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 생일 축하해요 -
망각에 끼여
- 이학근
마당 양지에 주저앉아
한때는
불알 만지던
그 손
휴대폰을 만지다
정신이 돌아와
안경을 찾는다
곁에도 사타구니 사이에도 없다
일어서 뒤돌아봐도
안 보이는
먼지 낀 내 안경
눈에 낀
내 안경.
*이학근 : 시인, 수필가. 시집 ‘옴마 밥그릇’, 수필집 ‘내 인생 지게 지고’ 등 다수
그녀는 서울로 가는 중이였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캐럴이 빌딩 숲을 뒤덮고 시내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사람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흐르고 비록,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마치 첫눈이 올 때처럼 마냥 설렜다.
퇴근 무렵에 한 며칠, 날 피하던 연희가 결재서류를 들고 날 찾아왔다. 그동안 그녀는 아마 그날, 그녀 스스로 취한 김에 내뱉었던 나와 유희와의 관계에 대한 발설 때문에 조심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상사 앞에서 술주정을 부렸다는 죄책감도 한몫했으리라 싶었다.
“과장님. 그날 정말 죄송했어요. 어떻게 사과드려야 할지.”
결재가 끝나자 벌건 얼굴로 그녀가 사과했다.
“그러면 커피 한잔 살래?”
연희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어디서요?”
“지금, 자판기 커피 빼서 옥상으로 가지.”
옥상은 바람이 꽤 불었다. 다행히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흡연자를 위한 부스가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던 그녀도 바람 때문에 그곳을 선호했다.
“그날, 내게 그리고 유희에게 무슨 말 했는지는 기억나?”
“그게 사실, 저도 꽤 취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은데요. 다음날 유희에게 제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들었어요. 죄송해요.”
나는 자신이 마치 죄인처럼 내 앞에서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연희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유희와 난 그런 사이가 아니야.”
난 은근슬쩍 그녀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그녀는 별말이 없었다. 그건 내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방증일 수 있어, 난 살짝 당혹스러웠다.
“정말이라니까!”
“유희를 좋아하죠?”
“뭐?”
“과장님은 제가 사랑에 대해 아주 숙맥이라 생각하시나 봐요. 저도 다년간 연애를 해봐서 아는데, 과장님은 분명 유희를 좋아하고 있어요.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녀의 말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나는 그날 연희가 술김에, 물론 우리사이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그녀 역시 넘겨짚은 줄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내 앞에서 정색하고 그녀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모습을 보니, 더는 피할 수가 없었다.
“유희는 지금 몹시 혼란스러워해요. 생각해보세요. 과장님은 그 애를 장난삼아 만나는지 몰라도 유희는 지금 결혼 적령기를 살짝 넘은 여자예요. 유희를 보니 난 이게 그냥 스치는 바람 같은 사랑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앤 지금 과장님을 정말 좋아하고 있거든요.”
나는 실례인 줄 알지만, 답답한 나머지 담배를 하나 물었다.
“그대는 내가 장난으로 유희를 만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진심을 털어놓고 있었다.
“아니겠죠. 과장님도 고민이 깊을 거로 생각해요.”
“유희가 내게 대해 뭐라든?”
나는 정말 연희에게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녀의 대답이 나오기 전 얼마나 떨었는지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유희는 자존심이 센 여자예요. 제게도 과장님 사이에 대해 상세하게 말을 하지 않아요. 하지만 난 같은 또래, 같은 시대를 사는 여자예요. 직감이란 게 있잖아요.”
나는 이런 사실을 혹 연희 외에 사무실 직원이 알고 있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아직 뭣 하나, 결정된 게 없는 상태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진다면 나나, 유희나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직원들은 그대만큼 이 사실을 아나?”
“아뇨. 아직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다들 바쁘고 제 앞가림하기에도 힘든 사람들이니까요.”
시계가 정각 6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나도 사실 아주 괴로워. 차라리 유희가 이곳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어.”
내가 조금이라도 진심을 비추자, 연희는 자세를 바로 고쳤다.
“과장님께서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에요. 첫째, 유희를 정말 사랑한다면 현재 가지고 있는 건 다 버릴 각오를 해야 하고요. 둘째, 그렇지 않다면, 그냥 그녀를 놓아주세요. 아직 시작단계니까 두 번째가 오히려 더 쉽겠네요. 사랑이 깊으면 헤어지기도 어렵다고들 하잖아요.”
그녀의 진단은 정확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에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알았어. 내 유의할게. 인제 그만 내려가지.”
“참! 유희는 오늘 퇴근 후에 서울에 간다네요.”
“그래?”
옥상에서 내려올 때 내 마음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는 교회에 갔지만 난 퇴근하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지금쯤 그녀는 KTX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중이었다. 예전 같으면 내게 최소한 문자라도 남겼을 그녀였지만 오늘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나는 기타를 잡았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행여 받지 않으면 어떡할까, 하는 조바심에 손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저에요.”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디쯤 가고 있는 거야?”
