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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등론석 제14권
24. 관성제품(觀聖諦品)
이제 이 품에서도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여 4성제(聖諦)에 자체의 뜻이 없음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자부 사람이 말하였다.
“만약 4성제가 공하여 자체가 없다면 그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모든 법이 공하여
생기와 소멸이 없어
4성제에 자체가 없다고 말하면
그대는 이와 같은 오류를 갖게 되네.
[釋] 그 말한 바의 도리에 따라 중생들을 이해시키려고 한다면 그 사실은 옳지 않다. 공하기 때문이니,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오류를 초래한다. 생기와 소멸에 자체가 없다면 고체(苦體)에도 실체가 없다. 고제에 자체가 없으므로 집제(集諦)를 일으키더라도 실체가 없다. 집제에 자체가 없으므로 멸제(滅諦) 역시 실체가 없다. 멸제에 자체가 없기 때문에 고(苦)를 소멸하는 도제(道諦)에서는 정견(正見)을 으뜸으로 삼지만, 도제에서 닦은 것도 또한 실체가 없다.
위의 게송에서 설한 것처럼 그대는 이러한 오류를 갖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존재는 삶과 죽음을 두려워한다. 중생은 4제(諦)의 경계에 대해 부지런히 행하고 정진하여 고제를 마땅히 알아야 하고, 집제를 끊어야 하며, 멸제를 증득해야 하며, 도제를 닦아야 할 것이다. 이 4성제 모두 자체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없는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알고 끊고
닦고 증득하는 작업(作業) 등은
4성제에는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얻을 수 없네.
[釋] 4성제란 성인으로 상속하는 실체를 능히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성제(聖諦)라고 한다. 또한 제(諦)란 진실의 뜻이다. 만약 4성제가 없다고 말하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4성제에는 자체가 없기 때문에
4과(果) 역시 존재하지 않네.
4과에 자체가 없기 때문에
4과에 머무는 자 역시 없네.
[釋] 여기에서는 말하자면, 신견(身見)ㆍ의견(意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 등의 여러 허물을 땔감이라고 한다면 4성제는 불이라는 것이다.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多含)ㆍ아나함(阿羅含)ㆍ아라한(阿羅漢) 등이 4성제의 불이 능히 번뇌를 태워 없애는 것을 보는 것이다. “4과(果)에 무는 자”란 말하자면 역시 수다원도에 의해 수다원과를 얻는 것을 말한다. 또 그 이름이 다른 연과 화합하지 않으므로 하늘의 악마도 가진 것으로써 파괴할 수 없다. 또한 계ㆍ정ㆍ혜ㆍ해탈ㆍ해탈지견 등과 함께 화합하므로 이름하여 승(僧)이라 한다. 이 승은 또한 무상복전(無上福田)이라고 한다. 그대가 만약 승보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옳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승보(僧寶)가 있지 않다면
8인(人)1)이 없네.
4성제에 만약 실체가 없다면
또한 법보(法寶)도 없네.
[釋] 만약 승보에 4도(道)와 4과(果)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또한 승보가 없으므로 역시 법보(法寶)도 없을 것이다. 법보가 없으므로 또한 불보(佛寶)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법보와 승보가 없는데
어떻게 불보가 있겠는가?
만약 삼보가 모두 공하다면
일체 존재를 파괴하게 되네.
[釋] 불(佛)이란 4성제를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佛)이라 이름한다. 어째서 보(寶)라 하는가?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의 게송에서 “나는 이해해야 할 것을 이미 이해하였고, 수행해야 할 것을 이미 수행하였고, 끊어야 할 것을 이미 끊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불이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모든 법에는 자체가 있어 거기서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므로 불이라 이름한다.
경전의 게송에서 “자체가 없는 법 중에 남김없이 깨달으면 모든 법을 평등하게 깨닫기 때문에 불이라 하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깨달은 경계가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위의 게송에서 “만약 삼보가 모두 공하다면 일체 종재를 파괴하게 되네”라고 말한 것처럼 주장에 오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원인과 결과의 자체가 공하다면
법과 법 아닌 것 또한 공하니
세간의 언설 등은
이와 같이 모두 다 파괴될 것이네.
