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은 감곡면 영산골 인물로 전해 옴
영산골외에 원통산 명칭은 남이의 원혼이 호국하는데서 유래
영산골 조문터에서 태어난 것으로 구전
(사)음성군 향토사 연구회 박종대 회장 집필
남이장군(南怡將軍)! 그는 누구인가?
그는 희대(稀代)의 기린아(麒麟兒)였다. 출생부터 남다른 기운(氣運)을 타고나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젊은 나이에 죽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추모해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사당, 지명 또는 허묘(墟墓)등이 전국에 산재해 오고 남이장군신이 모셔지면서 출생지에 대한 설이 난무하고 있다.
(사)음성향토사 연구회 박종대 회장이 집필을 끝내고 의령남씨종회의 승인을 거쳐 전산 작업중인 <충무공 남이장군과 충장공 남연년> 단행본이 올 추석을 맞이하여 발간 작업중에 있다.
그 중에서 남이장군의 출생지에 대한 부분만을 간추려 소개코자 한다.
남이장군은 6살때 기둥을 들어 여자의 치마폭을 눌렀고 역적 누명으로 체포할 때는 철사줄로 두손을 묶었으나 한번 힘을 주자 철사가 토막이 났다는 그 웅장한 힘을 지녔다. 그 뿐이랴!
귀신을 보는 신통력이 있었으며 앞날을 바라보는 예지의 힘이 있었지만 자신의 죽음을 덮어둔 호걸(豪傑)이었다. 그래서 그의 출생은 베일에 쌓였는지 모른다.
서울 연건동 126번지 지금의 한국국제협력단과 주택가 경계에는 <남이장군이 살았던 옛 집터>가 있다 하였는데 종로구청에서는 1994년 12월에 발행한 <종로의 명소>라는 홍보책에 연건동 126번지가 남이장군의 생가터라고 주장한다.
또 <동국여지비고> 한성부 기지에는 '남이의 집은 동부방에 있었는데 사람이 감히 살지 못했기 때문에 드디어 없어져서 채소밭이 되었다.
뜰에 반송(盤松)이 있는데 비길데 없이 커서 32개의 기둥으로 떠받쳤다. 애송(愛松)이라 부른다. 이 소나무는 바로 영종 정해년에 부사 조진세(趙鎭世)가 심은 것이라 한다 하였는데 남이장군이 피살당한 후 그터가 세다하여 들어가 살려는 사람이 없어 채소밭으로 쓰이다가 그곳에 장군의 사랑을 만들고 남이탑을 세워 모셨던 것이다.
남미탑동은 이 남이탑동이 와전된 표기이고 남이가 살았던 곳이지 출생지라 하기에는 여운이 남는다.
조선시대 관직에 있던 사람치고 지방출신이라도 서울 장안에 안살았던 사람이 있었는가?
인조때 학자 박동량(朴東亮)이 지은 기제잡기(寄齊雜記)에 남이구기인불감거 발위채보운운(南怡舊基人不敢居 發爲菜甫云云)이라 하여 출생지로 매도하기에 이르렀다.
일부 기록에서는 경기도 광주 사근동에서 남이장군이 태어났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사근동 백호등(白虎嶝)에 있었던 남이장군 사랑을 미루어 출생지로 속단된 것으로 간주된다.
억울하게 죽은 장군은 한국 서민의 신앙 대상으로 곧잘 신격화 되어 그 억울함에 공감하는 레스지팡스를 의식화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전국 각지에 남이장군신을 비롯하여 최영장군 임경업장군의 신위가 무속의 분포로 임증하고 있다.
사근동에 있는 남이장군 사랑은 이곳에 호랑이가 자주 나와 이 호환을 막기 위해 위력이 큰 남이장군을 수호신으로 모셨다고 하나 남이장군 신당의 발생 원인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이미 있었던 신당에 호환 수호의 염원을 빌었던 후세의 습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는 편이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또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에서 남이장군이 출생한 곳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곳은 남양홍씨의 세거지로 남이장군의 외가인 동시에 할머니 정선공주의 친정이었고 남이의 전지가 이곳에 이었고 남이의 묘가 이곳에 있어서 출생지라고 와전된 말이다.
남전(南田)은 남씨의 전지가 있어서 남전(南田)이라 하였고 남이장군이 건주위를 정벌한 공으로 적개공신이 되어 사패받은 곳을 사작골(賜爵滑)이라 하였을 것이다.
남이장군의 아버지 군수공 남빈이 어떠한 연유에서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2리 공산정(公山亭)에서 살았는지는 상고할 수 없으나 부친이 어느 고을 군수를 역임 하였는지 외지에 있었던 것은 명확하다. 음성고을의 역사도 태조부터 문종때까지의 고을원 기록이 없는 상태이다.
