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6) - 이영훈 목사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 17:1-6)”
할렐루야.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창세기 17장 1절로 6절 말씀을 가지고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해 주세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이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일생을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고 인도해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섬기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넘치는 감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1.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함
첫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돈 있는 사람은 돈을 의지해요. 세상에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을 의지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자기의 지식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권력에 있던 사람도 재판받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참 권력의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절대 우리는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은 말씀합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전능한 하나님이라.” 99세인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왜 그 말씀을 하셨습니까? 75세에 아브람이 부름을 받고 하나님께서 내가 복이 될 것이고 많은 자손을 주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 듣고 여기까지 왔는데, 99세가 되도록 자기하고 자기의 아내 사래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없었어요. 점점 그의 꿈과 희망이 다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도저히 우리 가정에 아이를 기대할 수 없다.’ 하는 그 때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우리가 낙심할 때 우리가 절망할 때 우리가 완전히 밑바닥에 떨어져서 이제는 ‘끝났다’ 할 그 때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절망의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전능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라.”
로마서 4장 19절을 보면,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라고 말씀을 했어요. 이미 나이가 100세가 다 되어서 인간적으로는 불가능입니다. 100세에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가 있습니까? 아내가 90세에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인간은 불가능을 말하지만 우리 하나님 안에서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인간은 절망을 말하지만 우리 하나님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분이고 우리 삶 가운데 꿈과 희망을 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여러분 기억하세요.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절망을 절대희망으로 바꾸시는 역전의 하나님. 우리는 다 끝났다하고 두 손을 놨을 때 주님은 우리 손을 탁 붙들어서 기적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 40년을 가는 동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만들어 주시고 저들을 돌보고 지켜주고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놀라운 역사로 우리에게 나타내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에서 외로움 속에 고난의 길을 가는 야곱에게 주신 말씀이 있어요. 창세기 35장 11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외로움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그리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믿고 나아가면 주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우리가 괜히 두려워하고 위축됩니다. 세상 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는 말도 못해요. 그러나 여러분 사람 앞에선 당당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갖고 주님을 붙잡고 나아가시되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믿음의 전진을 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절대순종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 가운데 놀라운 기적을, 놀라운 은혜를,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못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20세기의 출애굽으로 불리우는 덩커크 해안의 기적, 제2차 세계대전 전쟁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으로 남은 사건입니다. 독일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독일군이 프랑스를 쳐들어와서 열흘 만에 거의 그 영토를 다 점령해서 영국과 블란서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들을 다 몰아서 도버 해안까지 몰고 갑니다. 저들이 마지막 덩커크 해안에 갇힙니다. 이제 며칠 후에 저들이 다 붙잡히면 전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쪽에서는 독일군이 밀려 올라오고 이쪽은 바다기 때문에 마치 홍해 앞에 놓인 이스라엘 백성하고 같았어요. 바로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혔으니까. 저들을 실어 나를 전함이 34척 밖에 없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일주일 동안 33만 8천명이 여기서 이제 그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는데 절대 절망의 위기에 처한 거예요.
그때 처칠 수상이 온 국민에게 기도를 제시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영국군과 연합군이 지금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기도해주세요. 온전히 저들이 철수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모든 배들이 나와서 저들을 철수 하는데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고기 잡는 어선까지 다 나와서 약 900척의 배가 나와 가지고 철수하기 시작하는데 1940년 5월 27일부터 6월 4일까지 일주일 동안 33만 8천명이 철수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이 기간 동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느냐 하나님께서 기상 조건을 아주 나쁘게 만들어 갖고 억수 같이 비가 내리게 하고 그래서 그 탱크들이 밀고 올라오는데 땅이 진흙탕이 돼서 저들이 전진해 오지 못하고 또 하늘이 비로 뒤덮이고 먹구름이 가득 차니까 폭격기가 와서 그 배들을 폭격하려고 해도 기상조건이 악화되어서 폭격기가 많이 뜰 수가 없었어요. 폭격기로 인해서 피해를 입고 죽은 군인들이 3만 명이고, 무사히 철수한 군대가 33만 8천입니다. 그래서 이 2차 세계대전 모든 전쟁 가운데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던 사건을 ‘덩커크 해안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끝났다고 말합니다. 이제 철수할 배도 없고, 독일군은 밀려들어 올라오고, 그대로 저들은 다 갇혀서 몰살을 당하든지 포로가 되든지 완전히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일주일 동안 그렇게 비를 내리시고 그 다음 이쪽에는 날씨가 맑게 해주셔서 9백 척으로 어선과 모든 배를 다 33만 8천명을 빠져나가게 하신 후에 독일군이 탁 들어와 보니까 텅 비었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기적을 행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이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능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느냐.
2. 약속의 말씀을 의지함
둘째로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말씀을 지켜 행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장 2절에,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창세기 17장 4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 말씀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말씀을 주셨어요. 말씀과 동행하세요. 말씀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고, 은혜가 있고, 치료가 있고, 용서가 있고, 하나님의 풍성한 우리를 향하신 그 예비하심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에 거해야 돼요. 말씀의 약속 붙잡고 나아가면 기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100살 거의 다 돼서 아이가 없이 절망 가운데 있던 아브람에게 말씀 하시기를 너 이름을 바꿔라. 이름이 너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고 이제부터 믿음으로 고백하라.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예요.
창세기 17장 5절로 6절에,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이름을 바꾸셨어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꾼 것입니다. 그러니깐 많은 민족의 아버지, 많은 민족의 어머니로 이름을 바꿨어요. 지금 아이가 하나도 없는데.
우리 교회 남상돈 집사님은 자녀가 열셋이예요. 열셋. 열셋 인데 그 자녀들이 다 잘 자랐어요. 얼마나 복 받은 가정인지 몰라요. 그런데 부인되는 집사님이 올해 마흔아홉 되시는데 아직도 젊으셔서 원하시면 둘, 셋은 더 낳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쟤가 막내입니다. 막내인데. 이 아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다 잘 자라서 얼마나 복 받은 가정이 됐는지 몰라요. 또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이 남집사님네 가정을 다둥이 아빠, 다둥이 엄마 애들이 많으니까 별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애가 하나도 없는데 우리 식으로 쉽게 다둥이 아빠, 그 부인에게 다둥이 엄마하면 동네사람이 “어이구 정신이 이상 하구나. 애도 하나도 없는데 무슨 다둥이 아빠, 다둥이 엄마라 그래.” 그 열국의 아버지, 열국의 어머니가 그 말입니다. 많은 자녀들의 아버지, 많은 자녀들의 어머니라고 부르니 애가 하나도 없는데 “야 그렇게 애, 애, 애 하더니만 완전히 갔구나 갔어.” 아침에 일어나서 “여보, 많은 아이의 엄마, 많은 아이의 아빠”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다둥이 엄마’, “어이구 저 사람 애 하나도 없는데 무슨 다둥이 엄마야,” ‘다둥이 아빠’. “완전히 저 집은 이제 애를 하도 그리다가 이상하게 됐구나” 라고 생각 할 수도 있는데 이름을 부르는 동안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루신다. 하나님이 이루신다. 하나님이 이루신다. 할렐루야. 그러고 나서 이제 남자가 다 할례를 받으므로 약속이 지켜질 것을 너희 몸에도 표시해라.