[釋] 여기에서는 그런 말을 한 자는 오류를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이 오류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만약 공함을 세우지 않고 생기하고 소멸하는 모든 체에 자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대는 오류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증험하겠다. 모든 체에 자체가 있어 생기와 소멸이 있기 때문에 만약 모든 체에 자체가 없다면 생기와 소멸은 볼 수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인용한 주장은 모두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공(空)과 공의(空義)가
모든 희론을 능히 소멸함을 이해하지 못했네
그런데도 공을 부정하려 하는가?
[釋] 공은 모든 집착과 희론을 잘 소멸시킨다. 그러므로 공이라고 이름한다. 연기하므로 공함을 아는 지혜를 공의라 한다. 그대가 지금 진실한 모습을 파괴하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맨손으로 허공을 치는 것과 같아서 쓸데없이 스스로 피곤할 뿐 끝내 허공에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못한다. 그대가 만약 위의 게송에서 “만약 모든 법이 공하여 생기(生起)도 없고 소멸도 없다.”고 말한 바와 같이 그대가 이와 같이 말한 것도 또한 쓸데없는 노력일 뿐 중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2제(諦)에 의거하며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고
둘째는 제일의제이시네.
[釋] 세제란 세간의 언설을 말하는 것이다. 색(色) 등이 일어나고 머무르고 소멸하는 모습에 대해 설하는 것과 같다. 또 제바달다가 가고 오는 것, 비사노밀다라(毘師奴蜜多羅)가 먹는 것, 수마달다(須摩達多)의 좌선, 범마달다(梵摩達多)의 해탈 등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이른바 세간의 언설이며, 세제라고 이름한다. 이들을 제일의제라고 하지 않는다.
제일의제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것은 제일(第一)의 뜻이 있으므로 제일의(第一義)라고 이름한다.
또 그것은 최상의 무분별지(無分別智)이자 진실의(眞實義)이므로 제일의제라고 이름한다. 진실이란 다른 것에 연하지 않는 모습이다. 혹은 진실에 머물러 진실의 소연(所緣) 경계에 대해 분별이 없는 지혜를 제일의제라고 이름한다. 저 일어남 등을 말한 순서대로 부정하여 일어남이 없다고 설한 것과 문(聞)ㆍ사(思)ㆍ수(修)의 3혜(慧)가 모두 제일의제이다.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제일의제를 말한다. 능히 제일의 부정으로써 전도되지 않은 방편의 인연을 짓기 때문에 이러한 까닭으로 또 제일의제라고 하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사람들이 2제(諦)의
차별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진실하고 깊은
불법(佛法)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네.
[釋] 여기에서는 어떤 사람이 2제의 차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경계의 모습에 착란하지 않아도 올바르지 않은 사유가 많은 이러한 사람은 깊은 불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체가 있다거나 자체가 없다는 집착된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깊다’란 건너기 어렵다는 뜻이다. ‘불(佛)’이란 앞에서 이미 이해한 것과 같다. ‘법’이란 천인(天人)에게 감로의 법을 증득하게 하는 것이다. ‘행(行)’이란 이와 같은 깊고 깊은 경계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끊어야 하고, 증득해야 하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도되지 않은 가르침을 설하는 것을 감로법(甘露法)이라 한다. 이 사람은 제일 깊고 무분별지의 되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록 전도되지 않은 가르침을 행하고 진실한 법의 경계에 머물러도 생기도 없고 소멸도 없는 법의 실체에 대하여 중생에게 설법을 하더라도 경계가 아닌 것에 대하여 경계의 견해를 일으킨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는 『중론』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제 중에 생기와 소멸 등의 법이 모두 없다”고 말하고 이대로 분별한다면 그 오류도 위의 게송에서 “모든 법이 공하다면 생기도 없고 소멸도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자가 있다면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세제에 수순하여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고, 생기ㆍ머묾ㆍ소멸 등의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고 설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혜가 없는 자는 제일의제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일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허망한 분별을 짓는다면 존재의 광야 한가운데에 떨어져서 빠져나올 기약이 없을 것이다.
