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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소문경론 제9권
3.9. 12인연의 뜻(2)
[지엄감과 이름과 물질]
[문] 지어감[行]은 이름과 물질[名色]의 두 가지 원인으로써의 의식[識]에 반연된다고 거듭하여 말하는데, 여기에 어떠한 훌륭한 것이 있는가?
[답] 처음 태 안에 의탁한 의식은 지어감이 인연이 되어 그것이 종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며,
이미 종자를 심었으므로 이름과 물질이 인연이 되어 화합하여 일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며,
두 가지 인연은 머물러 지니고 성취하며 의지하여 경계를 쫓아 자세히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지어감의 인연을 업이라 이름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업의 원인[因]은 날 수 있는 원인이 되느니라”고 하셨다.
이름과 물질의 인연으로 욕망[愛]이라 이름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저 욕망의 연(緣)은 날 수 있는 연이 되느니라”고 하셨으므로, 두 가지 인연은 경계 중에서 경계에 의하여 머무른다.
또, 지어감의 인연은 처음 날 적의 마음이라 할 수 있고, 이름과 물질의 인연은 이미 났으며, 여섯 가지 감관[六入]은 아직 성취되지 못했지만 여섯 가지 감관이라 하게 된다.
또, 지어감의 인연은 1문(門)에 의한 행이니,
이는 무슨 뜻인가?
저 지어감의 인연은 오직 의문(意門)만의 행이다.
이름과 물질의 인연은 2문에 의한 행이니,
이는 무슨 뜻인가?
이름과 물질은 몸의 감관[身根]과 뜻의 감관[意根]의 2문에 의한 행이므로, 두 가지 인연은 6문(門)에 의한 행이다.
또, 지어감의 인연은 오직 나쁜 갈래 중에서만 죄업에 의하여 껴잡아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니,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저 중생들이 나쁜 갈래 중에서는 나쁜 업이 다하기 전에는 죽지 않으며, 업이 다하여야 비로소 죽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이러한 것이다.
이름과 물질의 인연은 사람과 하늘 길인 욕심세계와 형상세계 중에서이니, 그곳에 이름과 물질의 두 가지 일이 있고 무형세계 중에는 두 가지 인연이 없다.
[문] 여래께서는 저『성유경(城喩經)』과 대인연(大因緣) 등의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름과 물질의 원인에 의하여 의식에 반연하느니라”고 하셨거늘,
무엇 때문에 이 수다라에서는
“의식의 원인에 의하여 이름과 물질에 반연된다”고 하셨는가?
[답] 이름과 물질의 인연은 의식에 의하여 존재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실로 의식이 있는 것은 이름과 물질이 의식과 함께 갈마들며 서로가 원인이 되며 의식의 존재에 의하여 이름과 물질의 존재가 있다. 마치 의지할 것에 의지하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의지함이 있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왕과 신하가 갈마들며 서로 의지하지만 왕이 더 훌륭하므로 왕이 떠나가면 신하도 따라 떠나가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의식은 이름과 물질이 함께 서로 갈마들며 의지하지만 의식이 더 훌륭하므로 그 때문에 의식에 의하여 이름과 물질이 있다.
만약 의식의 인연이 어머니의 태 안에 의탁하지 아니하면 모든 딸린 마음[心數]의 법은 곧 있을 수가 없으며, 의식이 태 안에 의탁하므로 모든 딸린 마음의 법이 모두 역시 따르게 된다. 또, 근본의 마음으로 인하여 가라라(歌羅邏)가 형성되니, 붉고 흰 것 따위가 화합하여 곧 가라라를 이룰 수 있고 중생을 이루게 되므로 그곳에는 의식의 마음이 근본 원인이 된다.
