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이름이 나기 위하여 하는 보시[要名施]인가?
[답] 어떤 한 무리가 광대하고 좋은 명예와 칭송과 아름다운 이름을 얻기 위하여 여러 지방에 두루 보시하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이 나기 위하여 하는 보시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천상에 나기를 바라서 하는 보시[希天施]인가?
[답] 어떤 한 무리가 천상에 태어나려는 뛰어난 이숙과(異熟果)를 바라고 구하면서 보시하는 것이니,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목숨을 마치고는 천상에 태어나야 한다.
지금 하는 보시로 말미암아 천상의 묘한 쾌락을 받으리라’라고 한다.
이것을 천상에 나기를 바라면서 하는 보시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마음을 장엄(莊嚴)하기 위하고 마음을 돕기[資助] 위하며 유가(瑜伽)를 돕기 위하고 통혜(通慧)와 보리(菩提)와 열반(涅槃)과 으뜸가는 이치[上義]를 얻기 위하여 하는 보시인가?
[답] 어떤 한 무리가 생각하기를,
‘나의 마음은 오랜 세월 동안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에 뒤섞여 물들어 있다.
마음이 뒤섞여 물들었기 때문에 유정은 뒤섞여 물들어 있으며,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유정은 맑고 깨끗한 것이다.
만일 보시를 하면 곧 기꺼움이 일어나고 기꺼움 때문에 기쁨이 생기며,
마음이 기뻐지기 때문에 몸이 가뿐해지고 몸이 가뿐해지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사실대로 알고 보며,
사실대로 알고 보기 때문에 싫증을 내고 싫증을 내기 때문에 여읠 수 있으며,
여의기 때문에 해탈을 얻고 해탈하기 때문에 열반을 증득한다’라고 하나니,
이와 같은 보시는 점차로 모든 뛰어나고 묘한 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차츰차츰 보리와 열반과 미묘한 으뜸가는 이치를 증득하게 된다.
세존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뭇 상호(相好)가 원만한 것은
간탐(慳貪)을 버리고 여읨에서이니
보시가 질박 정직[質直]하고 때에 응하면
반드시 큰 과보를 얻게 된다.
지혜로운 이가 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는
그 보시는 공양할 만하고 사랑할 만하나니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드디어 기꺼움[欣]을 증득하게 된다.
곧 이 기꺼운 마음으로부터
다시 뛰어난 기쁨[喜]이 일어나며
이 마음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또 몸이 가뿐해진다.
이 몸의 가뿐함으로부터
지혜로운 이의 마음은 즐거움[樂]을 느끼며
마음이 즐거움을 느낌으로 말미암아
선정의 마음[定心]으로 한 경계[一境]가 된다.
이와 같은 뛰어난 선정에 의하여
마음은 청정하고 흐림이 없으며
조순(調順)하며 감당해 냄이 있어
사실대로 지견(知見)을 일으킨다.
진실한 지견으로 말미암아
곧 몸에 대하여 싫증을 내며
이미 몸에 대해 싫증을 내므로
지혜로운 이는 바르게 여의게 된다.
능히 멀리 여의기 때문에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해탈하나니
범행(梵行)은 섰고 생(生)이 다한 줄
지혜로운 이는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큰 이익은
보시 때문인 줄 알아야 하나니
만일 이를 반연하여 수행하게 되면
반드시 상락(常樂)을 증득하리라.
[8해태]
[문] 8해태사(懈怠事)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구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한 무리가 성읍(城邑)에 의지하여 머무르거나 혹은 마을에 머물러서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성읍 등에 들어가 돌아다니면서 걸식을 할 때에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맛있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많이 얻게 하소서’라고 한다.
그러나 만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곧 생각하기를, ‘
나는 먹을 것이 적으므로 몸의 힘이 빠지고 쇠약해져서 정진해서 닦아야 하는 뛰어난 행[勝行]을 닦을 수가 없다. 우선 잠시 기대 누워서 좀 쉬어야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마침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는 것과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는 것과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 하는 것에 부지런히 힘써 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첫 번째 게으름을 피우는 일[懈怠事]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성읍에 의지하여 머무르거나 혹은 마을에 머물러서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성읍 등에 들어가 돌아다니면서 걸식을 할 때에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맛있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많이 얻게 하소서’라고 한다.
그리하여 만일 뜻대로 이루면 마음에 곧 생각하기를,
‘나는 먹은 것이 많아 배가 부르고 몸이 무거우므로 정진해서 닦아야 하는 뛰어난 행을 닦을 수가 없다. 우선 잠시 기대 누워서 좀 쉬어야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마침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는 것과,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는 것과,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려 하는 것에 부지런히 힘쓰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두 번째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낮에 일을 경영하고는 생각하기를,
‘나는 낮에 일을 경영한지라 몸의 힘이 빠지고 피로하다.
