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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4권. 17세기, Le dix-septième siècle1-702
제2장, 프란시스 베이컨과 경험 철학
Francis Bacon et la philosophie experimentale 18-40.
1절 베이컨의 생애와 작품들18-20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국새(國璽) 관장자인 니꼴라 베이컨(Nicholas Bacon, 1510-1579)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에 의해 국가 공무원의 길로 정해졌다. 1584년[스물셋]에 지역 선거구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영왕의 특별 자문위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제임스 1세(James I, fr. Jacques l, 1566–1625) 지배 동안에 사법의 최고 지위에 올랐다. 따라서 베이컨은 법률가의 이력을 걸었다. 1582년[스물둘]에 변호사가 되었고, 1589년[스물여덟]부터 런던의 법학 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1599년[서른여덟]에 영국 법률들의 규준화(codification)를 준비하는 법의 격언들(Maxims of the Law)을 작성하였다. 야망을 지니고 음모적이면서, 유용한 모든 급변에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제임스 1세의 절대주의적 목표들에 아첨하면서, 그는 조금씩 승진하며, 1607년[마흔여섯]에 법무부 차관, 1613년[쉰둘]에 법무부 장관, 1617[쉰여섯]년에 국새 관장자가 되었다. 1618[쉰일곱]에는 상원의장[대법관]이 되었다.게다가 그는 1618년에 베루람의 백작이 되었고, 1621[예순]년에 세인트-알반스의 자작이 되었다. 항상 그는 왕실 특권의 방어자였다. 그는 아일랜드 의회 의원인 탈보(Talbot, 1560–1638)단죄했는데, 탈보는 참주살해[폭군제거]의 합법성에 관한 사상을 지닌 수아레즈(Suarez, 1548–1617)를 시인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율법에 관련된 소송사건에서 그는 심판관들이 그들의 판결에서 유예하고 왕과 상의하러 가야 하는 원칙 덕분에 승리 했는데, 각 경우마다 왕은 계류 중인 소송에 그의 권력을 개입하여 평가할 수 있었으리라. 1621년에 의회의 회합이 있었고, 그 의회는 베이컨의 운세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하원의원에 의해 횡령으로 고발당했으며, 그는 결국에는 선고판결재판에서 소송인들의 제시물들을 받아들인다고 시인했다. 상원회의는 그를 4만 파운드의 벌금형을 내렸으며, 이와 더불어 어떠한 공적인 업무에 개입하는 것도, 의원이 되는 것도, 궁정 가까이 거주하는 것도 금지하였다.베이컨은 늙었고 병들었으며, 파산하였다. 그는 자신을 회복하려고 헛되이 시도했다. (19)
매우 요동치는 생애의 한 가운데서, 베이컨은 과학들의 개혁하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베이컨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파악해보면 하나의 특이한 국면을 제공한다. 그는 아마도 매우 일찍이 그의 작품 일체에 대해 결론지었는데. 그는 그 일체를 나중에 거대한 재구축(Instauratio magna, 1620: The Great Instauration)이라 불렀다. 이것의 계획 속에는 신 기관(Novum orranum, 1620)의 서문이 있다. 왜냐하면 1625년의 한 편지에서 그는 40여년 전에 이미 최대 산출의 시대(Temporis Partus Maximus)라는 소품을 작성했다는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주제를 다루었다: 말하자면 이 소품은 아마도 거대한 산출의 시대, 즉 자연의 해석(Temporis Partus Masculus sive de Interpretatione Naturæ)과 동일할 것이며, 이것은 사후에 출판되는데, 거기에서 사람들은 신 기관(1620)의 서문과 거의 동일한 계획을 발견한다. 어찌되었던 간에, 그 마지막 계획은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 과학의 분류; 2) 신 기관 즉 자연 해석의 지표들; 3) 보편 현상들 즉 철학적 요약으로 된 자연사와 경험사: 4) 지적 단계들 즉 미로의 실, 5) 전조들 즉 부차적 철학의 예상참여들. 6) 이차 철학 즉 활동적 과학.이 계획의 실현은 일련의 논저들을 허용했다. 논저들은 과학의 현실적 상태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모든 공백들을 보태어서(I),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관을 연구했다(II). 그리고 나서 사실들의 조사 작업을 서술했다(III). 그리고 법칙들의 탐구를 거쳐서(IV), 인식이 우리에게 자연에 관해 시험하게 허용해 주었던 모든 작용들에게로 내려간다(V, VI). 