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상자 Mala kutija / 바스코 포파
작은 상자는 젖니를 가지고 있네
작은 키
작은 길이, 조그만 공허
그게 가진 건 이게 전부지
작은 상자는 점점 커져서
이제 상자 속에 벽장이 들어 있단다
전엔 벽장 안에 상자였는데
상자는 커지고 또 커지고 또 커져서
이제는 상자 속에 방이
집과 마을과 땅이
예전엔 상자가 들어 있었던 세계가 상자 안에 들어 있단다
작은 상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는
그때로 돌아가길 갈망했나 봐
작은 상자는 다시 작은 상자가 되어버렸지
이제 작은 상자 속에는
엄청 작은 전 세계가 들어 있다네
당신은 그걸 쉽게 호주머니 안에 넣을 수 있고
쉽게 훔치거나 쉽게 잃어버릴 수도 있어
작은 상자를 조심해 (김승일 옮김)
[단상] 바스코 포파(Vasko Popa, 1922~1991)는 옛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공화국) 출신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서 간이하고 창발적인 상상으로 민족어의 숨은 잠재력을 발굴한 시인이다. 그는 세르비아 전래의 수수께끼, 주문, 잠언, 자장가 등에서 주로 시적이거나 초현실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절제된 형식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추구하였다. 시집으로는『나무 껍질』(1953),『불안의 들판』(1956),『부차적 하늘』(1968),『곧추선 땅』(1972),『늑대의 소금』 등 8권이 있다. 이들은 각기 특색 있는 주제와 형식을 갖고 있으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순환적 비전 속에 연결되어 있다.「작은 상자」는 상자를 의인화하여 인간의 삶과 내면 심리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텍스트다. 짧은 시이지만 유한과 무한, 부분과 전체, 자아와 세계라는 철학적 문제들을 동화적 단순성으로 풀어낸 수작에 속한다. 딴은, 포파의 시가 냉전 시대 동유럽에서 검열을 피하면서도 깊은 존재론적 성찰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예의 우화적이고 역설적인 화법 때문이다.
상자는 ‘그녀her’로 명명되고, 갓 태어난 아기의 ‘젖니’로 비유되어 있다. 이런 의인과 활유의 수법은 자연과 사물의 인간화-인격화를 말한다. 상자는 작고 비어 있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들이 들어 있다. 상자는 아이처럼 자라나 수동의 입장에서 능동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상자는 더 자라나 커지고 하여 이제는 방과 집, 지구와 세계의 모든 것을 감싼다. 그러나 상자가 어린 시절의 그리움을 떠올리게 되면 다시 작아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부분으로서 전체를 나타낸 미니어처로서 세상 모든 것의 축소판이 된다. 작은 상자는 누가 몰래 훔쳐갈 수도 분실할 수도 있게 되어 값진 것일수록 잃어버리기 쉬운 형태로 존재한다. 시인은 마침내 소리 높여 외치며 시상을 갈무리한다.“작은 상자를 조심해” 이 마지막 말은 독자에게 보내는 하나의 경고 메시지로서 직접 말을 건네는 방식을 취한다. 명령형(“Take care~”)으로 전환된 이 구절은 단순히 조심하라는 게 아니다. ‘삶/존재/기억/정체성’처럼 눈에 잘 띄지 않은 본질적인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자의 성장 서사를 다룬 이 시에서 상자는 거듭 자라나 세상을 담을 만큼 커진다, 커졌다가 다시 작아지는 과정과 존재의 순환 구조(小→大→小)를 보여주는 이 시는 동시적 발상에서 비롯된다. 허나 여기에는 초현실주의적인 노벨티(novelty)가 있다. 대소와 유무, 내외와 중변(中邊) 등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유한과 무한, 부분과 전체, 자아와 세계의 관계는 또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보르헤스의 소설「알레프」에는 ‘알레프(Aleph)’란 작은 구슬이 나온다. 지름 약 2~3cm 크기의 이 구슬은 작지만 그 안에는 축소되지 않은 우주 전체와 모든 시공간이 담겨 있다. 지하실 계단 밑에 놓여 있는 이 빛나는 구슬, 아니 작은 상자를 통해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장소와 사건을 동시에 보게 된다. 수학 집합론에서 말하는 '알레프 제로'는 무한집합의 크기를 나타낼 때 사용되며 가장 작은 무한을 나타낸다. 이에 비해 시는 알레프의 현현(epiphany)이다. 시의 기원과 신비, 전통과 새로움이 생성되는 지점으로서 알레프는 모순의 합일, 반대의 일치에 수반되는 시인의 눈이며, 고유한 시선으로서 현람(玄覽)이다. 알레프의 시인은 최대한의 삶을 최소한의 언어로 담아내는 문제적-예외적 개인이다. 누구나 그 안에 살고 있지만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시와 삶.
