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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3권. 중세와 르네상스(Moyen Age et Renaissance) 463-702
제6장, 14세기 Le XIVe siècle 630-658.
1절,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 630-636
이런 분열상의 초기 징후는 섬세 박사인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5경-1308)의 의해 창시되었던 관념들의 운동에서 있었다. 그는 마흔 셋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1265년경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러 대학에서 인문학들과 신학을 공부했는데, 그 중에는 캠브리지 대학과 파리 대학도 있다. 그는 1300년 이전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평결문들에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을 거쳐 파리 대학에서 1306[마흔하나]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308년[마흔셋]에 퀠른에서 세상을 떴다. 평결문들에 대한 그의 주석의 진지한 원문은 정돈방식에 있다(이 책은 출판 중에 있다). 강연들 중에서 최상의 것은 옥스포트에서 강연이다. 그의 덕분에 사람들은 포르피리오스의 질문들,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논리학 작품들, 또한 형이상학에 관하여, 또한 저술들로서 제1원리에 대하여와 정리와 이런 것들를 읽을 수 있다. 와딩-비에브(Wadding-Vivès)의 편집으로 나온 사변적 문법과 사물의 원리에 대하여은 각 저자들이 토마스 에르푸르트(Thomas d'Erfurt, 14세기초 활동)와 비탈 드 푸르(Vital du Four, 1260-1327)이다. (630)
둔스 스코투스는 우리가 따라왔던 어떠한 흐름들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런 흐름들에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에 속하는 자들에게, 사람들은, 그가 그 학파에게 가장 값진 이론들로 만든 매우 생생한 비판을, 반박해야만 했다. 이론들이란, 마치 계시와 같은 지적 인식의 이론, 물질 속에 포함되어 있는 씨앗의 이법들의 이론, 영혼 속에 포함된 타고난 인식들의 이론이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토마스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학설들, 즉 물질의 현실적 현존, 형상에 의한 개체화, 즉 핵세이테(haeccéité), 의지의 우선성 등은 성토마스의 이론과는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대립 속에 있다. (630)
이것을 구별하고 따로 떼어내는 본질적인 특징들 중의 하나, 그것은 사람들이 우주에 대한 크리스트교적 전망의 역사적 성격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해 망설이지 않고 주장하는 것이다. 창조, 육화, 크리스트의 장점들에 대한 충당, 이것들은 신의 부분으로서, 단어들 가운데 가장 충만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작동들이다. 말하자면 이 작동들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신의 고유한 의지와 다르지 않은 이법인 신의 주도권에 의존한다. 성 안셀무스의 “나는 믿는다, 이로서 이해할 것이다(Credo ut intelligam)”와 신의 동기들을 탐색하는 노력은 이런 새로운 정신에 대해 직접적인 반대에 있다. 따라서 그는 특이하게 신앙의 순수 대상들의 목록을, 즉 크레디빌리타(credibilita)를 길게 나열했다. 크레디빌리타는 “카톨릭 신자들에게서는 그 보다 많은 확실한 것들이다. 그들이 우리들의 맹목적이고 자주 흔들리는 오성에 지지를 받지 않고, 오히려 진리들 중에서 가장 견고한 진리 속에서 확고한 지지를 발견한다.” 전능, 통약불가능성, 무한성, 생명, 의지, 완전 현전, 진리, 정의, 섭리, 말하자면 거의 모든 신적 속성들, 이것들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치 세계의 원인과 같은 신의 용어로부터 연역했다. 이 속성들은 둔스 스코투스에게서는 신앙의 대상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는 신의 현존의 추리적 증거를, ‘세계의 우연성으로부터 논증’을 인정했을 것이다. ‘세계의 우연성으로부터 논증’은 우리가 경험하고 변화하는 존재로부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가변성으로부터 존재 속에 존재근거를 갖는 필연적 존재로 우리를 이행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증거는, 마치 안셀무스가 그렇게 원했던 대로, “사람들이 사유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존재”라는 용어로부터 출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하고 타고난 관념이 아닌 이런 용어는 유한한 존재들에서 출발하면서 우리들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선 이용어가 모순이 아닌지를 제시해야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631)
사람들은 이런 관점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플라톤주의 정신의 모든 흔적, 다시 말하면 실재적인 것의 형상들 사이에서 연속성과 위계질서의 주장의 흔적은 둔스 스코투스에서 거의 사라졌다. 만일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존재 속에서 연속성을 따라서(donc) 인식 속에서 연속성을 주장했다면, 그리고 토마스주의가 존재 속의 연속성을 그러나(mais) 인식 속에서 불연속성을 주장했다면, 스코투스주의는 다음을 정식으로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존재 속에 불연속성 과(et) 인식 속에서 불연속성이다. 이런 이유로 둔스 스코투스는 모든 개념들은 사용했으며, 우리가 보기에 그것들은 13세기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 개념들이란 가능적 예지와 능동적 예지, 질료와 형상, 보편과 개별, 의지와 오성 등이다. 반면에 앞선 사상가들에게서 이런 개념들은 서로 불려지고, 서로 연결되고, 서로 위계를 지니고, 서로 조직화되는데, 둔스 스코투스는 거기에서 독립적인 항들을 보게 하는 것 같다. 독립적 항들의 각각은 따로 충만하고 자족적인 실재성을 갖는데, 그 실재성은 아마도 서로 요청하지 않고서도 서로 보태진다. (632)
게다가 둔스 스코투스는 보편적 유비의 원리를 포기한 것 같다. 그 원리는 보나벤트라에게서 심지어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도 연속성의 큰 동인이었다. 존재(l’être)는 신과 피조물들에 비추어서는 모호하지 않고 일의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선언하면서(말하자면 존재는 동일한 사물을 의미한다), 그는, 한 항(피조물)에서, 즉 파생적 의미에서 존재에서 다른 항으로, 즉 보다 고상한 의미에서 존재인 신으로 이행을 허용하는 유비적 연관에서 모든 토대를 걷어낸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신은 동일한 자격으로 존재라는 용어에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 존재는 신과 피조물을 연관시키면서도 이들을 구별하는 어떠한 수단도 부여하지 못한다. (632)
이 불연속주의는 우선 물질의 이론에 의해 표시된다. 물질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동시에 토마스주의에도 적대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에 적대적이란, 왜냐하면 둔스 스코투스는 물질 가운데 있다는 씨앗 이법의 현존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토마스주의에 적대적이란, 왜냐하면 그는 어떠한 잠재성도 물질에게 형상 없이 존재하기를 허락하지 않는 소요학파의 원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스코투스는 한마디로 두 이론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두 이론은 게다가 매우 반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즉 질료와 형상 사이에 연결이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전자의 이론에서, 질료는 내적 원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내적 원리는 질료를 형상에 열망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자에서는 질료는, 질료를 현실화하는 형상에 상대적인 현존일 뿐이다. 둔스 스코투스는 (앙리 드 강(1217경-1293)처럼) 질료가 자체적으로 현실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질료는 분명한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대에 머물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사정이 그러하다면, 질료와 형상의 조성물은 현실태로서 두 존재로 이루어졌고, 두 존재는 서로 보태진다고 하고, 조성물은 통일성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고 한다. (632)