이제 밤에는 정진해서 닦아야 하는 뛰어난 행을 닦을 수가 없구나. 우선 잠시 기대 누워서 좀 쉬어야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마침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는 것과,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는 것과,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 하는 것에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세 번째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내일은 여러 할 일들이 있을 것이므로 곧 생각하기를,
‘나는 내일 할 일들을 해야 되므로 정진해서 닦아야 하는 뛰어난 행을 닦을 수가 없다.
우선 잠시 기대 누워서 몸의 힘을 길러야겠구나’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마침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는 것과,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는 것과,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 하는 것에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네 번째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낮에 길을 걷고는 곧 생각하기를,
‘나는 낮에 길을 걸었으므로 몸에 힘이 빠지고 피로하다.
이제 밤에는 정진해서 닦아야 하는 뛰어난 행을 닦을 수가 없다. 우선 잠시 기대 누워서 좀 쉬어야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드디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는 것과,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는 것과,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 하는 것에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다섯 번째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다음날에는 길을 갈 것이므로 곧 생각하기를,
‘나는 내일 길을 떠나야 하므로 정진해서 닦아야 하는 뛰어난 행을 닦을 수가 없다.
우선 잠시 기대 누워서 몸의 힘이나 길러야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드디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는 것과,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는 것과,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 하는 것에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여섯 번째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마침 병고(病苦)에 시달리면서 곧 생각하기를,
‘나는 마침 병고에 시달리고 있어서 몸의 힘이 빠지고 쇠약한지라 정진해서 닦아야 하는 뛰어난 행을 닦을 수가 없다.
우선 잠시 기대 누워서 좀 쉬어야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드디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는 것과,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는 것과,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 하는 것에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일곱 번째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병고에 시달리다가 비록 낫기를 하였으나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곧 생각하기를,
‘나는 병고에 시달리다가 비록 낫기는 하였으나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몸의 힘이 빠지고 쇠약해졌으므로 정진해서 닦아야 하는 뛰어난 행을 닦을 수가 없다.
우선 잠시 기대 누워서 좀 쉬어야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마침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는 것과,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이르려 하는 것과,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 하는 것에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여덟 번째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라 한다.
[문] 무슨 연유로 이 여덟 가지를 해태사(懈怠事)라 하는가?
[답] 해태(懈怠)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어서 이런 여덟 가지 일로 말미암아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고, 생긴 뒤에는 갑절 더 자라고 광대해지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라 한다.
[8정진]
[문] 8정진사(精進事)란 어떤 것인가?
[답] 구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한 무리가 성읍에 의지하여 머무르거나 혹은 마을에 머물러서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 돌아다니면서 걸식을 할 때에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맛있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많이 얻게 하소서’라고 한다.
그러나 만일 뜻대로 이루지 못하면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먹은 것은 비록 적다 하더라도 몸이 가볍고 편리해졌으므로 정진해서 닦아야 하는 뛰어난 행[勝行]을 닦을 수가 있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더욱 왕성하게 정진하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이르려 하며,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 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첫 번째 정진의 일[精進事]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성읍에 의지하여 머무르거나 혹은 마을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 돌아다니면서 걸식할 적에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맛있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많이 얻게 하소서’라고 한다.
그리하여 만일 뜻대로 많이 얻어서 먹은 뒤에는 곧 생각하기를,
‘나는 먹은 것이 많아서 몸의 힘이 강성(强盛)해졌으므로 정진해서 닦아야 하는 뛰어난 행을 닦을 수가 있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더욱 왕성하게 정진하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며,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 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두 번째 정진의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낮에 일을 경영하고는 곧 생각하기를,
‘나는 낮 동안 일을 하느라 큰 스승[大師]의 가르침인 거룩한 교[聖敎]를 닦고 배울 여가가 없었다.
이제 밤에는 스스로 다잡아 힘써서 먼저 하지 못했던 공부를 보충해야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정진이 더욱 왕성해져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며,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세 번째 정진하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다음날에는 여러 일들을 해야 될 것이므로 그는 곧 생각하기를,
‘나는 내일 일을 해야 하므로 큰 스승의 가르침인 거룩한 교를 닦고 배울 여가가 없을 것이니,
지금 밤에 미리 부지런히 힘써서 장차 못한 공부를 보충해 두어야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더욱 왕성하게 정진하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것에 이르려 하며,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네 번째 정진의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낮에 길을 걸었으므로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낮 동안 길을 걷느라 큰 스승의 가르침인 거룩한 교를 닦고 배울 여가가 없었구나.