자부 사람이 말하였다.
“만약 제일의제로써 해탈을 얻는다면 2제(諸)를 말해서는 안 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세제(世諦)에 의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얻을 수 없고
제일의제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끝내 열반을 얻지 못하리.
[釋] 세속제(世俗諸)란 모든 법은 생기하지 않으므로 본성이 공하지만 중생은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망령되이 집착을 내므로 세간에서 진실로 삼는 것이다. 모든 현성((賢聖)들은 세간의 전도된 성품을 요달하고 있으므로 모든 법이 다 공하며 자성이 없음을 안다. 성인들은 이 제일의제를 또한 진실로 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 2제에 의거하여 설법하셨다.
제일의제란 무엇인가?
모든 언어의 길을 널리 초월하였기 때문이고, 모든 소승이 분별한 모든 분별의 원인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세제가 없다면 제일의제를 증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번뇌와 생기 등이 소멸한 것이 열반의 모습이다. 만약 제일의제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열반의 도(道)를 끝내 얻을 수 없다. 혹은 외도 중에 총명하다고 자만하는 자가 있어서 다음과 같이 분별하였다.
“공한 것과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무엇이 공하다는 것인가?
5음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집착하는 견해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공하지 않은 것인가?
5음이 공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보고 내가 지금 보면 내가 장차 보게 될 이러한 5음이 공하다고 보지만 5음을 여의고서는 공이 있을 수 없다. 공 중에 5음을 보고 5음 중에 공을 본다.”
이러한 견해는 올바른 사유가 아니며 증상만(增上慢)2)이라 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혜가 적고 어리석은 자는
악견(惡見)으로써 공을 파괴하니
마치 뱀을 잘못 만지는 것과 같고
법답지 아니한 주문을 지니는 것과 같네.
[釋] 여기에서는 무분별의 혜명(慧命)에 대해 장애를 짓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악견이 되며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다. 다시 자체가 없는 것에 대해 자체가 있다는 견해를 일으켜도 또한 공을 파괴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뱀을 잘못 잡은 사람이 스스로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다. 마치 주문을 지는 사람이 주문 법에 의하지 않아 스스로 손상을 입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공을 잘못 이해하는 자는 갖가지 이롭지 못한 일을 짓게 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까닭으로
회향하는 마음으로 법을 설법하지 않으셨네
부처님께서 이해하신 심오한 법에
중생은 들어갈 수 없네.
그대가 지금 이와 같이
공에 대해 비방하여
법(法)에 생기와 소멸이 없고
나아가 삼보를 파괴한다고 말하네.
[釋] 비방이란 모든 것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의 성냄과 분노 때문에 공에 대해 오류를 지우려고 하지만 공은 끝내 그대가 말한 오류를 입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실체에 자체가 없다면 제일의제 중에 공하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자체가 없다는 뜻은 나 역시 사용하지 않는다. 집착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부 사람들이 분별한 공을 부정하기 위하여 지금 이 공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공에 자체가 없다고 말해도 공에 집착하여 이러한 분별을 짓는 것은 아니다. 공은 이제 마땅히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보적경(寶積經)』 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가섭(迦葉)에게 말씀하셨다. ‘차라리 아견(我見)을 수미산만큼 일으킬지라도 증상만(增上慢)을 지어 공에 대한 견해를 일으키지 않겠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색이 공하다는 견해를 내도 안 되고, 색이 공하지 않다는 견해를 내도 안 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공에 대해 옳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옳을 것이고
공에 대해 옳지 않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옳지 않네.
[釋] 여기에서 말해지는 것은 공을 바로 본다면 어떤 것들이 ‘모든 것이 옳다’는 것인가? 생기 등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다는 것인가? 이른바 유무(有無)등과 눈 등은 모두 자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마치 허깨비의 사내와 같이 사내 자체가 공하다. 왜냐하면 모든 뭇 연의 모임에 의지하여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실체인가?
실체는 이른바 고(苦)이다.