창세기 17장 10절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세기 17장 13절에,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성경은 말씀합니다. 많은 자녀를 줄 것을 말씀으로 약속하시고, 남자의 몸에 흔적으로 남기게 하셨어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저들에게 확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온 천지는 변해도 일점일획 변치 않는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약속한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말씀을 지켜 행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말씀을 지켜서 행하시고, 그 말씀 가운데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Smith Wigglesworth) 목사님 계십니다. 20세기 초에 오순절 운동에 큰 역사를 이루신 영국의 목사님이신데 세계적인 부흥사이신데 원래 그렇게 많이 배운 분이 아닙니다. 배관공, 이 파이프 연결하는 배관공으로 계시다가 성령 충만 받고 나서 그 다음 주의 종이 되기로 하고, 말씀을 전하는 부흥사가 됐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산이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눈만 뜨면 말씀을 봅니다. 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가서 선포할 때 기적이 일어났어요. 얼마나 말씀 충만하고, 성령 충만했는지 말씀을 선포할 때 귀머거리가 들리게 되고, 눈 먼 자가 눈을 뜨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기록에 따르면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열네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 그래요. 암이 없어지고, 다리가 생겨나고, 그런데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하게 된 비결이 어디 있느냐.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저는 그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대꾸하지 않는 절대 순종이어야 합니다. 만약 성경이 이렇다 하면 정말 그런 것입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 요소입니다. 이 지구상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말씀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가벼운 치통을 고치는 것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온 세상은 변해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말씀으로 동행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기적을 가져올 것입니다. 말씀이 은혜를 가져올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새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3. 변화된 모습을 바라봄
이제 말씀 붙잡고 셋째로 거룩한 꿈을 꾸고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바라봐야 돼요. 100세가 다 된 아브라함이 부인을 많은 민족의 어머니여, 부인이 자기를 많은 민족의 아버지여 부르면서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아이 하나도 없지만 많은 아이가 주어질 것을 믿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믿음으로 바라보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이 풍성한 은혜로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 숭일당 교회에 가보니까 참 기적이에요. 중국 항저우라고 하는 도시에 그렇게 큰 교회 그렇게 많은 성도가 모이는 교회가 있다니 기적이에요. 교회를 얼마나 아름답고 크게 지었는지 몰라요. “야,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중국하면 기독교하고는 거리가 먼 나라인지 알았는데 그렇게 큰 교회를 짓고 그렇게 많은 성도가 모였는데 80%가 젊은이들이에요. 그 교회 미래가 있어요. 목사님도 아주 젊으시고 저도 젊지만 더 젊었어요. 그 교회가 불 일 듯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찬양도 막 뜨겁게 하고 여러분 그 목사님이 7년 만에 만명 교회를 이루었는데 거룩한 꿈을 꾸는 사람이에요. 이제 10만명을 바라보고 거룩한 꿈을 꿉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부흥시켜 주실 거예요. 여러분 거룩한 꿈을 꾸고 바라보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축복이 다가 오는 것입니다.
저는 매 주일 기적을 봅니다. 왜냐 이 성전에 들어오면서 이 많은 성도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 오늘도 또 제가 기적을 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지 아니하시면 이 많은 사람이 올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연약하고 감히 여기 설 수도 없는 그런 많이 갖추지 못한 종인데 하나님이 일하셔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와서 예배드리게 되니 주님 영광 홀로 받아주시옵소서. 할렐루야. 늘 저는 예배에 많은 성도들이 몰려오는 기도를 하는데 바라보는데 하나님이 계속 많은 분들이 오시고 많은 새신자가 있게 하시고 그 다음에 자리가 없어서 돗자리 깔고 앉아서 예배드리시고 죄송해요. 우리 11시 예배 때는 너무 사람이 많이 오셔가지고 그래서 9시 예배를 좀 오시라 그래도, 그래도 11시에 오셔서 하여간 하나님 은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바라보세요.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세요. 축복이 다가 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고 절대 긍정에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고백이 여러분의 미래를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난 할 수 없습니다. 난 죽고 싶습니다. 난 끝났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집니까? 오히려 마음만 더 속상하고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고 나서 절대긍정 절대 감사로 바뀌어 져야 되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듣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행하고 긍정적으로 우리가 믿음의 행군을 해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릴 통해서 일하시는 겁니다. 죄송하게도요.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불평한 사람들하고 함께 일한 기록이 없어요. 뭐, 죄송할 것도 없지 뭐 하여간 여러분 절대긍정 절대감사입니다. “따라하세요. 절대긍정 절대감사.” 쉽게 불평하지 마세요. 쉽게 부정적인 이야기하고 남을 비판하지 마세요. 그저 감사하세요.
창세기 17장 16절을 보니까 사라에게 준 축복의 말씀.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이고 지금 아이가 하나도 없는 89세 된 부인에게 주님 주신 축복의 말씀이 아이들을 낳아줄 것이라. 창세기 17장 8절 말씀에,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와 네 후손 대대로 이 땅에서 복을 받게 하리라” 지금 자녀가 없는데 그렇게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6절 17절에,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좀 전에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주여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겠습니다.” 하고나서 좀 있다가 마음이 금방 약해져가지고 “자기가 100세인데 무슨 아기를 낳아?” 혼자서 씩 웃었어요.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 웃음이라고 지은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절대로 절망적인 모습 과거에 상처입고 괴롭고 하고 슬퍼했던 모습을 바라보지 마세요. 사람이 자라나면서 상처 안 받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상처 받았지요. 무언가 크고 작은 상처가 다 있지요. 말 못할 사정 있지요. 내색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제가 속에 다 감춰놓고 있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거 보지 않으세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도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더 이상 과거를 바라보고 절망하고 상처받고 살지 말고 내게 주신 축복의 미래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전진, 전진, 전진을 해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바라보고 꿈꾸며 기도했을 때 어떠한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창세기 21장 1절로 2절에,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아이를 갖게 하셔서 남편 나이 100세, 부인 나이 90세에 아들을 낳았더라.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들을 낳았어요. 100세에, 부인 나이 90세에 주님 안에서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놀라운 기적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꿈을 꾸고 믿음으로 바라봐야 돼요.