오늘 밤에는 스스로 다잡아 힘써서 먼저 하지 못한 공부를 보충해야 되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왕성하게 정진하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며,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다섯 번째 정진하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다음날 길을 떠나려고 하면서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내일 길을 떠나야 하므로 큰 스승의 가르침인 거룩한 교를 닦고 배울 여가가 없다.
오늘 밤에는 미리 부지런히 힘써서 장차 하지 못한 공부를 보충해야 되겠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더욱 왕성하게 정진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며,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여섯 번째 정진의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마침 병고(病苦)에 시달려 있어서 그는 곧 생각하기를,
‘나는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 혹시 이 병고로 인하여 곧 몸과 목숨을 잃게 되어 큰 스승의 가르침에 대하여 아주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더욱 왕성하게 정진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이르려 하며,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일곱 번째 정진의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한 무리가 병고에 시달리다가 비록 낫기는 하였으나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곧 생각하기를,
‘나는 병고에 시달리다가 비록 낫기는 하였으나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며,
혹시 병이 다시 도져서 이 병고로 인하여 곧 몸과 목숨을 잃게 되어 큰 스승의 가르침에 대하여 아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는, 더욱 왕성하게 정진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고,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려 하며, 아직 깨달아 얻지 못한 것을 깨달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여덟 번째 정진의 일이라 한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를 정진사라 한다.
[문] 무슨 연유로 이 여덟 가지를 정진사라고 하는가?
[답] 정진(精進)이란, 다잡아 격려[策勵]한다는 말이니, 이 여덟 가지 일[事]로 말미암아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게 하고 생긴 뒤에는 갑절 더 키우고 광대하게 하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정진사라고 한다.
[8복생]
[문] 8복생(福生)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구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한 무리가 모든 사문이나 혹은 바라문이나 가난한 이나 고행(苦行)하는 이나 길을 가는[道行] 이나 구걸하는 이[乞者]에게 의복과 음식과 모든 향ㆍ꽃ㆍ방사(房舍)ㆍ침구와 등촉 등 살림살이를 보시한다.
그리고는 부귀(富貴)한 사람을 보며 곧 생각하기를,
‘이 보시로 쌓은 선근(善根)으로 말미암아 원컨대 저는 오는 세상에 이와 같은 부귀한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나니,
그는 이러한 마음을 익히고 닦아 많이 짓는다.
그는 이러한 마음을 익히고 닦고 많이 지음으로 말미암아, 먼저는 비록 하열하게 시끄럽고 복잡한 데를 좋아했다 하더라도, 뒤에는 곧 뛰어나고 묘하고 고요한 데를 구하기를 즐긴다.
그는 이러한 일이 있는지라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서 부귀한 이가 되며, 비록 부귀를 누리며 자재하고 안락하다 하더라도 시라(尸羅)를 갖추어서 마음의 소원이 청정해지나니, 그것은 먼저 사람 몸으로 있던 동안에 시라가 청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첫 번째 복생이라 한다.
마치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귀한 이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과 삼십삼천(三十三天)과 야마천(夜摩天)과 도사다천(覩史多天)과 낙변화천(樂變化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과 범중천(梵衆天)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범중천만은 차별이 있으니 욕심을 여읜[離欲] 이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이것을 첫 번째에서부터 여덟 번째까지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數]로 첫 번째요 여덟 번째까지가 되는 것이다.
복생(福生)이란 말에 대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복생이라 하는가?
[답] 복의 과보[福果]를 섭수하여 이곳에 와서 태어나기[生] 때문에 복생이라 한다.
[문] 8종중(種衆)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찰제리의 대중[刹帝利衆]이요, 둘째는 바라문 대중[波羅門衆]이며,
셋째는 장자 대중[長者衆]이요, 넷째는 사문 대중[沙門衆]이며,
다섯째는 사대왕중천 대중[四大王衆天衆]이요, 여섯째는 삼십삼천 대중[三十三天衆]이며,
일곱째는 마천 대중[魔天衆]이요, 여덟째는 범천 대중[梵天衆]이다.
[문] 어떤 것이 찰제리 대중[刹帝利衆]인가?
[답] 그들의 빛깔[色]을 나타내 보이고 그들의 온(蘊)을 나타내 보이며, 그들의 부(部)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것을 찰제리 대중이라 한다.
이에 범천 대중[梵天衆]에 이르기까지도 자세한 설명은 역시 그러하다.
[문] 8세법(世法)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얻는 것[得]이요, 둘째는 얻지 못하는 것[不得]이며,
셋째는 헐뜯는 것[毁]이요, 넷째는 기리는 것[譽]이며,
다섯째는 칭찬하는 것[稱]이요, 여섯째는 비방하는 것[譏]이며,
일곱째는 괴로운 것[苦]이요, 여덟째는 즐거운 것[樂]이다.