아비센(980-1037)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보편자와 개별자에 자체적으로 “무차별적” 실체의 이론은 토마스주의도 아우구스티누스주의도 아니다. 한편 사람들이 알다시피, 류들과 종들의 목록은 하위 종들에게까지, 또는 개체주의에게까지 그려졌기에, 소요학파주의는 종차의 형태가 분배되는 개체 속에 가지적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를 거부했는데, 종차의 형식에 우발적사건들을 부과하는 것에 따라서 순수하게 수적인 분할을 물질에게 속하게 하면서도 말이다. 다른 한편 사람들은 다음을 상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개체적 영혼 속에 초자연적인 숙명의 주어를 보면서도, 게다가 영혼에게 자기에 의한 자기의 인식을 부여 한다. 자기에 의한 자기인식은 영혼이, 아무리 특이자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에게 가지적이게 하면서도, 신앙의 이름으로 물질에 의한 개체화의 이론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래도 역시 프란체스코파인 둔스 스코투스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정신의 어떤 것이 남아있다. 토마스주의 주제를 인정하는 것, 자연이 또는 종적 형상이 동일한 종의 모든 개체들 속에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아베로스(1126-1198)의 저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이, 불가분 그 자체이지만, 마치 동질적인 물(수, 水)을 사람들이 다른 항아리에 분배할 수 있는 것처럼, 양에 의해서 분할된다. 그러나 둔스 스코투스의 이론은 훨씬 더 일반적인 결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있는 그대로로서 개체에게, 소요학파가 종에게 부여한 가지성과 같은 유비적 가지성을 부여하고자 원했다. 말하자면 규정성을 실증적이고 본질적인 성격들에 의한, 부정적이고 우발적인 성격들에 의해서가 더 이상 아닌, 규정성을 부여하고자 원했다. 소크라테스인격성(la scratité)은 긍정적 어떤 것이며,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현존이 물질 속에 들어있기 앞서 있으며, 그리고 그 소크라테스인격성은 영속한다. 그 양과 우발사건들의 변화들이 실재적인 소크라테스 속에 있을 수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개체의 통일성이며,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는 통일성이며, 이 통일성은 둔스 스코투스에게서는 헥세이떼(haeccéité)라는 규정된 현존성을 요구한다. 종적인 형상(la forme spécifique: équinité)은 이런 현존성을 포함하지 않고, 그런 형상이 연결되는 물질도(말들의 모든 몸체에 공통하는 물체적 구조) 더 이상 현존성을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형상 밖에서, 물질 밖에서, 따라서 이들의 조성물 밖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만 한다: 종에서 개체들로 이행은 류에서 종들로 이행처럼 조작되지 않는다. 류에서 종들로 이행에서, 류와 (종)차이의 관계는 마치 잠재적 존재가 자기를 규정하는 형상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류와 (종)차이는 유일한 실재성으로 통합된다. 반대로 최상위 종별화(spécialissime)의 종은 전적으로 정의된다. 이 종은 스스로 충만하기 위하여 개체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유일하고 동일한 개체적 존재(이 말, ce cheval) 속에서는, “특이한 현존성(이 말의 이것임, haeccéité de ce cheval)과 종별 현존성은 형식적으로 구별된 실재성들로 남아있다.” 말하자면 개체성은 사실로서 단순하게 종에 보태어지는데,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지적 연속성의 어떠한 연결 없이도 말이다. 둔스 스코투스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서 천사적 인식을 행한 비판 속에서 표출되는 중요한 특성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전통에 따라서, 천사들은 우리와 공통이 아닌 특이한 사물들을 인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냐하면 천사들이 우리의 예지보다 상위인 예지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천사의 예지에서 특이자들에 대한 인식은 보편자들의 인식에 포함되어 있다. 둔스 스코투스에서 연속성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하다. (634)
마치 그가 질료를 가지고 형상 없이도 현실적 실재성 자체를 만드는 것처럼, 또한 개체를 가지고 종으로부터 구별된 실증적 실재성을 만들 듯이, 둔스 스코투스는 어느 정도로는 능동적 예지에 마주하여 자치적이라는 활동성을 가능적 예지에게 부여한다. 능동적 예지의 고유한 역할은 종적인 형상을 감각적 이미지로부터 따로 떼어 놓는 것이다. 감각적 이미지에서 종적인 형상은 잠재적이다. 그러나 가능적 예지의 역할은 이해하는 작동이며, 이 작동으로부터 그 역할은 전체적 원인이다. 가지적인 종(種)은 추상화작업에서 생산된 것으로, 가능적 예지로부터만 도출되는 이해 작동을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작동을 이런 저런 대상에게 규정하기 위해서 이다. 또한 그는 이 작동들의 구별이 단지 대상들의 구별에 의해서 표출된다고 믿으며, 구별 그 자체에서 구별은 전적으로 오직 지적인 권능[잠세력]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또한 어떤 점에서 이런 이론이 둔스 스코투스를 아우구스티누스의 계시주의로부터 갈라놓는지를 안다. 그는 앙리 드 강(1217경-1293)의 주제에 응답하는데, 앙리 드 강은 감각적 대상들은 영혼을 밝힐 수 없다고 하고 또는 대상에게는 신적 광선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비해, 둔스 스코투스는 명백하게 이해되었던 제일 원리들의 확실성을 인용하고, 이 항들이 이해되면서부터 경험의 확실성도 인용하며, 결국에는 직접적이고 자치적인 확실성의 예들만큼이나 의식적 사실들의 내부적 확실성도 인용하면서 응답했다. (634)
그가 토마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오성에 대한 의지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것은 동일한 정신에서이다. 또한 의지는 올바른 이치의 명령(dictamen)을 조금도 경멸하지 않을지라도, 의지는 오성을 이런 저런 대상의 고려에로 인도하면서, “오성에게 권고[명령]할” 수 있다. “오성이 의욕의 원인이라면, 따라서 오성은 의지에 복종하는 원인이다” 둔스 스코투스가 목표로 삼는 것, 그것은 토마스주의를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인식으로보다 오히려 사랑으로 사물들의 최종 목표를 만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의지를 오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며, 마치 물질을 형상으로부터, 개체를 종으로부터, 예지를 신적 계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찰작업들은 무엇보다 의지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선언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의지 이외에 어떠한 것도 의지 속에서 의욕의 전체적 원인이 되지 못한다.” (635)
이것들이 둔스 스코투스가 신학 속에 옮겨 놓은 심리학적 견해들이다. 신에게서도 아니듯이, 그의 오성에 의해 생각된 선에로 그의 의지의 어떠한 노예상태도 없다. 아마도 신이 그의 오성에 의해 생각한 가능성들은 자기의 의지력의 임의 결단들이 아니다. 그리고 둔스 스코투스는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영원한 관념들의 창조도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신적인 의지가 항상 추론적이라는 것을 유지했다. 그러나 본질들은, 마치 무조건적인 규칙들처럼 의지력에 선현존하지 않는다. “그의 의지가 그러한 사물들을 원했다는 사실로부터, 그 의지가 그 의지가 아닐지라도, 거기에는 어떠한 원인도 없다.” 그리고 “규칙이 신적 원칙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어떠한 규칙도 똑바르지 않다.” (635)
스코투스의 도덕적 정신에 관하여 중요한 귀결들을 갖는 주제이다. 우리에게 선을 인식하게 하는 도덕적 지각들은 신적인 법칙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 선은, 지각들이 신에 의해 원했었던 것으로부터 처음에 온다. 마치 신적 전능이 - 그것은 신앙의 자료 이지만 – 무모순 이외 다른 한계가 없는 것처럼, 십계명의 첫 부분들의 명령들만이 자체적으로 필수적(그리고 모든 처분으로부터 배타적이다). 다른 것들은, 우연적 피조물들을 향한 의무들에 관한 것으로, 차이들을 가질 수 있고, 이것들의 명백한 고지(告知)에 의해서만 가치가 있다. 조건화된 권능(potentia conditonata)이라는 강요들은 보다 큰 선의 관점에서 신적인 결심에 의해 변경될 수도 있고, 또한 변경 할 수도 있을 것이다. (635)
둔스 스코투스가 신적인 실재성에까지 도입한 이런 철저한 불연속성은 그의 정치적 개념작업에도 지배한다. 오직 가정만이 그에게서 “자연적 권리”의 사회이다. 다른 인간적 단체들은 자유로운 계약에(즉 선거와 합의, electio et consensus)에 근거한다. 공동재산의 기원적 공동체는 죄진 이후에 폐기되었고, 사회적 조약에 의해 구성된 권리기관들은, 불변을 가정한 “자연법”을 참조함이 없이, 공통이익 속에서 소유제와 교환 법칙을 규제할 수 있다. 이런 학설은 인간의 자유와 산업에 넓은 지위를 부여하고, 여러 방식으로 근대 민주적 이론들을 예고한다. (635)
둔스 스코투스의 의지주의는, 14세기에 한 옥스퍼드학자에게서 보다 급진적 형식을 취할 것이다. 그 학자는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1300경–1349)인데, 그는 1290년 보다 앞서 태어났으며, 1349년에 칸터베리 주교로서 죽었다. 그는 수학자이며, 신의 현존 증명에서 안셀무스의 증명과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최고로 완전한 존재 개념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증명하면서, 신의 현존 증명이 완성되기를 바랐다. 특히 그는 이것으로부터 신적 원인성과는 다른 모든 원인성을 거의 부정하게 이르는 반(反)펠라기우스파였다. 그에게서는 “이법도 없고, 의지에 앞서는 신 속에 필연적 법칙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적 의지는, 원인이 어떤 것일지라도 모든 사물의 효과이며, 모든 운동의 운동인이다.”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작동, 그것은 그 작동을 필연적이게 하는 신이다. (636)