마치 대인연법문(大因緣法門) 중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저 의식의 마음이 어머니 태 안에 의탁하지 않으면, 저 가라라와 이름과 물질 등이 역시 성취되지 않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의식은 모든 고통의 종자가 되는 근본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의식은 이름과 물질에 반연한다고만 말하고, 이름과 물질의 원인은 의식에 반연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12인연은 시절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 사람은 의식의 원인에 의하여 이름과 물질에 반연한다는 이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의식이 없어지게 된 연후에 이름과 물질의 인연을 지을 수 있고 의식이 없어지지 않게 되어도 인연을 지을 수 있으므로, 만약 의식이 없어진 뒤에 이름과 물질의 인연을 짓는다면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없어지게 된 종자로써는 싹이 나는 인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시, 허물이 있다. 중간이 끊어진 중생의 몸이기 때문이다. 만약 의식이 없어지지 않고 이름과 물질에게 인연을 지어줄 수 있다면, 한 중생의 한 생각 동안에 나란히 두 개의 의식이 있으리라. 이런 이치 때문에 의식은 이름과 물질의 인연을 지을 수 없다.
[답] 서로가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인연은 마치 등잔의 불꽃이 서로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불꽃이 서로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으면 켜져 있을 수 있고 먼저의 불꽃이 꺼졌으면 뒤의 불꽃이 켜져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먼저의 불꽃이 꺼졌는데 불꽃이 살아있다고 하면, 이는 곧 꺼진 뒤에 다시 켰으리라.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뒤의 불꽃이 켜져 있을 적에는 원인이 없이 켜져 있으리라.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만약 원인 없이도 켜졌다면 으레 언제나 켜졌어야 한다. 역시 이는 먼저 켰던 불꽃이 머무른 것이며, 뒤에 따른 불꽃이 켜진 것이 아니다.
만약 먼저의 불꽃이 머물러 있는데 뒤의 불꽃을 켠다고 하면, 먼저의 불꽃은 곧 둘째의 생각에서 머물러야 하지만 부처님 법 중에서는 이러한 이치가 없다.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먼저 켜진 불꽃이 원인이 없이 켜진다.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불꽃은 으레 더욱 자라나야 하리라.
또 다시 허물이 있다. 으레 많은 불꽃이 켜져 있어야 하리라. 역시 먼저의 불꽃이 있을 때에 다시 다른 불꽃을 켠 것이 아니리라.
왜 그런가?
용납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먼저 켜진 불꽃을 따라 그대로에 어떤 곳의 어떤 인연으로써 하는가?
곧 그 켜는 곳과 곧 그 인연은 곧 먼저 켜진 불꽃을 즉시 함께 물리치리니, 그 때문에 다른 불꽃과 다른 인연을 용납할 수 있으리라.
또 다시 허물이 있다. 앞의 등잔불이 꺼지고 뒤의 등잔불이 켜짐이 불 없는 인연으로부터 켜진 것이 아니리니,
이 이치가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심지의 불꽃이 앞뒤에 차례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켜져 있는가?
이와 같이 의식과 이름과 물질 등이 차례로 나고 없어짐이 인과를 이루는 줄 알아야 하리니,
이런 이치 때문에 의식의 인연에 의하여 이름과 물질이 날 수 있으며, 인과의 이치가 이루어진다.
[여섯 가지 감관]
[문] 이름과 물질의 인연으로 여섯 가지 감관이 있다 함은 어떠한 원인인가?
[답] 그 인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물질의 깨끗한 인연은 다섯 가지 감관[五入]이며, 이름의 깨끗한 인연은 뜻의 감관[意入]이기 때문에 이름과 물질의 인연이 여섯 가지 감관이라고 말한다.
[문] 만약 이름과 물질이 여섯 가지 감관에 반연한다 하면,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으리라.
왜 그러한가?
비록 저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가라라(歌羅邏) 등일 때에 비록 이름과 물질이 있다 하더라도 여섯 가지 감관 등은 없다. 이런 이치 때문에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또, 이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 까닭은 중생에게는 소경과 귀머거리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만약 이름과 물질이 여섯 가지 감관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소경과 귀머거리인 중생이 있지 않아야 하며, 모두가 다 모든 감관을 두루 갖추어야 하리라.
[답] 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저것을 여의고서 이루어짐이 없는 것은 마치 구름과 비와 같다.
이는 무슨 뜻인가?
그대는 하늘의 비가 만약 구름이 있은 뒤에 내린다고 하면 구름을 떠나서 비가 있다고 하거나 구름이 있는데도 비가 없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여섯 가지 감관도 만약 이름과 물질이 있어서 여섯 가지 감관이 있다고 하면 이름과 물질을 떠난다고 하거나 다시 이름과 물질이 있는데도 여섯 가지 감관이 없는 것이 아니리라.