[문] 어떤 것을 얻는다[得] 하는가?
[답] 좋아할 만한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과 의복ㆍ음식ㆍ침구와 병에 대한 의약 등 살림살이를 얻고 따로따로[別] 얻으며 이미[已] 얻었고 장차[當] 얻을 것이니, 이것을 얻는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얻지 못한다[不得] 하는가?
[답] 좋아할 만한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과 의복ㆍ음식ㆍ침구와 병에 대한 의약 등 살림살이를 얻지 못하고 따로따로 얻지 못하며 이미 얻지 못했고 장차 얻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을 헐뜯는다[毁] 하는가?
[답]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등뒤에 안 보이는 곳에서 기리지 않고 추켜 주지 않으며, 찬탄하지 않고 칭송하지 않으며 또한 찬양하지도 않으면서 말하기를,
‘그는 믿음[信]과 계율[戒]과 견문[聞]과 버림[捨]과 지혜[慧] 등을 모두 두루 갖추지 못한 이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헐뜯는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을 기린다[譽] 하는가?
[답]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등 뒤에 안 보이는 곳에서 칭찬하고 추켜 주며, 찬탄하고 칭송하며, 또한 찬양해 말하기를,
‘그는 믿음과 계율과 견문과 버림과 지혜 등을 모두 다 두루 갖춘 이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기린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칭찬한다[稱] 하는가?
[답] 등 뒤에 있지 않고 그의 앞에 나타나 있으면서 꾸짖지 않고 헐뜯지 않으며, 나무라지 않고 욕하지 않으면서 기리고 추켜 주고 찬탄하고 칭송하며, 또한 찬양해서 말하기를,
‘그대는 믿음과 계율과 견문과 버림과 지혜 등을 모두 다 갖추었구나”라고 하나니,
이 때문에 칭찬한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을 비방한다[譏] 하는가?
[답] 등 뒤에 있지 않고 그의 앞에 나타나 있으면서 꾸짖고 헐뜯고 나무라고 욕하면서 칭찬하지 않고 추켜 주지 않으며, 찬탄하지 않고 칭송하지 않으며, 또한 찬양하지도 않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믿음과 계율과 견문과 버림과 지혜 등을 모두 두루 갖추지 못하였구나”라고 하나니,
이것을 비방한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을 괴로움[苦]이라 하는가?
[답] 순고수촉(順苦受觸)에 접촉되는 까닭에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내는 것이니, 평등하지 않은 느낌[不平等受]이어서 느낌의 종류에 속한다. 이것을 괴로움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을 즐거움[樂]이라 하는가?
[답] 순락수촉(順樂受觸)에 접촉되는 까닭에 몸과 마음에 즐거움을 내는 것이니, 이것은 평등한 느낌[平等受]이어서 느낌의 종류에 속한다. 이것을 즐거움이라 한다.
세존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게송으로써 말씀하셨다.
얻는 것[得] 얻지 못하는 것[不得], 헐뜯는 것[毁] 기리는 것[譽]
괴로운 것[苦]과 즐거운 것[樂]은
무상하고 마음으로 내는[意生] 욕심이요
변하고 파괴되는 법이라 보존하기 어렵다.
지혜로운 이는 사실대로 알고
현재 보인 데서 생사(生死)를 조복하며
좋고[愛] 좋지 않은[非愛] 법에 대하여
마음에 기뻐하거나 성을 내지 않는다.
그는 비록 순(順)과 위(違)를 만난다 하더라도
능히 버리고 억누르고 없애서
온갖 것에 대하여 해탈하므로
세간의 맨 끝인 저 언덕[彼岸]에 이른다.
[8해탈]
[문] 8해탈(解脫)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빛깔[色]이 있어서 모든 빛깔을 관(觀)하니,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안[內]으로는 빛깔에 대한 생각[色想]이 없으면서 바깥의 모든 빛깔을 관하니,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청정한 해탈[淨解脫]을 몸으로 깨달아 얻어 두루 갖추고 머무르니,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온갖 빛깔에 대한 생각을 초월하여 상대가 있다는 생각[有對想]을 없애고 갖가지 생각을 하지 않으며, 끝없는 허공에 들어가 공무변처(空無邊處)를 두루 갖춰서 머무르니, 이것이 네 번째 해탈이다.
온갖 공무변처를 초월하여 끝없는 의식[識]에 들어가 식무변처(識無邊處)를 두루 갖춰서 머무르니,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다.
온갖 식무변처를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는 데로 들어가 무소유처(無所有處)를 두루 갖추어 머무르니,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다.
온갖 무소유처를 초월하여 생각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가 두루 갖추어 머무르니,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다.