이런 자의적 농노의 이론은 매우 건조하고, 신비주의와도 매우 멀고, 성찰과 사랑에 의한 인간과 신의 통합과도 거리가 멀다. 그는 외적인 방식으로, 마치 농노가 자기 주인에게 의존하는 것처럼(“인간은 신의 농노이며, 자발적 농노이며 내가 말하건 데, 구속받은 것은 아니다.”) 인간을 신에 의존하게 했다. 그 이론은 14세기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이론은 시토파의 쟝 드 미르꾸르(Jean de Mirecourt, 1300-1349)에 의해 파리 대학에 재현되었다. 미르꾸르는 1347년에 자신의 마흔 주제들이 단죄되는 것을 보았다. 이 주제들 가운데 “신은 어떤 이가 죄 짓고, 그가 죄인이 되기를 바란다. 신은 자기의 선을 원하면서도 그가 죄인이기를, 그가 마치 죄처럼 죄의 원인이기를, 마치 짝의 잘못처럼 짝의 잘못의 원인이기를, 즉 마치 죄처럼 죄의 주인이기를 바란다.” 이 신학적 결정론은 영국인 위클리프(John Wyclif, 1330경-1384)를 거쳐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게 영향을 주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스코투스주의에는 수많은 주석가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유럽의 중요한 대학들에서 이를 가르치게 맡겨진 교수직도 많았다. 스코투스주의는 이렇게 여러 방식들로 새로운 정신의 창조에 기여했다. (636) (56TMB)
2절, 14세기와 15세기 대학들 Les Unversité aux XIVe et XVe siècle 636-639
14세기와 15세기 총에 대학들의 사회적 역할을 과대평가하기는 어렵다. 15세기에, 즉 1499년에 루이 12세(1462-1515, 재위 1498-1515)의 조칙에 의해 확정된 왕국조칙이란 것이 있었다. 그 조칙에서는 대학들의 졸업자들에게 수여하는 특권에서 커다란 이익들을 유보했다. 당시에 대학의 긴 연구과정들은(신학과 교회법전의 3년 과정) 도시의 교구들에 사목의 지명을 받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대학들과는 다른 곳에서 보다 더 자유로운 터전은 없었다. “대학이란 정신의 신탁소와 유럽 견해의 안내자이자, 법률적 권력들에 마주하여 세워진 가장 무서운 권능이었다. 어떠한 단체도 이보다 더 이상 자유롭지 않았고, 어떠한 조직도 이보다 더 민주적이지 않았다. 학부들이든 민족들이든 동아리들의 회의체들이, 그리고 일반 의회들이 있었다. 행정업무든, 교육이든, 사법이든, 정의 모든 소송업무들에 관해 판결할 권리가 있었다. 심지어 몇몇 업무들에서는… 학생들에게 동의 받은 대리 업무…였다. 교수들은 그들 자체로 채용되었다. 선출된 권력들은, 짧은 기간 동안(학장과 업무담당관은 세 달, 네 달 또는 다섯 달, 고작해서 1년이었다)…이었다. 중앙권력 또는 지역 권력의 간섭에 반대하여, 이의 제기되지 못하게 하는 특권들의 굳건한 방패막이 있었다. 세무에서 면제, 자기 짝들에 의해서 판단 받을 권리, 그리고 이런 보증들을 효과적으로 받기 위하여 자기 강의를 중단할 권리…, 그러한 것이 교황들과 왕들의 호의로 축복받고 인정되었던 면허장이다.” (637)
이런 대학들의 번창은 15세기까지 펼쳐진다. 15세기에 다양한 상황들은 중앙 권력의 이용하여 대학들에게 힘과 영향력을 걷어냈다. 중앙권력에서는 사변적인 것을 포기되었고, 직급들의 준비작업이 유일한 업무였다. 이 당시에 대학들은 과거에 존속했던 대로 활동적 중심들이 되기를 오랫동안 그만 두었다. 그리고 우리가 곧 볼 것이지만, 정신적 삶은 새로운 조건들에서 계속될 것이다. (637)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 이런 독립성은, 12세기와 13세기의 전통들에 집착하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잘 고심하면서, 새롭고 과감한 사변작업들에 의해 표출되었다. 이 시대 전체는 고대인들(les antiqui)과 근대인들(les moderni)의 갈등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실재로는 13세기의 혁신가들인데,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아랍 주석가들에서 나온 개념들에, 즉 형상과 질료, 가지적 원리와 감각적 원리, 천상의 운동하는 지성들에 완전히 말려들었다. 그런데 근대인들은 새로운 통찰을 이용하여 문제들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 자들이다. 그 통찰은 11세기와 12세기에 우리가 초벌로서 보았던 통찰과 종종 충분히 가까운 새로운 통찰이었다: 로스켈리누스(1050경-1121)와 아벨라르(1079-1142)의 유명론, 기욤 드 콩쉬(1088-1154)의 원자론이다. 사람들은 마치 성 안셀무스처럼 신앙을 더 이상 추리하려 애쓰지 않고, 마치 성 보나벤투라(1217-1274)처럼 이법을 계시하려고 애쓰지도 않고, 마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처럼 이법에게 그것의 영역의 한계들을 규정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철학적 사변작업은 자유를 얻었으나, 일반적으로 어떤 신앙심에 기대고 있었다. (638)
상당한 시대적 동요 가운데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안다: 옛 크리스트교 속에서 유지되는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300이상의 공국들(des principauté)로 된 제국의 해체에 의해 황제의 권력은 무화되었다. 이 공국들이 중앙 권력을 파고들었다. “군주들이 제국을 삼키는 것처럼, 인민이 군주들을 삼킬 것이다.” 쿠자누스(Cusanus, 1401-1464)가 1433년에 예언할 것이다. 교황의 권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했다. 그 권력은 서방 교회 대분열(le grand Schisme, 1378-1417)로 찢어졌다. 그 대분열의 출구로서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과 바젤 공의회(1433)가 있었다. 그 공의회들은 회의 참석자들 사이에 서로 서로의 갈등을 더욱 날카롭게 했다. 그 참석자들 중, 하나는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우월성의 찬성자들이며, 교황을 교회의 행정관처럼 고려했으며, 다른 한쪽은 교황의 무제한적 권능을 주장하는 교황권 지상주의자들이다. 전통적 권력들의 이런 퇴폐 분위기에서, 민족적 왕국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키웠다. (638)
실천적 관심들에 역할만큼이나 법률적 개념작업들에도 반성하게 하는 이런 갈등들에서, 14세기와 15세기의 교수들은 활동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모두가 철학자인 동시에 법률가들이었고 정치학자들이었다. 유명론의 중요한 주도자인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kham, 1285경-1347)은 교황 요한 22세(Jean XXII, 1244-1334; 재위 1316-1334)의 반대자였다. 그런데 그는 1328년에 교회에서 축출 당했고,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루드비히 3세(Ludwig III, 1282–1347, 1328-1347)의 궁정에서 지냈다. 궁정에서 그는 이미 교황의 적이었던 쟝 드 장댕(Jean de Jandun, 1280경-1328)을 만났고, 장댕의 내밀한 친구인 마르실 파두(Marsile de Padoue, 1275경-1342)는 자신의 작품 평화의 옹호자(1342)에서, “시민들의 대학들만이 인간 법제자였다”고 주장했으며, 그리고 그도 또한 1327년에 교회에서 축출되었다. 윌리엄 오캄은 궁정에서 20여년 이상 동안 교황에 반대하는, 교황 요한 22세의 오류 요약집(1334-1338)과 같은 팜플렛들을 썼고, 그리고 방대한 정치적 작품인 황제와 교황의 권력에 대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도 썼다. 대 분열은 수학자이면서 천문학자인 하인리히 하인부헤(Heinrich Heinbuche, 1325경–1397)의 편에서 보면, 1378년 이후에 쓰여진, 교회에서 평화의 조건들에 관한 수많은 작품의 기회였으며, 그런데 경제학들과 정치학들에 저술들의 저자도 동일한 저자이다. 15세기에 사람들은 추기경 삐에르 아이이(Pierre d'Ailly, 1351-1420)가 독일 지방의 도시에서 개최된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공의회파들을 지지했다. 반면에 바젤 공의회에서 쿠자누스(1401-1464)는 교황 편에 가담할 것이고, 추기경이 되고, 그의 시대에서 독일에서 성직자의 내부 개혁, 후스주의자들과 그리스인들과 협상, 교황청의 개혁과 교황령들의 행정부 등, 모든 교회 업무들에 탁월한 역할 할 것이다. (639)
3절, 유명론의 시작 Les débuts du nominalisme 639-940.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앞에 14세기와 15세기에 우리가 재발견했던 정신적 것들과 신비적인 것들 이외에도, 냉정하면서도 절제하는 일련의 실천가들과 논리학자들을 갖는다. 이들은 거대한 십자군전쟁들의 세대들이 활기찼던 종교적 열정을 상실했지만, 이 시기에 최소한의 업무에서 요구되는 간략하고 긍정적인 정신을, 그리고 자기 학설을 특징지우는 긍정 정신을 획득했다. 이런 시대의 유명론은 보편자들의 특별한 문제에 대해 개별적 해결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소요학학자파들과 플라톤주의자들이 발견했다고 믿었던 형이상학적 실재성들을 불신하는 새로운 정신이었다. 이 새로운 정신은 경험을 가능한 만큼 가까이 다가갔고,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을 거부함이 없이, 이 신앙의 진리들을 일반적으로 마치 이법에 이질적이고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했다. (639)