[문] 무슨 이치 때문에 저 이름과 물질이 있는데도 여섯 가지 감관이 없겠는가?
[답] 모든 인연을 두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안식(眼識)과 같나니, 실제로 눈은 있지만 모든 인연이 두루 갖추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같다.
또, 마치 실제로 종자는 있지만 모든 인연이 화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싹을 낼 수가 없는 것처럼, 이것도 그러하여 가라라 등일 때에 인연이 두루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눈 따위의 모든 감관도 두루 갖추어지지 않는다.
[문] 저 모든 인연은 어떻게 두루 갖추어지는가?
[답] 번뇌의 업과 이름과 물질이 화합하여 순수하게 완숙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문] 어떻게 번뇌 역시 여섯 가지 감관의 인연인 줄 알게 되는가?
[답] 아라한에게는 다시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아라한은 비록 업은 있다 하더라도 번뇌가 없다. 그러므로 나지 않으며, 나지 않기 때문에 여섯 가지 감관이 없다.
그러므로 번뇌 또한 여섯 가지 감관의 먼 원인이며, 업 또한 저 여섯 가지 감관의 인연인 줄 알게 된다.
왜 그런가?
소경 따위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실제로는 번뇌가 있어서 종류를 따라서 난다 하더라도 여섯 가지의 업을 갖추어 소경과 귀머거리 등이 있나니, 그 때문에 업 또한 여섯 가지 감관의 원인임을 알게 된다.
또, 열두 가지 감관은 가지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감관은 가지가지에서 서로가 같지 않다. 하나의 중생에게 하나의 몸 가운데서도 가지가지여서 같지 않거든, 하물며 갖가지 중생의 몸 안에 모든 업의 같지 않은 것이겠는가? 집[家]과 힘과 빛깔과 목숨이 다 같지 않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의 집ㆍ힘ㆍ빛깔 등은 모두가 차별되며 이는 모두가 업에 의하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저 업도 역시 여섯 가지 감관의 인연이며 이름과 물질도 역시 여섯 가지 감관의 인연이다.
저 여섯 감관은 종자에 의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비록 다시 번뇌와 업이 있다 하더라도 이름과 물질의 종자는 여섯 가지 감관을 낸다. 이름과 물질을 여의고서 여섯 가지 감관을 낼 수 없다고 함은, 마치 종자를 여의고서 싹을 낼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가까운 원인으로서 이름과 물질은 여섯 가지 감관을 내며 역시 그 업에 의하여 여섯 가지 감관을 낸다 함을 알게 된다.
왜 그런가?
비록 저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비록 번뇌와 업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이름과 물질이 완전히 성취되지 못함은 마치 가라라일 동안에 눈 등의 감관은 없지만 그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 감관이 성취되는 것과 같다.
마치 처음 씨를 맺어서 끝내는 열매를 이루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번뇌와 업 등이 이름과 물질로 완숙하여 저 여섯 가지 감관의 인연을 짓게 되는 줄 알 수 있다.
[문] 그대의 말하는 인연은 오히려 완전하지 못하다.
왜 그런가?
이 중에서 바깥의 인연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오직 소리의 감관을 제외한 이름과 물질 등의 인연이 여섯 가지 감관과 함께 생긴다.
만약 그렇다면, 여섯 가지의 인연만을 말씀했을 뿐이며, 이름과 물질의 인연을 두루 갖추어서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허물이다.
[답] 그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두 가지 곳에서 보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저 바깥에서 받아들임은 두 가지 곳에서 보기 때문이니, 중생에 의하여 포섭되는 것과 중생이 아닌 것에 의하여 포섭되는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이 안에서는 다만 중생에 의하여 차례로 저 열두 가지 인연을 말한 것이 저 중생이 아닌 것에 의하여 열두 가지 인연을 말한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중생에 의하여 포섭하여 받아들이는 것만을 말하고 중생이 아닌 것에 의하여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런 이치 때문에, 이 중에서는 다만 중생에 의하여 포섭되는 안[內]의 인연을 말했을 뿐이며, 저 바깥의 인연에 의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문] 만약 그렇다면, 이름과 물질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름과 물질의 갈래 중에서는 이름과 물질을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물질[色]은 두 곳에서 보기 때문이다.
