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책가방/ 최영희
불행은 개떼처럼 몰려온다
『더러운 나의 불행 너에게 덜어줄게』
마르탱 파주 지음, 배형은 옮김(내인생의 책 펴냄,2013)
내 친구의 사촌의 옆집 애의 이웃사촌의 사촌의 친구의 친구가 중학교 때 겪은 일이다. (편의상 그 친구를 K라 부르기로 하자.)
과학시간, 남자애 하나가 선생님 눈을 피해 오징어땅콩(oo제과)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비를 털어 오징어땅콩을 조달한 녀석의 뜻을 높이 사서, K를 비롯한 반 아이들은 흔쾌히 그 일에 동참했다. 주로 선생님이 판서하는 틈을 노렸고, 채 5분도 안 되어 오징어땅콩은 교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협업은 그걸로 끝이었고, 그때부터는 각자 알아서 과자를 먹으면 되었다. 사탕처럼 녹여 먹는 애들도 있었고, 조금씩 갉아먹는 애들도 있었다. K는 어찌 했냐고?
K로 말할 것 같으면 과학 과목을 가장 좋아하는데다가 과학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과자를 먹는 불경 따윈 저지르지 않았다. 둥글둥글한 과자를 꼭 쥔 채, 선생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놓칠 세라 눈을 부릅뜨고 수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K는 자기 몫의 오징어땅콩이, 튀김옷 부분과 땅콩이 분리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앞, 앞, 앞 문장에서 말했듯이 과학을 좋아하는 K가 그 사실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K는 땅콩이 분리된 오징어땅콩에서 흰자와 노른자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긴 신기한 삶은 달걀을 떠올렸고, 핵이 갑자기 식어버리는 바람에 멘틀과 핵 사이에 공간이 생긴 고체행성을 떠올렸고, 급기야는 귀에 대고 오징어땅콩을 흔들어보기에 이른다. 달그락달그락……. 자박자박…….
K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과학선생님이 K의 책상 앞에 강림하신 뒤였다. 결국 K는 사모해마지 않던 과학선생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키가 몹시 작았던 선생님은 그날의 장난거리가 ‘땅콩’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날 오후, K는 교무실에 끌려가 반성문을 써야 했다. 키 작은 선생님을 땅콩에 비유하며 모욕했다는 게 반성글의 핵심이었다. 그날부터 K는 과학선생님에게 무던히도 시달려야 했다. 과학선생님을 좋아하던 과학자 지망생 K가 하루아침에 사랑도 꿈도 잃고, 인간성 글러먹은 애로 전락한 것이다. 그 무렵 집안 사정으로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살았던 탓에 K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렇게 불행은 개떼처럼 K의 인생을 덮쳐왔다.
K는 어른이 되었고, 그 해의 일을 기억 속에 묻어두고 살았다. 중학생 시절 오징어땅콩 사건 따위를 되새김질하기엔 K의 일상이 너무 바쁘고, 세상엔 그 사건보다 훨씬 어이없고 힘든 일들이 쌔고쌨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K는 『더러운 나의 불행 너에게 덜어줄게』라는 책을 읽고 묵은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기에 이른다.
더러운 내 불행을 너에게 덜어주겠다니! K는 제목만 보고도 울컥했다. 그래, 내 맘이 딱 그랬어. 나만 시달리는 건 불공평했어. 덜어줄 수만 있다면 딴놈에게 덜어주고 싶었다고! 앉은자리에서 책을 읽어치운 K는 생각했다. 그때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행한 인간을 다룬 작품이야 그때도 많았지만, 수레바퀴 아래 짓눌린 존재론적 절규 말고,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고 다니는 먼 이국땅 아줌마 얘기 말고,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칠성문 밖 복녀 이야기 말고, ‘왜 나야? 왜 또 나야? 나 말고 오해받고 욕먹고 얻어맞는 애 또 있어? 이건 공정하지가 않아!’라고 속 시원히 외쳐주는 책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부적응자 클럽
『더러운 나의 불행 너에게 덜어줄게』에는 K를 능가하는 ‘재수 옴 붙은 애들’이 등장한다. 늘 정장을 입고 다니고 발명에 심취해 있는 에르완, 인터넷 채팅에 빠진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사는 것도 모자라 1시간 만에 여자친구에게 차인 마르탱, 천체물리학에 조예가 깊고 너무 똑똑해서 따돌림을 받는 바카리, 머리를 초록색으로 물들이고 음악에 미쳐 있는 프레드. 소년들은 하루하루 긴장 속에 살아간다. 다른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자신들을 놀려먹고 괴롭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 상태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 나머지 세상 전부.” 이 말은, 우리한테는 세상에 만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10쪽)
그나마 다행인 건 마르탱, 에르완, 바카리, 프레드가 늘 함께 몰려다닌다는 점이다. 혼자서는 세상 전부를 대적할 수 없기 때문에 ‘부적응자 클럽’을 만들어 똘똘 뭉친 거다. 동네 공터의 버려진 오두막이 아이들의 아지트다. 아이들은 충분히 지질한 상태였지만 불행은 ‘부적응자 클럽’을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느 날 에르완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질 나쁜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는다. 마르탱, 바카리, 프레드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에르완의 부상은 얼굴과 손에 붕대를 감아야 할 만큼 심각했다.