베이컨은 한 인간이 혼자서 실현하기에 불가능하고 생각한 일체의 작품들 중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논저들은 마치 흩어진 단편들(disjecta membra)과 같다. 우리는 이것들 중의 매우 많은 것들을 인용하며, 이것들을 거대한 재구축(1620)에 따라서 분류한다(그러나 순서에 따라 쓰여지지 않았다). 첫째 부분만은 그 자신의 고백에 따라 완성되었다. 즉 그것은 1623년에 출간된 지식의 품위와 증가(De dignitate et augmentis scientiarum, 1623)(9권)이다. 이 저술은 1605년 영어로 된 신적이고 인간적인 지식의 숙달과 진보(Of the Proficience and Advancement of Learning Divine and Human, 1605)의 라틴어 번역본이다. 게다가 그의 필사본들은 동일한 주제에 관한 여러 초고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1603년 경에 쓴 최종 가치(Valerius Terminus)는 1736년에 출판되었고, 1612년에 쓴 지적 세계의 묘사(Descriptio globi intellectualis)는 1653년에 출판되었다. 둘째 부분은 신 기관, 즉 자연 해석을 위한 진실한 지표들(Novum Organum sive indicia vera de Interpretatione Naturæ)은 1620년에 나타났다. 셋째 부분에서, 그 부분의 목표는 신 기관의 연속으로 출판된 소품들 속에 지적 되어 있는데, 자연적이고 경험적인 역사의 서설(Parasceve ad historiam naturalem et experimentalem)은 1622년에 철학적으로 요약된 자연적이고 경험적인 역사, 즉 보편 현상(Historia naturalis et experimentalis ad condendam philosophiam sive Phaenomena universi) 속에 다루어졌다. 이 작품은 많은 양의 독백록들을 알려준다. 그 독백록들 중의 어떤 것은 장관에서 추락한 후에 밑그림으로 또는 초고로 쓰여졌다. 삶과 죽음의 역사(Historia vitae et morlis)는 1623에 출판되었다. 촘촘하고 성긴 역사(Historia densi et rari)은 1658년에, 공기의 역사(Historia ventorum. 1622)는 1622년에 쓰여졌다. 재료들의 수집으로 실바 실바룸(Sylva sylvarum)은 1627년에 출판되었다. 넷째 부분에서, 1608년에 미로의 실, 즉 운동의 합법적인 탐문(Filum labyrinthi sive inquisitio legitima de motu) 작성되었으며, 1653년에 출판되었다. 빛과 조명의 탐구 주제(Topica inquisitionis de luce et lumine)는 1653년에 출판되었다. 자석 탐구(Inquisitio de magnete)는 1658년에 출판되었다. 다섯째 부분에서 선구자들, 다음 철학의 예상들(Prodromi sive anticipationes philosophiae secundae)은 1653년에 출판되었으며, 바다의 밀물과 썰물(De fluxu et refluxu maris)은1616년에 작성되었으며, 천체론(Thema coeli)은 1612년에 작성되었다. 마지막으로 2차철학[다가올 철학]은 자연 해석에 관한 사상들과 결론들, 생산적 작업들의 과학(Cogitata et visa de interpretatione naturae sive de scientia operativa)의 목적이며, 1653년에 출판된 거대한 산출의 시대(Temporis partus masculus)의 셋째 권의 목적이었다. (20)
이런 거대한 작품에게, 이것의 부분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이, 즉 1736년에 출판된 철학들의 반박(Redargutio Philosophiarum)과 특히 1627년에 출판된, 과학적 탐구들의 조직화의 기획인 새로운 아틀란티스(New Atlantis)가 관련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 문학적 저술들을, 즉 시론들(Essays, 1597)을 덧붙여야 할 것이고, 이 작품들의 각각의 새로운 판본(1612년과 1625년)은 앞에 나온 판본에 덧붙여졌다. 또한 역사적이고 법률적인 수많은 저술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20)
그것은 새로운 정신의 전조가 행한 문학 활동이며, 나팔수(un buccinator)의 문학 활동이다. 그 나팔수는 자연에 관한 인간의 지배를 보장하면서,정신들 각성하게 하고, 인간적 삶을 변형해야 하는 운동의 주도자가 된다. 그는 열정이 대단하였고 잊을 수 없는 특성로 규범들을 각인하는 강한 상상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법률학자이며 또한 행정가 있다. 그는 조직화의 정신을 가졌으며, 거의 자질구레한 데도 신중하였으며, 그가 시작한 백주년이 될 작품에서 각자에게(관찰자, 실험자, 법칙 발명가) 정확하고 제한된 임무를 분배할 욕망도 가졌다. (20)
2절 베이컨의 이상: 오성과 실험(경험) 과학
- L’ideal baconien : entendement et science expérimentale 21.