[답] 실은 힐난한 것과 같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저곳에 이름과 물질을 말하지 않고 다만 이름이 여섯 가지 감관에 반연한다고만 말하여 이와 같이 다섯 가지의 물질의 감관을 말하지 않는다면, 저 여섯 가지 감관 중에 물질 또한 깨끗한데 다만 이름과 물질의 감관만이 깨끗한 것이 아니리라.
이는 무슨 뜻인가?
볼 수 있는 물질 등의 감관의 인연[緣]을 말해야 하리니, 그러므로 그곳에서도 물질이라는 이름을 말한다. 이 때문에 의식의 인연이라는 이름을 말하면서 이름은 뜻의 감관[意人]에 반연한다고 이렇게 한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때는 분별이 없나니,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이 중에서 말씀하셨으며, 이것을 바른 말씀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바깥에서 받아들이는 인연을 말씀하지 않는가?
[답] 눈 따위를 설명하면, 이것이 곧 설명이 성립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이 수다라에서 완전히 중생의 몸을 말씀하셨다.
이는 또 무슨 뜻인가?
어떠한 처소에서 눈 따위의 모든 감관을 따르면, 그곳에서는 반드시 물질 따위의 바깥에서 받아들임이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물질 등의 경계를 멀리 여의고서 안식 등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눈 등의 감관을 말하면 이미 바깥 물질 등의 받아들임이 포섭되어 있다. 그러므로 따로 바깥에서 받아들임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또, 안의 감관에 의하여 이름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안의 감관에 의하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바깥에서 받아들임에 의한 것이 아니니, 이런 이치 때문에 안의 감관만을 말하고 바깥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접촉]
[문] 무엇 때문에 닿음이라 하는가?
[답] 마주 닿는 것을 닿음이라 한다.
[문] 그것은 무슨 뜻인가?
[답] 생각하는 경계 중에서 의식과 상대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안식(眼識) 등은 그 빛깔 등의 모든 경계 중에서 피차에 상대하나니, 이를 닿음이라 한다.
또 닿음이 있다 함은 가깝게 마주 합쳐서 한 군데에 이르는 것 등이니, 이름은 다르나 뜻은 하나다.
또, 화합하여 의지를 내는 법이기 때문에 닿음이라 한다.
[문] 닿음의 인연을 설명하였으나 오히려 만족하지 않나니, 세 가지 법이 화합한 인연으로 닿음이 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세 가지 법의 화합이 있고서 닿음이 난다”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중에서는 다만 여섯 가지 인연으로 닿음을 낸다고만 말하므로, 그 때문에 이 중에서는 닿음이 나는 인연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
[답] 안의 인연을 말하면 바깥 것이 포섭되기 때문이니, 마치 저 북소리와 같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사람과 북과 북채가 합쳐서 소리가 나지만 다만 북 소리라고만 말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세 가지 법도 합쳐서 닿음이 나니, 비록 안에 의지하여 말한다 하더라도 바깥을 포섭하게 된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또, 같지 않은 이치는 마치 종자와 싹과 같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때[時]와 땅과 물 등이 화합하여 싹을 내는 인연이 있지만 종자가 훌륭한 원인이라 하여 종자는 싹을 낼 수 있다 하고 이 싹은 훌륭한 원인이어서 이것이 바로 벼 싹이다, 이것이 바로 보리의 싹이다 라고만 말하면서 함께 내는 원인은 말하지 않는 것처럼, 닿음 또한 그와 같아서 같지 않은 이치를 지녀서 비록 세 가지의 법의 화합함이 있기 때문에 나지만 오직 안의 감관만을 말하고 함께 내는 원인은 말하지 않는다.
또, 훌륭한 원인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비록 세 가지 일이 화합하여 닿음이 난다 하더라도 근본되는 것에 의하여 나게 되므로 안의 원인을 말하나니, 그것은 훌륭하기 때문이며 근본되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의식이 날 수 있다.
소경과 귀머거리 등은 의식 등이 없기 때문이며 빛깔 등의 법은 의식의 경계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근본되는 것에 의한 세 가지 법이 화합함으로써 그 법을 낼 수 있다.