자폐아를 둔 그 한 어머니의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폐증이라는 것은 현대 의학으로 완전한 치료법, 약이 없어요. 그 모든 사람마다 다 경우가 다르기 때문에 case by case 다 달라요 그래서 이 자폐증에 걸리면 가족이 온 가족이 매달려서 이 아이를 위해서 정말 희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자폐증으로 자라는 동안에 놀이터에 가서 모래를 갖다 막 눈에다가 뿌리고 유리조각으로 얼굴을 막 긋고 너무나 고통스러워가지고 그 엄마가 같이 그냥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같이 죽었으면 좋겠다. 너무나 아이가 막 그러니까요. 그 아이의 이름이 진호인데 『진호야 사랑해』 라는 책을 쓴 유현경 집사님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4살이 넘도록 엄마 소리는커녕 듣기에도 끔찍한 쇳소리밖에 내지 못하던 아이였어요. 유리를 깨서 얼굴에 자해를 해댔죠. 하루 종일 장난감 자동차 바퀴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혼자 낄낄 댈 때면, 정말 죽고만 싶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이가 유리조각 갖다 막 얼굴 긋고 피투성이가 되고 장난감 자동차를 놓고 바퀴 보면서 막 껌뻑껌뻑 웃고 있고 엄마라는 말을 못하고 밤낮 끽끽 이상한 소리를 내고 야, 그러니까 좀 속 썩이는 애 있어도 얘를 생각하면 감사하셔야 돼 감사 “야, 우리 애는 그래도 좀 낫구나.” 얘가 좀 나를 속 썩이고 대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닌데 그런데 이 이분이 어떻게 은혜를 입었느냐? 우리 순복음교인이 전도를 해갖고 우리교회 나오게 했어요. 우리 교회 나와서 아이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 말씀을 듣고 바라봄에 법칙을 가지고 거룩한 꿈을 꾸었어요. 이 아이가 집에 와서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밥을 먹는 꿈을 꾸고 그림을 그려 놓고 또 학교에서 교복을 입고 공부하는 꿈을 꾸고 그림을 그려 놓고 매일같이 기도했어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우리 애가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드릴 것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매일 같이 꿈꾸고 믿고 바라보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여서 13년 기도 한 후에 2005년 체코에서 열린 세계장애인수영선수권 대회에서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매스컴이 인간의 위대한 승리라고 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승리라고 말하면서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거에요.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진호가 내 삶의 짐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진호는 내 삶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요 아직도 그 진호가 완전하지 못하니까 본인은 진호보다 하루 더 늦게 죽고 싶다고 마지막까지 진호를 돌봐주고 진호가 세상을 떠나면 그 다음에 죽겠대요. 어머니의 마음이 대단하지요. 이제 새로운 그림을 그립니다.
“저는 이제 새로운 그림을 그립니다. 진호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가정을 이루는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는 사람을 기억하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기도할 것입니다.” 어떤 불가능에 상황에서도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큰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상상하지도 못하는 놀라운 일들이, 좋은 일들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큰 영광을 받으시고 놀라운 복을 우리 모두에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매일 매일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창세기 17:1-27) - 손재호 목사
우리가 지난주 16장에서 살펴본 대로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듣고 아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간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아브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스마엘에게 빠져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이스마엘이 자기의 대를 이어갈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17:17-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와 사래 사이에서 나온 자녀가 나의 언약을 이어갈 자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웃으면서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3년 만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라는 말인데 ‘엘’은 하나님이고, ‘샤다이’는 능력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13년 만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내가 세운 언약을 내가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전능하시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그 약속을 이룸에 있어서 자기의 노력과 방법이 동원되어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고 그 자식으로 언약의 자식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마엘도 아브람의 자손이기에 20절에 보면 번성하고 열두 방백을 낳고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무엇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까? 언약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지를 아브람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전능하게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데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능과 다른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생각하는 전능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그런 전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 같은 전능을 생각합니다. ‘금 나와라 뚝딱, 집 나와라 뚝딱’ 그러면 금이 나오고 집이 나오는 그런 것을 전능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전능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능을 오해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무엇이나 하실 수 있잖아요. 저 장가보내 주세요, 저 시집보내 주세요, 집하나 주세요, 병 고쳐 주세요. 원하는 대학 가게 해 주세요’ 이런 식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단지 자기의 소원을 따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보다는 그저 자신 앞에 당면한 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8:1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미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고 했습니다. 사래가 경수가 끊어 졌는데도 그를 통하여 아이를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일에 있어서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려내시는 방법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불가능한 무엇을 이루어 주시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가 불가능하게 여긴 것을 때로 이루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도록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기적의 방법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시지는 않습니다.
