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회지에 살면서 농사를 짓거나 농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고 있다. ‘텃밭 가꾸기’, ‘옥상 밭 만들기’, ‘베란다 채소 기르기’, ‘도시 양봉’을 통해 취미 생활을 즐기며, 여가를 활용하여 친환경 농업으로 좋은 먹거리를 생산하려는 뜻이 있기 때문인가 보다. 그리고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주말농장’을 만들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꾸고, 행복을 찾는 사람들도 해마다 그 숫자가 증가하고 있단다. 실제로 최근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충남은 10년 전보다 농업인구가 24% 감소하였지만, 대전은 오히려 44%나 늘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퇴직하거나 현업에서 은퇴한 뒤에 새롭게 농업에 참가하는 도시 농부들이 점차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퇴직한 뒤의 소일거리를 생각해서 나도 10여 년 전에 지인의 소개를 받아 가까운 옥천(沃川)에 작은 밭을 한 필지 장만해 두었다.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동안 밭에 갈 때마다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기에 밭에 가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밭 가까이에 살고 계신 동네 어른에게 농사를 짓도록 맡겨두고, 한쪽 모퉁이에 우리 가족이 먹을 만큼 열무, 오이, 들깨 등을 심어두고 한 달에 두어 번씩 찾아갔다. 자주 갈 수 없어서 밭에 가는 날이면 풀과 씨름하다가 기진맥진해서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곤 했다.
농작물을 기를 수 있는 땅이 있고 노동력도 있었지만,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없어서 생각했던 것보다도 힘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배우고 싶던 차에 대전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그린농업대학의 신입생 모집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입학원서를 접수했다. 지원만 하면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사람도 많이 있다는 담당자의 이야기를 듣고는 겁이 났다. 이번 기회에 영농교육을 받아서 농업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봉사활동 실적까지 덧붙여 서류를 준비하고는 합격하기를 기도했다.
입학시험을 치른 아이들이 합격자 발표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대전농업기술센터 홈페이지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합격한 것을 확인했을 때의 기분은 어른도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합격통지를 받은 날 저녁에는 케이크를 준비해서 가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자기 소개하는 첫 시간에 보니, 공직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뒤에 농업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영농교육을 통해 질 좋은 먹거리를 생산하고, 흙과 함께 인생 2막을 보람 있게 보내려는 향학열이 뜨거운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농업대학 교육과정은 씨앗을 어떻게 뿌리고, 무슨 비료를 주며, 어떤 농약을 살포해서 수확물을 거두어들이는 효율적인 영농기술을 배우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강사마다 수업시간을 통해서 농업은 생명이며, 농작물을 가꾸는 것은 생명체를 기르는 소중한 작업이라는 것만 강조했다.
농사꾼은 땅에 씨앗을 뿌리기 전에 흙을 고르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여 발아를 잘 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씨앗이 딱딱한 껍데기를 깨고 어린 싹이 땅 위로 올라오면 생명체가 자랄 수 있게 양분과 햇볕이 공급되도록 여건을 만들어 준다. 그러면서 각종 병·해충이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지 못하게 제거하며, 잡초를 뽑아 성장하는 데 어려움이 없게 주변 여건을 손질해 준다. 작은 씨앗 하나가 땅을 헤집고 나와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들은 여름 내내 돌아보며, 가을이 되어서야 알곡을 거두어들인다. 이렇게 농작물을 가꾸는 행위는 어린아이를 출산해서 기르는 어미의 심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수업을 통해서 비로소 터득하게 되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서 자란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농작물을 가꾸는 일에 깊은 애정을 쏟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내가 농부가 되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나 보다.
가지치기
남녘으로부터 훈풍을 따라 꽃소식이 올라오고 있다. 양지쪽에 앉으니 따사로운 햇살이 아랫목처럼 포근하다. 주말을 이용해서 울안에 있는 나무들을 손질하기로 마음먹었다. 담장을 따라 늘어선 네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 그리고 주목 밑으로 화단 주변을 둘러싼 영산홍과 회양목이 뒤엉켜 있다. 감나무가 너무 크고 무성하게 우거져서 소독하거나 감을 딸 때마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던 아내가 올해는 꼭 가지치기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가을이면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가지를 잘라내면 그만큼 수확하는 양이 적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 아내의 제안에 손사래를 치곤 했었다. 그러다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조경하는 친구에게 가지치기를 부탁했다. 약속한 대로 토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집으로 왔다. 아내는 마실 것을 내오면서 “저 양반 말을 듣지 말고 잘라 달라.”고 당부한다. 친구는 웃으면서 “원래 본인 것은 아까워서 못 자르는 법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올해는 많이 따먹지 못하겠지만, 후년에는 감이 제법 열릴 것이라며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안심시켰다.