무엇이 고인가?
이른바 이 생기를 고라 하며, 고 등의 작용을 보는 것을 고제(苦諦)라 한다.
무엇이 집체(集諦)인가?
이른바 고의 원인을 일으키는 것을 집제라 한다. 다시 집제란 이른바 여기에서 고가 일어나기 때문에 집(集)이라 한다.
혹은 집 등의 작용을 보므로 멸제(滅諦)라 한다. 고를 소멸하는 원인인 방편을 얻으므로 도제(道諦)라 한다.
만약 도(道) 등의 작용을 보므로 도제라 하면 그 4성제가 이와 같이 존재하기 때문에그 법이 성립한다.
일체의 작용에 대해 자연스레 깨달으므로 이에 부처라 한다. 성문에 수순하여 말하면 경에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고에 대해 나는 예전에 듣지 못하였다. 모든 법에는 눈의 생기[眼起], 지혜의 생기[智起], 진리를 아는 지혜의 생기[明起], 깨달음의 생기[覺起]가 있으니, 이들 실체의 자체는 모두 허깨비와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제일의제 중에 생기 등이 없다고 보면 “4성제를 본다”고 한다. 마치 『문수도행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모든 법에 생기가 없음을 본다면 고제(苦諦)를 이해할 것이다. 만약 모든 법에 머묾이 없음을 본다면 곧 집(集)을 끊을 것이다. 만약 모든 법이 궁극적으로 열반임을 본다면 멸제를 증득할 것이다. 무수사리여, 만약 모든 법에 자체가 없음을 본다면 도(道 )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마하연(摩訶衍) 중에 4성제의 도리를 이룰 수 있다. 도리를 이루기 때문에 지혜를 이루며, 지혜를 이루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다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공을 비방하면 위의 게송에서 말한 것처럼 “만약 공에 대해 옳지 않다고 하면 모든 것이 옳지 않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오류를 지녔으면서도
나에게 씌우려고 하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있으면서
스스로 타고 있는 것을 망각하는 것과 같네.
[釋] “그대가 공에 과실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제 다음과 같이 설명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대가 만약 모든 법에
자체가 있다고 본다면
모든 실체에 인연이 없어
도리어 자연(自然)의 견해를 이루게 되리라.
[釋] 만약 모든 실체에 자체가 있다고 본다면 모든 실체는 인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인연을 상대하는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모든 실체에 자체가 있다고 본다면 이제 오류를 설명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원인과 결과에 상대가 없다면
작업하는 자와 작업
나아가 생기와 소멸 등의
모든 법은 다 허물어지네.
[釋] 여기에서는 인연을 상대하면 인과(因果) 등의 뜻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대는 어찌하여 공의(空義)에 대해 허망한 분별을 내는가? 비유하면 어린애가 그림 속의 야차(夜叉)를 보고 공포심을 내고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 만약 색 등은 공하여 허공의 꽃과 같이 자체가 있지 않다고 분별하는 자는 이 공의에 대해 두려움을 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뭇 인연을 따라 생기하는 법을
나는 바로 공하다고 말하니
단지 가명자(假名字)이고
또한 중도(中道)의 뜻이다.
[釋] 눈 등의 모든 실체가 연(緣)에서 일어난다면 모든 연 중에 눈 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으면서 없는 것도 아니며,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으며, 자기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또한 자타(自他) 동시도 아니고 자타 동시가 아닌 것도 아니다. 연기에 따라 존재하는 것은 제일의제 중에 자체가 생기하지 않으며 세속제에 의거하므로 눈 등이 생기한다. 내가 “이 생기는 것은 공하다”고 말하면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경전의 게송에서 “인연을 따르는 것을 발생이라 이름하지 않으니 발생법에는 자체가 없네. 만약 연에 속하는 존재가 있다면 곧 공하다고 이름하네”라고 한 것과 같다. 세간과 출세간은 단지 가설로 시설된 것이다. 그 공으로 이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름하여 불방일(不放逸)이라 한다.
