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가나찰소집경 하권
[부처님의 공덕]
그 부처님에게 이러한 공덕이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 깨달아 알아서 이렇게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해 비길 데 없었으며, 그 가운데서 스스로 모든 법을 깨달았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를 비방해 말하기를,
“그는 소리와 성품이 서로 응함이 있어 이렇게 남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어떤 출가한 사문이나 또 바라문이라도 총명하고 슬기롭기가 하늘에 사는 사람 같으며,
혹은 욕계(欲界)의 마군 천왕이나 범천(梵天)으로 색계(色界)의 묘한 사람도 이렇게 설법하였다.
“나는 또한 그 상을 보지 못하며, 또한 인연이 없으나, 그 말한 대로 그 상을 보지 못하고, 어떻게 등정각(等正覺)이라 하랴.”
또 이런 말을 하였다.
“그의 설법함을 보면 편안함을 얻어 스스로 즐기고, 등정각이 되어 또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 이르고, 또 나머지 집착이 없으리라.”
널리 말함은 계경과 같았다.
“그는 가장 묘하여 집착이 없고 흔들리지 않으며, 약간의 그의 이름도 없다.
마땅히 범(梵)의 수레를 굴리되 그 범세존(梵世尊)이 이 법을 굴리니, 이른바 현성팔품도(賢聖八品道)라, 그것을 어느 곳에서 굴렸는가?”
이런 말을 하였다.
“여기 대중에서 묘하게 굴렸고, 여기 대중에게 사자후 하였다.
또한 빈 곳에서 굴리지 않고 여기서 사자후해도 또한 두려움이 없었다.”
또 이렇게 말하였다.
“저 중생들을 항복 받고자 한 까닭에 최초에 두려움이 없었고, 둘째 모든 루(漏)가 아직 다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가?
이른바 유루(有漏)의 막힘 가운데 모든 두려움이 있으니, 만약 다시 끊으면 지혜가 구족하여 이에 제2ㆍ제3 나의 도를 말하는 법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말하자면 이러한 참다움이 있으니, 그것을 위하기 때문에 구한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이는 모든 내입(內入)을 지으므로 제3ㆍ제4의 얽힘이 되어, 거기 열 가지 일이 있어 사람의 수행하는 바가 있으므로 대중 가운데서 온갖 두려움이 없으며, 혹은 공손하고 삼가는 마음이 없나니, 이러한 위의가 없기 때문에 대중 속에서 두려움을 품는다.
비록 다시 공손하고 삼가는 마음이 있으며, 밝고 슬기로워 실다우며, 이런 위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는 또한 두려움이 있으며, 대중 속에서 또 공손하고 삼가는 마음이 있고, 비록 두려움이 없더라도 뜻에는 어리석고 미련함이 있다.
또 섬기고 공양하며 공손하고 삼가는 마음이 있더라도 자주자주 수행하지 않으며, 수행하더라도 또한 오래 영유하지 못하면, 그 속에 또한 두려운 마음이 있으며,
거기서 비록 오래 수행하더라도 뜻이 민첩하고 빠르지 못하면 그 속에 짐짓 두려움이 있다.
비록 민첩하고 빠른 뜻이 있어도 또한 친근하지 못하면 그 속에 짐짓 두려운 마음이 있으며,
비록 친근하나 또한 참다이 의지하지 못하면 그 속에 두려운 마음이 있으며,
뜻이 비록 착함을 의지하나 스스로 이 착함이 없으면 그 속에서 짐짓 두려운 마음이 있으며,
두루 이 뜻이 있으나 공교로운 방편이 없으면 그는 대중 가운데서 짐짓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이다.
세존께서 보살이었을 때 스승들을 섬기어 3계에 보배 깃대[寶幢]를 굳건히 하여 정광불(錠光佛) 이래로 삼먁삼불타 몇몇 겁으로 극히 청정하여 티와 더러움이 없고, 일체 어둠을 비추지 않음이 없으며, 그 각의(覺意)를 인연하여 이런 모양의 무리가 있으므로 하는 일을 성취하였으나, 그는 도를 위한 까닭에 91겁이나 지어 행하였었다.
그때 세존의 이름을 받고 이러한 밝은 지혜를 일으켜 성불하였으며, 지혜와 서로 응하여 뜻을 모두 깨달았다.
그 착한 뜻에 의지해 일체를 모두 성취하여 뜻에 집착함이 없이, 그는 제일로 더러움에 물듦이 없고, 또한 두려운 마음을 내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삼매에 들어 그 지혜에 수승하였고, 무수한 세상으로 훌륭함이 있었다.
이렇게 관찰하여 비록 어려운 물음이 있을지라도 마침내 기연미연함이 없고 글자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때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몸이 사자왕과 같이
저 동산을 거닐며
뭇 짐승이 모두 놀라듯
각각 이리저리 달아났네.
이렇게 물듦이 없고
대중에게 용맹을 나누었네.
나고 죽음의 근원을 싫어해
법으로 천상과 인간을 건졌네.
이때 세존께서 일체 세간이 초목과 같음을 관하셨다.
이른바 “어떻게 시험해야 하는가? 최초의 씨앗에 5행(行)이 있는데 밖에 있는 초목과 같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 어떤 다섯 가지가 있는가?
또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나무들은 어떻게 서로서로 의지하는가? 고제에 의해서 끊는[苦諦所斷] 가지가지 번뇌의 결(結)을 일으키는데 바깥에도 역시 다섯 가지 행(行)을 일으킴이 있다.