비록 세 가지 법으로 난다 하더라도 근본되는 것이 더 훌륭한 것이므로 여래께서는 더 훌륭한 법만을 말씀하셨나니, 마치 여섯 가지 감관을 말씀한 것과 같다.
또, 비록 여섯 가지 감관을 말한다 하더라도 세 가지 법이 화합하여 닿음이 나는 것을 포섭하게 된다. 감관의 이름을 말하면 곧 여섯 가지 식(識)을 말한 것이니, 그것은 서로가 따르는 것이다. 눈 등의 감관을 말하면 곧 빛깔 등의 받아들임이 포섭되게 된다.
왜 그런가?
빛깔 등의 받아들임을 여의고서 눈 등의 감관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마치 여섯 가지 감관을 말씀하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러하다.
[문] 여섯 가지 감관은 닿음에 반연한다 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소경 등의 사람에게는 눈 등의 닿음이 없지만 그 밖의 사람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눈 등의 감관이 있으면 눈 등의 닿음이 있지만 눈 등의 감관을 여의면 눈 등의 닿음이 없나니, 마치 소경인 사람에게는 다만 의식만이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여섯 가지 감관은 닿음에 반연한다.
[느낌]
[문] 닿음은 느낌에 반연한다 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즐거움의 느낌[樂受] 등의 경계가 화합하여 즐거움의 느낌 등이 있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사람이 열병을 앓으면 열에 의하여 괴로움을 받으므로 눈[雪]과 찬 마니주(摩尼珠) 따위와 그들의 시원함을 구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추위에 의한 괴로움을 받으면 불을 구하고 옷을 구하고 따끈한 물 등의 온갖 따스한 닿음을 구하는 것과 같다.
[문] 닿음은 느낌에 반연한다 함은 그 이치가 옳지 않다.
왜 그런가?
닿음과 함께 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닿음은 느낌과 함께 난다. 이런 이치 때문에, 닿음은 느낌에 반연한다는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마치 두 뿔이 같이 날 적에 오른쪽 뿔은 왼쪽 뿔이 나게 하는 원인이 아니고 왼쪽 뿔은 오른쪽 뿔이 나게 하는 원인이 아닌 것처럼 이것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다른 인연에 의하여 나야 하고 닿음의 인연은 아니다.
또, 만약 함께 난다 하면 닿음은 느낌을 짓는 인연일 수 있다.
어떠한 이치 때문인가?
느낌은 닿음에 인연이 되어 줄 수 없나니, 느낌과 닿음은 서로 응하는 원인을 내기 때문이다.
[답] 비록 또 함께 난다 하더라도 하나가 원인이면 하나는 원인이 아니다.
이는 무슨 뜻인가?
두 가지 법이 있어서 비록 같이 난다 하더라도 하나의 법은 저것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둘째 번의 법은 그 법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광명과 불꽃이 비록 함께 난다 하더라도 불꽃은 바로 광명의 원인이지만 광명은 불꽃의 원인이 아닌 것과 같다.
또, 마치 해와 광명의 두 가지 법은 함께 나지만, 해는 광명의 원인이 되어 주고 광명은 해의 원인이 되어 주지 못한다.
또, 마치 싹은 함께 나서 그림자를 만드는 원인이 되지만 그림자는 싹의 원인이 아닌 것처럼, 닿음도 그와 같아서 비록 느낌과 함께 나지만 닿음은 느낌의 원인이 되고 느낌은 닿음의 원인이 아니다.
이 의심은 끊어졌으나, 또 다시 다른 뜻이 있다.
우리의 이 법 중에는 닿음은 함께 나지 않는 차례의 인연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우리의 이 법 중에는 느낌과 닿음이 한꺼번에 같이 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나는가?
과거의 시기에 의하여 곧 뒤의 때를 부여하나니, 느낌의 법이 원인을 지어서 차례로 반연이 생긴다.
이를 어떻게 아는가?
하나의 원인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닿음의 인연에 의하여 느낌을 낸다고 말하고 느낌의 원인에 의하여 닿음을 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만약 이 두 가지 법이 한꺼번에 같이 난다고 하면 서로의 인연을 말해야 하리라. 이런 이치 때문에 차례의 인연임을 말하고 한꺼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애욕]
[문] 느낌은 욕망[愛]에 반연한다 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느낌은 하고 싶음으로 인하여 즐거움을 따르게 되기 때문에, 욕망을 낸다.