베이컨은 과학들의 상태들과 지적 세계의 상태들을 자기 주위에 둘러보았다. 그는 거서 고착성과 정체성을 그리고 동시에 자기만족을 보았다(그는 게다가 자기 시대의 위대한 과학자들의 작업들을, 특히 갈릴레이의 작업들을 무시하거나 잘못 이해했다). 그 자기만족은 목적에 대한 선구자적 징후들인 셈이다. 그는 어떻게 과학이 진보를 그리고 증가하는 생활을 다시 가능할 수 있게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였다. 그는 자기 시대의 과학들에서 무엇을 비판했는가? “[비판한 것은] 기예들에서 또한 방법들에서 과학들의 조숙하고 무모한 환원이다; 마찬가지지만 과학은 단지 거의 아무것도 심지어는 전혀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이 경구들과 관찰들로 분산되는 한에서, 과학은 증가하고 커갈 수 있다. 일단 과학은 자기 방법들 속에 갇혀있어서, 사용법에서 매끄럽고 세련되게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더 이상 덩어리[전체]로 증가하게 할 수 없다.”따라서 이 “방법들”은 다소 인위적인 전시작업의 절차들일 뿐이며, 그 절차들은 과학들을 그것들의 현실적 상태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과학은 자기의 자유로운 걸음걸이[보조]를 가지고 있는데, 신 기관(Novum Organum, 1620)[새로운 방법]에서 베이컨 자신의 절차에 따라서 과학이 예견된 도식 없이 보다 자유롭게 표현될 때이다. 베이컨은 자신이 확실성에 대해 심한 두려움을 느낄 만큼 그렇게 고착성을 이해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여러 사색들에서 만일 사람들이 확실성에서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끝내는 의심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의심에서 시작한다면, 또한 만일 사람들이 한 동안 인내하면서 의심을 지탱한다면, 사람들은 끝내 확실성에 이를 것이다.”이는 겉보기에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의심이지만, 실재로는 반대되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실재적으로 의심자체가 함축되어 있는 확실성에서, 즉 코기토의 확실성에서 출발한다. 이런 확실성은 다른 확실성들을 생산하게 한다. 베이컨에게서 확실성은 시작이 아니라, 탐구를 마감하는 끝이다. (21)
베이컨의 비판들 모두는 다음에서 유래한다. [우선] 인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인데, 이들은 과학들에서 문학적 발전에 맞는 주제만을 과학에서 본다. [두째] 스콜라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인데, 이들은, 마치 작은 방속에 신체를 가두듯이, 자신들의 영혼을 아리스토텔레스 속에 가두면서, 견고한 독단들(dogmes solidifiés, rigor domatum)을 가지고 있다. [세째] 과학이 이미 만들어진 것, 즉 과거의 것이라고 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네째] 전문가들에 대한 비판인데, 이들은 제1철학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학문 속에 격리되어 있으면서, 자신들이 선호하는 과학이 마치 기하학자인 퓌타고라스학파들, 즉 카발리스트처럼 모든 사물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있다. 카발리스트들은 플러드(Robert Fludd, 1574–1637)와 마찬가지로 도처에 많은 이들이 있다. 분류하는 모든 것, 고정하는 모든 것은 나쁘다. (22)
분류작업의 도구 자체에, 예지(l’intellectus)즉 오성에, 반대하는 불신은 어디서 오는가? 예지는 자기 자신에게 허락하게 내버려 두고서(permissus sibi) 구별에 관하여 구별만을 생산할 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사람들 “주지주의자들”의 토론들에서 그런 것을 보는 것과 같다. 토론들에서 물질의 희박함은 정신의 생산력 없는 연습만을 허락할 뿐이다. (22)