『능가경』에서 “자체는 생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무기(無起)의 진리는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신 “나는 모든 법이 공하다고 말한다”고 한 것과 같다. 만약 연에서 발생한다고 말하면 또한 이것도 공의 다른 이름이다. 왜냐하면 시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법은 모두 세속에서 지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명자(名字)를 시설하여 중도(中道)라 한다.
이는 『마하반야바라밀다경(摩訶般若波羅蜜多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무엇을 중도라 하는가?
생기와 비생기 및 존재와 비존재 등의 치우침을 여의었기 때문에 중도라 한다. 이른바 모든 실체에는 생기도 없고 생기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존재도 없고 비존재도 없으며, 상주도 없고 무상(無常)도 없으며, 공(空)도 없고 공하지 않는 것도 없다. 중도를 닦는 자는 관찰할 때 눈에 실체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눈에 실체가 없다고도 보지 않는다.”
또한 『보적경(寶積經)』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있다는 것도 하나의 치우침이며 없다는 것도 하나의 치우침이다. 양자를 떠난 중간에는 바로 색도 없고 수ㆍ상ㆍ행ㆍ식도 없다. 이와 같은 중도를 이름하여 실상을 증득하는 방편이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일찍이 어떤 법도
인연에 따라 생기한 적이 없었네
이와 같다면 모든 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네.
[釋] 여기에서 인연에 따라 생기한 사물은 비유하면 허깨비 등의 장부와 같은 것이어서 필경에는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허공 등과 같이 인연에 따라 생기하지 않는다. ‘연에서 생기한 법’을 이유로 든다면 그대의 주장 중에 일부 뜻으로서 그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대가 제시한 이유의 오류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허공의 오류는 이미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큰 오류가 이제 그대 자신에게 있기에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오류가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일체가 공하지 않다면
생기도 없고 또한 소멸도 없으니
4성제에 자체가 없어
오류가 도리어 그대 자신에게 있게 되네.
[釋] 이 주장은 무엇인가? 만약 고가 공하지 않아 자체가 있다면 작용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작용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생기하지 않는다. 존재에 집착하는 것은 세속제에서도 믿을 수 없는데 어찌 제일의제이겠는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연(緣)에서 생기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고(苦)가 있겠는가?
무상(無常)은 곧 고(苦)를 뜻하는 것으로서
고에는 자체가 없네.
[釋] 여기에서 만약 인연에 따라 생기하지 않는다면 곧 상주하는 것이다. 상주한다면 고가 아니다.
경량부 사람이 말하였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라면 고이므로 무아(無我)이다. 무아라면 곧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 고에는 자체가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것은 주장과 상응하지 않는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고 자체가 이미 없는데
어디에 집(集)이 있겠는가?
집이 있지 않으므로
이는 곧 공에 대해 논파하는 것이다.
[釋] 여기에서는 고 자체가 생기하지 않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자체가 있다면 인연을 상대하지 않고 존재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고(苦)에서 만약 정해진 성품을
앞서 보지 못한다면
지금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 성품은 변이(變異)하지 않기 때문이네.
[釋] 만약 먼저 고의 성품을 보지 못한다면 성과(聖果)를 얻을 때에도 역시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품이 만약 결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고에 자체가 있다면
소멸이 있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되네
그대가 자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까닭에
곧 소멸의 실체를 논파할 것이네.
만약 고에 정해진 성품이 있다면
도를 닦는 일도 없네
도를 닦는다면
정해진 성품은 없네.
[釋] 여기에서는 만약 소멸에 실체가 있다면 고에도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닦는다’란 무엇인가?
자주자주 정견(正見) 등을 일으키므로 닦는다고 이름한다. 만약 이러한 도(道)의 자체가 이미 성취되어 생기가 있다면 옳지 않다. 만약 이러한 오류를 피하려고 도(道)를 닦는다고 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도가 닦을 수 있다면
자체가 없는 것이니
고와 집부터 멸에 이르기까지
이것 등도 모두 없네.