[문] 만약 그렇다 하면, 괴로움은 나지 않아야 하리라.
[답] 여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문] 즐거움의 느낌을 구하는 이는 즐거움을 당하기 때문에 구하며, 괴로움을 구하지 않아야 함은 쓸데없기 때문이다.
[답] 비록 괴로움을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욕망이 있으며, 얻으려 하지 않아도 그 고통은 느껴지기 때문에 괴로움을 여의려고 하면 그것은 곧 바로 욕망이니, 그러므로 괴로움의 느낌[苦受] 또한 욕망의 인연이다.
또, 즐거움을 느끼는 이는 애욕을 바라는 인연이며, 괴로움을 느끼는 이가멀리 여의는 것도 애욕이 있는 인연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사람이 괴로움이 있어서 괴로움에 의하여 시달리면 모르는 결에 힘도 없이 몸을 살해하게 되는 것과 같나니, 괴로움을 구하지 않고 즐거움을 구하지 아니하여도 욕망의 인연이다.
또, 광명이 없는 소경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나니, 마치 저 목마른 사람이 어두운 밤에 똥이 섞인 물을 마시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와 같다.
[문] 빛깔 등의 경계는 모두가 욕망의 인연이거늘 무엇 때문에 느낌은 욕망에 반연하게 된다 함만을 말하는가?
[답] 즐거움의 느낌을 위하여 저 빛깔 등을 구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즐거움의 느낌으로 나는 것은 반드시 짝이 있다. 이런 이치 때문에 빛깔 등의 법에서 모두가 욕망의 마음을 내나니, 느낌이 더 나은 원인이 되고 빛깔과 향기 따위는 아니다. 그러므로 느낌은 욕망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빛깔 등은 말하지 않는다.
[잡음]
[문] 잡음[取]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가?
[답] 가까이 하면서 물들고 집착함을 모두 잡음이라 한다. 존재하는 것과 자량을 구하는 것 따위가 모두 물들고 집착함이며 물들고 집착하게 되어서 서로가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니, 그의 이름을 잡음이라 한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욕심의 잡음[欲取]과 소견의 잡음[見取]과 계율의 잡음[戒取]과 나의 잡음[我取]이다.
또, 욕심의 잡음이라 함은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와 공덕을 탐냄이며, 계율의 잡음으로 접촉하는 것은 계율을 지님으로써 세 가지의 소견인 소견의 잡음과 몸에 대한 소견[身見], 나라는 소견[我見]이 따른다.
또, 나[我]에 집착함을 나의 잡음이라 하며, 그 사람은 나에 집착하여 나를 위하여 즐거움을 구한다. 그 때문에 저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구하고 여러 하늘의 즐거움을 구하며, 혹은 여러 하늘들을 보려고 하여 고행을 하는 이러한 법들을 소견의 잡음이라 한다.
만약에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구하여 얻고서 그 법을 탐착한다면 이를 욕심의 잡음이라 한다.
미래세상의 욕심 경계가 되는 원인에 집착하여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멀리 여읠 수 없으면서 그와 같은 것 때문에 계율을 지니면, 이를 계율의 잡음이라 한다.
또, 자기 몸에 집착하여 두 가지 치우친 소견을 따르면, 이를 소견의 잡음이라 한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만약 아주 없음[斷]의 치우친 소견에 떨어져서 곧 다섯 가지 욕심 경계에 굳게 집착되면 이를 욕심의 잡음이라 하며, 만약 항상하다[常]는 치우친 소견에 떨어져서 다섯 가지 욕심을 탐내고 집착하며 훌륭한 데에 나기를 위하면서 그와 같은 것 때문에 계율을 지니면 이를 계율의 잡음이라 한다.
[문] 욕망은 잡음[取]에 반연한다 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욕망[愛]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욱 구하면서 더 자라게 하는 것이니, 마치 짠 물을 마시면 더욱 더 갈증이 남과 같다.
또, 욕망에 의하기 때문에 네 가지의 잡음이 있다.
이는 무슨 뜻인가?