베이컨은 추상적이고 분류적인 예지[오성] 이외에 다른 예지를 알지 못했다. 이런 예지는 아랍인들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는 데카르트가 수학적 발명의 작업에서 발견했던 예지[오성]를 무지했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과학이 진정되거나 풍부하게 될 수 있는 것은 오성 의 내부 개혁에 의하여가 아니었다. 이점에 관해서 베이컨은 아주 깔끔했다. 인간 오성의 관념들은, 창조주가 사물들을 만든다는 신적인 관념들과 더불어 보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또한 결코 [미래에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인간 정신의 우상들과 신적 정신의 관념들 사이에, 즉 헛된 우리들의 견해들과 신이 피조물에게 각인했던 진실한 도장들 사이에, 차이는 가볍지 않다.”인간적 예지와 진리 사이에 어떠한 자연적 친근성도 없다. 그것은 마치 찌그러진 거울과 같다. 은유 없이, 도처에서 동등성, 일관성, 유비를 보는 것은 필요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베이컨은 여기서 정당하게 르네상스의 가장 유명한 형이상학들을, 즉 파라셀수스(Paracelsus, 1493-1541)와 브루노(G. Bruno, 1548-1600)의 형이상학들을 공상할 수 있었다. (22)
따라서 정신의 섬세함이 자연의 섬세함과 동등할 수 있을 것이라면, 그것을 인식하기 위하여, 이런 관련을 물어야 하는 것은 자연 자체에게서 이며, [자연의] 진실한 지배자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베이컨은 자연에 대한 실험 과학의 전통에 집착했다. 실험과학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양에서 다수 분명한 방식으로 체험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20경-1292경)에게서 중세에 그 전통을 다시 입장 시켰다. 이런 과학에는 두 국면들이 있다. 한편 역사들(Histoiriae)인데, 자연으로부터 사실들을 모은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들의 역사, 특히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와 같은 것들이다. 이런 편집들은 자연의 모든 영역들을 포함하며, 수세기 동안에 세계에 대해 철학자들의 이미지보다 더 구체적이고 더 살아있는 이미지를 탐구했던 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역사들(Histoiriae) 이외에도, 모든 종류의 미신들을 뒤섞었던 조작적 기술들도 있는데, 이 기술은 인간의 구도들에 맞게 복종하도록 자연을 강제하게 한다고 허풍을 떨었다. 또한 의지들을 구속한다는 자연적 마술도 있고, 금을 제작한다고 애쓰는 연금술도 있다. 이런 과학들은 마치 점성술처럼, 스토아주의와 네오플라톤주의에서 파생한 우주의 표상[재현]작업에, 즉 불가사의한 공간들과 반감들의 표상작업들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이런 작업들에 대해 경험은 우리에게 그것의 비밀을 폭로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histoires)”은 조작적 과학처럼 16세기에 열광시켰다. 이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 자체가 여러 이야기들과 더불어 실어 날랐던 모든 미신들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성격을, 베이컨이 과학에서 찾았던 진보적 성격을 가졌다. 그리고 진실로 이 이야기들은 인간에게 명령할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자연에게 복종할 조건에서만(natura non vincitur nisi parendo), 말하자면 자연의 법칙을 안다는 조건에서만 희망을 주었다. 베이컨은 과학들 속에는 신뢰성과 사기성이 있다는 것을 전혀 잘못 인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보하지 않고[기탄없이] 그것[과학]들의 목표들을 시인했다. 즉 목표들이란 “밑[심층]의 사물들에 관해 높이[상층]의 사물들의 영향”을 마치 구천문학[점성술]처럼 탐구하는 것이고; “사색작업의 수천가지 형식들로부터 조작적 실천들의 중요성으로 자연철학을” 마치 자연적 마술처럼 상기하는 것; “그 속에 감추어져 뒤섞여 있는 물체들의 이질적인 부분들을 따로 떼어내어 추출하는 것, 물체들의 불순수성으로부터 물체들을 순수하게 하는 것” 마치 구화학[연금술]처럼; 이것들은 그 만큼 인정되어야 마땅한 목표들이다.과학들이 사용하는 수단들은, 이것들이 종종 부조리하다 할지라도, 그래도 과학들에 대한 풍성한 발견들의 기회를 적잖이 가졌다.