[釋] 여기에서는 道에 생기의 의미가 성립한다면, 자체가 없음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앞서 게송에서 설한 도리에 고를 생기하는 것이 없음은, 고가 없기 때문에는 멸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 고를 소멸하는 도를 말하자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고를 소멸하는 것이 도(道)인데
어디서 도를 얻을 수 있는가?
고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또한 고의 원인도 이해하지 못하네.
[釋] 여기에서 그대가 말한 도리에 따르면 고에는 자체가 있다는 것이다. 자체가 있다면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고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오류가 있어 단멸의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원인의 실체를 끊지 못하였으므로 단멸에도 자체가 없는 것이다. 애(愛)의 실체에 다함이 없다면 다함이 있다는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소멸에 실체가 없다면 실체가 없으므로 소멸을 증득했다는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소멸을 증득함이 없는데 소멸에 나아가는 도에 자체가 있다면 수도(修道)도 없게 된다. 만약 도를 닦음이 없다면 또한 4과(果)를 증득하는 사람은 없다. 4과를 증득하려는 사람이 자체가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이제 묻겠다. 어째서 버리지 않는가? 만약 증득한 결과에 자체가 있다면 어떻게 다시 증득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미 4과에 자체가 없으므로
4과와 4향(向)에 머무는 것도 없네
8인(人)이 있지 않으면
승보(僧寶)도 또한 없네.
[釋] 8인이란 4도(道)와 4과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사람 중에 뛰어난 사람이나 사대부 등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4성제에 자체가 없다면 단지 승보(僧寶)만 없는 것이 아니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4성제가 없다면
또한 법보(法寶)도 없네
법보와 승보가 없으므로
불보(佛寶)가 어떻게 있겠는가?
[釋] ‘부처’란 법으로써 제자를 깨닫게 할 수 있으므로 부처라 한다. 다시 이제 자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자에게 묻겠다. 부처님에게 자체가 있는가, 없는가?
[문] 이것은 어떤 오류가 있어서 이와 같이 묻는가?
[답] 만약 그대가 부처님에게 자체가 있다고 하면 진여(眞如)를 깨닫지 못해도 부처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깨달음을 인연으로 삼지 않으면
부처는 무연(無緣)의 오류에 떨어지며
부처를 연으로 삼지 않으면
깨달음은 무연의 오류에 떨어진다.
부처에 자체가 있다면
모든 보살이 수행하여
부처가 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여도
성불할 수 없네.
이 법과 법이 아닌 것은
사람을 만들 수 없네
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자체가 있어 만든다면 옳지 않다.
[釋] 여기에서는 법에 자체가 있어 작용을 일으킨다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한 그대의 의도가 “작은 것을 큰 것으로 늘리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밝은 지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오류는 앞서 말한 것과 같다.
자부의 사람들이 말하였다.
“어째서 작용하는 것에는 모든 자체가 없다는 것인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곳곳에서 작업하는 자는 모두 자체가 없음을 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마치 환술로 만든 사물과 같다. 내입(內入) 등의 작업도 또한 이와 같다. 그리하여 이 내입도 또한 자체가 없다. 만약 어떤 한 사물이라도 자체가 있다면 앞의 주장과 위배된다. 이는 말하자면 작업에는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니, 그대가 자체가 있다는 뜻에 집착해도 만약 자체가 있다면 그대는 분명히 나를 위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작용과 자체가 있다고 말하면 어떠한 사물과 비슷한가?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는 것은 모두 삿된 견해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법과 법이 아닌 것의 원인이 없다면
결과는 무인(無因)의 오류를 얻을 것이네
만약 법과 법 아닌 것을 여의었다면
그대는 상대하지 않는 결과를 얻을 것이네.
[釋] 만약 그대의 의도가 세간에서 논해지는 것과 어긋나지 않으려고 이와 같이 법과 법 아닌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그대가 법과 법이 아닌 것의
원인이 있다고 하면
결과는 법과 법이 아닌 것에서 생기한 것인데
어떻게 공이 아니라고 하는가?
[釋] 여기에서는 “무릇 생기하는 것은 모두 공하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환술로 만든 사물과 같다. 이는 그대의 주장과만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거듭 나머지 오류가 있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언설의 일과
세간은 다 파괴되네.
