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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월 상순(10수)
하루시조 244
09 01
바람이 불 줄 알면
무명씨(無名氏) 지음
바람이 불 줄 알면 설면자(雪綿子)를 위에 걸어
님이 올 줄 알면 문(門)을 닫고 잠을 들랴
왔다가 가더라 하니 그를 설워 하노라
설면자(雪綿子) - 풀솜. 실을 켤 수 없는 허드레 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 빛깔이 하얗고 광택이 나며 가볍고 따뜻하다. 명주솜.
님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노래했습니다.
초장은 양잠(養蠶)을 알면 금방 이해가 되었을 텐데요, 가볍디가벼운 것을 바람에 날려버렸다는 후회를 적었습니다. 걸어? 정도로 말끝을 올려서 올렸겠느냐?의 뜻을 살려야 합니다. 이런 초장은 결국 중장의 상황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님이 올 줄 알았더라면 잠을 잘 리가 있겠습니까. 초저녁잠이 많은 편이라 하더라도 문을 열어둘 수도 있었겠지요. 종장의 끄트머리가 ‘그 걸 슬퍼한다’고 아주 얌전하게 평서문으로 되어 있지만, 얼마나 원통 절통했겠습니까.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사(人生事)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45
09 02
이천에 배를 띄워
무명씨(無名氏) 지음
이천(伊川)에 배를 띄워 염계(溓溪)로 건너가니
명도(明道)께 길을 물어 가는대로 가자스라
가다가 저물어지거든 회암(晦庵)에 들어 자리라
이천(伊川) - 글자 대로 보면 ‘저 냇가’가 되겠으나, 시조 전체 맥락으로 보면 중국의 철학자로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 중 정이의 호가 이천(伊川)인 바, ‘정주학’으로 보거나, 정이로 봄이 옳겠다.
염계(溓溪) - 중국 북송의 유교 사상가 주돈이(周敦頤).
명도(明道) - 정호(程顥)의 호.
회암(晦庵) - 주자학(朱子學)의 창시자 주희(朱熹)의 호.
등장하는 네 사람의 중국 사상가 철학자의 호(號)를 요즘 젊은이들은 거의 생각해낼 수가 없습니다. 불과 100년 전 만해도 우리 선조들은 이런 불편이 없을 정도로 주자학 성리학에 갇혀 살았던 것입니다만.
이 작품은 네 사람의 호를 등장시켜 그 글자를 끌어다가 일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 배를 띄워 건너가고 길을 물어 가다가 저물면 자고 가는 것, 이 모두가 인생길일진대 어떤 상황이건 성리학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천(川) 계(溪) 도(道) 암(庵)이 중의법(重義法) 수사가 되도록 서술하고 있어 먹물깨나 든 사람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46
09 03
오려 논에 물 실어 놓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오려 논에 물 실어 놓고 고소대(姑蘇臺)에 올라 보니
나 심은 오조 밭에 새 앉았으니
아이야 네 말려주렴 아무리 우여라 일러도 감돌아 듭네
오려논 - 올벼를 심은 논. 올벼 - 제철보다 일찍 여무는 벼.
오조 – 올조의 준말. 올조 - 제철보다 일찍 여무는 조.
고소대(姑蘇臺) - 중국 춘추 시대에, 오나라의 왕인 부차(夫差)가 고소산(姑蘇山) 위에 쌓은 대. 부차는 월나라를 무찌르고 얻은 미인 서시(西施) 등 천여 명의 미녀를 이곳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
우여라 일러도 - ‘우여 우여’하면서 큰소리로 말해도. 쫓아도.
감돌다 - 어떤 둘레를 여러 번 빙빙 돌다.
논에 물을 실어 놓았다는 첫구부터 상콤하네요.
올벼니 올조니 파종과 수확기간이 짧은 품종이거늘, 수확량은 둘째치고 춘궁기의 대비책으로 심었습니다. 고소대(姑蘇臺)는 중국 역사적 장소 지명인데, 전남 여수에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냥 높은 곳에서 조망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라 풀어봅니다. 종장의 앞절은 아이에게 부탁하는 말이고, 뒷절은 그 아이의 대답으로 꾸며져 있군요. 깨어진 음수율과는 무관하게 흥미롭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47
09 04
촉석루 밝은 달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촉석루(矗石樓) 밝은 달이 논낭자(論娘子)의 넋이로다
향국(向國)한 일편단심(一片丹心) 천만년(千萬年)에 비치오니
아마도 여중충의(女中忠義)는 이뿐인가 하노라
촉석루(矗石樓)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누각. 남강(南江)에 면한 벼랑 위에 세워진 단층 팔작(八作)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곧을 촉, 돌 석, 마루 루.