도미니크파인 생 뿌르생(Guillaume Durand de Saint-Pourçain, 1270-1334)은 프랑스 중서북부 도시인 모(Meaux) 주교로서 사망했다. 그는 어떠한 박사의 권위도, “그 권위 매우 유명하거나 장엄한 학설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뿌르생은 그 자신 스스로 진실한 유명론을 공표하지 않았더라도, 감각적이고 가지적인 “종들”의 중재를 거부했고, 능동적 예지를 탈실체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뿌르생에게서 우선 보편자는 감각적 이미지를 고려하는 어떤 방식으로만 정신 속에서 태어난다. 그럼에도 이미지 자체에서 개별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보편자는 개체와 다른데, 마치 비규정된 것이 규정된 것과 다른 것과 같다. 따라서 거짓 문제, 즉 개체화의 문제는 개체에 앞서서 종이 현존한다고 가정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무엇이 종을 개체화하는 지를 묻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데 개체적인 것 이외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으며, 개체적인 것은 우리 인식의 첫째 대상이다. (639)
마찬가지로 프란체스코파인 오리올(Pierre Auriol, 1280-1322)은 1318년에 파리 대학에서 신학의 교수가 된 후에, 아비뇽에서 1322년에 죽었다. 교황 요한 22세의 교황청에서 지내며, 교황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평결론집의 그의 주석에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실재성을 인식하는 것보다, 개별적이고 지칭된, 즉 증명된 실재성을 아는 것이 보다 고상하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오리올이 시도한 인식의 분석을 따르면서, 이런 정식을 보다 더 잘 이해할 것이다: 먼저 사물들은 “인상들”의 예지 속에서 생산하고, 인상들은 힘에서 그리고 간략함에서 차이들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런 연후에 예지 속에서 “겉모습”이 생겨나며, 이 겉모습을 오리올은 의도적 존재(지향적 존재), 반사(거울 이미지), 개념 또는 개념작용, 개관적 겉모습이라 불렀다. 이 모든 동의어들은 영혼이 사물을 인식하는데 쓰이는 매개를 지칭하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치 토마스주의의 겉모양(la species)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의 고유한 대상을 지칭한다. 이제 덧붙이자. 이런 겉모습은 그에게서는, 겉모습이 재현하는 것과 구별되는 실재성을 갖는 사물, 그 사물의 이미지와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정신 안에서, 그러나 사물이 정신을 통해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갖는다는 점에서, “현재 있는” 사물 자체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말하기를, “개념작업”이 완전히 불완전하고 구별되지 않을 때, 류의 인식이 있다고 하며, “개념작업”이 보다 완전하고 보다 구별될 때, 종의 인식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식의 진보는 보편적인 것에서 특이한 것으로 나간다. 그것은 뒤섞임에서 분명하고 구별된 것으로 간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640)
4절, 귀욤 오캄 Guillaume d'Ockham 640-642.
유명론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명론자는, 영국 프란체스코파인 기욤/윌리엄 오캄이다. 그는 이론의 모든 귀결들을 연역했던 철학자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는데(1280년 과 1290년 사이 태어나, 1349년 또는 1350에 세상을 떴다). 박사학위에 이르지 않았으나, 그는 창안자였다. 이런 용어의 의미에서 본다면, 사람들은 그를 유명론의 존경하는 창도자 즉 존엄한 창안자, 유명(명목)들의 군주 또는 기수이며, 사람들은 무차별적으로 그의 찬성파를 마치 유명론자들, 항목론자들 또는 개념론자들로 지칭한다. (640)
보편자들의 현존에 반대하는 오캄의 논증들은 새롭지 않다. 그것은 이미 11세기와 12세기에 사용했던 논증들이다. 이 논증들은 보에티우스에 의해서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한 토론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보편자는 자체로 현존하는 것으로 가정되어서, 보편자가 개체가 될 것이다. 이것은 모순적이다. 다른 한편 특이자를 설명하기 위하여 보편자를 제시하는 것, 그것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을 이중화하는 것이다(삐에르 오리올이 이미 사용했던 유명한 경제 원리의 적용인데, 오캄은 그 원리를 이렇게 발언한다: 필연성 없이 용어를 다수화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정신이 보편자를 추상작업에 의해 끌어내는, 특이한 사물들 속에 보편자를 놓는다는 것, 그것은 또한 보편자를 개별자이게 하는 것이다. (64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캄은 이 점에서 보에티우스에 매우 충실하고, 또한 그는 범주론에 대한 모든 고대 주석가들에 충실하면서, 보편자들을 단어들 자체 속에서 두지도 않고, 게다가 사물들 속에 두지도 않고, 오히려 단어의 기호화작업들(영혼의 의도, 영혼의 개념, 영혼의 정념) 속에 두거나, 단어들이 어떤 것을 기호화하는 한에서 단어들 속에 두거나 이다. 둘째 의미에서 단어들은 협약적이다. 왜냐하면 단어들은 인간적 제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의미에서 단어들은 자연적 보편자들(universalia naturalia)이다. (641)
보편자들을 마치 기호들로 또는 기호작용들로서 지칭하면서, 기욤은 아벨라르가 다른 곳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보편자들의 자연의 문제를 인식 속에서 그것들의 사용[용법]의 문제로 옮겨 놓았다. 이것들의 존재를 완전하게 만드는 이런 용법은 명제들 속에서, 보편자들이 지칭하는 사물들 자체를, 대체하는 것이다. 공상의 동물인 키메라처럼 허구이기는커녕, 사물들의 외연 속에 포함된 특이한 사물들의 어떤 하나를 무차별적으로 미래에 재현할 것은 이미지들이다. 또한 마치 기호가 기호화된 사물을 대체할 수 있는 것처럼 미래에 사물들을 대체할 수 있는 있은 것도 이미지들이다. 보편자는 오직 여러 사물들에 대해 말하게 되는 술어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보편자는 공리 덕분에 사물이 아니다. (641)
따라서 원초적 인식은 오캄에게서 특이한 사물들의 직관, 즉 “이해하는 작동”이다. 이해하는 작동은 스토아학파의 이해방식으로 항상 현존 판단을 포함한다. 이런 직관은 외적이거나 그리고 외적 직관은 감각적 사물에 도달하는 것이고, 또는 내적이거나 그러면 이 때에 “우리 예지가 특별하게 그리고 직관적으로 감관으로 전혀 떨어지지 않는 몇몇 가지적인 것을 인식하는데, 마치 인간이 자신 속에 있음을 실험할 수 있는, 예지작용들, 의지 작동, 환희, 슬픔, 류적 사물들과 같다.” 따라서 감각할 수 있는 것과 가지적인 것의 대립관계는 유명론자들에게서 끈질기게 계속된다. 그러나 그 대립관계는 개념과 추상의 대립도, 감관의 자료들과 그것의 기원 또는 원본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재성의 대립관계도 전혀 아니다. 그 대립관계는 두 경험들, 외적 경험과 내적 경험의 대립관계이다. 따라서 대립관계는 자료들이 연관되었을 법한 형이상학적 실재성에 의해 경험의 자료들을 채우기 위하여 어떠한 동기도 부여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영혼이 파손될 수 없고 비물질적인 형상인지를, 그 이렇게 이해된 영혼이 신체의 형상인지를, 이치에 의해서도 그리고 경험에 의해도 전적으로 모른다. 반대로, 감성과 이법의 대립관계가 토마스 아퀴나스와는 반대로 오캄에게 감각적 영혼을 예지와 분리하게 하고, –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했던 대로 - 이 양자에게 셋째 형상을, 즉 물체적 형상을 첨가하는 데로 옮겨가게 할 것이다. 신과 그의 속성들은 더 이상 인식되지 않는다. 마치 신이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것과 같기에, 우리는 그것의 관념들을 조성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성 안셀무스가 그렇게 원했던 대로 우리가 신의 현존에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 경험의 사물들에게 빌려온 특징들로 이루어진 이런 관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효과[결과]들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도 더욱 아니다. 이런 증명의 원리, 즉 “움직였던 모든 것은 다른 사물에 의해 움직였다.”는 원리 그자체로 명증하지도 증명되지도 않았다(우리는 이 원리가 오캄주의자들의 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공격들을 감당했는지를 곧 보게 될 것이다). 다른 원리, 즉 원인의 계열 속에, 제1원인에 거슬러 올라가면서 멈추어야 한다는 원리는, 개연적이지만 그러나 엄밀하게 증명될 수 없다. 하물며 신의 통일성, 신의 무한성, 위격들의 삼신성은 신앙에 대한 순수 항목들이다. (642)
이렇게 생각된 신앙은 스코트주의의 결론들보다 더 급진적인 결론들로 이끌었다. 10계명의 모든 명령들은 신의 의지의 순수 작동들이다. 우리는 의지 이외에 다른 이유[이법]들을 가지지 말고,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 “신은 어떠한 작동(l’acte)에도 강요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행한 것은 정당하다.” (56TME)
5절, 14세기의 파리의 유명론자들: 소요학파의 비판
Les nominalistes parisiens du XIVe siècle: La critique du péripatétisme 643-644.
