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 달 하고도 20여일이 지난 기억을 써야만 할 이유가 있다. 첫째날도 둘째날도 가슴에 새길만한 기억이기도 하지만 대미(?)를 장식한 삼일째의 기억은 그저 글로 옮기기엔 너무나 복잡한 생각들이 뒤엉키었고 실제로 지금까지 그 때의 기억과 연관된 생각들로 멍하니 사색을 하곤한다. 그 실체를 보지도 못한 '왜덕산'이란 산이 그 생각의 가운데 중심을 떡하니 잡고있다.
삼국이전에도 이 곳은 분명 역사가 있겠지만 여행 중 들은 기억으로는 견훤과 왕건의 대 결투, 장보고의 청해진, 삼별초의 1차 거점, 이순신의 명량대첩 그리고 아직도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왜덕산은 울돌목의 전투(명량대첩)로 해류로 쓸려온 왜군을 백성들이 수습하여 죽어서라도 고향을 바라보게 묘를 만들어준 곳이 있는 산의 이름이다. 선생님의 초청으로 왜덕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박주언'학자님이 동행하여 벽파진을 보고 왜덕산으로 향하려했지만 일정이 빠듯하여 취소되었고 차안에서 왜덕산에 얽힌 사연을 설명으로 들었다. 감히 개인의 생각을 올려 왜덕산의 이미지를 망치고 싶지않아 그 감동인지 숭고함인지 한인지 모를 복잡미묘한 감정을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를 권해본다.
분명한 것은 요즘 우리민족의 고유정서(이것도 사상이라 해야할지 민족성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신론이라 해야할지...)를 생각하는 나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 존재라는 것!
공짜여행이 탐났다기보다는 정말 자린고비 선생님이 쏜다는 말이 믿기질 않아 확인차 떠난 여행이다. 사실 서울역에서 차타기 전에 이미 선생님한테 10만원을 뜯겼다(우띠~~그럼 그렇치...). 2박3일 진도여행하는데 10만원이면 공짜라면서.....
우연히 술자리에서 시작된 이 여행은 또한 어떤 결과물도 탄생시켰는데 후일담을 꼭 써야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 이 여행의 종착지라 생각되기에 한 번 더 글을 올리고 진도여행을 마무리 짓고 싶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새벽에 이 몽돌투성이 바닷가를 산책하며 앙증맞은 생각들을 참 많이도 했다.
눈대중으로 200m가 넘는 긴 선창장 벽이 하나하나 이런 누군가의 기도로 채워져 있다.
팽목항이 진도항과 같은 곳인줄 여기서 알았다.
개인적으로는 맘에 안든다. 바다에 가라앉은 아이들을 표현한 듯 한데.....
어제본 씻김굿을 이곳에 전달하고 싶은데 ...현장에서도 눈물이 앞을 한참 가렸지만 글을 올리는 지금도 코끗이 시큼하다. 세월호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훌쩍이는 나무아래님 생각이 갑자기 납니다그려~~
왼쪽에서 네번째칸 아래쪽 정유년 이월 이십구일이란 한자가 눈에 들어온다. 왜 저렇게 썼을까요?
자세히 보면 장군님이 보이는데 글을 쓰고 계십니다. 제가 엿봤는데 생즉사 사즉생(한자 따붙이기하기 싫어요~~)!
주차장에서 담은 진도대교! 저 아래가...
바로 울돌목입니다. 진도여~~안녕!
하고 인사는 했지만 어렴풋이 나와 인연이 있을듯하다.막연하지만....
첫댓글 너무나 슬프고 가슴 아픈 곳...
그날은 누구도 잊지 못할 겁니다. 잊어서도 안 되고요
아! 왜덕산? 왜덕산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현장입니다.
다음에 갈 기회가 생기면 왜덕산과 삼별초 때 지은 궁터를 꼭 가봐야겠습니다. 유구국과 삼별초도 큰 연관이 있어여 좀 더 알아보고 싶기도 하고요.
@산인 (옛 님을 통해 세상을 본다) 삼별초가 마지막 이동한 지역이 유구라고합니다.
보다더 많은 스토리를 개발하여야 합니다.
사실, 설화, 신화도 모두 역사입니다.
@김형규 예...선생님이 그리 얘기하셔서 찾아보니 그 자리에서 진도 성터에서 발견된 기와와 거의 같은 문양이 발견되었다네요. 삼별초가 진도에 왔을때 1000여척의 배가 왔었다는 자료가 있는데 많은 사람을 이끌고 가서 그곳에 정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과서는 그런 사실을 언급조차 안하는게 우리의 역사교육입니다.
그곳이 왜군 2500여명이 사망한곳이라고 하는데
왜덕이든 팽목이든 다 아픈 역사입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