따라서 거대한 재구축(Instauratio magna, 1620)은 수학들의 계열에도, 수학적 자연학의 계열에도 속하지 않지만, 이런 학문들의 진보는 17세기를 특징지운다. rl 길r,f 는
가 있었다. 이 저술은, 증가하는 과학들을 포기하고서, 자연에 관한 진술들로, 조작적 절차들로, 실천적 기술들로 혼재되어 있는 일체를, 실험과학들을 구성하는 일체를 추론적으로 조직화하는 데 있다. (23) (56VKJ)
8절 영국에서 경험 철학 – La philosophie experimentale en Angleterre
볼떼르(Voltaire, 1694-1778)는 자신의 철학적 편지들(Lettres philosophiques, 1734)들에서 베이컨에 관하여, 18세기 초에 영국에서 아주 일반적이 되었던 한 견해를 내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특이하고 최상인 작품이 오늘날 매우 덜 읽히고 또한 가장 무용하다. 나는 그의 새로운 과학의 기관(Novum scientiarum organon)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운 철학을 건설하는 발판(비계 飛階)이다. 그리고 이 건물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세워졌을 때, 비계는 더 이상 어떤 용도로 쓰이지 않는다. 대법관인 베이컨은 자연을 아직 알지 못했으나 그는 자연에 이르는 모든 길들을 알았다.” 영국에서 1650년부터 사실상 새로운 철학, 즉 경험철학또는 효과적 철학이라 불렸을 경탄할 진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자연ㅇ에 대한 실험과학들의 일체가 있었다. 1645년에 세웠고 공식적으로 1662년 인가된 런던의 왕립학회,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의 물리학적 작품, 특히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은 이 발전의 기념들이었다. 단지 왕립학회의 집단적 작품, 즉 이 학회가 자연의 현상들을 세우고자 시도했던 목록은 베이컨 과학인 역사의 첫째 요구를, 그랜빌(Joseph Glanvill, 1636–1680)의 과학적 스켑시스(Scepsis Scientifica, 1665), 즉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왕립학회의 예언적 기획”을 실현하기 위한 시론이었다. 그 동일한 그랜빌은 자기 작품에서 데카르트 철학이 다루는 모든 재료들에 관하여 우리 인식의 불확실성을 제시하면서 학회의 정신을 잘 표현한다. [그 재료들이란] 영혼과 신체의 통합, 영혼의 자연과 기원, 생명체들의 기원, 원인들에 대한 무지(흄보다 앞서서, 그가 말하기를, 한 사물이 다른 사물의 원인이라고, 우리가 기대한 사물로부터 아니라면,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는 그 재료들에 대해 철학의, 즉 “그의 담론이 이끌어 가 새로운 철학”의 실험적이고 실천적인 부분의 발견물에서 풍부성을 대립시켰다. 모든 증명은 경험적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학회의 본질적 규준들이다. 이때부터 학회는 임시적인 결과들만을 기대하기를 원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미래 시대들의 경험들은 현재 시기의 경험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러나 반대로 거부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왕립학회 비서(사무장)이었던 훅(Robert Hooke, 1635–1703)은 “비교할 수 없는 인물, 베루람(Verulam, 베이컨)”의 찬미자인데, “자기들의 사상들을 오로지 베끼기를 원하는 자들, 그리고 자기들에게 개별적이지만 사물들에 대해 마치 일반적인 것처럼 주어진다고 이처럼 진술하는 자들”을 질책한다. 이 왕립학회에서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은 뉴턴(Newton, 1643-1727)에까지 가장 탁월한 회원이었다. 그런데 보일은 특히 화학에 전념하였으며, 물질에 관한 상당한 이론가였으며, 너비(l’etendue, 길이)이자 불가침투성인 제1성질로부터 “제2성질들”을 연역해내는 소립자 이론과 역학 이론의 찬성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국 경험 철학의 메카니즘이다. 데카르트의 메카니즘에 대해 그는 후크에 의해 사용된 동일한 용어들로서 말했다, 그것은 개별적인(particulière, 부분적인) 관점이다. “데카르트가 성질들에 부여한 역학적 설명은 미묘한 방식으로 개별적인(particulières) 용어들에 의존하는 만큼, 둘째 요소와 다른 비슷한 사물들에 의존한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 용어들을 자기 가설들의 나머지 용어와 매우 잘 엮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철학을 전적으로 채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드물게 사용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사유는 너무나 체계적이고 인격적이기에, 경험과 더불어 굴절하게 되는 어떤 사유에게는 자유로운 놀이를 질식하게 할 지경이다. 보일의 메카니즘의 출발점은 실험적[경험적]이다. 이것은 기계들의 수학적 이론, 즉 “순수 수학을 생산작업에 적용하게 하는 또는 물체들 속에 운동들의 모양변화에 적용하게 하는” 이론이다. (39) (17:29, 56V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