오캄의 이론들은 1339년과 1340년에 파리 대학의 인문학부에서 금지되었다. 한 세기가 지난 이후 1473년에 루이 11세(Louis XI, 1423-1483, 왕위, 1461-1483)의 칙령은 오캄주의를 새로이 금지했다. 그리고 스승들은 실재론을 가르칠 경우에 설교를 통해서 참여해야만 했다. 이런 두 날짜들 시기의 사이에, 옥스퍼드의 과학은 침체되었고, 반면에 파리의 대학에서 유명론의 운동은 생산되었고, 과학사와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운동을 뒤앙(Pierre Duhem, 1861-1916)이 그것의 정당한 가치를 연구했던 첫 연구자였다. 교황 클레멘스 6세 (Clément VI, 재위 1342-1352)는 1346년에 인문학부 스승들이 “소피스트 같은 학설들을” 향하는 연구에 불안 없이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교황은 다음해에 오캄의 제자인 시토파의 쟝 드 미르꾸르(1300-1349)를 단죄했는데, 그가 신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또한 이웃의 증오가 비난받을 만한 것은 그 증오가 신에 의해 방어되기 때문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643)
1346년에 클레멘스 6세는 다른 박사의 주제들도 단죄했다. 다른 박사란 문학부의 교수인 니꼴라스 오트레꾸르(Nicolas d'Autrécourt, 1300경-1350)이며, 그는 다음해에 군중이 모인 대학 앞에서 공식적으로 주제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모든 변화가 지엽적 운동으로 환원되는 입자 자연학, 유일한 효과인이 신이고 또 사람들이 자연적 원인성 전체를 부인하는 세계, 그러한 자연학과 세계는 니콜라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형이상학을 대체하기 위하여 제안했던 우주의 단순한 이미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형이상학은 그의 견해로는 단 하나의 증명작업도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윤리학과 그의 정치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포기해야만 했으리라. (643)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러한 부정을, 자연학과 형이상학이 이용한 두 개의 큰 용어들을 공격하면서 오트레꾸르는 증명한다. 말하자면 원인성의 용어와 실체의 용어이다. 사람들이 이런 비판들을 흄(Hume, 1711-1776)의 비판들과 비교하고, 또한 사람들은 이 비판들을 섹스투스 엠피리쿠스(2세기-3세기)의 원인성에 관한 방식들에 특히 가깝다고 하며, 게다가 비판들의 “생생한 묘사법”들이 메르베케(Guillaume de Moerbeke, 1215-1286)의 번역 이래로 알려졌었는데, 이런 비판들의 방법은 본질적으로 모순율을 진리의 기준으로서 적용하는 데 있으며, 그처럼 모순율은 형이상학 속에 발언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원리는 다음을 쉽게 제시할 것이다. “하나의 사물이 현존처럼 인식된다는 사실로부터, 그 원리는 다른 사물이 현존한다고 명증하게(제일 원리로 또는 제일 원리의 확실성으로 환원할 수 있는 명증으로) 추론할 수 없을 것이다.” 불꽃이 지푸라기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사람들은 불꽃이 타오를 것이라고 명증하게 결론지울 수 없다. 나의 손이 불을 가까이 하면서 뜨거워졌다는 사실로부터는, 손이 동일한 조건들 속에서 더워진다는 것을 개연성으로만 결론 낼 수 있다. 그러한 비판은 소요학파의 자연학의 붕괴였다. 그 자연학은 원인성의 연결을 마치 동일성의 연결과 동족인 것처럼 간주했고(모든 원인성은 닮은 것에 의한 닮은 것의 생산을 원리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자연학은 이렇게 생성의 통일성, 즉 세계의 통일성을, 그 동일성에 의해 유일신앙을 보장했다. 반면에 오트레꾸르에게서 생성은 연결 없는 찰나들의 계속이 된다. (644)
동일한 비판이 실체라는 용어에서도 실행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마치 감관에 의해 주어진 겉보기들의 주체로서 제시하였다. 그 실체는 직관적으로 인식되지 않고(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은 인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토론적인 추론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겉보기들은 사물이고 실체는 다른 사물이기 때문이며, 또한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결론짓는 것이 허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는 나의 감관들의 대상들만이, 그리고 나의 영혼의 작동들만이 명증하게 확신한다.” 논리적 놀이에 의해, 시제르 드 브라방이 증명작업으로부터 제공한다고 했던 불가능성들 가운데, 다음의 명제가 발견되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은 시뮬라크(모방체)와 공상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현존을 확신한다고 알지라도”,그리고 시제르는 아래 논증을 지지했다. 우리게 겉보기들을 주는 것은 감관들이 아니라, 오히려 겉보기들이 진실인지를 오직 판단하는 다른 어떤 역량이다. 오트레꾸르는 모순 원리가 겉보기들에게 실재성으로 이행하는 데 쓰일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논증을 완전하게 했다. 그리고 오트레꾸르는, 사람들이 의지의 작동으로부터 의지의 현존으로 결론 낼 권리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영혼 역량들의 용어에게도 마찬가지로 공격했다. (644)
6절, 파리의 유명론자들 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 Les nominalistes parisiens et la dynamique d’Aristote 644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조각났다. 이제 그의 체계의 토대 자체를 이루는 것을, 즉 그의 운동론을 공격하는 것만이 남았다. 이런 동역학의 원리는, 우리가 그것을 상기해보자면, 이러하였다: “움직였던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였다.” 이 원리를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최초의 찰나에서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찰나들 각각에서, 운동은 운동체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하는 중에 있는, 작동 중을 포함하는, 운동자(moteur)에 의해서 생산된다. 이로부터 우리가 앞서서 제시했었던 더 많은 단일자들에 대한 두 가지 이론들이 나온다. 투척물(포탄)들의 운동이론과 천체들의 운동이론이다. 전자는 끊임없이 새롭게 미는 힘 덕분에만 연속될 수 있다. 후자는 영원히 현존하는 운동하는 지성들 덕분에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천체들의 운동하는 지성들의 이론은 아랍인들에 의해 그리고 13세기 철학자들에 의해 우주의 신학적 개념작업들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개념작업에 이론은 필수불가결한 지지점을 제공했다. 드니 아레오파지트(위-드니)의 천사의 계급질서는, 사람들이 그 계급만큼 거울 반사하는 자연 위에서 따로 떨어진 지성들에서 실현되었다. 이런 운동론의 원리는 또한 토마스주의자에게 지지하는데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그 원리는 대부분 신 현존의 첫 증거이기 때문이다. (645).