저 고지(苦地)에서 생기는 것을 관해 보면 모두 바깥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안에서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식처(內識處) 등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관함이 있다.
이와 같이 바깥에 머무는 것도 종류에 따라 곧바로 생겨난다.”
이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치 해와 달이 나타나도 빛이 없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각각 서로 의지하는 것이다.”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깥에 의지해서도 역시 생겨난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답한다.
지금 이것은 서로 의지하지 않는다. 밥이 물에 젖고 불에 의해 볶아져도 있는 곳에서 형체를 유지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혹은 바람에 불리기도 하는데 마치 땅에서 생겨난 나무가 바람을 따라 오고 가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모두 알 수 있다. 몸에 바람이 닿고 귀에 들리는 것이 있을 때에도 또한 알 수 있는데 그것을 부드럽다고 한다.”
딱딱한 것[堅]은 바깥을 의지하는데 그것도 지(智)가 있는가?
이와 같이 어지러운 생각은 외과(外果)에 의해서 생기는 것의 경우, 모두 바깥이 안을 반연한다고 관찰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체가 사유색상(思惟色想)이 아닌가?
이와 같이 관하지는 않는데 4대를 관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경계를 모두 관찰한다.”
혹은 과의 안식이 많은 과를 생기게 한다고 관하였다. 식을 우두머리로 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너져서 없어진다.
어떤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깥에서도 많은 과가 생기게 한다.
비유하면 저 반은 푸르고 반은 노란 색과 같고, 같은 뿌리의 나무에서 많은 과실이 생기는 것과 같다. 가을에는 과실이 없는데 혹은 때에 따라 생긴다.
이 생사의 나무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몸이 가장 근본이 되고 근(根)은 지말적인 것이 된다.
비유하면 삼매의 경계와 같다. 이 때문에 식시과(識施果)가 으뜸이 된다. 이와 같이 지각해서 안다.”
눈을 저 나무에 비유하면 저 안식에 포섭되는 색의 경우, 그 근의 지금의 색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른바 앞에서 관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관(觀)이 바로 묘한 것이 되는데 그것은 이와 같이 나타나고 여기에서 다시 나타난다. 생겨난 모든 종자가 점점 자라고 늘어나서 그것에서 생겨난 것이 과실이 된다. 시기에 따라 시듦을 알 수 있다.
저 과(果)는 인(因)이 되는 것이 없는데 이 과(果)와 같다. 이른바 ‘마음의 때에 오염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안식이 모든 것을 안다.”
여기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저 색(色)이 저 과(果)를 반연해서 생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의식을 반연한다.”
이러한 생사의 나무가 있는데 저 안식을 우두머리로 삼았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유하면 태(胎)가 점점 자라는 것과 같은데, 그곳에서 안식이 생긴다. 이렇게 해서 안식이 있다.”
어떤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안식은 중간에서 죽지 않는다. 신근(身根)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근은 만드는 것이 없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떤 경우 근을 의지하지 않는 바깥이 과(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똑같이 과실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똑같은 인체의 신근 등을 말하였는가?
왜냐하면 과거를 의지하지 않는 것은 근이 없기 때문이다. 풀에 열매가 맺히면 근이 없어진다.
또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깥에는 정(情)이 없지만 안에는 정(情)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정상(情想)에 과실이 있는가?
비유하면 바깥에 있는 꽃의 열매와 같다. 이 종자의 과실도 이와 같다.
이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정(情)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정이 같은 것인데, 이 가운데는 실로 걸림이 없다.”
어떻게 사념해야 하는가?
어떤 곳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곳에는 머무는 곳이 없는가? 답한다.
비유하면 저 처소가 없는 곳이 바로 청정한 곳인 것과 같다. 바깥이 무너져 없어짐이 없어서 바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4대(大)에 소의(所依)를 더하는 과(果)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다.”
이를 통해 다시 알 수 있는 것은 지은 행업은 바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안에 가지 않음[不行]이 있는 것은 나무라 하고 가는 것은 나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이 지(地)에는 무너짐이 없도록 유지함이 있는가? 이 지(地)에는 무너짐이 없도록 유지함이 있는가?
이 지에는 따뜻한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저 딱딱한 모습에 의지하는 경우에는 곧바로 바람에 불린다. 그러므로 곧바로 알 수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바깥에 있는 약초 나무는 무상하고 단절되는 것이므로 무너짐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인연은 무상(無常)한 것이고 고(苦)이고 공(空)한 것이다. 이것도 마찬가지이다’고 관해야 한다.
그러나 외공(外空)은 있지 않다. 중생도 이와 같다.
비유하면 아(我)가 없다고 관하는 것과 같은데 안[內]을 관하는 것도 이와 같다.
하물며 안에서 만드는 것이 있어서 안에 있는 생각을 무너뜨리겠는가? 그것은 모두 바깥에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젖은 나무의 씨앗이 어느 때에 곧바로 싹이 나는 것과 같은데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근(根)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은 마치 신심(身心)이 법(法)에 의지해서 왕래하고 움직이는 것과 같아서 이것은 모두 의지하는 것이 없다.
또 생명이 따뜻한 명식(命識)과 같은데 이것도 마찬가지여서 시작과 끝이 없다.
저 지향하는 성품이 나아감을 관해 보니
바깥과 나무와 풀은
실로 공하여 과실이 없으니
법에서 마땅히 분별해야 하네.
이미 무너져 버린 저것을 보고
몸도 같다고 사유하면
저 진로(塵勞)의 얽어맴이 없어져서
5근(根)이 영원히 없어지리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