논낭자(論娘子) - 논개(論介). 조선 선조 때의 의기(義妓)(?~1593). 진주의 관기(官妓)로,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촉석루의 술자리에서 당시 왜장(倭將)이었던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죽었다.
향국(向國) - 나라를 향하다.
일편단심(一片丹心) -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변치 아니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
비치오니 – 비추오니.
여중충의(女中忠義) - 여성 중에서 뛰어난 충성(忠誠)과 절의(節義).
한자투성이의 작품은 단어 풀이만 되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내용이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추앙하는 것이라 특별합니다. 진주성이 전란을 극복할 용도로 쓰일 적에는 촉석루는 대장의 진두지휘소 역할을 합니다. 그 웅장함은 깎아지를 듯한 절벽 곧 촉석 위에 세워져 더욱 높아 보입니다. 그 아래 너럭바위 의암(義岩)이 역사의 현장이지요. 촉석루 곁에 작지만 절도 있는 사당 의기사(義妓祠)에서 굽어보는 남강과 성가퀴 행렬은 여행자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48
09 05
파연곡 하셔이다
무명씨(無名氏) 지음
파연곡(罷宴曲) 하셔이다 북두칠성(北斗七星) 앵돌아졌네
잡을 님 잡으시고 나 같은 님은 보내소서
동자(童子)야 신 돌려 놓아라 갈 길 바빠 하노라
파연곡(罷宴曲) - 잔치를 끝내는 악곡이나 연주.
북두칠성(北斗七星) - 밤하늘의 별자리 ‘큰곰자리’에서 국자 모양을 이루며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일곱 개의 별. 이름은 각각 천추(天樞), 천선(天璇), 천기(天璣), 천권(天權), 옥형(玉衡), 개양(開陽), 요광(搖光)이라 하며 앞의 네 별을 괴(魁), 뒤의 세 별을 표(杓)라 하고 합하여 두(斗)라 한다. 위치는 천구(天球)의 북극에서 약 30도 떨어져 있으며, 천추와 천선을 일직선으로 연결한 곳에서부터 그 길이의 다섯 배만큼 떨어진 거리에 북극성이 있다. 국자의 자루 끝에 있는 요광은 하루에 열두 방위를 가리키므로 옛날에는 시각(時刻)의 측정이나 항해의 지침으로 삼았다.
앵돌아지다 - 홱 틀려 돌아가다.
놀 만큼 놀았으니 이제 그만 파(罷)하자고 객이 주인장에게 권하는 내용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북두칠성 국자자루가 돌아간 만큼으로 알아차리던 옛정취가 잘 드러나 있군요. ‘잡을 사람’ 잡아서 여흥을 더 즐기시되, 저는 그만 갸게 하시기를. 점잖은 부탁의 말씀이군요.
상대방이 잡을 사람을 ‘잡을 님’이라 하는 것은 좋은데, 자기 또한 ‘나 같은 님’이라 존대하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자존(自尊)이지 싶습니다. 보통 ‘아해야’로 이어가는 종장 첫구 석 자를 ‘동자야’로 해서 아이까지 존대한 듯하여 특별합니다. 댓돌 위의 자기 산발을 신기 쉽게 돌려 놓아 갈 차비를 부탁하는 어투가 자못 결연(決然)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49
09 06
편작의 청낭결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편작(扁鵲)의 청낭결(靑囊訣)에 화음하는 법을 배워
님의 속 내 간장(肝腸)을 아픔 없이 헤쳤으면
그제야 뉘 정(情)이런지 헤어 볼까 하노라
편작(扁鵲) - 중국 전국 시대의 의사(?~?). 성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치료하였다. 장상군(長桑君)으로부터 의술을 배워 환자의 오장을 투시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전한다.
청낭결(靑囊訣) - 의서(醫書) “청낭비결(靑囊秘訣)” 중국 후한 말기의 명의(名醫)인 화타(華陀)가 지은 의서.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청낭(靑囊).