온갖 비상비비상처를 초월하여 생각과 느낌이 사라지는 데[想受滅]로 들어가 몸으로 증득하고 두루 갖추어 머무르니,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첫번째 해탈]
‘빛깔이 있으면서 모든 빛깔을 관한다’라고 함은,
그는 안[內]에서는 저마다 따로따로 빛깔에 대한 생각[色想]을 아직 멀리 여의지 못하고 아직 따로따로 멀리 여의지 못했으며,
아직 조복하지 못하고 아직 따로따로 조복하지 못했으며,
아직 소멸시켜 없애지 못하고 아직 파괴하지 못한 것이니,
그는 안으로 저마다 따로따로 빛깔에 대한 생각을 말미암아 아직 멀리 여의지 못하고 아직 따로따로 멀리 여의지 못했으며,
아직 조복하지 못하고 아직 따로따로 조복하지 못했으며,
아직 소멸시켜 없애지 못하고 아직 파괴하지 못한 까닭에,
뛰어나게 아는 힘[勝解力]으로 말미암아 바깥의 모든 빛깔을 관하는 것이다.
혹은 푸른 어혈[靑瘀]이라고 관하기도 하고, 혹은 고름이 나서 문드러진다[膿爛]고 관하기도 하며,
혹은 파괴(破壞)된다고 관하기도 하고, 혹은 떨어져 흩어진다[離散]고 관하기도 하며,
혹은 쪼아 먹고 뜯어먹는다[啄噉]고 관하기도 하고, 혹은 피가 묻어서 붉다[異赤]고 관하기도 하며,
혹은 해골(骸骨)이라고 관하기도 하고, 혹은 골쇄(骨鎖)라고 관하기도 하나니,
이것을 ‘빛깔이 있으면서 모든 빛깔을 관하다’라고 한다.
‘첫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定] 중에서 점차(漸次)와 순차(順次)와 서로 이어지는[相續] 차례의 순서[數]로 첫 번째가 되는 것이다.
‘해탈(解脫)’이라 함은, 이 선정 중에 있는 온갖 착한[善] 물질[色]ㆍ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이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두 번째 해탈]
‘안으로는 빛깔에 대한 생각이 없으면서 바깥의 모든 빛깔을 관하다’라고 함은,
그는 안에서는 저마다 따로따로 빛깔에 대한 생각을 이미 멀리 여의었고 이미 따로따로 멀리 여의었으며,
이미 조복하였고 이미 따로따로 조복했으며, 이미 소멸시켜 없앴고 이미 파괴한 것이니,
그는 안으로 저마다 따로따로 빛깔에 대한 생각을 이미 멀리 여의었고 이미 따로따로 멀리 여의었으며,
이미 조복하였고 이미 따로따로 조복했으며,
이미 소멸시켜 없앴고 이미 파괴한 까닭에 뛰어나게 아는 힘으로 말미암아 바깥의 모든 빛깔을 관하는 것이다.
혹은 푸른 어혈이라고 관하기도 하고, 혹은 고름이 나서 문드러진다고 관하기도 하며,
혹은 파괴된다고 관하기도 하고, 혹은 떨어져서 흩어진다고 관하기도 하며,
혹은 쪼아 먹고 뜯어먹는다고 관하기도 하고, 혹은 피가 묻어서 붉다고 관하기도 하며,
혹은 해골이라고 관하기도 하고, 혹은 골쇄라고 관하기도 하나니,
이것을 ‘안으로는 빛깔에 대한 생각이 없으면서 바깥의 모든 빛깔을 관한다’라고 한다.
‘두 번째’라고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두 번째가 되는 것이다.
‘해탈’이라 함은, 이 선정 속에 있는 온갖 착한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청정한 해탈[淨解脫]을 몸으로 깨달아 얻어 두루 갖추어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세 번째 해탈]
[문] 이 청정한 해탈의 가행(加行)이란 어떤 것인가?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 청정한 해탈의 선정[定]에 드는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비로소 관(觀)을 닦을 때에는 푸른 나무의 모양[靑樹相]을 취하나니, 푸른 줄기ㆍ푸른 가지ㆍ푸른 잎ㆍ푸른 꽃ㆍ푸른 열매이다. 혹은 푸른 옷과 푸른 꾸미개의 모양을 취하기도 하며, 혹은 그 밖의 갖가지 푸른 모양을 취하기도 한다.
이미 이러한 모든 푸른 모양을 취한 뒤에는 뛰어나게 아는 힘[勝解力]을 말미암아 이 빛깔은 곧 아무 푸른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염(念)하며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한다.