오늘날의 참된 기적은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 아들을 믿게 하시는 것이 참된 기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약속한 것은 내가 이루어 낸다. 그러니 이스마엘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가 이루어 내시겠다는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재확인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의 언약을 신실하게 빈틈없이 이루어 내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아브람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기의 언약을 아브람에게 너는 이것을 이루어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루어 내겠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도행전 1:8절의 말씀 곧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복음의 증인이 되자’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정확한 뜻은 ‘내가 너를 증인이 되게 하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내실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언약을 자기가 이루어 내신다는 차원에서 너희가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브람을 통하여서 ‘내가 너를 언약의 상대자로 세웠으니. 나의 언약이 너에게 이루어지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언약을 자기가 이루어 내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형편을 바라보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가 늙었을 뿐 아니라 아내는 경수가 끊어졌기에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내 사래도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시자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듣고 웃었습니다. 18:12절에 보면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라가 ‘하나님도 참 아브람도 늙었고 나도 늙어 경수가 끊어졌는데 내가 무슨 아들을 낳겠습니까?’하고 웃는 것입니다. 이런 사라에게 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18:14절에 보면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는 내용이 17장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17:2절에 보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리라 하신 것은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열심과 전능의 실력으로 이뤄 내신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시고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아니하여도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7장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전능이 우리를 이깁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 성도이고, 교회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가 사람의 의지를 결집하여 ‘으쌰! 으쌰!’하며 우리의 목표를 이루어 내자고자 하고, 온갖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회사인 것입니다.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그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 곧 고상한 아버지라는 뜻인데,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 곧 열국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까지 바꾸어 주시면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 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7절에 보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방인인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이 언약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 중의 기적입니까? 이러한 것에 눈이 뜨여져야 세상의 다른 기적에 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이미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하셨지만 또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여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늘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자기 계획과 자기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경수가 끊어진 여인에게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민족의 열 왕이 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정녕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낳은 아들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낳은 이스마엘과 세우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라의 몸에서 날 이삭과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이삭과 세워야 하는 이유는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루어 내실 언약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이루어 내시겠다는 표시로 무엇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11절에 보면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내신다는 증표를 이제 사람의 몸에다 새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새기는 것은 그냥 말로만 하는 것보다는 더 기억을 하기가 쉽습니다. 친구끼리 우정을 다짐할 때나 또는 애인끼리 약속을 할 때 어디다가 새겨둡니까? 반지나 바위와 같은 그런 곳에 새겨두기도 하고, 오늘날은 몸에다 문신으로 새겨 두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서 그 약속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그 표로 너희가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단순히 그 언약을 몸에 새겨 표로 삼는 의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마엘은 할례 전에 태어난 아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할례 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생식기의 껍질을 조금 잘라 내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아브람과 그 후손에게 심지어 집안의 종들에게 조차 할례를 행하고 유대인으로 개종하는 자들도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혈통을 자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뜻을 할례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할례란 위생상의 문제이거나 다른 나라의 성인 의식과 무관한 것입니다.
물론 할례가 다른 나라에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언약의 백성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2-13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님을 할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능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데 자기의 언약을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 내시겠다는 표가 바로 할례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라니까 이 할례가 대단한 특권이나 되는 줄 알고 이방인이 예수를 믿을 때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할례가 언약을 받은 표로 주어진 것인데, 이미 구약에서 조차 마음의 할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0: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30:6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0:16절에서 사람이 마음에 할례를 하라고 하신 것이 “너는 구원을 받았기에”라고 1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10:1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란 하나님이 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몸의 할례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의 할례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음의 할례를 행하심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섬기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4:9-13절을 보면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무할례시에 받은 믿음을 할례로 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라는 말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위에, 믿음을 은혜에 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언약의 자손이 된 것을 할례로 표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로 표하는 것입니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죽고 산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마음의 할례로 보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8-15절을 보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할례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우리가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할례입니다.
오늘 우리는 17장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그 능력으로 자기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는 표로 할례를 말씀하시고 그 언약을 몸에 새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할례는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주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았음을 더 깊이 알아 갈수록 우리는 주님께 항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행한 증거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풍성하여 지는 것이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주님의 솜씨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가 입었기에 주님을 섬기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신 결과임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더욱 감사하며, 그 사랑 가운데 굳게 서서 더욱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언약을 쫓아 살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 아브람과 맺으신 은혜언약(창세기 17:1~8) 피영민 담임목사
서론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른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은혜언약’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은혜언약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은혜언약은 어떤 언약입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인데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결코 어길 수 없는 약속입니다. 언약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맺으신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시겠다는 언약을 맺으셨고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완성하신 속죄를 택한 백성들에게 빠짐없이 적용하겠다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맺은 언약을 가리켜 별도로 ‘구속언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속언약도 크게 보면 은혜언약에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언약(Covenant)이라는 개념은 창세기 2장과 3장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첫 사람인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 혼자만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아담을 대표자로 해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가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행위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행위언약이란 하나님이 일정 기간을 두고 아담과 맺은 언약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시험기간 동안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자신과 그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영생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 나와 있듯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와 그리고 아담이 차례로 행위언약을 어기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도 행위언약을 어긴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인으로 태어나 결국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아담이 행위언약을 어긴 이후 인간은 자신의 노력이나 선행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어떤 관원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8:18).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7). 사람의 어떤 행위나 어떤 노력으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행위언약에 실패할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시간상으로 훨씬 먼저 은혜언약을 체결해놓으신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은혜언약을 체결하신 것이 아니라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이 체결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체결되었고 아담이 범죄하자마자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여자의 후손이 단수로 사용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복수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괴롭히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사단의 종 되었던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해내신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은 창세 전에 체결된 것이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계시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많은 언약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9장 8~17절에는 노아언약이 있습니다. 다시는 물로 땅을 멸하지 않고 생명체를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표징으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과 17장에 나타난 아브람의 언약은 그 범위가 좁아져 아브람의 후손과 그 후손들이 살아갈 땅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브람은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들이 번성하여 큰 나라를 이루고 그 후손들은 가나안 땅에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아브람의 아들인 이삭과 그의 아들 야곱 그리고 먼 후손인 다윗에게까지 계속해서 확인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부터 레위기까지 나타난 모세언약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지켜 영생을 얻거나 구원을 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언약은 행위언약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31장 31~33절을 보면 은혜언약의 실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1~33).
이처럼 많은 언약들이 있는 이유는 은혜언약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측면들을 하나씩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만졌을 때 어떤 사람은 코를 만지며 뱀 같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만지며 기둥 같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몸을 만지며 드럼통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조합해보면 그것이 코끼리라고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많은 언약들이 있지만 그것을 종합해보면 결국 은혜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언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집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 언약인데 두 언약이 다른 언약이냐? 그런 것은 아니고 한 언약이지만 집행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옛 언약은 그림자와 예표로 집행되는 것이고 새 언약은 실체로서 집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도 은혜언약을 알아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신약도 은혜언약을 알아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언약의 창시자는 성부 하나님이시고 은혜언약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은혜언약의 집행자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은혜언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몇 분이냐고 물어보면 몇 분이라고 대답해야 됩니까? 한 분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단입니다. 그리고 세 분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이단입니다. 한 분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삼신론자로 명백한 이단입니다. 하나님이 몇 분이냐고 물어보면 한 분이며 세 분이고 세 분이며 한 분이시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불신자이거나 이단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17장 1~8절 말씀을 통해서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과 아브람이 맺은 은혜언약의 여러 가지 측면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Ⅰ. 은혜언약의 당사자는 누구인가?