따라서 사람들은 이 원리에 어떤 중요한 관심들이 결합되어 있는지를 안다. 그런데 파리의 유명론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몇몇 스코틀랜드학자들에 의해서) 공격받은 자는 바로 아퀴나스이다. 이리하여 이 유명론자들은, 운동하는 지성들의 신화를 천구의 역학에 의해 대체하면서, 근대 물리학의 발전에 분명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 천구 역학은 지상의 역학의 원리들과 동일한 원리들을 갖는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옛 운동론이 그래도 사물들의 자연학의 이론과 우주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확립했다고 하는 연속성의 연결을 단절한다. (645)
먼저 우선 뷔리당(Buridan, 1300경–1358경)이다. 그는 1300년경에 프랑스 북서부 릴부근 베튄에서 태어났다. 1348년경에 파리 대학의 학장이었으며, 1358년 이후에 세상을 떴다. 비잔틴의 주석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포노스(Φιλόπονος, 490경-568)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그는 충력이란 용어를 다루면서 정확히 하고자 했다. 그는 이 용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원리에 대한 대립자 자체로서 이해했다. 이런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고난이었던 투척물들의 운동에서 빌려왔다. 만일 사람들이 돌을 공중에 던지면, 운동자[힘]는 운동체[돌]에게 어떤 권능[잠재력]을 소통한다. 이 잠재력은 동일한 방향으로 운동체를 그자체로부터 스스로 연속하여 움직일 수 있게 한다. 이런 충력(cet élan, impetus)은 돌이 움직였던 속도가 큰 만큼이나 그 만큼 더 권능이 있다. 그리고 그 운동은, 만일 운동이 공기의 저항과 무게에 의해 약화되지 않는다면, 무한정하게 지속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약화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상황들을 가정한다면, 그 운동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것이,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다면, 천구들의 경우이다. 신은, 사물들의 초기에서부터, 획일적이고 규제적인 운동의, 즉 끝없이 연속되는 운동의, 천구들을 살아 활동하게 했다. 운동하는 지성들을 무용하게 하는 주제가, 또한 심지어 신의 모든 특별한 협력을 무용하게 하는 주제가 있다. 그 주제는 천구들의 운동들을 투척물들의 운동에 동화시키는 것이고, 그리고 관성의 원리에 앞서 그려지면서, 자연적 장소들의 이론이 가치를 잃는 경향이며, 우리가 곧 보게 될 것이지만, 이 이론과 더불어 세계의 유한성과 지구중심주의도 가치를 잃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이 원리는 그것의 귀결들의 풍부함 전체를 한 번에 풀어놓지 못했다. 그리고 뷔리당 자신은 그 원리를 부정확하게 적용했는데, 그가 원 운동과 구(球)의 일률적 운동을, 최초의 충격 덕분에 직선운동보다 더 잘 또는 그만큼이나, 마치 계속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646)
알베르 삭스(Albert de Saxe, 1320경–1390)가 범했던 오류도 동일하다. 그는 1353년에 파리 대학 학장이었고, 1390년에 할베르슈타트 주교로서 죽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천체 역학의 문제를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했던 가설을 발표했다: “지구는 움직이고, 그리고 하늘은 쉬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때부터 지구의 부동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처럼 자연적 이치를 더 이상 가지지 않고, 새로운 가설이 “현상들을 구원할 것”인지를 아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리하여 천체들의 부동성에 대한 퓌타고라스적 옛 통찰이 다시 태어났다. 그 통찰이 중세에서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몇몇 해석가들은 그 통찰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서 발견했기 때문이고,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와 알베르투스는 그것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또 왜냐하면 스코투스학파의 메이론(Meyronnes, 1285-1327)은 1320년경에 그것에 호감을 표시했지만, 오히려 일단 그에게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는 고유한 역학 일반 용어들을 발견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리고 동일한 정신에 알베르 드 삭스는 자연적 장소들에 관한 모든 가설을 배제하고서, 무게에 관한 탐구들을 시도했다. 그는 속도, 시간, 공간, – 물체의 낙하에서 지나간 궤적 - 사이의 연관들에 대한 게다가 또한 부정확한 규정성을 부여했다. (646)
나콜라스 오레슴(Nicolas Oresme, 1320경-1382)은 1348년에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382년에 노르망디 지방 리지외의 주교로서 세상을 떴다. 그는 새로운 천체 역학을 선전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하늘과 세계의 책들에 관한 주석(1377)(그는 다른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통속적 언어로 썼다)에서, 그는 어떠한 경험과 어떠한 이법도 하늘의 운동을 증명할 수 없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지구가 일상적 운동으로 움직이지만, 하늘은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설득들을” 지적했다.” 그에게는 운동에 관한 정지의 형이상학적 우선성(불완전성의 표시)과 양립할 수 있을 것 같다. 데카르트(1596-1650)에 앞서서 좌표의 사용을 발명한 이는 니콜라스 오레슴이며, 갈릴레이(Galilei, 1564-1642)에 앞서서 가속 운동으로 낙하하는 물체의 궤적 공간에 대한 정확한 정식을 발견한 이도 그였다. 1396년 세상을 뜬 마르실 인겐(Marsile Inghem, 1340경–1396)과 1393년에 파리대학 학장을 지내고 1397년에 세상을 뜬 하인리히 하인부헤(1325경–1397), 이들에게 천문학적이고 자연학적인 작품들이 아직 출판되지 않았는데, 이런 생각들이 선전가들을 발견할 것이다. (6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기경 삐에르 아이이(Pierre d'Ailly, 1351-1420)는 1350년에 태어났으며, 1389년 파리 대학의 사무총장이었고, 1420년에 아비뇽의 교황 영지에서 세상을 떴다. 그는 오캄주의의 정신을 이어갔다. 절대적 권능을 근거로 해서, 그는 외적 세계의 현존이 증거 될 수 없다고 공언했다. 왜냐하면 “모든 외적 감각적 사물은 파괴되기 때문이고, 신은 우리 영혼 속에서 동일한 감각작용들 보존하기 때문이다.” 신의 현존은 개연적 이법들에 의해서만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세계의 “질서”는 – 규정적 권능(potentia determinata)에 연결되어 있어서 – 정의상으로 “자연의 습관”일 뿐이다. 오캄의 의지주의의 도덕을 옹호하는 삐에르 아이이는 법률가들의 적이다. 그 법률가들은 신적인 결정 작업들을 소위 말해서 자연 법(lex naturae)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647) (56TMF)
7절, 오캄주의, 스코투스주의, 토마스주의 Ockhamiste, scotisme, et thomisme 647-648.
14세기 대학들의 역사는 특히 고대인과 근대인들의 투쟁의 역사였다. 오캄주의는 특히 독일에서 퍼져나갔다. 거기서 오캄주의는 독창성은 없으나, 인격면에서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1420/1425-1495)에 충실한 대중화하는 자를 발견했다. 비엘은 1484년에 튀빙겐 대학에서 가르쳤고, 1495년에 세상을 떴다. 가브리엘주의자 즉 비엘의 제자들 중에 스타우피츠(Staupitz, 1465-1524)가 있다. 스타우피츠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수도원에 속해 있으면서 루터(1483-1546)를 유명론의 신학으로 인도했다. 그 신학의 신은 오성에 의해 생각된 명령과 선의 법칙에 의지를 종속시키는 신에게보다, 오히려 변덕스럽고 자의적인 여호와에 닮았다. (648) [15세기 이야기 인데,]
옛사람들은 대학들 속에서 재현되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특히 주석가들이었다: 파리와 툴루즈에서 쟝 캎레올루스(Jean Capreolus, 1380-1444); 피렌체에서 앙토냉(Antonin de Florence, 1389-1459); 특히 퀠른에서 알베르투스-토마스주의가 남아있었는데, 거기에서 드니 샤르트뢰(Denys le Chartreux, 1402-1471)가 나온다. 16세기 초에 까제땅(Cajétan, 1469-1534)은 1505년에서 1522에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주석을 달고, 프란체스코 실베스트리(Francesco Silvestri, 1474경–1528)는 1516년에 아퀴나스의 이방종교 대전에 주석을 단다. 14세기 전반기에 한 프란체스코파인 쟝 드 리빠(Jean de Ripa, 1325경-?)는 거대함(immence)과 무한(infini) 사이에 섬세한 구별을 한다. 그의 제자들 중의 하나인 루이 드 파도바(Louis de Padoue, ?-?)는 1362년에 파리에서, 신의 ‘원하다’ 속에서 변화와 우연에 관한 명제들로 단죄 당한다. 그는 명제를 그의 스승의 교육으로부터 끌어냈다. (648) (56TMF)
8절, 14세기의 독일 신비주의: 에크하르트 Le mysticisme allemand au XIVe siècle: Eckhart 648-654.