그는 이미 이와 같이 뛰어나게 아는 힘을 말미암아 이 빛깔은 곧 아무 푸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염하며, 관찰하고 벌여 세우며, 믿고 이해하기 때문에 마음이 곧 산란하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一境]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빛깔은 곧 푸른 것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그는 마음이 산란하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므로,
한 군데로 나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빛깔은 결정코 푸른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직 마음을 머물게 해 청정한 해탈의 선정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 산란하게 움직이고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하나의 푸른 모양에 생각을 잡아매어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은 곧 푸른 것이요, 푸르지 않은 모양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모양을 생각하되 부지런히 힘쓰고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나아가 마음으로 하여금 서로 이어 나가 오래오래 머무르게 한다.
이 가행(加行)으로 말미암아 청정한 해탈의 선정에 들어간다.
부지런히 힘써서 이 가행을 자주자주 익힌 뒤에는 다시금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가행을 이끌어내는 도(道)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 것이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내는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지으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 빛깔은 결정코 푸른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이어져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푸른 모양을 생각하되,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곧 청정한 해탈의 선정에 증득하여 들게 된다.
마치 푸른 모양을 관하는 것처럼, 누렇고 붉고 흰 것을 관하는 것도 그 마땅한 것을 따라 역시 그와 같다.
‘세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중의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세 번째가 되는 것이다.
‘해탈’이라 함은, 이 선정 가운데 있는 모든 착한[善]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네 번째 해탈]
[문] ‘온갖 빛깔에 대한 생각[色想]을 초월한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빛깔에 대한 생각인가?
[답] 안식신(眼識身)과 상응하는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等想]의 성품과, 나타낸 생각[現想]의 성품과, 이미 생각한 성품과, 이미 나타낸 생각의 성품과, 장차 생각할 성품과, 장차 나타낼 생각의 성품이니, 이것을 빛깔에 대한 생각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5식신(識身)과 상응하는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이것을 빛깔에 대한 생각이라 한다’라고 한다.
지금 이 뜻에서는 안식신과 상응하는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이것을 빛깔에 대한 생각이라 한다.
이 선정에 들어갈 때는 그러한 빛깔에 대한 생각에 대해 모두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며, 가장 지극하게 초월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온갖 빛깔에 대한 생각을 초월한다’라고 한다.
[문] ‘상대가 있다는 생각[有對想]을 없앤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상대가 있다는 생각인가?
[답] 4식신(識身)과 상응하는 생각과 평등한 생각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이것을 상대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5식신(識身)과 상응하는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이것을 상대가 있다는 생각이라 한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진에(瞋恚)와 상응하는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이것을 상대가 있다는 생각이라 한다’라고 한다.
지금 이 뜻에서는 4식신과 상응하는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이것을 상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선정에 들어갈 때는 그러한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으며, 이미 멀리 여의었고 이미 따로따로 멀리 여의었으며, 이미 조복하였고 이미 따로따로 조복하였으며, 이미 소멸시켜 없앴고 이미 파괴한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없앴다’라고 한다.
[문] ‘갖가지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갖가지 생각[種種想]인가?
[답] 부(覆)와 전(纏)이 있는 이가 지닌 온갖 염오(染汚)의 빛깔에 대한 생각[色想], 소리에 대한 생각[聲想], 냄새에 대한 생각[香想], 맛에 대한 생각[味想], 감촉에 대한 생각[觸想]과 모든 생각으로서 착하지 않은 것[不善]과 모든 생각으로서 도리가 아니게 이끄는 것[非理所引]과 모든 생각으로서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두를 ‘갖가지 생각’이라고 한다.
이 선정에 들었을 때는 이런 갖가지 생각을 끌어내지 않고 따라 끌어내지 않으며, 평등하게 끌어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미 생각하지 않았고, 장차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갖가지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끝없는 허공[無邊空]에 들어가 공무변처(空無邊處)를 두루 갖추면서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문] 이 공무변처의 해탈의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을 연유하여 공무변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가는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비로소 관을 닦을 때에는,
먼저 마땅히 제4 정려(精慮)를 거칠고[麤] 괴롭고[苦] 장애[障]가 된다고 생각하고,
뒤에는 마땅히 공무변처를 고요하고[靜] 묘하고[妙] 여읜다[離]고 생각해야 한다.
그는 이미 제4 정려를 거칠고 괴롭고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또한 다시 공무변처를 고요하고 묘하고 여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이 곧 산란하게 움직이면서 모든 모양[相]에 내닫게 되어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서로 잇대어 공무변처를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그는 마음이 산란하게 움직여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고,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서로 잇대어 공무변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은 마음을 머물러서[住心] 공무변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산란하게 움직이며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오로지 생각을 잡아매어 공무변처의 모양만을 생각하며, 이 모양만을 생각하되 부지런히 힘써서 용맹스러우며, 나아가 마음을 서로 잇대어서 오래오래 머무르게 하나니,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 공무변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부지런히 힘써서 이 가행을 자주자주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가행으로 이끌어내는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내는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잇대어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것은 곧 공무변처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잇대어 한 군데로 나가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와 같은 공무변처를 생각하되,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곧 공무변처의 해탈 선정을 깨달아 얻어 들어간다.
