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간을 영원히 고착시킨 앨범을 보다가 문득 상지에서 “제1차송화강문학상”시상식을 진행할 때 찍은 기념사진에 눈길이 멎었다. 매우 낯익은 얼굴들이다. 당시농민기업가로 일컫던 신천봉(송화강문학상 협찬자)이 제일 복판에 서고 왼쪽으로 리삼월, 김종운, 윤림호(수상자), 오른쪽으로는 신천봉의 부인과 정원욱(당시 하얼빈조선족문화관 부관장), 림국웅, 정수창(수상자), 뒷줄에는 김춘산(수상자), 정해홍(상지시 공상국부국장), 김창수(수상자), 한창선(수상자), 량학수(당시 송화강잡지 편집), 그리고 필자, 박현철(당시 송화강잡지 편집) 등이었는데 실로 의미 있는 사진이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영원히 기념으로 남을 사진, 이 사진 속에 내가 알기로 이미 고인이 된 분이 다섯 분이나 계시기에 더욱 그러하다.
당시 “송화강문학상”은 송화강잡지의 위탁을 받고 자주 상지로 오셨던 송화강잡지 주필이신 김종운 선생님과 “송화강문학상”을 설치하는데 주요 다리 역할을 한 상지의 치과의사이자 문학애호자인 송병식 씨, 당시 상지시 조선족문학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통 큰 신천봉 씨와 여러모로 돌봐준 공상국의 부국장 정해홍 씨 등 상지시 민족간부들의 적극적인 뒤받침에 의해 이루어졌다.
“송화강문학상”은 송화강잡지가 회복된 후 처음으로 진행한 문학행사였는데 “송화강문학상”경영위원회를 결성한 뒤 작업을 시작하였다. 경영위원회에서는 “송화강문학상” 설립에 중요역할을 한 송병식에게 페넌트(锦旗)를 증정하였는데 사람들이 필자도 함께 나가 받으라고 하여 페넌트를 받는 장면을 찍은 사진도 아직 남아있다. 그밖에 시상식에 참가한 전체 인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 수상자들만 찍은 사진 등으로 그때의 역사를 회억할 수 있는 몇 장의 소중한 사진들이 있어 그것을 볼 적마다 자꾸 당시의 정경을 떠올리게 된다.
오늘 새삼스레 이제는 퍽 멀어진 “송화강문학상” 설립할 당시를 떠올리는 것은 “송화강”이 지금껏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것과 혹여 “송화강”이 오늘까지 줄기찬 생명력을 과시할 수 있는데는 당시 설립한 “송화강문학상”이 일정한 촉진작용을 하지 않았나 하는 마음 때문이다.
신생한 순 문학지로 “송화강”잡지의 지명도를 높이고 보다 질 좋은 작품으로 다른 잡지들과 대처하기 위해 문학상을 설치했을 당시, 상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도와주었다는 것(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이 또한 좋은 추억거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상지가 이렇게 조금이나마 민족문학에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상지 나름의 문화적 전통과 포부가 있었기 때문으로 인식되는데, 이런 문화전통은 사람에 의해 이어지는 것으로 크고 작은 무수한 문필 활동 끝에 끝내 중국조선족 치고 제일 선참으로 되는 “상지시조선족작가-기업가련의회”가 결성되고 그것이 “송화강문학상”을 설치할 수 있었던 토대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라고 “송화강문학상”을 설치한 나날을 회억하면서 먼저 “상지시조선족작가-기업가련의회”의 성립부터 말하려한다.
……상지는 북방에서 조선족문학이 비교적 앞선 곳이다. 필자가 알기에도 일찍 상지에 있었거나 상지를 거쳐 간 문인들만 해도 중국조선족문단의 한 산맥으로 일컫는 정판룡을 비롯하여 백호연, 리상각, 허룡구가 있었고 그 후 김종운, 한춘, 강효삼, 김상봉이 있었다.
그중에는 벌써 고중 때부터 작품을 발표한 김려수며 임광산이 있었고 발표는 안했지만 장편서사시를 쓴 안만수며 김명선 등 당당한 문학희망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학생 문학써클을 중시하여 상지조선중학교에는 학생작품을 묶은 “싹”, “봄” 과 같은 프린트잡지들이 있었는가 하면 학교 공청단에서 꾸리는 “종소리”란 정기 신문이 있었다. 그리고 학교 흑판보를 통해 대대적으로 학생 작문을 등재했고 교내에서 각종 글짓기콩쿠르를 진행하였는데 필자나 한춘 등도 바로 그런 콩쿠르에서 입선이 되면서 문학에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다. 실은 나나 한춘 말고도 당시 상지조선중학교에는 장차 문학을 하겠다는 작가희망자가 특별히 많았는데 그들이 조선으로 가지 않고 그냥 남아있었더라면 상지는 북방에서 상당한 실력을 가진 문학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1980년대 초, 필자는 하동문화소에 사업일꾼으로 배치되었다. 하동향은 당시 상지시의 유일한 조선민족 향으로 일찍 50년대 초에 문화관이 있어 조선민족의 문화예술을 관장하였는데 한시기 발전을 거듭하다가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해산되어 문화관이 작은 범위의 문화소로 작용이 축소되었다. 그곳마저도 문화대혁명 때는 취소되었다가 그 후 문화소를 회복한 뒤 한 음악인이 있었는데 대우문제로 그만두고 학교로 전근되어가면서 일찍 50년대 문화관 관장이었던 엄주식이란 분을 초빙하여 임시사업을 맡겼다. 명색이 문화소지 돈 한 푼 없이 간판만 있다시피 하였다. 후에 민족정책이 관철되면서 정식 사업인원을 두게 되어 80년대 초, 필자가 중학교에서부터 문화소 책임일꾼으로 전근된 것이다.