아브람이 맺은 은혜언약의 당사자는 누구입니까? 한쪽은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다른 한쪽은 누구입니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창 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7~8). 하나님이 누구와 언약을 맺으셨냐면 너와 네 후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의미에서 보면 아브람과 그의 육신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것입니다. 아브람의 자손이 번성할 것이고 가나안 땅에 살게 될 것이라는 언약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 언약은 이런 역사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아브람 언약의 영적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부친인 제사장 사가랴가 성전에 제사 드리러 갔다가 네 부인 엘리사벳이 잉태하게 될 것이고 그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는 말을 듣고 난 이후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보고 사가랴의 입이 풀렸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말을 합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눅 1:72~73).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맹세하셨습니까?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눅 1:77). 제사장 사가랴는 아브람의 언약을 주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구원을 얻는 언약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아브람의 자손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영어나 히브리어에는 단수와 복수가 동일한 단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sheep’이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sheep’은 단수나 복수가 동일하게 ‘sheep’입니다. 이처럼 자손이라는 단어 ‘seed’도 마찬가지로 단수나 복수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의 자손이라고 하면 단수가 될 수도 있고 복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단어가 단수로 사용될 때 예수님으로 해석하고, 복수로 사용될 때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로 해석한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29). 그러므로 아브람의 언약을 하나님과 맺은 당사자는 영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 17:2).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이 택하여 성자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의 언약은 성부 하나님이 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과 맺은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Ⅱ. 은혜언약의 ‘시간성’은 어떠한가?
창세기 17장 7절에 보니까 아브람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아브람과 그 후손인 유대인만을 당사자로 하는 언약이라면 영원이라는 단어를 쓸 수가 없습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기원이 영원 전에 있고 효과도 영원한 것을 뜻합니다. 다윗도 하나님이 자신과 맺은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삼하 23:5).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히 13:20).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입니다. 영원 전에 성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따라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 1:2).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택하여 그리스도께 주신 백성들에게 영생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시 103:7). 우리는 지금 영원 전과 영원한 미래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영원 전에 시작되어 영원히 계속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눈부신 은혜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택자들에게 주신 은혜는 눈부시고 황홀한 은혜인 것입니다.
Ⅲ. 은혜언약이 약속하는 ‘영원한 미래’는 무엇인가?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8). 역사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도 역사적인 의미보다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9~10).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동일한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어떤 약속이냐면 가나안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이 장막에 거한 이유가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은 하늘에 있는 가나안 땅을 바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들에게 약속된 미래는 다가올 천국입니다.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이 지으실 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없어질 땅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광스럽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더 나은 본향으로 가는 관문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깐 누리는 것은 잠시 있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리고 잠시 피었다가 지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바에 주먹을 믿겠다는 사람은 주먹에 피부병만 나도 무너집니다. 또 자신의 은행 잔고를 믿는 사람도 언제 돈이 없어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어 예수님을 믿었으니 영광된 미래가 있는 것을 확신하시고 지금 조금 배고프고 서글퍼도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이 세상은 속히 지나가지만 우리에게 약속된 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복을 생각하며 잠시의 고난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Ⅳ. 은혜언약이 주는 ‘최고의 축복’은 무엇인가?
은혜언약은 천국뿐만이 아니라 최고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7).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8).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어린 아들에게 아주 좋은 아빠가 있었습니다. 퇴근할 때마다 아빠가 사탕을 사서 아들에게 주었는데 어느 날 아빠가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사탕이 좋아? 아빠가 좋아?” 아들은 한참 고민하다가 아빠가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지혜로운 대답을 한 것입니다. 만약 사탕이 좋다고 했으면 다음부터는 사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빠가 좋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아서 사탕에 과자까지 사줬다는 것입니다. 아빠만 계시면 사탕이나 과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복을 다 받을 수가 있습니다.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 67:6). 우리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도 되시고, 지혜도 되시고, 힘도 되시고, 소망도 되시고, 위로도 되시고, 돈도 되시고, 떡도 되시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이 결코 언약을 어기지 않으시겠다는 증거로 인증샷을 주셨습니다. 파리에 갔다 왔다는 증거로 에펠탑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을 인증샷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결코 언약을 어기시지 않겠다는 증거로 주신 인증샷은 아브람의 이름을 바꿔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의 의미는 ‘존귀한 아버지’인데 이것을 ‘아브라함’ 즉, ‘열국의 아버지’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길거리에 지나가는 노숙자가 자신의 이름이 이건희라고 한다면 당신이 무슨 이건희냐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아브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본부인인 사래에게서 낳은 자식이 한 명도 없는데 자신의 이름이 아브라함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여기겠습니까? 자식이 한 명도 없는 사람이 무슨 열국의 아버지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이 바꿔주신 대로 자신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도 은혜언약을 따라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6).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직 죄인 같지만 예수님을 완전히 닮은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놀랍고 황홀한 은혜를 받은 우리도 아브람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살아야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창 17:3). 참된 종교는 하나님을 높이고 인간을 낮춥니다. 어떤 종교든지 인간을 높이는 종교는 이단이고 아주 불건전한 집단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랍고 황홀한 은혜에 감사하고 엎드려 경배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브라함과 사라 개명에 담긴 의미(창17:1-5, 15-16)
할례를 받고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가 되었다. 이름에 담긴 뜻은 무엇이고, 왜 하나님은 이들의 이름을 바꿔주신 것일까?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나일 문명에 접촉하며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다가온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유럽 문명과 미국 문명 사이에 끼여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그 타인과 자기 자신을 구별하는 '기호'로서 주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름은 나를 위한 것이기 보다 타인에게 다가서는 어떤 의미가 될 때가 적지 않다. 고대 근동도 마찬가지였다. 할례를 마친 후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지시(?) 사항이었다. 그런데 왜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두 사람의 이름을 바꾸도록 한 것일까? 할례 받음과 개명이 어떤 상관성이 있는 것일까? 이 이름이 아브라함과 사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궁금함을 던져본다.
1.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 능력자? 청지기?‘아비’ 또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마주하면서 무엇이 어떻게 다가오는가? 우리는 시간 여행을 멀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가 우리에게도 100년도 안되던 시절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그 영향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20세 이상의 건강한 성인 남자만이 사람이었던 시절이다. 아이들이나 여자들은 물건 같은 존재였다. 사고파는 대상, 별다른 이유기 없어도 그냥 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애꿎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던 미물 같았다. 그 시절 가장 힘 있는 존재는 아비, 아버지였다. 그야말로 아비들의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 의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힘은 적지 않았다. 할례가 주어진 장소는 이스라엘의 남부 네게브 주변 지역이었다. 그 당시 이 지역은 고대 이집트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이집트의 정치적 힘도 받고 있었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왔을 아브라함의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 그들은 이 이름을 대하면서 누구를 연상했을까?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세기 17:5) 여러 민족의 아버지?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버지? 고대 이집트 문명 한 복판에 살던 요셉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8)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창세기 41:40-41) 요셉이 표현한 내용 중에 '바로의 아버지'가 나온다.