‘네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네 번째가 되는 것이다.
‘해탈’이라 함은, 이 선정 속에 있는 온갖 착한[善]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모두 해탈이라 한다.
[다섯 번째 해탈]
[문] ‘온갖 공무변처를 초월한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온갖 공무변처를 초월하는 것인가?
[답] 장차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나아가 들려고 할 적에는 온갖 공무변처의 생각에서 모두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며 가장 지극하게 초월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온갖 공무변처를 초월한다’라고 한다.
‘끝없는 의식[無變識]에 들어가 식무변처를 두루 갖추어서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문] 이 식무변처의 해탈의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 식무변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가는 것인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비로소 관(觀)을 닦을 때에는 먼저 마땅히 공무변처를 거칠고 괴롭고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뒤에는 마땅히 식무변처를 고요하고 묘하고 여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는 이미 공무변처를 괴롭고 거칠고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또한 다시 식무변처를 고요하고 묘하고 여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곧 산란하게 움직이면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어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서로 잇대어 식무변처를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그는 마음이 산란하게 움직이면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어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서로 잇대어 식무변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은 마음을 머물러 식무변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산란하게 움직이면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오로지 생각을 잡아매어 식무변처의 모양만을 생각하며, 이 모양만을 생각하되 부지런히 힘쓰고 용맹스러우며, 나아가 마음을 서로 잇대어서 오래오래 머무르게 하나니,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 식무변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부지런히 힘써서 이 가행을 자주자주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가행으로 이끌어내는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내는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잇대어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것은 곧 식무변처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잇대어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와 같은 식무변처를 생각하되,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곧 식무변처의 해탈 선정에 깨달아 들어간다.
‘다섯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다섯 번째가 되는 것이다.
‘해탈’이라 함은, 이 선정에 있는 온갖 착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모두 해탈이라 한다.
[여섯 번째 해탈]
[문] ‘온갖 식무변처를 초월한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온갖 식무변처를 초월하는 것인가?
[답] 장차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려고 할 적에는 온갖 식무변처의 생각에서 모두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며, 가장 지극하게 초월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온갖 식무변처를 초월한다’라고 한다.
‘아무것도 없는 데[無所有]에 들어가 무소유처를 두루 갖추어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문] 이 무소유처의 해탈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 무소유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가는 것인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비로소 관을 닦을 때에는 먼저 마땅히 식무변처를 괴롭고 거칠고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뒤에는 마땅히 무소유처를 고요하고 묘하고 여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는 이미 식무변처를 괴롭고 거칠고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또한 무소유처를 고요하고 묘하고 여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곧 산란하게 움직이면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어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서로 잇대어 무소유처를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그는 마음이 산란하게 움직이면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어,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서로 잇대어 무소유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은 마음을 머물러서[住心] 무소유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산란하게 움직이면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오로지 생각을 잡아매어 무소유처의 모양만을 생각하며 이 모양만을 생각하되 부지런히 힘쓰고 용맹스러우며 나아가 마음으로 하여금 서로 잇대어서 오래오래 머무르게 하나니,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 무소유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부지런히 힘써서 이 가행을 자주자주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정진 수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가행으로 이끌어내는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내는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잇대어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것은 곧 무소유처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잇대어 한 군데로 나가면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와 같은 무소유처를 생각하되,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곧 무소유처의 해탈 선정을 깨달아 들어간다.
‘여섯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여섯 번째가 되는 것이다.
‘해탈’이라 함은, 이 선정에 있는 온갖 착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모두 해탈이라고 한다.
[일곱 번째 해탈]
[문] ‘온갖 무소유처를 초월한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온갖 무소유처를 초월하는 것인가?
[답] 장차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나아가 들려고 할 적에는 온갖 무소유처에서 모두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며, 가장 지극하게 초월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온갖 무소유처를 초월한다’라고 한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어가 두루 갖추어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문] 이 비상비비상처의 해탈의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 비상비비상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가는 것인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비로소 관(觀)을 닦을 때에는 먼저 마땅히 무소유처를 괴롭고 거칠고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뒤에는 마땅히 비상비비상처를 고요하고 묘하고 여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는 이미 무소유처를 괴롭고 거칠고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또한 다시 비상비비상처를 고요하고 묘하고 여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곧 산란하게 움직이면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어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서로 잇대어 비상비비상처를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그는 마음이 산란하게 움직이면서 모든 모양에 내닫게 되어서,
한 군데로 나아가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서로 잇대어 비상비비상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은 마음을 머물러서[住心] 비상비비상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산란하게 움직이면서 내닫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오로지 생각을 잡아매어 비상비비상처의 모양만을 생각하며, 이 모양만을 생각하되 부지런히 힘써서 용맹스러우며 나아가 마음으로 서로 잇대어서 오래오래 머무르게 하나니,
이런 가행으로 말미암아 비상비비상처의 해탈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부지런히 힘써서 이 가행을 자주자주 익힌 뒤에는 다시 나아가 이 선정의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가행으로 이끌어내는 도(道)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는다.