우리가 막 분석해 보았던 유명론 운동의 반대편에는 신비주의 운동이 있다. 이 운동은 특히 독일에서 동일한 시기에 전개되었다. 14세기 말경에 제르송(Jean Gerson, 1363-1429)은 신비 신학을 “복음에 따르면 넘쳐난 사물들에 대해 명석하고 맛깔스런 지성”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신학은 “인간적 탐구에 의해서라기보다, 고행을 통해서 획득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신이 탐구의 오성에 의해서라기보다 고행의 감정에 의해서 더 잘 알려지지 않는지”를 자문할 수 있다. 사람들은 삐에르 아이이(Pierre d'Ailly, 1351-1420)의 친구이고 프랑스 신비가인 제르송에게서 빅토리아 학파의 영향을 본다. 빅토리아 학파에게서 신비주의는 무엇보다 정신적 향상에 연결된 명상의 방법이다. 스콜라의 신학은 증거하고 증명한다. 그리고 그 신학은 잘 분류된 관념들의 체계에 도달한다. 신비적 신학은 보고 즐긴다(savourer). 그리고 그 신학은 신과 표현할 수 없는 통합에 이른다. (648)
독일 신비주의가 전개되었던 터전과 조건들, 그리고 그 신비주의가 꿈꾸었던 문학적 형식, 이런 모든 것은 신비주의를 대학들의 철학과 매우 깊이 구별하였다. 그것은 이 모든 것들과 더불어 합의하는 삶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모든 것들이란, 수도원 제도가 허용하는 정신적 성찰에로 훈련, 예지에 보다 더 감정에 호소하는 세속적 언어로 설교들, 결국 인민의 성인들에까지 퍼져있는, 정신들[영혼들]에 대한, 일반적 운동, 특히 우리가 12세기에서 많은 예들을 보았던 천년지복 신앙을 드러내는 운동 등이다. 그런데 14세기에 천년지복의 신앙은 시대가 격변하고 반크리스트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예언가들과 여성 예언가들의 예외적인 개화기에 이르렀다. 그 신비주의는, 그것이 학설적이라 할지라도, 신비주의를 인민에게 연결시켜주는 많은 특징들을 간직하고 있다. 14세기 독일 신비가들은 세속적 언어를 선호하여 사용했다. 그들은 특히 긍정문에 의해, 통찰에 의해 제시했다. 그들의 목표는, 이들 중에 가장 사변적인 에크하르트(Jean Eckhart, 1260-1328)가 말하듯이, 항상 영혼을 인도하는 것인데, 영혼이 신체와 스스로 분리되어, 신 속에서 스스로 형성하고, 자기의 고상함과 신적 본성[자연]의 순수함을 확신하는 것이다. (649)
그것은 플로티노스가 말한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플로티노스와 함께 에크하르트의 사유는 많은 인접성이 있다. 비록 그의 사유가 직접적으로 플로티노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도미니크파인 쟝 에크하르트는 1260년에 태어나서, 1300년에 파리 대학에 있었다. 그러나 1304년에서 1327년 생의 마감까지, 1311년 파리 체류를 제외하고, 그는 스트라스부르와 퀠른에서 머물렀다. 퀠른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도미니크파의 수도원들을 방문하고 감독하면서 그는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두 해 동안에 그는 프란체스코파들의 공격을 받아 암울해졌다. 프란체스코파들은 그의 사후 2년지나 1329년에 아비뇽에서 그의 28개 주제들을 단죄하였다. (649)
따라서 어떻게 이 신학에서 이 대가가 – 자기방식으로 행동하는 인간이었는데 - 형이상학의 사변들에 이르렀는지를, 이유가 없지 않겠지만 사람들이 어디에서 독일 철학의 기원을 보는지를, 만일 사람들이 어떻게 그가 크리스트교 생활을 생각했는지를 처음에 지적하지 않았다면,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이로부터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복음의 교훈들과 수도원의 규율들에 대한 정신적인 모든 해석체계에 의해서이다: 즉 청빈, 순결, 복종, 자비(charité, 사랑), 기도 등 이 모든 규칙들은 인간을 그 자신으로부터 또한 세계로부터 숙명적으로 되돌려 놓고, 그리고 인간을 신에게로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인데, 에크하르트는 이것들을 순수하게 정신적 한 방향으로 해석했다: 청빈,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또 자기로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인간의 상태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한 모든 피조물로부터 완전히 박탈당한, 진실한 청빈은 심지어 신의 의지를 완수할 의지가 아니다. 청빈은 완전한 수동성의 상태 안에 있으며, 거기에서, 청빈은 신이 자기 속에서 자기 작품을 완수하게 내버려두고, 또한 지복의 환희에 참여하는 만큼이나 지옥의 고통들을 겪게 되어 있다. 또한 성령은 말씀과 분리될 수 없을 만큼이나 지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 사랑은 그 자신 속에서만 자기 목표를 갖는 전체적 통합이다. 신비주의의 영속적 특성에 부합하여, 플라톤이 묘사했던 항상 결핍하는 에로스(l’erôs)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 자체에 동일한 충만이 중요하다. 따라서 사랑하는 영혼의 행동은 결함적인 것이 더 이상 아니며, 그 행동은 어떤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다. 사랑과 그들이 영감을 준 작품들은, 영혼의 습득물이기는커녕, 오히려 (에크하르트가 플로티노스 이후에 말했던 것처럼) 영혼의 존재 자체들이다. 그것들은 깊은 통일성이며, 그 통일성에서 모든 덕성들이 분해할 수 없을 정도로 통일되어 녹아있고, 이때부터 노력 없이도, 심지어 의지 없이도, 의식 없이도 완성된다. 그리고 이 모든 덕성들은 어떠한 정도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선량한 작업들은, 자선이든 금식이든, 만일 사람들이 그 작업들이 출발한 의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가치 없는 것 같다. 모든 외적인 성공을 생각하지 않고, 따라서 공간과 시간에 비해 모든 상황보다 상위이며, 결코 거리낌 없는, 의지는 진실한 작업, 유일하게 신에 가까이 가는 내적인 작업이다. 진실한 기도는 결정된 목표에 제한된, 찰나적인, 외적인 기도가 더 이상 아니다. 기도는 신의 의지에게 영구적인 양도이다. (650)
사람들은 여기서 전력을 다하여 내재적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나타남을 본다. 내적 삶은 플로티노스 이래로 분명하고 완전한 정식으로 발견된 적이 없었다. 사랑 속에서 항상 있는 정신적 삶의 목표, 유일한 덕목으로 이해된 모든 덕목들, 영혼을 자기 자신의 토대에 위치시키면서 도달한 완전한 자유, 다시 말하면 생명이 제한되고 규정된 활동성으로 있는 상태들 그 속에서 있는 자유, 이런 것들이 플로티노스 전통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이 전통이 다른 전통과는 대립된다고 이미 여러 번 보았다. 그 다른 전통에 따르면, 덕목은 자기로 후퇴와 자기로 귀환인 것이라기보다, 외적이고 사회적인 환경과 더불어 반복되는 여러 접촉들에 의존하는 의지적 획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 학설도 플로티노스주의도 외적 활동성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외적 활동성의 포기를 사람들은 17세기에 정적주의라고 부를 것이다. 영혼의 열등한 활동성들은, 행동, 의지, 이법, 오성, 외적 감각들에 도달하는 활동성들은, 영혼 자체로 후퇴에 의해서 제거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 활동성은 배열되고 정돈된다. 스토아주의를 매우 심하게 뒤꼬이게 했던 문제가 여기서 해결된다. 사람들은 올바른 권리를 소유할 때, 올바른 행동들은 그 자체적으로 올바른 원리로부터 결과가 나온다. (651)
그것이 정신적 삶의 개념작업이다. 이 개념작업의 리듬이 에크하르트의 신학과 형이상학을 지배했다. 우리는 이 리듬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존재들의 기원적 통일성, 분할, 통일성으로 귀환, 그것은 스토아학파 이래로 우주의 유일한 통찰이 아니었다. 그것의 체계는 다양한 고민들에 의해 다소 왜곡되어, 그 체계는 일반적 구상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하나에서 다양(le divers)으로 이행을, 마치 유출 또는 창조처럼, 생각한다. 일체 사물들의 개념작업은 여전히 이런 생각의 지배하에 남아 있으며, 이런 생각이란, 사물들의 소비는 신과의 통일성에로 귀환이며, 진실한 신격화이다. (651)
에크하르트의 고유한 관점, 그것은 통일성의 귀환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의미조차도 없다는 것인데, 만일 사람들이 신 바깥에 놓여있는 유한하고 개별적인 피조물들을, 신적 실재성과 동일한 의미에서 마치 진실한 실재성을 부여받은 피조물들처럼, 고려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형이상학은 이런 부정 작용 속에 있다: “개체성은 순수 우발사고, 즉 무(un néant)이다. 이 무를 제거한다면,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이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다음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신과의 통일화작업은 숙명(la destinée)의 소비인데, 그 통일화작업은 우리에게 사물들의 실재성을 동시에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사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숙명에 대한 그의 학설은 동시에 존재의 학설이다. (651)