여기서 '아비(아버지)'의 뜻은 어떤 뜻일까? 바로보다 높은 존재를 뜻하는 것인가? 바로가 명목만 있고, 실권을 요셉이 쥐고 있었다는 뜻일까? 아니다. '온 집의 주' '애굽 온 땅의 통치자'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즉 아비라는 단어는 (바로의) 충실한 관리자, 신하라는 뜻을 지닌 것이다. ‘온 집의 주’에서 나오는 ‘주’라는 단어조차 파라오의 청지기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아브라함,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을 당시의 문화 속에서 읽는다면 어떤 느낌, 어떤 의미였을까? 여러 민족 위에 군림하는 자는 아니다. 여러 민족을 섬기는 자, 여러 민족의 청지기 같은 존재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2. 사라, 열국의 어미? 권세자? 여주인? 사라의 이름 뜻에 대한 풀이는 다양하다. 많은 이들은 사래가 ‘공주’라는 뜻이었고, 사라는 ‘왕비’라는 뜻이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사라’라는 이름 뜻에도 공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여주인(Lady) 또는 공주(Princess) 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주석들이나 학자들은 적지 않다.
그런데 이 여주인 또는 공주라는 단어를 마주하면 우리의 고정관념이 작동할 것 같다. 전근대사회가 아닌 현대 사회에서도 이 단어가 ‘갑 질’의 상징어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물며 고대 근동에서 이 단어를 어떤 존재감을 갖고 있었을까?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세기 17:15, 16)
‘열국의 어미’,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수식어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 문명권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왔을 사라의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 그들은 이 이름을 대하면서 어떤 존재, 누구를 연상했을까? 당시 이집트 신화에서 여주인 또는 공주로 불리던 여신이 있었다. 하토르(Hathor)이다. 그를 수식하던 표현에는 하늘과 땅의 여주인, 돌무화과나무의 여주인, 파라오의 여주인 등 다양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는 하늘의 여신이었고, 하늘 여왕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감은 하늘의 유모였다. 파라오를 양육하는 자였다. 모든 어미들의 어미였다. 여성들의 여신으로서 임신과 출산, 어린이의 여신이었다. 여성들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였다. 하토르 여신의 이미지는 군림하는 신이 아니라 섬기는 신이며, 건강한 어미의 속성을 보여주는 여신으로 볼 수 있다.
사라의 이름 뜻,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을 당시의 문화 속에서 읽는다면 어떤 느낌, 어떤 의미였을까? 이 또한 여러 민족 위에 군림하는 자는 아니다. 여러 민족을 낳고 기르고 가꾸고 지키는 자, 여러 민족의 유모 같은 존재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고대 이집트에서 생명의 나무로 알려진 돌무화과나무 사이에서, 하토르 여신이 생명의 물과 삶의 힘을 전해주고 있다.
3. 아브라함과 사라는 새로 태어났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 그 이름 값하는 삶은 견고한 부족장, 가부장제 질서가 지배하던 시절에 주어진 것이다. 권위주의가 가득 차 있던 그 시대에서 던져진 잔잔하지만 강력한 목소리였다. 섬기는 자로서의 아버지(아비)의 존재감을, 낳고 기르고 돌보고 채워주는 자로서의 어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새로운 출발이다. ‘능력자'의 새로운 이미지, 섬기는 자, 돕는 자, 필요를 채우는 자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일까? 다른 이들의 위에 있는 자, 군림하는 자의 모습과 사람들의 곁에 있는 자, 섬기는 자, 높여주는 자의 모습, 어떤 모습이 다가오는가?
아브라함과 사라의 새로운 정체성 안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담긴다. 군림하고 지배하고 장악하고 권력을 마음껏 행사하는 능력 있는 남자 가장이 아니라, 섬기는 가장, 섬기는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당시의 견고했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부장의 모습을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사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의 왕비, 안주인, 여주인의 모습이 아니라, 잉태하고 낳고 젖을 주고 키우고 돌보고 베풀고 사랑하는 안주인, 어미의 삶으로 사라를 초대하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할례가 죽음과 부활, 창조와 연관되어 있었던 것을 떠올려보자.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남자들의 할례는 옛사람(기존의 가치관에 젖어 사는 삶)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죽음과 장사지냄, 그리고 다시 태어남의 이벤트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의 세계관에도 깃들어 있던 죽음과 깊은 어둠, 혼란을 뚫고 밝음과 삶,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다시 기억하게 하는 거대한 의식이었다. 할례의 흔적을 몸에 지님은 창조질서를 수행하는 자라는 지워지지 않는 존재로 살라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 예수의 고난, 찢김과 피 흘림, 죽음과 장사되어 무덤에 눕혀있음, 다시 살아남, 하나님나라의 회복의 파노라마를 떠올려본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남자들이 할례 시술을 하고는 누워서 몸의 회복을 기다리는 그 고통의 시간을 떠올려본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는 그 새 창조의 시간을 바라본다. 그 피 흘림의 의미를 다시 기억해본다.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는 자, 권세부리는 자, 행세하는 자가 아닌 섬기는 자, 돌보고 가꾸는 자로서의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다시 바라본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 표식인 할례 받은 자로서 우리가 머물고 있는 땅이 그리고 이웃이 복을 누리는 통로가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 아브라함과 사라 - 이광석
인생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아브라함에게 “당신 인생에 있어서 제일 소중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누구라고 대답할까요? 소중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겠지요. 그래도 그 가운데 꼭 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아내 사라를 고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하란을 거쳐 가나안까지 백 년이 넘는 역경의 세월을 같이 한 사람이 사라이니까요. 사라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광야에서 통곡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생전에 사라와 아주 깨가 쏟아지는 금실 좋은 결혼생활을 누렸을 것 같지는 않지만, 사라는 조강지처로서 그 긴 세월을 함께 기다려 귀중한 아들 이삭을 낳아준 사람입니다. 둘 사이는 우리말로 “일심동체”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가 처음부터 “일심동체”는 아니었을 겁니다. 사래(사라의 본래 이름)는 아브람(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의 이복누이입니다. 아버지가 같았던 것이지요. 어린 시절 두 사람은 어머니가 달라 한 장막에서 살지는 않았겠지만 아버지가 같았으니 한 가족으로는 살았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사래보다 10살 위이었으니 아브람은 사래가 어릴 때부터 쭉 지켜볼 수가 있었을 겁니다. 아브람은 예쁜 동생을 참 잘 대해 주었을 것이고, 사래도 그런 든든한 오빠를 커 가면서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두 사람도 이것이 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사촌남매간, 이복남매간, 삼촌-조카간 결혼이 흔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도 이러한 결혼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장래를 촉망받던 아브람과 아름다움으로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던 사래는 모두가 축복하는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을 겁니다. 아브람은 사래에게 아주 믿음직한 남편이었고, 사래는 아브람에게 아주 아름답고 소중한 아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누이로 지내던 사이가 바로 완전한 부부 사이로 변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누이로 지내던 시간이 20여년이 넘었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특히 사래를 누이로 귀여워하던 아브람에게는 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사래가 아내로 보이다가도 불쑥불쑥 옛날의 누이 모습이 겹쳐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둘 사이에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사래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아브람의 무의식 속에 몰래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중에 아브람이 사래를 누이라고 하는 거짓말도 쉽게 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브람은 이런 자신의 깊은 내면을 오랫동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래면 사래지” 아내로 보느냐 누이로 보느냐가 무슨 중요한 문제이겠나 싶지만 사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이야기해 보기로 하고 일단 넘어가 봅니다.