차를 마신 뒤에 친구는 가져온 사다리를 나무에 걸쳐 놓더니 날다람쥐처럼 올라가 옆구리에 찬 혁대에서 톱을 꺼내어 감나무 가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무를 자르는 모습을 바라볼수록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가지를 쳐내는 것이 아니라 감나무 중동을 마구 자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굵다란 몸통을 마구 쓰러트린다. “너무 많이 자르는 것이 아니냐?” 물었더니, 키가 크면 감을 따기가 힘들다면서 감나무는 옆으로 자라도록 길러야 한단다. “그렇지만 굵은 중동을 마구 자르면 어떻게 하냐?”고 내가 볼멘소리를 했더니, 곁가지에서 새순이 뻗어 나가면서 감이 열리는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감나무 가지들을 끌어다가 한쪽 구석에서 톱으로 자르며 뒷심부름을 하는 나는 말을 못 하고 혼자서 속만 태웠다. 우리 집에서 제일 크고 늠름하게 생긴 대접감인 납작감[盤柿] 나무를 손질하고 내려오는 친구는 승전보를 안고 돌아오는 장수의 모습처럼 의기양양해 보였다. 감나무를 보기 좋게 이발한 것이 아니라, 볼썽사납게 잘라내고 몸통만 남겨 두었다. 마치 시야를 가리는 가지들을 모두 잘라버린 도로 위의 가로수처럼 내 눈에는 흉물스럽게 보였다. 친구는 나를 바라보면서 지금은 마음이 아프겠지만 후년이면 자기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라고 말하면서 옆 단감나무로 올라간다.
우리 집에서 딴 단감은 한 입 베어 물고 씹을수록 입속에서 단물이 솟아나오며 아삭거리는 식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 식구들이 모두 다 애지중지하는 나무다. 그런데 이 나무에 올라가자마자 재빠르게 굵은 중동을 마구 쳐내는 손놀림이 피도 눈물도 없이 형장에서 칼춤을 추는 망나니처럼 느껴졌다. 두 그루를 손질하고 나니, 아내가 과일을 내왔다. 친구는 자랑스럽게 이제 몇 년 동안은 손을 안 대도 된다고 큰소리 하면서 으스댄다. 나는 속이 몹시 아렸다. 이어 월하시(月下柿)와 대봉시(大峯柿)까지 자르고 나무에서 내려와 허리에 찬 벨트를 풀었다. 그동안 서로서로 손을 마주 잡고 사이좋게 지내던 감나무들이 마치 싸우고 난 뒤 토라져서 서로 등을 돌린 아이들처럼 사이가 벌어졌다. 손질을 마친 정원은 나무 중동 위에 드문드문 몇 개의 가지만 파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이 마치 볼썽사나운 가로수처럼 보였다. 여름철이면 나뭇잎이 우거져서 시원했던 우리 집이 올봄부터는 햇살 가득한 정원을 갖게 될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내가 걸어온 길도 감나무를 잘라내듯이 커다란 중동을 자르고, 많은 가지를 쳐내면서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는 장래에 하고 싶은 일들이 밤하늘에 수놓은 별처럼 많기도 했었다. 운전기사, 선장, 기관사, 군인, 과학자, 정치가, 공무원, 은행원, 교사…… 그러나 점점 커가면서 하나둘씩 잘려나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을 두고 고민을 하다가 자연계열을 잘라냈다. 그리고 대학으로 진학할 때에는 국어국문학과를 남겨두고는 모두 베어버렸다.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마다 많은 아픔과 갈등과 번민이 있었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그래도 가지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다니는 동안에도 진로를 두고 썼다가 지우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가지를 쳐내야 했다. 신문기자, PD, 회사원, 공무원, 출판업, 교사…… 그러다가 교수님의 조언으로 교직을 선택하면서 다른 것을 과감하게 끊어냈다. 학교에서 삼십오 년 동안 학생들과 생활하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돌아보니, 내가 헤쳐 나온 길이 모두 주변 어른이나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가지치기를 한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박영진 pyj9934@hanmail.net
수필가, 『그린에세이』 『한국산문』 등단. 대전·충남 수필문학회 회원, 한남대학교 총동문회장. 대전대신고등학교 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