문화소는 보기엔 하찮아도 일을 하고자 하면 실로 할 것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다 할 수는 없어 보통 해당 문화간부의 소질과 취미에 쫓아 중점항목을 틀어쥐게 되는데 나는 과외작자들의 문학창작을 틀어쥐었다. 문화소에 전근되어 가기 전, 내 본신이 글을 쓰면서 당지의 많은 문학도들을 집결시켜 활동을 조직했던 만큼 그것이 기초로 되어 과외작자들의 문학창작이 나의 주요 사업으로 되었던 것이다. 나는 열성과 방법을 강구하여 해마다 “하동향진달래문학살롱”을 진행하였는데 하동향을 중심으로 하여, 때론 전 현의 작자들을 망라한 전 현 범위의 행사로 되기도 하였다. 이런 활동을 진행하는 과정에, 상급 언론매체와 문학지인 “송화강”편집부, “흑룡강신문”, “흑룡강조선말방송국”문예부, 목단강조선민족출판사 “은하수”잡지 편집부 등의 문학편집과 신문 일꾼들의 협조와 지지를 받아 새로 입문하는 작자들의 작품도 많이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송화강”잡지의 리삼월 시인, 김종운 선생님, 신문사의 한춘 선생님 등 분들이 교통 불편도 마다하지 않고, 숙식의 어려움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가 청할 때마다 참석해주셨는데 그 본신들이 못 오시면 다른 분이라도 꼭 보내 참으로 감사했다. 그런 가운데 어느 하루 치과의사로 있는 송병식을 알게 되었다.
송병식은 상지 시장 한 귀퉁이의 작은 집에서 기계를 차려놓고 치과를 했는데 교접성이 좋아선지 당시 상지시 그러루한 사람들과 많이 왕래하였다. 그 가운데는 윤성근이라는 기업가도 있었다. 80년대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임업에서 사용하는 트럭부속품 제작에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된 윤성근은 송병식을 통하여 상지시 조선족문학을 추동하는데 한 몫 할 궁리를 했던 것이다. 송병식은 맨손이다시피 진행하는 진달래문학살롱의 형편을 알고는 나를 도우려 생각했던 같다. 무튼 아주 고마운 일이고, 당시 돈 있는 기업인들이 조선족 문학은 물론, 교육에도 관심을 보였고 불우이웃 돕기 등에 관한 감동스토리가 신문, 방송, 잡지 등에 많이 등재되었던 때였던 만큼 송병식도 거기서 계발을 받은 것 같다. 후에 안 일이지만 기업가 윤성근도 한때 문학을 지향하여 시도 써봤고 후에 미술을 공부하여 회가가 될 꿈도 꾸었었다. 그러니 문학에 대해 일정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여 그의 도움을 받는 일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당시 송병식은 문학 활동을 한 번 크게 해보자면 그 어떤 명분이 있어야 하고, 그러자면 그에 필요한 조직을 내와야지 않겠는가고 건의하여 구상하여 내놓은 것이 “상지시조선족작가-기업가련의회”였다.
의기투합된 나와 송병식 등 사람들은 꿈을 곧바로 행동에 옮겨 급급히 조직의 운영목적이며, 제도며, 절차며 조직구성 등 구체사항을 만들어냈다. 물론 비밀조직이 아닌 이상 상급 유관부문에 청시하고 상지현위, 현정부와 민족사무위원회 등에 근무하는 민족간부들의 의견을 모아 합법적인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드디어 윤성근 기업인이 한번에 3천원을 투자하였는데 당시에는 아주 큰돈이었다. 자금이 해결된 후 우리 몇몇 골간들은 자주 한자리에 모여 대회진행날짜며 장소, 참가인원이며 진행 절차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토의한 후 6월 27일을 모임날짜로 정하였으며 “송화강”잡지사, 흑룡강신문사, 흑룡강조선어방송국, “은하수”편집부, “도라지”잡지사 등의 관계자들을 청하였다. 우리 성의 유명 작자들도 불렀는데 그중에는 녕안의 김동진 시인도 있었다. 이렇게 되어 “상지시작가기업가련의회”를 성립하였는데 성립장소는 현 농업기술보급중심청사였다. 마침 그곳 주임이 조선족인 김광수 씨였는데 민족에 대한 애정이 깊은데다 부인이 조선중학교 조선어문교원이였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한 덕에 경비도 줄일 수 있었다.