장면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로 옮겨 갑니다. 일흔 다섯 살의 아브람은 아내와 조카 롯과 자신의 소유와 하인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사래는 평안히 잘 지내고 있던 하란을 떠나기 싫었지만 남편 아브람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결국 아브람을 믿고 따르기로 합니다. 롯은 아브람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그저 아버지 같은 아브람을 따라가기로 한 것이었겠지요. 아브람은 이들의 동기가 어쨌든 같이 데리고 떠납니다. 그 모두를 이끌고 비장한 마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는 아브람의 모습을 그려보면 제 가슴도 설렙니다.
하란을 떠난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따른 것이었으니 아브람의 기대는 매우 컸을 것입니다. 당장 무엇인가 별천지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각했던 별천지가 아닙니다. 이미 토박이들이 거주하고 있어 이들 때문에 정착하기가 힘듭니다. 또한 기근까지 찾아옵니다. 기대가 무너지면서 아브람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애굽 땅을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애굽 땅에 들어서며 아브람은 자신을 아리따운 사래의 남편이라고 하면 애굽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 귀동냥으로 들은 정보에 근거한 것이었겠지요. (아니면 실제로 그 당시에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죽여버리는 일이 잦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내에게 이를 말하고 누이라고 거짓말하자 합니다. 애굽에 들어가자 애굽 사람들은 아리따운 사래가 아브람의 누이라 하자 애굽왕 바로에게 사래를 데려가고 보답으로 아브람에게는 여러 재물을 줍니다. 아브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참담했겠지요. 일단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려고 거짓말은 했는데 아내를 빼앗겼으니 이제 다시 아내 얼굴을 볼 수나 있을까 몸이 달았을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개입합니다.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자 바로는 아브람을 책망하면서 사래를 되돌려 줍니다. 만일 아브람이 거짓말하지 않고 사래를 아내라 했으면 어떠한 일이 벌어졌었을까요? 아마 아무 일도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 모른 것은 아브람의 한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누이라 거짓말 한 사건이 세번씩(아브람 2번, 이삭 1번)이나 성경에 기록된 것은 무언가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면서도 좀처럼 잡히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우리 믿음의 성숙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의 초기 단계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달콤했던 세상과 결별하고 재미없는 무미건조한 생활이 되지는 않을까? 나의 이러한 변화가 세상의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비칠까, 그들이 나를 받아 줄까, 왕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살면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살며시 고개를 들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담대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람이 그랬던 것이지요. 사래(믿음)를 자기 아내라고 하면 세상으로부터 왕따(죽음)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라 봅니다.
흔히 믿음 생활을 시작한 이후 나타난 여러 변화들을 세상 친구들에게 설명할 때 이를 자신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경우를 보면 침례 받고 조금 지나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자연스럽게 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저 자신은 좋으면서도 제 동료들, 친구들을 만날 때 그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이 어떻게 느낄까 부담이 되어 확실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얼버무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은 술 먹지 않는 나를 이상히 여기고 강제로 먹여보려고도 하고 제 건강에 큰 문제가 있지 않나 염려도 하곤 했습니다. 저도 그냥 건강이 안 좋은 것처럼 조용히 있곤 했었지요. 그러다가 술을 끊은 이야기를 담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했었는데 결과는 놀랍게도 그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술을 따라주려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이젠 아예 술을 못 먹는 사람으로 치고, 간혹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아브람에게 담대하게 행동하라고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왜 거짓말하는 아브람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애굽왕 바로를 혼내주었을까요? 담대하게 믿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안 먹고는 우리들의 선택의지라 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으셨고 거짓말 하는 것 자체도 나무라지 않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고 보시며 기다리시는 것이겠지요. 대신 아브람 주위의 상황을 정리해 주십니다. 바로왕을 혼내십니다. 왜 바로왕을 혼내실까 따지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라 봅니다. (바로왕은 이 이야기의 엑스트라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공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은 담대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했겠지요. 아내를 팔아먹다시피 했으니 재물을 받고도 기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브람에게는 작지 않은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바로왕이 “왜 그랬느냐?” 따질 때에도 제대로 답변조차 못합니다. 사래 또한 남편의 말에 동의해 바로왕에게 가기는 했지만 얼마나 찝찝했겠습니까? “이것은 아니다. 여기는 아니다” 아브람은 다짐했겠지요. 그래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바로왕이 재물을 주고 사래를 돌려보내 주었기 때문에 애굽에 계속 머무를 수도 있었는데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간 것은 아브람이 조금은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러나 성경에 아브람이 한참 후에 아내 사래를 또 누이라 거짓말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다짐은 오래가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한 번 다짐으로 땅이 굳어지기는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건은 사래가 아브람이 아이를 갖게 하기 위해 자기 하녀인 하갈을 아브람의 첩으로 들이는 사건과 연결됩니다. 아브람이 얼마나 아들을 바라는 것으로 보였으면 사래가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아브람은 의도적으로 표시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조강지처인 사래가 그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없지요. 사래는 아이를 못 낳는 것이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사래는 아브람의 거짓말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고 있었지만 결단을 내려 하갈을 아브람이 취하게 합니다. 아브람은 몇 번 거부하다가 후손을 가져야 한다는 사래의 부탁 아닌 부탁을 못이기는 척 받아들였겠지요.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늦게 아들을 갖게 된 아브람은 이스마엘에 푹 빠져 지냅니다. 아마 이 시절이 아브람과 사래 사이가 제일 멀게 느꼈을 때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성경에는 아브람이 사래를 누이라 거짓말하는 사건이 두 번만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번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렇지 않고서는 성경에 기록된 두 번째 거짓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때는 이미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 준 다음입니다. 이름 바뀌고 아들까지 점지 받은 아브라함이 왜 또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궁금증이 풀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은 거짓말한 사건이 두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여러 번 있었으며, 성경은 이 가운데 처음과 마지막 사건만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조금씩 풀려나갔습니다. 