이미 가행으로 이끌어내는 도를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자주자주 많이 짓게 되면, 마음이 곧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잇대어 한 군데로 나가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것이 곧 비상비비상처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가까이 머무르고 서로 잇대어 한 군데로 나가서 한 경계에 생각을 잡아매어 이와 같은 비상비비상처를 생각하되,
둘이 없고 옮아감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곧 비상비비상처의 해탈 선정을 깨달아 들어간다.
‘일곱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수로 일곱 번째가 되는 것이다.
‘해탈’이라 함은, 이 선정에 있는 온갖 착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모두 해탈이라 한다.
[여덟 번째 해탈]
[문] ‘온갖 비상비비상처를 초월한다’라고 함에서 어떻게 온갖 비상비비상처를 초월하는 것인가?
[답] 장차 상수멸(想受滅)의 해탈에 나아가 들려고 할 때에는 온갖 비상비비상처의 생각에 모두 초월하고 평등하게 초월하며, 가장 지극하게 초월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온갖 비상비비상처를 초월한다’라고 한다.
‘상수멸에 들어가 몸으로 증득하여 두루 갖추어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문] 이 상수멸의 해탈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관행을 닦는 이는 어떤 방편으로 말미암아 상수멸의 해탈 선정에 드는 것인가?
[답]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가 비로소 관(觀)을 닦을 적에는 온갖 행(行)에 대하여 조작(造作)을 원하지 않고 사각(思覺)을 바라지 않으면서 선정에 들어가며, 다만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아직 생기지 않은 생각[想]과 느낌[受]으로 하여금 잠시 동안이라도 생기지 않게 하며, 이미 생긴 생각과 느낌은 잠시 동안이라도 쉬어 없어지게 할까?’라고 할 뿐이다.
그는 모든 행에 대하여 조작을 원하지 않고 사각(思覺)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선정에 들어가 다만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아직 생기지 않은 생각과 느낌으로 하여금 잠시 동안이라도 생기지 않게 하며,
이미 생긴 생각과 느낌은 잠시 동안이라도 쉬어 없어지게 할까?’라고 할 뿐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원하는 것을 따라 그때에 아직 생기지 않은 생각과 느낌을 잠시 동안이라도 생기지 않게 하고,
이미 생긴 생각과 느낌은 잠시 동안이라도 쉬어 없어지게 하나니,
이와 같이 되는 것을 ‘상수멸의 해탈 선정에 들어간다’라고 한다.
‘여덟 번째’라 함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여덟 번째가 되는 것이다.
‘해탈’이라 함은,
이 선정의 모든 해탈과 달라지는 해탈[異解脫]과 달라짐이 지극한 해탈[異極解脫]과 이미 얻은 해탈과 장차 얻을 해탈이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또 만일 법(法)이 생각의 미세한 것을 인(因)으로 삼고 생각의 미세한 것을 등무간(等無間)으로 삼아 생각이 화합하지 않는 뜻[不和合義]이 성취하지 못한 것이 아닌 뜻[非不成就義]을 말미암으면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문] 이 가운데서 ‘상수멸의 해탈 선정[想受滅解脫定]’이라 했는데,
어떤 것이 상수멸이고 어떤 것이 상수멸의 해탈이며,
어떤 것이 상수멸의 해탈 선정이기에 상수멸의 해탈 선정이라 하는가?
[답] ‘상수멸(想受滅)’이라 함은, 생각[想]과 느낌[受]이 사라져서[滅] 고요하고 없어지는 것을 상수멸이라 한다.
‘상수멸의 해탈[想受滅解脫]’이라 함은, 생각과 느낌이 사라지는 모든 해탈이요 달라지는[異] 해탈이며, 달라짐이 지극한[異極] 해탈이요 이미 얻은 해탈이며, 장차 얻을 해탈이니, 이것을 상수멸의 해탈이라 한다.
‘상수멸의 해탈 선정[想受滅解脫定]’이라 함은, 상수멸과 상수멸의 해탈이 숨지 않고 등지지 않아서 바로 앞에 나타나며 자유로이 몸으로 증득하는 것이니, 이것을 상수멸의 해탈 선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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