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駱山)의 청룡사 (靑龍寺)로 온 정순왕후와 시녀(侍女)들은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시녀(侍女)들이 동냥을 하기도 하고 허드렛일을 하여 살았지만 그것도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청룡사 건너편에 있는 우물가로 가서 옷감을 세탁하는 일을 했는데 그 물에 옷감을 빨아 말리면 자주색이 되었단다.
그 골짜기 이름이 "자줏골"이라고 한다.
자줏골을 가려면 청룡사(靑龍寺)에서 내려가 창신역(昌信驛)을 건너 오른쪽으로 올라가야한다.
조금 올라가면 큰 길과 긴 계단길이 나오는데 계단길이 지름길이다.
긴 계단길을 허덕대며 다 올라가면 큰길과 다시 만난다.
큰길에서 왼쪽에 있는 숭인교회를 끼고 길을 따라 올라가면 "명신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원각사"라고 하는 절이 왼쪽 아래에 보인다.
원각사 담을 끼고 좁은 계단길로 내려가도 되고,
조금 더 길을 올라가면 아파트 정문전에 왼쪽으로 운동기구가 있는 쉼터가 보인다.
이길로 내려가면 "자지동천"(紫芝洞泉)이 있는 곳이다.
안내판이라고는 학교앞 전봇대에 높이 매달린 "자주동샘" 하나뿐이다.
좁은 계단길로 내려와 원각사 입구에서 본 "紫芝洞泉"이 있는 곳.
庇雨堂.
이 설명문도 문제가 있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 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실학자다.
지봉유설(芝峰類說)은 20권으로 된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 격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이 안내문에 빠져있다.
이 지봉유설에 사육신의 묘가 언급되고있다.
원래 이 비우당(庇雨堂)은 좌측에 보이는 쌍룡2차 아파트에 있었다고 한다.
아파트를 지으면서 이곳으로 쫒겨온 것이다.
내 생각에는 아파트 휴식공간에 만들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마음이다.
이곳으로 옮겨 지으면서 紫芝洞泉을 보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샘을 찾아 한참을 두리번 거리니 집뒤로 돌을 쌓아놓은 곳이 보인다.
그런데 문을 잠가 놓아 들어갈 수가 없다.
관리소에 전화를 하니 한참후에 관리인이 와서 문을 열어준다.
紫芝洞泉이라는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비우당 옆에 세워진 이 비문(碑文)이다.
이 글의 내용은 그냥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비석을 세우는데 같이 한 단체에 천주교 서울 대교구가 들어있다.
왜 천주교에서 芝峰 先生의 生家에 의미를 두는 것일까?
그 이유는 지봉 선생(芝峰 先生)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이란 책에 있다.
이 책에 "마태오 리치"(Matteo Ricci)가 쓴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다.
천주실의(天主實義) 란 이탈리아어로 ‘DeDeoVeraxDisputatio’이며 ‘天主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다.
겨울이라 그런지 아니면 주변에 온통 아파트를 지어서 물길이 달라진 것인지 샘에 물이 없다.
샘 위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옛것은 아닌듯 하다.
집 뒤로 紫芝洞泉이러고 쓴 글씨가 있다.
紫芝洞泉
글씨를 자세히 보니 우측의 "紫芝"라는 글씨와 좌측의"洞泉"이라는 글씨가 조금 다르다.
紫芝의 글씨는 힘차고도 부드러운데 반해 洞泉은 굳어있는 모양세다.
아마도 洞泉은 훨씬 후에 써 진듯 하다.
조금 더 일찍 가야 좋은 사진을 찍을 듯하다.
샘에 집 그늘이 들어 자세한 사진이 안나온다.
윗쪽으로 "거북바위"가 보인다.
거북바위를 머리쪽에서 보면 느낌이 없다.
거북바위는 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달리 보인다.
제대로 보려면 비우당 위쪽에 있는 온동시설이 있는 곳 끝 철책으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 봐야 제대로 거북 모양이 보인다.
생각컨대 빨래를 하여 이 바위 위에 널어 말리지 않았을까 한다.
사람들이 여기서 나온 자주옷감을 팔아주기 위해 저고리 깃이나 끝동을 자주색으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인시장이 있던 곳.(사진 중간 승합차 옆으로 파란 전화박스가 있는 곳.)
동묘 앞 여인시장이 있던 곳은 옛날 숭신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곳이 牛市場이였다.
이곳에 원래 남정네들만 나다니는 市場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 일부를 막고 여인들만 모였단다.
정순왕후(定順王后)와 시녀들을 그곳을 오게하여 물건을 사고 파는 척하며 채소며 생필품을 몰래 건넸단다.
전에는 길 옆에 "여인시장터"란 팻말이 있었는데 근래 가보니 없어졌다.
정순왕후(定順王后)는 평생을 고기나 생선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게 살다가 중종(中宗) 16년인 1521년 7월 7일 82세의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정순왕후가 죽은지 77년만 인 숙종 24년인 1598년 12월 7일에야 단종(端宗)의 억울함을 인정하여 복위(復位)가 된다.
단종이 복위(復位)가 되면서 정순왕후(定順王后)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러고도 많은 세월이 흐른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이 단종(端宗)과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래서 낙산(駱山) 청룡사(靑龍寺)에 영조대왕의 친필로 쓴 비석이 서게 된다.
비각(碑閣) 입구.
이곳은 청룡사에서 관리를 한다고 한다.
언제 개방하는지 알 수 없으나 항상 잠겨있다.
碑閣.
碑閣의 懸板.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 "앞산과 뒤의 바위는 천만 년을 가리라".
세 신묘 구월 육일 음체서(歲 辛卯 九月六日 飮涕書)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신묘년이면 영조 47년이다.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碑.
그런데 왜 정업원 구기(舊基)일까?
구기(舊基)라고 하면 "옛터"를 말함이다.
즉 이곳이 정업원이 있었다는 말이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이 碑를 세운 것은 이미 정업원이 없어진 지 160여 년 이후다.
이 정업원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조선 초기에는 궐내(闕內)에 정업원이 있었다고 한다.
정업원에는 왕족의 홀로 된 여인들이 사는 곳이였다고 한다.
언제인지 청룡사로 정업원이 넘어오게 된다.
그때에 정순왕후가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정업원은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다가 1612년(선조 40)에 정업원은 완전히 폐지되고
비구니들은 성 밖으로 쫓겨났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어찌됐던 비석 앞면에 새겨진 淨業院舊基라는 글씨도 英祖大王의 御筆이라고 한다.
뒷면에는
皇朝正德十六年辛巳 六月初四日後 二百五十一年辛卯 九月六日 立
前後皆親書.
라고 씌여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