욕망의 인연에 의하여 현재에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구하나니, 경전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욕망의 인연에 의하여 모든 욕심을 구하는 것을 욕심의 잡음이라 한다. 또, 욕망에 의하여 미래세상의 다섯 가지 욕심 경계를 구하고 그 욕망 때문에 계율을 지니게 되면 이를 계율의 잡음이라 하며, 그것은 다만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만을 구하는 것이다. 만약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얻으려 하면서 버리거나 떠나려 하지 않고 여러 하늘을 구하며 좋은 날에 제사지내면서 이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라 하여 이와 같이 나[我]에 집착하면 나의 잡음이라 하느니라.”
이를 욕망의 원인에 의하여 잡음에 반연한다고 한다.
[문] 어떠한 욕망이 어떠한 잡음에 반연하는가?
[답] 사랑하려 하고 잡으려고 하여 지니는 욕망은 계율의 잡음과 나의 잡음을 취득할 수 있고, 존재하는 것을 여의면서 하는 욕망은 소견의 잡음을 취득할 수 있다.
또 다시 중생에게 나[我]는 소견의 잡음을 사랑하고 낢[生]은 계율의 잡음을 사랑하고 느낌[受]은 욕심의 잡음을 사랑하나니, 온갖 잡음에서 소견의 잡음을 탐내며 집착한다.
또, 네 가지 잡음 중에서 욕심의 잡음과 계율의 잡음의 두 가지 잡음은 바로 사랑함[愛]이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무명이 근본이 된다.
[존재]
[문] 존재[有]라는 뜻은 무엇인가?
[답] 이것은 낼 수 있기 때문이니, 이것에 의하여 낼 수가 있고 이것으로 부지런히 닦을 수 있으며 이 법에 의하기 때문에 다른 법을 낼 수 있으므로 존재라 한다.
[태어남]
[문] 존재는 나기에 반연한다 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업에 의하여 낢이 있음은 먼저 말한 것과 같으며 지어감에 의하여 의식이 있는 이 가운데서도 역시 그러하므로 두루 갖추어서 말하여야겠다.
[문] 번뇌가 또한 낢의 인연이므로 경전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욕망의 원인으로 태어날 수 있거늘, 무엇 때문에 존재의 원인이 나기에 반연한다고만 말하고 잡음의 인연은 말하지 않는가?
[답] 더 나은 낢의 원인에 의하여 짐짓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이 중에서는 다만 낢의 법으로서 더 나은 원인만을 말한다. 무엇이 더 나은 것인가?
‘이것이 바로 지옥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따위의 갖가지 몸의 업은 가까운 원인으로 된 것이며 번뇌가 아니다.
그 갖가지 원인은 또 이미 낢이 있었고, 같은 류[同類]의 낢 중에서도 저마다 차별이 있나니, 이른바 집ㆍ힘ㆍ빛깔과 오래 삶, 짧게 삶이며 병이 있고 병이 없음과 받아쓰는 자량의 온갖 것이 차별이다.
이 중에서도 역시 그러하며 업이 갖가지이기 때문이니 이는 가까운 원인이며, 번뇌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의 인연으로 낢이 있고 잡음의 인연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문] 만약 존재가 낢의 인연이 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존재의 인연으로 난다고만 말하고 낢의 원인이 존재에 반연한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 일정함과 일정하지 아니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존재의 갈래가 있으면 반드시 낢의 갈래가 있지만 낢의 갈래가 있다 하여도 반드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저 둘째의 진리에 의하기 때문에 반드시 처음의 진리가 있지만 반드시 처음의 진리가 있기 때문에 둘째의 진리가 있지 아니함과 같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침내 해탈의 인연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존재 갈래의 인연에 의하여 반드시 낢의 갈래가 있지만, 낢은 존재에 반연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늙음]
[문] 늙음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답] 소멸하고 쭈그러져서 힘이 줄어짐을 늙어진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른바, 늙음이란 변하여 달라지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함이 있는 행은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나니, 만약 함이 있는 행이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여 변하여 달라짐을 늙음이라 하게 되는가?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법이 만약 변한다면 곧 둘째의 찰나 동안에서는 머물러야 하고, 법이 만약 둘째의 찰나 동안에 머무른다면 부처님 법의 이치가 아니다.
또, 허물이 있다.