만약 연기법을 파괴한다면
공의(空義) 또한 성립할 수 없네.
[釋] 언설이란 “병을 만든다”, “옷을 만든다”, “제바달다는 흰 소가 오면 나는 우유를 마시겠다고 말한다”하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병 등에 자체가 있어 반드시 작업이 있다면 옳지 않다. 만약 연기에서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위의 게송에서 “만약 연기법을 파괴한다면, 공의(空義) 또한 성립할 수 없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대가 공의를 파괴하면 어떤 오류를 얻는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한 사물도 만들 필요가 없으니,
또한 사람이 업을 일으키는 일도 없다.
만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드는 자라고 하면
공의를 파괴하게 되리라.
발생도 없고 또한 소멸도 없는
이것이 바로 상주이며
갖가지 모든 사물의 부류가
다 자체에 머무네.
[釋] 무엇을 사물의 부류라 하는가?
비유하면 벽화에 갖가지 색과 모양과 성질과 분량 등의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무엇을 ‘자체에 머무네’라고 하는가?
짓는 자가 없는 것을 ‘자체에 머문다’고 말한다. 파괴되지 않는 까닭에 ‘상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주라고 말하는 것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아직 얻지 못한 자는 얻어야 하네
고변(苦邊)의 업이 다함과
모든 번뇌가 끊어짐을
공의가 없기 때문이네.
[釋] 세간과 출세간이 수승한 법을 증득하고 고변을 다하면 반드시 대치법을 닦을 필요는 없다. 말하는 상(相)도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을 따르면 환화와 불꽃처럼 자체에 일어남이 없다. 자체가 있다거나 없다고하면 모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니, 지혜의 눈이 가린 자는 모든 법에 대해 망령되이 “모든 법은 연(緣)에서 생기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세제의 견해이며 허망되게 집착하여 제일의로 삼는다. 그 견해는 어떤 것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른바 고와 집과
나아가 멸과 도에 이르기까지
발생과 소멸이 있다고 보면
이러한 견해는 잘못 본 것이라 하네.
[釋] 어째서 잘못 본 것인가? 이른바 여실하게 연기법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부의 사람들이 말하였다.
“만약 고 등의 모든 작용을 보는 것을 여의었다면 달리 볼 진리의 법이 없을 것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진리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부 사람들이 말하였다.
“내입(內入) 등에 자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전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진리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부 사람들이 말하였다.
“내입(內入) 등에 자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전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생기 등의 도리는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다. 고 등에 생기가 없다고 보는 것이 ‘진리를 본다’는 뜻이라면 그대가 항상 말한 것은 성립시킨다. 내입 등에 자체가 있다고 보는 것이 전도되지 않았다면 그 말은 도리어 전도된 것이다. 그대가 하고자 하는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떻게 고를 보아야 할 것인가를 자세하게 관찰할 것이다. 마치 자식이 어머니를 따라서 환희환(歡喜幻)을 찾아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것과 같다. 이 품에서는 자부의 사람들이 한 말에는 오류가 있어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고 4성제에 자체가 없음을 밝혀 중생들을 신해시키는 것이 의도이므로 아래에 경을 인용하여 나타내고자 한다.
『범왕소문경(梵王所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범천왕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문(門)에 의거해 마땅히 고는 성제(聖諦)가 아님을 알아야 하며, 집ㆍ멸ㆍ도 또한 성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시 이 성제란 무엇인가?
범천왕이여, 만약 고가 생기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성제라고 하고, 집이 생기하지 않으면 이것을 성제라 한다. 만약 모든 법이 필경에는 열반과 같이 생기와 소멸이 없음을 본다면 이것을 성제라 한다.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알고서 도를 닦는다면 이름하여 성제라고 한다⧽고 하셨다.’
이어서 경에서 설하기를, ‘만약 인연법을 본다면 그 사람은 부처를 볼 것이며 또한 성제(聖諦)를 보아 성과(聖果)를 증득하여 모든 번뇌를 소멸할 것이다’고 하였다.”
「관성제품」의 해석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