옛부터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에는 전해오기를 <남이는 영산골 인물>이라 하고 영산골 위에 있는 산이 <원통산>인데 <남이의 원혼이 서려 산이 호곡하는 자세>라 하여 남이가 원통히 죽어 <원통산>이라 하였다.
원통산은 조선 초엽만해도 사적에 나타나지 않다가 영조 33년(1757)에서 41년(1765) 사이에 전국의 읍지를 모아 간행한 <여지도서, 충원현(忠原 )에 원통산(元統山)이라 표기하였다.
음성의 9개읍면중 음성읍 원남면만 제외하고 7개 읍면은 근선말까지도 충주 땅이므로 충주 사적에 있는 것이다.
"거느리는 시초,근본이 크다"에서 그후 <대동지지>충주에 원통산(圓通山)이라 하여 불교의 주원융통(周圓融通) 뜻으로 부처나 보살이 깨달은 경계를 이르는 말에서 따서 원통(圓通)이라 하였고 마지막 1928년부터 수년에 걸쳐 각군의 지리지를 편찬한 <조선환여승람> 충주군에 <원통산(元通山)>으로 표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산 이름이 없었던 곳에 <원통산>이라 명한 곳에 원통산 줄기따라 서쪽으로 나즈막히 뻗어내린 곳에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2리 공산정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영산리 계곡을 <영산공>이라 하는데 영산골 골짜기에 하나의 작은 골짜기가 있어 그곳을 <잔자골>이라 부르니 <잔>은 <작은>의 준말로 표기하여 <새끼골짜기>의 뜻으로 <잔자골>이 되었다.
이곳에 남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오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이 남이장군이 태어난 곳을 조문터(朝門)과 전해오고 있다.
조문의 朝는 왕조의 뜻으로 같은 왕가에 속하는 통치자의 계열 또는 그 군림하는 시기를 말하고 門은 씨족을 갈라 그 집안을 가리키는 말로써 <조문이 있는 터>란 말은 즉 <남이장군이 태어난 터>란 말이 된다.
정선공주의 손자가 되므로 남이는 조문이므로 <지명지>에 전하는 <조문터>는 곧 <남이장군의 출생지>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영산골의 잔자골에 있는 조문터가 산자락 밑에 있고 그 아래에 영산리 마을이 있다
<조문터>는 지금은 밭으로 변해 버렸으나 촌로들의 구전으로 <남이장군 새가터>라고 지금도 믿고 전해 내려오고 있어 남이장군이 출생한 곳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영웅이 태어난 곳은 그 흔적을 남겨 후세에 전해져 산천 초목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탄생시킨다.
산천의 모든 이름은 사람이 만드므로 그 모양, 생김새, 지형에 따라 인물의 자취에 따라 만들어져 원통산 조문터의 이름이 이곳에 생긴 것은 남이장군 때문이었으나 역적으로 몰려 그 이름도 변하고 숨겨져 5백년이 넘는 수많은 세월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또한 <잔자골>은 인물이 태어나는 것으로 우리나라 단맥처(短脈處)의 한곳이고 음성군의 4대 단맥처의 한곳이다. 임진왜란때 이 여송이 이곳의 혈을 끊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한 곳이다.
<영산골>에는 육전 충무공이라 부르는 이수일장군(李守一 將軍)과 효종때 북벌정책을 이룩하려고 하였던 이수일 장군의 아들 이완대장(李浣大將)이 출생하기도 하여 <인물이 태어나는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영산골 인물>이라는 말이 생겼다.
또한 남이장군 모든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2리에 있는데 이곳에 남이의 전지(田地)가 있어 <사작골>이 있다고 앞에서 말하였다.
역적으로 몰려 죽자 <남이섬>에 허묘를 만들어 그 곳에 있는 것처럼 하고 남전리 자신의 땅에 누군가가 장군의 묘를 썼을 것이다.
남이장군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권람의 딸)묘가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던 것을 1972년에 이장하여 함께 묻혀 있으므로 남이장군의 출생이 음성으로 주장하는 것이고 더우기 <지네에 읽힌 설화>에도 출생지가 전해오는 것은 민담이 사실과 부합되어서 백족산(白足山) 원통산의 지명이 남이장군과 연관되어 있어 허실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권씨 부인의 친정 아버지 권람을 비롯하여 할아버지 권제,증조 할아버지 권근의 3대묘소가 이곳 사패지에 있음은 참고가 될 것이다.
후에 남장군전(南將軍傳)을 지은 정범조(丁梵租)는 감곡면 문촌리에 있는 오갑리(梧甲里) 외가집에서 출생하였다.
외가집은 평산신씨(平山申氏)로 한성판윤을 지낸 신후재(申厚載)의 손자 신필양(申弼讓)이다.