변하여 달라진다고 하면 실제의 몸을 버리는 것이니, 만약 곧 앞의 법이 변하여 달라짐이 있다면 그 법은 곧 응당 본래의 몸을 버려야 한다.
또, 만약 그 법이 변하여 달라지지 않는다면 변함이 있고 달라짐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만약 법이 그 본래 몸을 버리지 않는 것이라면 역시 변하여 달라짐을 늙음이라 한다고 말할 수 없으리니, 그러므로 바뀌고 변함이 있는 것을 늙음이라 할 수 없으며 먼저 설명한 늙음의 모습이 바로 늙음의 뜻이다.
[문] 임자마음[心王]과 딸린 마음[心數]의 법에서는 어떻게 늙음을 아는가?
[답] 마음의 법을 봄으로써 법의 달라짐에 의지하고 머무르나니, 이른바 모든 감관과 네 가지 원소가 줄어지고 생각과 기억이 없어져서 온갖 법문 등에 소리를 들어도 분명하지 못하고 경계를 보아도 보기가 어렵다. 이와 같은 등은 마음에서 늙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죽음]
[문] 죽음이라 함은 어떠한 뜻이 있는가?
[답] 죽음이라 함은 목숨을 버리고 마침내 없어지며 다른 세상으로 떠나감을 바로 죽음이라 한다. 이와 같은 죽음과 먼저 설명한 늙음의 이 두 가지가 합쳐지기 때문에 늙어 죽음[老死]의 갈래라 한다.
또 다시, 말이 있다. 감관과 네 가지 원소 등이 뒷날 줄어져서 아주 작아 구별하기 어려움을 바로 늙음이라 하고 파괴되는 것을 죽음이라 하나니, 마치 줄기가 점차로 다하여지는 것과 같다.
또, 네 가지 원소가 파괴됨을 바로 늙음이라 하고 흩어져 없어짐을 죽음이라 하는데, 마치 썩은 헌 수레가 파괴되어 흩어져 없어지는 것과 같다.
또, 다섯 가지 쌓임[五陰]이 없어짐을 따르기 때문에 늙음이라 하고 없어지면 죽음이라 하나니, 마치 헌 집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문] 나기는 늙어 죽음에 반연한다 하는 이것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가?
[답] 저 법이 무너지기 때문에 이 법이 있게 되며, 만약 저 법이 없으면 역시 이 법이 없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처음 만들어진 병이 뒷날에는 헐어지고 또 먼저 만들어진 병이 뒷날에 깨지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중생에게 낢이 있으면 뒤에는 늙어 죽음이 있어서 이는 낢이 아닌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낢은 늙어 죽음에 반연한다고 설명한다.
[문] 만약 낳자마자 즉시 죽게 되면, 그 동안을 어떻게 낢이 늙어 죽음에 반연하겠는가?
[답] 목숨이 없어진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그곳에서 목숨이 있다가 앞에 나타난 목숨이 줄어져서 다섯 가지 쌓임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를 늙음이라 하며, 마치 저 비는 구름이 있기 때문에 내리고 구름이 없으면 비도 없지만 역시 구름이 있어도 비가 없기도 하는 것처럼 그것도 역시 그러하다.
[문] 무엇 때문에 함이 있음의 세 가지 형상인 법 중에서 한 곳에서만 오직 나기는 나기의 갈래임을 말하고 한 곳에서는 늙음은 늙음의 갈래가 됨을 말하는가?
[답] 이치를 따르기 때문이다. 법이 나려고 할 적에는 낢이 따르고, 법이 없어지려 할 때에는 늙음의 갈래가 따른다.
또, 늙어 죽음의 갈래는 무너짐의 법을 따르므로 낢의 갈래와 저 늙어 죽음은 서로가 어긋나며, 늙어 죽음의 두 가지 법은 서로가 함께 따르게 된다.
따른다고 함은 파괴됨을 따르기 때문이면 늙음이라 하며 죽음도 역시 그와 같나니, 그러므로 늙어 죽음을 합쳐서 한 갈래로 삼았지만 낢은 다른 갈래이다.
[문] 무엇 때문에 근심 따위는 갈래로 삼아서 말하지 않는가?
[답] 온갖 중생들에게 두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근심 등의 모든 법은 세 가지 세계에 두루하지 않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갈래로 삼아서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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