에르완은 엄청나게 다쳤다. 무척 놀란 것 같았다. 그렇게 넋 나간 얼굴은 처음 봤다.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큰 것 같았다. 자기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에르완이 에르완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 이유도 없었다. (29쪽)
불행은 기러기떼처럼 몰려온다
에르완의 일을 계기로 부적응자 클럽 아이들은 불안에 떤다.
우리는 우리 중 누군가가 두들겨 맞는 날이 언젠가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번 두고 보자고 말한 놈도 있었고 우리에게 침을 뱉은
놈도 있었고 우릴 놀려 대는 놈도 있었다. 막연히 감돌던 위협적인
분위기가 현실이 된 것뿐이다. (33쪽)
그나마 아이들은 학교에 새로 온 수학선생님에게 정을 붙이며 살아간다. 보나세라 선생님은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은 수학을 싫어하게 만드는 데 쓸모가 있지.”라는 선언으로 아이들의 지지를 받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아이들은 부적응자 클럽 소년들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 보나세라 선생님은 늘 술 냄새가 풍기는 문제 선생일 뿐이다. 하지만 불행은 또 부적응자 클럽 소년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불행은 기러기 떼처럼 몰려온다고들 한다. 바카리네 아빠가 줄곧 일해 왔던 정원 관리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 바카리는 수업 중에 불안 발작을 일으켰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고 숨 쉬기 힘들어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불행은 이어졌다. 나는 교실 문 앞에서 보나세라 선생님의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타난 사람은 교무 주임 선생님이었다. (39-40쪽)
술 냄새가 화근이 되어 보나세라 선생님이 정직 처분을 받은 것이다. 이제껏 집에서 요양 중이던 에르완은 이 소식들을 전해 듣고 절규한다.
“왜 우리야? 왜 또 우리냐고? 왜 우리만 여자 친구가 없지? 우리 말고 욕먹고 맞는 애가 누가 있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애들은? 부모님이 실업자가 되는 건? 왜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 잘리는 거야? 우린 학교에서 최고로 저주받은 네 명이야. 지긋지긋하다고!” (46쪽)
불행을 평등하게 나눠주는 기계
천재 발명가 에르완은 불행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불행을 평등하게 나눠주는 기계’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돈도 많고 인기도 좋고 절대 아프지도 않으며, 어딜 가든 느긋한 녀석들에게 부적응자 클럽의 더러운 불행을 조금씩 나눠주려는 것이다. 아이들은 기막힌 발명품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론 고민이 되었다.
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일이라고는 해도 이 일을 이끄는 힘은 공격성이었다. 정의라는 옷을 입은 공격성. (73쪽)
하지만 에르완이 기계를 작동시킨 다음 학교 화장실 천장에 숨겼을 때, 아이들은 맘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걸 느낀다. 모든 걸 가진 아이들, 불행과는 담 쌓은 아이들에게 무시당했던 날들…….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그 기계가 정말 작동하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79쪽)
그날, 아이 하나가 체육시간에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늘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어주는 것 같던 아이였다. 기계를 발명한 에르완은 눈을 번뜩이지만, 나머지 소년들은 진지하게 이 사태를 분석한다. 아이들이 내린 결론은 기계가 가짜라는 거였다.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으면 부적응자 클럽의 형편이 좀 나아졌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결국 마르탱은 에르완 몰래 기계를 심리치료사 선생님에게 가져간다. 선생님이 직접 기계를 분해했고, 그 결과는 마르탱의 예상대로였다.
열을 만들어 내는 저항이 하나, 통풍기 하나, 진동판 하나야. 이 기계엔 전혀 특별한 점이 없구나. 소리를 내는 게 목적인 기계야. 네 친구는 영리하고, 미치지 않았어. (93쪽)
달랑 세 가지 부품으로 만들어진 기계는 에르완이 자기 울분을 드러낸 장치였을 뿐이다.
나는 뭔가 하고 싶었어. (97쪽)
다시 부적응자 클럽
아이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인터넷 채팅과 술 말고는 관심이 없던 마르탱의 아빠가 아들을 위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빠는 정직당한 보나세라 선생님을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한다.
“행복과 불행을 평등하게 나누어 주는 게 딱 하나 있구나. 바로 시간이지.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십 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거든.”(103쪽)
결국 행, 불행의 균형추를 맞춰 주는 건 시간이며, 개떼처럼 몰려오던 불행들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거다.
K가 이 이야기의 결론에 백프로 공감하는 건 아니다. 세상엔 시간으로도 균형이 맞춰지지 않는 행, 불행이 있으니까. 하지만 K는 뭐라도 해야만 했다는 에르완의 말에서 위안을 받았다. K가 중학생 때 이 책을 읽었다면 과학선생님을 찾아가 조곤조곤 해명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과학선생님의 등에다 불행을 나눠주는 부적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요즘 K는 이 책을 늘 손닿는 곳에 두고 산다. 그리고 이 책을 <어린이와 문학> 독자들에게 소개할 기회가 생겨 무척 기뻐하고 있다.
최영희
<어린이와 문학>에 청소년소설이 추천완료 되었으며, 푸른문학상 신인상을 받았다.
단편집 『첫 키스는 엘프와』를 발표했고, 엔솔로지 『스키니진 길들이기』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