“대전 막 지났어요.”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수화기만 계속 들고 있어.”
“왜요?”
“들려줄 노래가 있어서 그래.”
나는 휴대전화 거치대에 전화기를 꽂고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오늘 새벽에 만든 그녀만을 위한 생일축하곡을 불렀다.
“…….”
어떻게 노래를 끝냈는지 솔직히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않았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내내 나는 가슴이 떨렸고 행복했다.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 진리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노래가 끝나자 들뜬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언제 만들었어요? 아저씬 천재인가 봐.”
밝은 그녀의 목소리를 확인하자 나는 그만 눈물이 왈칵, 하고 쏟아졌다.
“울고 있어요?”
나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칭얼대듯 그녀에게 그간의 심정을 토해내었다.
“미안해.”
그러자 그녀의 목소리에도 나와 같은 울음이 묻어났다.
“아니에요. 제가 더 그렇죠.”
옆좌석에 사람들이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노래가 너무 좋아요. 얼마 살지 않았지만, 제 생애 최고의 선물인걸요.”
“언제 올 거야?”
“월요일 오후 늦게 나요.”
“데리러 갈까?”
“어디? 서울에요?”
그녀는 장난을 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니, 무산 역 대합실이지.”
“좋아요. 출발할 때 전화할게요.”
그녀의 마지막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창밖으로 눈 대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기타를 내려놓고 침대에 널브러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성탄절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만큼 나는 월요일 그녀를 만날 생각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월요일이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아내는 오랜만에 가족끼리 가까운 교외라도 나가자 했으나, 나는 사무실에 일이 있다며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으나 이즈음에 나는 완전히 사랑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녀의 생일이니 직장 근처에 꽃집을 알아보고 그녀와 함께 보낼 근사한 식당을 알아보는 등, 사무실에서도 일은커녕, 시간 외 근무를 하러 나온 직원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저녁 8시경 도착한다는 메시지였다. 그동안 나는 그녀에게 줄 장미꽃 100송이와 부두 근처의 근사한 카페를 예약해두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불도 켜지 않고 앉아있다가 시간에 맞추어 꽃을 찾아, 예약한 카페에 전달하고 무산 역 대합실로 향했다.
한 무리의 승객들이 개찰구로 쏟아져 나왔다. 멀리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는 금방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날 보자 활짝 웃었다.
“잘 지냈어? 생일 밥은 잘 챙겨 먹었고?”
“그럼요. 아침에는 엄마가 미역국을 해줘서 배부르게 먹었구요. 점심나절에는 친구들과 맛있는 거 먹으면서 실컷 수다도 떨었어요.”
내가 핸드백 옆에 있는 그녀의 다른 짐가방을 쥐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꼈다. 나는 마치 연인이 된 것처럼 우쭐했고 기분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바깥은 다행히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았다. 카페로 가는 내내 그녀는 서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처음 그녀와 거리를 걸을 때처럼 그녀는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카페에 들어서자 예약해 둔 테이블 위에는 촛불 여러 개와 장미꽃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감탄한 것은 당연하였다.
“와우! 이게 다 아저씨가 준비한 거예요?”
와인과 스테이크가 나오면서 그녀는 오랜만에 기쁜 사랑 가운데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지경으로 나는 그녀의 수다에 나는 엄청나게 웃었고, 그녀는 진지한 이야기임에도 목젖이 보일 만큼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래서 연희가 뭐래요?”
그녀에게 성탄절 앞날 연희와 옥상에 갔던 일을 말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말고 이렇게 물었다.
“뭐라긴? 그냥 둘이 잘 해보라더군.”
나는 시치미를 떼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연희, 그 계집애는 눈치가 참 빨라요. 난 무조건 잡아뗐거든요. 그래도 이 정도 아는 것 보면 참, 영특한 애인가 봐요.”
그녀는 분위기 때문인지 벌써 와인을 석 잔이나 마셨다.
“그래서 아저씬 뭐라고 했어요?”
“그러겠다고 했지.”
그러자 그녀는 잠시 와인 잔을 놓았다.
“나랑 어떻게 잘해볼 건데요?”
동그랗게 말아 뜬 그녀의 눈을 보자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침,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손님은 거의 없었다. 빨간 입술과 새침한 그녀의 표정에 나는 그만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왜? 왜요?”
그녀도 싫지 않은지, 살짝 몸을 빼다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자 나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잘하려고.”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왼쪽 뺨을 내게로 당겼다. 잠시 멈칫하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내 입술이 서서히 그녀의 입으로 다가갔다. 와인을 머금은 그녀의 입술은 달콤했다. 나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허리를 감싸던 손으로 그녀의 두툼한 가슴을 만졌다. 황홀한 느낌이 밀려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스커트 밑으로 손을 넣었다.
그때였다.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