작은 상자는 인간의 내면과 의식 그리고 시와 예술의 메타포에 해당한다. 그 작은 상자의 에너지와 형태는 동서남북과 춘하추동, 원형이정(元亨利貞)이 그렇듯이 사-각형이다. 이는 어느모로 하이데거의 사방세계(Geviert-Welt)를 연상하게 된다. ‘땅/하늘/신적인 것/죽을 자-인간’이 그것. 이 네 가지 즉 사방이 서로 어우러지며 사물의 면목과 본래적인 세계를 열어가는 우주적 공간이다. (작은) 상자를 포함한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항아리란 작은 상자 안에는 빛과 흙, 장인(匠人)과 신을 마주하는 마음이 혼재해 있다. 천-지-신-명이 숨어 있다. 이 존재와 사물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는 자가 시인이라면, 그에겐 크고 화려한 것(집, 도시. 세계) 보다 그 모든 것을 응축한 작고 연약한 것(상자, 자아, 내면)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간요하다. 작은 상자 안의 말을 조심해! 다음은 바스코 포파의 시론 일절이다.
“당신은 종종 시를 위한 단어들을 어디에서 취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 당신의 목 안에 박혀 있는 단어의 뼈Wort-Knochen가 있다. 당신은 그것들이 목에 걸려 질식할 수도 있다. 당신의 마음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단어의 작열함Wort-Glut이 있다. 당신은 그에 타 죽을 수도 있다. 당신의 머리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단어의 뱀들Wort-Schlang이 있다. 당신을 위하여 당신의 마적(魔笛)을 연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단어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무엇보다도 단어-열쇠Wort-Schlüssel가 있다. 이 단어-열쇠들은 살아 있는 유일한 단어들이며 그러한 것들로 당신은 한 편의 시를 지을 수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언제나 당신에게 예기치 않게 오지만 그러나 결코 우연히 오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당신의 머리 속의 창궁에 별처럼 혹은 성좌처럼 돌연히 나타나 미래의 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또다른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서 빛난다. 이러한 단어들은 그 시의 전조로서 빛나는 것이다. 이러한 단어들만을 식별해내야 한다. 그것들은 마치 당신의 단어들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당신을 당황하게 한다. 그리고 당신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선가 이미 들었던 것처럼 희미하게 그것들을 기억한다. 다만 장소와 시간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당신에게 언제나 희미한 채로 남아 있으며, 그 시를 집필한 후에도 역시 명백해지지 않는다.”(『언어의 세계』제2집, 1983년 가을, 청하. 조영필 브런치에서 가져옴)
첫댓글 시인은 마침내 소리 높여 외치며 시상을 갈무리한다.“작은 상자를 조심해” 이 마지막 말은 독자에게 보내는 하나의 경고 메시지로서 직접 말을 건네는 방식을 취한다. 명령형(“Take care~”)으로 전환된 이 구절은 단순히 조심하라는 게 아니다. ‘삶/존재/기억/정체성’처럼 눈에 잘 띄지 않은 본질적인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이다. - 김상환 시인님의 포파에 대한 시평은 깊고 높다. 포퐈는 갇힌 존재가 아니라 열린 존재로서의 시의 비밀을 드러낸다. 어쩌면 우주는 상자 속이거나 상자 밖일 것이다. 시가 언어 이전이거나 이후이듯, 인생이 생이거나 사이듯이 - 참 아름답고 슬프다.
함께 걷는,
이 길 없는 길이 아름답고 슬프지만, 마냥 좋습니다.
저간의 관심과 응원에 감사!
닫힌 열림 혹은 작은 상자로서의 시가, 시의 상상적 우주와 세계가 內外와 前後, 生死의 경계와 리멘(limen, 玄關)에 있다면, 침묵의 시는 명사가 아니라 전치(사)의 현상에 있음을 압니다. within, into, before, beyond, against, between, toward, around, through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