이렇게 보면 처음 거짓말 사건과 마지막 거짓말 사건은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처음의 거짓말은 정말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단순히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그렇게 처절하게 느꼈던 모멸감, 그렇게 굳게 다짐했던 맹세들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희미해져 간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기근이 들어 할 수 없이 그런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만 어려우면 애굽으로 내려가곤 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애굽으로 가는 경우가 생기자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쉽게 해결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말하기 시작하자 습관이 됐을 것이고, “거짓말하는 것이 모두에게 더 이익”이라는 자기합리화까지 생겨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이와 같음을 봅니다. 아니 우리 믿음생활의 많은 부분이 이와 같음을 봅니다. 교회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봅니다. 그러나 교회를 나가 세상 생활로 돌아가면 우리는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누이”라 합니다. 처음에는 세상의 왕따가 두려워 거짓말 하고 후회를 해 보지만 그때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대로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거나 거짓말은 어디까지 해도 된다는 자기의 선을 긋곤 합니다. 이렇게까지 되면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누이”면 어떻고 “아내”면 어떤가, “사라”가 있기만 하면 되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모태신앙이 아니지만 특히 모태신앙을 가지신 분들 가운데 이런 경험을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나 싶습니다.
“아내”와 “누이”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누이”는 나면서부터 결정된 사이입니다. 따로 맺어지는 것도 아니고 무를 수도 없는 그저 친숙한 사이지요. 그러나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일심동체는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요즘 오누이 같은 부부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쉽게 서로를 대하고, 상대방에게 바라기만 하고, 격식이 없어진 그런 부부관계가 참 많지요. 처음에는 전기가 찌릿찌릿 통하던 배우자가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저 정으로 살지요” 하는 밋밋한 관계로 변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조선시대의 격식 있으면서도 진한 사랑이 깃들어 있던 그런 부부관계가 그립습니다. 10여 년 전에 “일출봉”이라는 사극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거의 역모로 몰리는 아주 어려웠던 상황에서 고생하던 아내를 업고 걸어가면서 “부인, 나뭇잎처럼 가볍구려” 하던 한 마디 속에 담긴 두 사람간의 찌릿찌릿한 사랑에 눈물지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아내“와 ”누이“의 가장 큰 차이는 “아내”와는 자식(이삭, 믿음의 열매)을 낳을 수 있지만 “누이”와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장난일 수도 있으나 그런 관계이면 우리는 “누이”라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생각하는 한 이삭을 낳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삭을 낳기 바로 전에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기록된 것이라 봅니다. 마지막 거짓말이 있기 전에 아브람은 여러 사건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브람 자신과 가족, 모든 하인들까지 할례를 했고, 하나님이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도 바꿔 주셨으며, 아브람은 롯이 거주하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겪고서도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내”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작정했다기보다는 습관적인 거짓말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이 뱉었던 거짓말은 평소와 같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날 아브라함의 마음은 왠지 모르지만 평소와 다릅니다. 무겁습니다. 하란을 떠나기 전 들었던 희미한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날따라 떠나보내는 사라의 모습이 마음에 와 박힙니다. 절절한 마음이 솟아오릅니다. 사라의 마음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이제야 납니다. 사라를 “아내”라 하지 못한 자신의 비굴함, 옹졸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거짓말 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때마다 자기에게 가졌을 사라의 실망감, 분노와 눈물이 느껴옵니다. 처음 거짓말 하고 나서 느꼈던 모멸감과 다시는 거짓말 안하겠다고 했던 자신의 맹세가 기억납니다. 그 동안 거짓말 했던 일들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아흔아홉 살이 되어서야) 깨닫습니다. 사라를 데려갔던 아비멜렉이 사라를 돌려보내며 아브라함에게 “왜 그랬냐” 따져 물을 때에 아브라함의 이러한 마음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이전에는 이러한 다그침에 대답조차 못했던 아브라함은 통곡하며 변명같지만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아비멜렉에게 한다기보다는 하나님께 털어놓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회개가 이루어지며 아브라함은 새로 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새로남으로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는 진정한 부부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사라는 아들을 임신하고 이삭을 낳습니다. (이를 보면 사라가 임신을 못했던 것은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부부의 결실이 맺어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아브라함 힘으로 이룬 것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아니 실제로 아브라함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 힘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이지요.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너는 만민의 조상이 될” 것이라 이야기해 주고,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을 할례시켜 “너희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북돋아 주고,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까지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잘 해서 상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해 가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하나님의 인도를 잘 알아채지 못하다가 백 살이 거의 다 돼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된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는 사라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지속됩니다. 사라를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시각이 변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사라는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만 스쳐도 전기가 찌릿찌릿 하는 그런 아내가 됩니다. 그러기에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통곡합니다. 가나안에 있는 막벨라 굴을 장만하고 사라를 여기에 장사지냅니다. 나중에 아브라함도 이곳에 묻히게 되지요. 죽어서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이는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믿음 생활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혼생활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지요. 아브라함이 사라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 거짓말 했던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듯이, 줄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면서 부인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찌릿찌릿한 전기(“두려움과 떨림”)가 없어져 버렸음을 통감합니다. 아비멜렉에게로 떠나보내던 사라의 뒷모습에서 우리가 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봅니다. 그의 분노와 눈물을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아니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도 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우리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우리를 깨우쳐 주시려고 노심초사, 불철주야 방편을 마련해 주시느라 오늘도 바쁘실 것 같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우러러 보기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되기까지 아브라함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