신의 통일성은 소멸되지 않으며, 이때부터 사람들은 사물들의 다양성 전체를 마치 보다 깊은 통일성으로부터 표출 또는 계시처럼 생각한다. 만일 하나의 말투가 내적 사유를 표현한다면, 이 말투는, 그 말투가 표현하는 사유와 하나를 이룰 뿐이다. 그리고 다양함이, 다양함으로서 또 독립적인 존재로서 무매개적으로 부정되기 위하여, 그리고 다양함을 나오게 했던 신에게 되돌아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통일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로 이제부터 나는 사물들을 마치 신의 계시 작용들처럼 생각하고, 나는 사물들이 신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651)
에크하르트가 신 속에 다양한 것이 있다는 것에게, 즉 삼신성에게 이 방법을 적용한다. 삼신성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파의 많은 견해들은 이런 적용에 적합했다. 성자는 말씀, 즉 말투 또는 지성이 아닌가? 이 말씀을 통해서 성부가 표현되고, 성령은 성자와 성부를 통일하는 사랑의 연결이 아닌가? 그러나 메르베케(1215-1286)에 의해 번역된 프로클로스(412-485)의 신학 원론이 그에게 모델로서 제공된 삼원성의 예에서, 그는 삼신성의 그 위에 마치 불편부당하지 않는 통일성으로서, 즉 “자연화 되지 않는(수동화 되지 않은) 자연”으로서 신성(die Gottheit)을 그자체로서 남아있는 신성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그 아래에 삼신격이 ‘자연화된 자연’을 형성한다. 첫째, 성부는 플로클로스의 참여된 통일성에 상응한다. 그는 절대적 통일성이며, 거기에서 인식된 것과 인식하는 것이 동일시된다. [둘째] 성자는 성부의 사유를 표현하며, 성령은 이 둘을 통일한다. (652)
세계의 창조, 즉 신의 바깥에서 창조된 사물들의 과정은 성부에 의한 성자의 생성과 자연적으로(본성상) 엄밀하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창조된 세계는 신의 표현과 다른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각 사물은 신 속에서 말씀 속에 포함된 그것의 영원한 존재를 갖는다. 창조는 비시간적 작동이며, 이 작동에 의해 신은 자기 성자 속에서 표현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에크하르트가 내재하는 원인성과는 다른 신적인 원인성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 속에 각 피조물의 개별적 현존을, 마치 신의 긍정적 작동의 결과처럼, 전혀 생각할 수 없다. 신이 어떤 찰나에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신 바깥에서 사물들의 유한한 현존은, 사물들을 따로 놓는 이런 다양성은, 마치 무와 결핍으로서만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에크하르트가 어떤 힘을 가지고 플로티노스-아우구스티누스 이론에 결합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이론은 악을 이런 다양성에 연결된 단순한 결핍과 결함으로 만든 이론이다. (652)
그런데 세계가 자기의 기원에 되돌아오는 것은 피조물들의 기원적 통일성의 인식 자체에 의해서이다. 영혼은 이런 인식과는 다른 기능들을 갖는다. 사람들은 에크하르트가 어떤 호의를 가지고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들을 인정해야 했는지를 안다. 그 주장들이란, “영혼은 어떤 방식에서는 모든 사물들이다”라고 하고 또 작동 중인 지성 안에서, 대상은 주체와 동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영혼과 지성과 같은 각각의 위격(hypostase)은 자기 방식으로 모든 사물을 이해한다는 이런 신플라톤주의 주제를 받아들여야만 했는지를 안다. 거기서 그의 영혼 이론의 진실한 토대가 있다. 그 이론은, 사람들이 가끔 그렇게 했던 대로 마치 그의 학설의 출발점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플로티노스에게서처럼 마치 결말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의 바닥은 그가 또한 보존(συντήρησις)이라 불렀던 것인데, 그것은 마치 장소와 같다. 그 장소에서 모든 피조물은 자기의 통일성을 재발견한다. 따라서 가장 높은 의미에서 인식은(그것은 이런 통일성 또는 신앙에 대해 추리를 초월한 인식이다), 사물들의 재현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사물들은 인식에 속할 것이고 인식의 외부에 남았을 것이다. 인식은, 사물들의 신에로 귀환 속에서, 사물들 자체의 변환이다.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인식은 마치 보편적 대재앙의 정신적 국면과 같다. 그 보편적 격돌에서 몇몇 스토아학자들은 이미 물질적 대화재라기보다, 오히려 정화작업을 보았다. (653)
에크하르트의 크리스트교주의에서, 구현된 말씀은 속죄로서 이라기보다 통일성의 평등성으로서 작동한다. 통일성의 평등성 속에서 근원과 흐름 사이에 통합이 영원히 실현된다. 그 흐름은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고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크리스트교의 학설의 역사적이고 법률적인 국면인 카톨릭의 준성사(sacramental)의 국면은 둘째 평면으로 즉 육신화(l’incarnation)로 이행한다. 심지어 아담의 원죄 없이 일어났을 것인 이 육신화는 하나의 결함 때문에 중요한 존재 이유로서 신에게 만족을 전혀 주지 못할 것이다. 그 하나의 결함이란 – 마치 피조물의 밖-존속(l’ex-sistence)이 그대로인 한에서처럼 - 진실로 더 작은 존재이고 그리고 거의 “무”일 뿐인 것이다. 크리스트[메시아]는 오히려 가장 과감한 문헌들에 따르면 “이미지(das Bild)”이며, 표현할 수 없는 신성은 이미지를 전반적으로 박탈당한 영혼 전체로 생겨나게 한다. (653)
에크하르트의 사유로부터, 14세기에 독일 신비가들은 형이상학적 이론보다 생명의 내재적 규칙에 집중했다. 타울러(Jean Tauler, 1300–1361)와 주조(Heinrich von Suso, 1300–1365)는 특히 설교자들이었다. 플라망드 출신인 루스브뢰크(Jan Van Ruysbroeck, 1293-1381)는, 브뤽셀 부근에 있는 그뢴델 수도원의 수도자인데, 경전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는 그의 취향에 때문에, 플로티노스의 사변적 선물을 생각하기보다 필론의 경건함을 더 많이 생각하였다. 루스부뢰크가 말하기를 “정신적 결혼들의 치장에서 영혼은 신을 신에 의해서 이해한다. 그러나 신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그것을 연구하고자 원했던 자들은, 그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미치광이들이 될 것이다. 창조된 모든 빛은 자칫 놓칠 뻔 했다. 그런데 신의 무엇임(quiddité)은 모든 피조물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신앙의 조항들을 믿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 조항들을 꿰뚫기를 시도하지 않은 것이다…, 자 이것이 절제이다.” (653)
이 흥미있는 원문은 우리에게 14세기의 마지막에 정신들의 깊은 분열을 증거하게 한다. 그 중에서 우주보다 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우주에서 세계는 신에게 인도하고, 또한 그 우주에서 이치는 신앙에 의해 완성된다. 한편으로 유명론이 있고, 거기서 경험에 의해 지도받은 이법은 사물들의 자연적 법칙들을 알기 시작한다. 그러나 거기서 신앙은 다른 모든 법칙들을 창조할 수 있었던, 그리고 그 법칙들을 변형하는데 자유로운, 신의 절대적 권능에 귀착한다. 다른 한편 신비주의가 이다. 신비주의는 자연을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신에게 가며, 이어서 신으로부터 완전히 침투된, 어느 정도는 신 속에 흡수된, 자연만을 재발견한다. 아마도 더욱 장중한 것, 그것은 이런 분열이 지적인 두 터전의 분리에 응답한다. 한편으로 대학들이고, 다른 한편으로 수도원들이다. 전자에서는 진솔한 지적인 관료제가 이 찰나에 창조되었고, 그리고 과학의 방법들이 정교화 되었다. 후자에서 정신적 삶은 대중들의 삶에 더 많이 연결되었고, 또한 그런 삶은 깊은 신비적 사변들 이외에도, 지적이라기보다 사회적이면서 매우 널리 퍼진 대중운동들을 허용한다. (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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