정범조는 나주정씨(羅州丁氏)로 그의 선조는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자은갈(自隱葛) 덕현(德峴-덕고개)이 나주 정씨의 터로 정수곤, 정수강 형제의 선후대가 세거하여 문명을 펼쳐 후손들의 세거지가 된 곳이니 정범조가 남이장군 전을 지은 것도 우연이라기 보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역적의 누명을 벗지 못한 상태에서 정범조는 과감하게 남이장군전을 지어 후세에 남겼으니 아마도 출생비밀의 신통력이 같은 의미가 아닐런지.
특히 주목할 것은 남이장군의 할아버지 의산군 남휘(宜山君 南暉)와 세종원년에 사은사로 갔던 태종의 다섯째 아들 경영군 이비가 영산리 거동터(巨洞)에 우거하여 임금이 거동 하였다 하여 지명이 되었는데 남이장군이 출생한 곳으로 주장하는 영산리 공산정의 조문터와 남이장군 출생설이라는 것을 신빙성 있게 말해준다.
경영군 이비와 남이장군 아버지 남빈이 영산리에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상고할 수 없으나 태종의 왕자인 경영군 비도 궁궐이나 도성안이 아닌 이곳에 살았는데 하물며 외손이야 무어라 말하랴?
남이장군 아버지 남빈의 기록이 미비하여 알 수 없으나 경영군의 기록을 통하여 경영군이 이곳에 살게된 연유를 추적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경영군이 사은사를 가게 된 배경과 궁궐에서 나오게 된 연유가 있어 소개코자 한다.
이비(李榧)는 태종 17년 9월12일에 효령대군,충녕대군 등 종친의 봉작을 내릴때 이비를 정헌대부 경영군(敬寧君)으로 봉작하고 경영군의 처 김씨를 경신택주(敬愼宅主)로 삼았다. 경영군 비와 공영군인(恭寧君姻)은 주상(태종)의 측실 아들이라 하였다.
세종원년 8월17일에 사은사를 정하는데 황엄이 상왕(태종)에게 말하기를 "누구를 보내어 사은하시렵니까? 하니 상왕이 "나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큰 자식은 멀리 밖에 있고 둘째는 병으로 누워있고 세째 아들은 이제 국왕이 되었고 네째는 일찍 죽었고 모두 아들이 있기는 하나 모두가 정비(正妃)소생이 아니라 감히 보낼 수가 없소. 또 여서(사위)가 넷이 있는데 위로 세사람은 모두 다 조정에 가 뵈었으나 끝에 사위 남휘(南暉)가 아직 뵙지 못하였으므로(벼슬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번에 보낼까 하오"하니 황엄이 아뢰기를 "성상이 조선을 대우하삼이 오늘같이 후하신 적이 없었으니 친 왕자가 아니면 보내실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정비의 소생은 아니더라도 역시 친왕자일 것입니다."하니 생왕이 "끝에 자식은 나이 어리니 경영군 이비를 보내겠소"하고는 곧 경영군에게 명하여 술을 따르게 하고 연회를 파하였다 하여 경영군과 남휘가 사은사로 가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세종 5년 5월 1일에 대사천 하연(河演)이 경영군의 처벌을 상소한 글에 "이비는 일점홍(一點紅) 관계로 인하여 태종에게 죄를 입었고 바야흐로 쫓겨나서주상을 보지 못하는 때에도 오히려 허물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가만히 통신하여 태종의 교회(敎誨)하는 지극한 뜻을 배반할 것이 그 죄의 첫째요" 라는 내용이 있다.
5월21일에는 세종임금이 조극관(趙克寬)을 불러 말하기를 "이제 비의 추악을 나도 당연히 용서할 수 없으나 다만 약병이 족사(足社)의 죄를 얻어 이미 밖으로 내쫓겼는데 이제 또 경영이 뒤를 이어 일어나니 종실의 연고는 가히 한심한 일이다" 이제 내가 이미 구사(驅史)만을 거두어 그 출입을 제한하고 마음을 바꾸고 행실을 고치는 날을 기다릴 뿐이다."하여 여자 관계로 쫓겨난 기록이 있어 경영군 이비가 감곡면 영산리 거둥터에 와서 살게된 연유를 짐작케 한다.
그후 남이장군은 세종 25년에 출생하였으므로 아버지 남빈에게 어떠한 연유가 있었을 것이고 경영군이 이미 터를 잡게 되어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영군 부인 김씨 경신 택주는 죽어서 이곳에 묻혔고 경영군은 세조 4년에 죽어 주덕읍 사락리에 묻혔으니 이 모두가 남이장군이 이곳에서 출생하였다고 주장하기에 충분하지 아니하겠는가?
남이장군 할아버지 남휘도 죄를 입어 남이장군이 태어나기 전에 이천에서 귀향살이 한 일도 있으므로 이천과 감곡은 인접이고 이미 경영군이 살고 있으므로 연관이 없지 않다 하겠다. < 역사도감에서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