그때 “송화강”잡지에서 주필로 계신 김종운 선생님이 왔는데 연변의 유명한 가수 송대관을 초대하여 개막식 때 독창을 멋지게 불렀다. 그리고 언제나 연설을 격양된 목소리로 하는 문창남이 민족 문학을 두고 심금을 울리는 발언을 하여 참가자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당시 80고령인 윤주택 노인께서는 모임을 위하여 축시도 써왔다.
모임에서는 정식으로 “상지시작가-기업가련의회”성립을 선포하고 윤성근이 고문 겸 회장으로, 내가 부회장, 송병식이 비서장을 맡기로 하였다. 모임에 기업가 윤성근 뿐 아니라 신천봉이며 양영근 등 당시 상지에서 기업으로 잘나가는 사람들도 불렀는데 그것이 훗날 은을 낼 줄이야. 모임 이튿날 전체 참가자들이 야외에 가 들놀이를 하기로 했는데 경비를 신천봉이 자진 담당하였다. 이것이 신천봉이 “송화강문학상”을 설치하는 발단으로 되었다.
바로 그 번 모임이 있은 후 “송화강문학상” 설치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아무리 지방의 문학 활동이 잘되어 작자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해도 작품을 발표할 원지가 없으면 안 된다. 당시 신문의 문예부간과 “송화강”, “은하수”, 방송국의 문예프로에서 하동향이나 상지시 조선족작자들의 작품을 전란으로, 혹 개별적으로 많이 실어주었다. 이에 고무를 받으면서 우리 자신이 잡지나 신문을 꾸릴 수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작품을 많이 발표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신문이나 잡지에 많이 기대야 했기에 우리와 가장 가깝고 또 우리를 많이 지지해준 “송화강”을 선택했다. “송화강”잡지에서 여러 번 “상지특집”을 내주었고, 상지작자들의 작품도 기대 이상으로 많이 등고해 주어 감사했던 것이다. 하여 “송화강문학상” 협찬자를 물색하던 중 우리 의도를 선뜻 받아들인 분이 바로 신천봉 씨였던 것이다.
하긴 신천봉 씨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수 있는 배경엔 상지 공상국부국장인 정해홍 씨의 역할이 크다. 정해홍 씨는 일찍 50년대 초, 퇴역 후 상지시 공상계통에서 사업하다 개혁개방 뒤 자유상업을 허락할 때지만 법과 질서를 위반하는 상인들에 대하여 원칙적인 제재를 가한 통에 일부 영도들의 미움을 사서 한때 철직까지 당했던 사람이다. 후에 수차 당중앙에 편지를 써서 꼭 99번만에 당중앙으로부터 지시가 내려 누명을 벗고 복직했다. 정의감이 넘치고 원칙성이 강한 그는 민족심이 더 강했다. 후에 알았지만 그 역시 젊었을 때 문학을 희망하고 작품을 썼었다. 신천봉이 기업을 운영할 때 그가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그 덕에 신천봉이 “송화강문학상”을 후원하게 되었다.
드디어 제1차 시상식을 상지에서 갖게 되었다. 심사를 거쳐 송화강잡지 첫 문학상으로 한창선의 “산재마을 시초”와 정창수의 “씨비리 포로수용소에서”, 그리고 지오의 소설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2차로 윤림호의 소설과 김춘산의 시, 그리고 필자의 시 등이 선발되었다. 지금에 비해 상금이 많진 않았지만 당시로 말하면 작은 돈이 아니었다. 한달 노임이 극상 몇 십 원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일등 수상자의 상금이 300원이었으니…… 그보다 작자들이 이로 하여 작품창작에 성을 내는데 지대한 고무가 된 것은 “송화강”잡지의 지명도를 높인 것이다.
그때 스타트를 뗀 “송화강문학상”이 3차까지 진행이 된 것 같다. 후에 신천봉도 경기가 좋지 않고 코리안 드림이 시작되어 작자들도 하나 둘 빠져나가면서 “송화강”잡지는 가혹한 시대의 고험을 겪어 문학지가 한때 종합지로 되는 고충도 겪었었다. 그러나 어찌해도 이 잡지만은 살려나가기 위해 그 어려운 경제적 조건에서도 문학상을 설치하며 노심초사한 이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더더욱 순수한 농민기업인으로써 한때 “송화강”잡지의 번영 발전을 위해 적은 노력이나마 아낌없이 기여한 신천봉과 송병식 같은 일반인들의 작은 고마움이라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