화타(華陀)의 일과 편작(扁鵲)의 일이 뒤섞여 있어 ‘실명씨’의 작품이 맞긴 맞습니다. ‘화음하는 법’이 무엇일까요. ‘화음’을 한자로 적지 않았는지라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나 편작 신의(神醫)의 의술에서 유추하건대, 오장육부(五臟六腑)를 들여다보듯 살피는 법이러니 싶습니다. 문제는 나와 님의 속내를 세밀히 살펴 누구 정으로 이러는지 헤아려보겠다는 내용이고 보면 또 하나의 ‘진실(眞實)공방(攻防)’의 노래입니다. 누구 정으로 사랑이 ‘이어지는지’ 아니면 ‘멀어지는지’ 어느 쪽 형펴을 알고자 하는가는 가늠하기는 쉽지 않고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50
09 07
하늘천 따지 땅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하늘천 따지 땅에 집우 집주 집을 짓고
넓을홍 거칠황하니 날일 달월이 밝았구나
우리도 언제나 정든 님 만나 별진 잘숙
천자문(千字文)이 아동 학습입문서였던 시절이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었고,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들도 천자문 첫부분은 능히 흥얼거렸으니, 이 작품은 아주 자연스럽게 음(音)과 훈(訓)과 토(討)를 섞어 초장 중장을 이어간 다음 ‘별 진(辰) 잘 숙(宿)’ 앞에 할 말을 붙여내었습니다. 그렇죠, 정든 님과는 자는 게 아주 중요하니까요.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 창법에 의한 것으로 ‘하리오’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51
09 08
나무 여름 중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나무 여름 중에 잣같이 고소하며
넌출 여름 중에 어흐름같이 흥덩지랴
어흐름 자고명 박으면 흥글항글 하리라
여름 – 열매.
넌출 – 넝쿨. 덩굴.
어흐름 – 으름.
흥덩지다 – 달다
자 – 잣.
고명 - 음식의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음식의 맛을 더하기 위하여 음식 위에 얹거나 뿌리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 버섯ㆍ실고추ㆍ지단ㆍ대추ㆍ밤ㆍ호두ㆍ은행ㆍ잣가루ㆍ깨소금ㆍ미나리ㆍ당근ㆍ파 따위를 쓴다. 웃고명.
흥글항글하다 –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으름의 옛이름이 ‘어흐름’이었군요. 요즘은 과수원예가 아주 발달해서 계절의 구분이 없거니와, 무역을 통해 지역간 거리조차 없어졌지만 이 작품에서처럼 잣과 어름의 조화가 최상급이었던 시절이 그다지 먼 옛날이 아니었습니다.
잣이 조연(助演)인 으름 주인공(主人公)에 대한 찬사입니다. ‘흥덩지랴’ ‘흥글항글’ 군침이 돌고 입 꼬리가 올라가는 멋진 순우리말 ‘맛표현어’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52
09 09
아이야 그물 내어
무명씨(無名氏) 지음
아이야 그물 내어 어강(漁舡)에 실어 놓고
덜 괸 술 막걸러 주준(酒樽)에 담아 두고
어즈버 배 아직 놓지 마라 달 기다려 가리라
어강(漁舡) - 어선(漁船). 강(舡)은 선(船)의 속자(俗字).
주준(酒樽) - 술동이.
어즈버 - (감탄사) 아아!
배를 타고 고기도 잡고 술도 한 잔 하려고 준비를 다 했거늘, 아직은 때가 아니랍니다. ‘놓다’는 ‘띄우다’의 뜻으로 무척 간단하나마 전문용어로 들립니다. 막 걸러진 술 곧 막걸리의 표현이 들어 있어 또한 새롭습니다. 덜 괸 술 곧 아직 다 익지 아니한 술이라도 걸러서 먹는 술이라는 의미가 찾아집니다.
가장 중요한 건 월광(月光)이라는 말씀인데, 이건 인간의 몫이 아닌 거라 때를 기다려야 얻을 수 있군요. 자연에 순응하면서 함께 즐기는 어옹(漁翁)의 여유가 부럽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53
09 10
아이야 네 어디 사노
무명씨(無名氏) 지음
아이야 네 어디 사노 내 말씀이요 강변(江邊) 사오
강변(江邊)서 무엇 하노 고기 잡아 생애(生涯) 하오
네 생애(生涯) 좀도 좋구나 나도 함께
생애(生涯) - 살림을 살아 나갈 방도. 또는 현재 살림을 살아가고 있는 형편. 생계(生計).
아이와 어른이 나누는 대화가 문답(問答) 형식으로 각장의 전후를 장식합니다. 어른은 묻고 아이는 대답하는데, 어미의 ‘오’와 ‘요’가 현대 문법과는 거꾸로 쓰였군요. 강변(江邊)이나 생애(生涯)라는 아이의 대답을 되받아 묻는 수법이 아주 매끄럽습니다.
어로(漁撈)의 생계(生計)가 좋아 보인다는 어른은 세파(世波)에 어지간히 시달린 모양입니다.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 창법에 따른 것으로 ‘하자꾸나’ 정도로 읽힙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한국적인, 가장 특징적인, 역사가 깊은 문학의 한 형태인 시조문학이 이들 무명씨의 작품들로 더욱 빛난다는 사실, 한국문학도라면 자긍심을 가져도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