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작]
절단면
김승일
시간이 많이 지나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역사가 되
면, 우리는 사건을 논평하는 대신 간단히 요약하여 나열하게 되
겠지. 이 문장을 요약해줘. 현재는 미래에 간단히 요약되어 나
열될 것입니다.
시간은 요약하지. 죽음이 더 잘하지만. 내 딸이 죽으면 아마
도 나는 딸을 잃은 아버지로 요약될 거야. 내가 평생 동안 갖은
이유로 시달렸던 내 우울증도 딸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짧은 설
명으로 해명이 가능하겠지. 그리고 내 딸은 죽은 사람이라는 짧
은 이름을 갖게 될 거야. 딸의 원래 이름은 두 글자고, 죽은 사
람이라는 단어는 네 글자지만.......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
지? 요약해줘. 딸의 짧은 이름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 그래, 하지만 내겐 딸이 없어. 여자와 남자가 있었어. 남
자는 통영에서 선박 건조 회사를 다녔고, 여자는 출판사 직원이
었지. 둘은 오토바이 동호회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고, 2년 동안
국내를 여행했고, 그해 겨울엔 둘 다 회사를 그만뒀지. 세계 여
행을 떠났어. 배편으로 오토바이를 미리 중국에 보내놓고, 중국
에서 파키스탄으로,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
렸지. 북인도의 산악 도로였어. 고산지대였고, 비포장도로였고,
절벽에서 돌멩이가 떨어졌고, 남자의 오토바이가 절벽 아래로
미끄러졌어. 죽음은 모든 것을 간단히 요약하는데, 끝내는데,
여자도 당장 자신의 인생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시신을
송환해야 해서 아직 그럴 수가 없는 거야. 죽은 남자는 아직 ‘죽
은 사람’이 아니라 한국으로 보내야 하는 시체이고, 이송 비용
은 한화로 1억 가까이 되고, 남자의 가족은 시신을 인도에서 화
장하지 않기를 바라고, 그러면 송환 비용이 1억 5천만 원 가까
이 되고, 누구에게도 그만한 돈이 없고, 절차가 복잡하고, 남자
는 죽음의 요약을 거부하고, 끝나지 않고, 일주일이 지났어. 이
주일이 걸렸어. 델리의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어. 이 모든 것이
끝나면...... 여자는 중얼거렸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너무 천천히 날았고, 장례식이 열렸고, 남자의 가족이 불교를
믿어서 49재가 있었고, 계속 무슨 일이 더 생겼고, 여자는 사랑
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해결해야 하는 일이 남은 사람
이었고, 그녀의 오토바이가 한국의 선착장에 도착했어. 어쨌든
여자는 아이를 낳았고, 가정을 이뤘고, 인생을 끝내지 않았고,
요약되지 않았어. 이 이야기를 요약해줘. 여자와 남자의 여행은
비극적으로 끝났으나, 여자는 살아남아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녀의 인생은 요약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진행 중입니다.
아니야 여자는 노환으로 죽었어. 요약해줘. 죄송합니다. 그녀
는 요약되었습니다. 죄송할 필요 없어. 나는 네게 요약할 수 없
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요약해줘. 당신은 불가능한 이야
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나는 네가 요약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요약해줘. 당신은 그 사람을 잃
어버린 사람으로 요약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습니
다. 네, 요약할 수 없는 이야기는 요약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이
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충분히 의미 있기를 바랍니다. 맞습니다. 당신은 조금 더 살 것
입니다. 물론이죠. 죄송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충분히
의미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여자는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
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렇군요.
잠시 혼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을 이해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맞습니다. 죄송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사평
제24회 박인환문학상에 김승일 시인의 「절단면」을 선정한다.
이 글은 심사평이다. 심사평이 늘 그러하듯 박인환문학상의 취지나 의의,
수상자가 본상의 취지나 지향에 부합되는지 등등 심사평의 서두를 시작하려다 수상작 「절단면」을 다시 본다. 그렇다. 박인환문학상의 취지나 의의를 요약할 수 없다.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내린천의 밤 골짜기를 오갔던 일들과 막 끝낸 교정본을 들고 늦은밤 인쇄소로 뛰어갔던 일들과 심사위원들의 논쟁으로 몇 시간씩 줄담배를 피워야 했던… 24회를 이어오며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아직 요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무엇이든 말해야 한다면… 그동안 ‘새로운 시’ 또는 ‘새로운 그 무엇’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절망했던 시인들의 몸짓, 그 흔적이 박인환문학상으로 요약되길 바란다. 때문에 김승일 시인의 박인환문학상 수상이 무엇보다 반갑고 기쁘다.
김승일 시인의 시는 당혹스럽다. 일반적이지 않은 언술이 보편적 사유의 흐름을 절단하여 독자를 당황스럽게 한다. 또한 다시 찾은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아니 절망이 읽힌다. 그래서 기쁘다. 평생 동안 갖은 이유로 시달렸던 우울증도 “딸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짧은 설명으로 해명”되어 요약되는 삶에 우리는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해결해야 하는 일이 남은 사람”으로 “인생을 끝내지 않았고, 요약되지 않았어”라고 말하고 있다. 인생을 끝내지 않는 것으로 요약되는 것을 거부하는, 아니 지연시킴으로써 끊임없이 생을 이어가고자 하는 생의 의지. 이 절망을 희망으로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 좋다는 느낌」에서 사랑하는 것이 죽을병에 걸리면 여행을 떠나는 사람. 사랑하는 것이 죽었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 채로 돌아와서 문 앞에 서서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는다. 이 열쇠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데도 힘을 잔뜩 줘서 열쇠를 돌리고, 열쇠가 뚝 끊겨버리고, 토막 난 톱니 부분이 열쇠 구멍에서 빠지지 않고 잠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 다만 그는 여행에서 돌아왔고 열리지 않는 문을 두고 다시 떠나지는 않을 거라는 것. 천국인가 지옥인가. 상관없다. “다 좋다는 느낌” 이것이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아닌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오늘의 나」)이 아니라 “이것이면서 저것인 것”, 삶은 그대로 천국이면서 지옥이며, 희극이면서 비극이라는 것. 김승일 시인의 이 절망의 몸짓, 그 흔적이 박인환문학상으로 요약되길 희망한다. 김승일 시인을 박인환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승일 시인이 끊임없이 절망하길 희망한다. 그리고 그의 절망이 우리의 희망이 될 것임을 믿는다.
김승일 시인의 박인환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장 박주택(시인, 본지 주간)
심사위원 강동우(문학평론가)
심사위원 권경아(문학평론가)
▶시인이 쓰는 연보
1. 저서
시집 <에듀케이션> 문학과 지성사. 2012년
시집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문학과 지성사. 2019년
시집 <항상 조금 추운 극장> 현대문학. 2022년
산문집 <지옥보다 더 아래> 아침달. 2024년
2. 학력사항
201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졸업
2015년 중앙대학교 문화 연구학과 수료
3. 수상내역
200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2016년 현대시학 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