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성들
암만의 동쪽, 검은 현무암으로 덮인 곳에
이슬람-아랍 문명의 초기에 번영하던 광야의 성들이 흩어져있다.
뚝뚝 떨어져 있는 별채처럼 보이는 대상 체류지(caravan stations)들,
격리된 목욕탕((secluded baths), 사냥을 위한 숙소 등이다.
한때 통합된 농경이나 무역을 위한 장소로서
거의 대부분 움마야드 왕조 시기(AD 661~750)에 건립되었다.
원천수로 광야주변 환경을 바꾸어 아랍 모슬렘 때 번영했다.
매우 장엄한 초기 이슬람 예술의 원형으로 생각된다.
이들 구역의 실질적인 용도는 주거지들, 대상(隊商)용 숙박시설 그리고 목욕탕 등이다.
stucco(치장벽토)
움마야드 광야의 성들은 대개 유목민 가문의 왕자인 ‘바디야스’가 주도한 것으로 추정한다.
암라 성(Qusayr Amra)이나 카라네(Kharaneh)와 므샤스(Mshash)는
때때로 성지순례(Hijaz)중인 정부요인들의 휴식처로 제공되었다.
카라나 성(Qasr Al Kharrana)
카라나 성(Qasr Al Kharrana)은 암만에서 아즈락으로 가는
큰길 옆에 있으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사막궁전(Desert Palace)이라고도 하는 카라나를
이미 아랍인들 십여 명이 둘러보고 나오는 중이었다.
암만에서 65Km 동쪽, 쿠세이르 암라에서 서쪽으로 18Km에 있다.
요르단 스텝지역에서 잘 보존된 것 중의 하나인 움마야드의 기념물이다.
가운데 빈 공간을 중심으로 2층 구조인 이곳은 61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각 방이 양측으로 나뉘어 있었다.
4분의 3이 버팀벽으로 4구석을 받치고 있고,
원형 타워들이 남쪽 부분 입구의 중앙으로 이어져 있고,
반원형의 아치들이 남은 3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4면의 벽은 화살을 쏠 수 있는 구멍들과 빛과 환기를 위한 좁은 구멍이 뚫려 있고,
통로의 양쪽은 중앙의 마당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긴 방으로 마구간과 창고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작은 물탱크가 지붕으로부터 빗물을 모으기 위해 중앙에 자리했다.
그 외의 물은 와디 베드에서 끌어다 썼다.
건설, 건축기술은 사산조(페르시아)의 영향을 배제하고,
홍예와 낮은 가로로 아취형 벨트를 사용했다.
벽도 세공장식을 했다.
"Qasr"는 성이나 궁전을 의미한다.
카라나는 주후 8세기 우마야드 시대의 보루(성채)였다는데,
관리인 압달라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암만에 살면서 버스로 출퇴근을 한단다.
성벽 내부에는 온통 낙서투성이다.
아랍어로 우즈단, 암잣, 아비르, 함마드 등등...
이름 석자 남기는 게 대단한 일인 양...
모두 사람들의 이름이라 했다.
낙서문화는 한국이나 여기나 다름없어 보였다. 함마드가 어디 한둘뿐인가.
쌔고쌘게 함마드인데... 낙서란 자기만족의 한 방법일 수는 있을 것이다.
암라 성(Qasr Al-Amra)
다음으로 암라 성(Qasr Al-Amra)은 암만에서 동쪽으로 85Km 거리에 있는데,
광야에 홀로 세워진 건물이라 쉽게 눈에 들어온다.
작은 궁전으로 알려진 이곳은 섬세한 프레스코 화(그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모든 내벽에 장식한 그림들은 사냥과 춤, 음악가와 목욕장면
그리고 큐피드(미 소년들)과 개인적인 역사와 철학과 시 등의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 독특한 그림들은 UNESCO에 등재되어 세계문화유산에 포함시켰다.
남쪽부분의 중앙에 왕좌를 가진 직사각형의 큰 홀이 있으며,
열탕 온탕 냉탕 3개의 방으로 구성된 목욕탕으로 되어 있다.
도르래를 사용하여 물을 퍼 올려 쓸 수 있는 물 저장소(깊은 우물)가 있다.
암라성은 성격상 거주지 형태가 아니라,
일정기간 동안 머물러 사용하던 휴게소라고 추정된다.
장기간으로 살 수 있도록 미리 계획된 것도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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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락 성 (The fortress of Azraq)
아즈락 요새(The fortress of Azraq)에 이르렀다.
출입구의 잘 단장된 화단에는 이름모를 빨강, 파랑, 노랑꽃들이 만개하여
방문객들을 반겨준다.
암만에서 115Km 거리에 있는 아즈락은 “푸르다 blue"라는 의미에서 기원하는 걸까?
오아시스(Oasis)의 푸른 물과 넓은 숲 때문에 주어진 이름일 것이다.
예로부터 요단계곡 동편사막에서 아즈락은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왜냐하면, 요르단과 이라크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잇는
대상로의 접점(接點)이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아즈락에서 세 갈래길이 사막을 향하여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사는 곳은 그럴만한 입지조건이 있게 마련인데,
사막가운데 있는 아즈락은 오아시스이기 때문에 정착이 가능했으리라고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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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락 오아시스의 샘들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의 정착을 위한 매력적인 장소였다.
많은 샘들은 남부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의 내륙 사이에 자연적인 이주통로인
와디시르한의 북쪽 끝자락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아즈락은 오아시스를 방어하는 일련의 요새들,
북동쪽 15Km에 위치한 우세이킴(Usaykhim)과
남서쪽 15Km의 샤움(al-Shawm)
자연보호지역에 가까운 우웨이니드(Uwaynid) 요새가 있다. .
아즈락 요새는 현지에서 생산되는 검은 돌(현무암)로 세워졌는데,
‘디오클레시안’의 기록이나 ‘맥시미안’의 제안의 의하면
테트라크 시대(AD300)부터 사용되었으며,
다른 라틴기록에 의하면 로마시대에는 아즈락이 다시아니스
혹은 바시아니스/ 바시(Basie)라고 불리웠던 것 같다.
정문 입구에 새겨진 아랍어 기록에는
1237년에 대대적인 재건축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마야드 시대에 이곳은 우마야드의 삼촌이며 칼리프인
‘알 말리크’(Hisham bin Abd al-Malik, AD724~743)와의
법정다툼에서 분연히 충돌한 ‘알 왈리드 2세’의 피난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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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문은 1톤씩이나 되는 돌문을 해 달았고,
안으로 들어서면 별로 커 보이지 않는 현무암 성곽 내부를 볼 수 있다.
현관부분 2층에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한 달간 묵었다는 조그만 방이 있고,
왼쪽(북쪽?) 성벽에는 3톤이나 된다는 돌문이 돌쩌귀에 매달려 있는데,
밀어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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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구할 수 있는 곳에(광야의 오아시스Oasis)
그곳으로 통하는 길이 생기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건물이 세워지고 상거래가 이루어지며
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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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구할 수 없게 되면 그곳은 폐허가 되고 만다.
생수(生水)!
생명을 유지하려면
탁수(濁水)가 아닌 생수가 필요하다. -관-
참고 : Jordan guidebook
첫댓글 물은 삶과 직결되어있습니다 어느곳이나 물은 귀중한것이죠 좋은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