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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4년 7월 21일
博士친구가
美學에 대한 나의 식견이 全無한데
내게 中國語를 해석하여보라고 권유하였다.
나의 중국어 실력은 아직도
동사가 어떤 것인지
또한 동사가 어디까지 걸려 있는지 모른다.
나름 애를 써 보았지만 어휘에서도
많이 부족하다.
안하는 것보단 하는 것이
내게 보탬이 되리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려한다.
1p
引論 “眞” 的美學內涵
(진의 미학 성질을 이끌어 논함)
인식론으로부터 말하면 “眞”은 대부분 주관과 객관을 가리키는데 사상과 실재는 서로 일치한다.
서방과 서로 비교하면 중국은 과학적 사상이 진리를 구하는 전통이 모자라 자연히 과학이 발달치 못했지만
중국은 春秋戰國에서부터 유가.도가.묵가.명가.법제가 등이 끊임없이 위.진의 玄學에 이르기까지 역시 모두
“名實之辨”을 중시하였다. 이것은 인식론상으로부터 眞을 구하는 폐쇄적 전통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간단화의 사용은 서방의 명확한 眞의 인식론의 특성을 가지고 중국고전 철학과 미학 가운데의 眞을
억지로 비교한다면 현실적으로 적중하기 매우 어렵다.
태주학파의 “진”의 미학범위에 대해 연구하기 전에 반드시 서방과 중국고대 “진”의 범위에 미학의 특성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第一節
西方哲學中 “眞”的內涵與科學之 “眞”的美學旨趣
(서방철학 중 “진”의 특성과 과학에서의 “진”의 미학의미)
일반적으로 말해서 서방철학 정신은 참(眞)을 구하는 것으로써 큰 근본으로 삼았고, 중국철학은 선을 구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다.
“진”(拉丁文;αληΘεξ)영문 truth, 독일문 wahr-heit)은 서방철학의 기초성분이다.
이천여년 동안 “진”에 관한 토론은 줄곧 “현학(유명한 학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통토론 이 한 문제의 최초
철학자의 한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이 부문의 과학을 세웠고 그의 논리학 연구 중에서 “진”을 연구토론의 기본 문제로 삼았다. 그는 <<해석편>> 가운데에서 말하길 “혹은 진실, 혹은 거짓의 문장이 비로소 명제가 된다. 진실과 거짓은 결코 어떠한 문장이나 소유물로 하지 않는다. 예를들면, 기도는 바로 진실도 아니고 역시 거짓도 아닌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명백하게 “진실” 혹은 “진실이다”에서 이러한 의미상의 진의 이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철학서적인 <<형이상학>> 가운데에서 말하길, 그러한 상반을 허락하는 것에 대해서 동일한 생각, 동일한 원리는 진도 되고 역시 거짓도 되며 그는 어떤 때는 거짓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충분히 달라질 수 없는 정도에 이르면 곧 어떤 때는 진이 될 수 없고 어떤 때는 거짓이 되기도 하며 또한 영원히 변함없는 혹은 진이거나 혹은 거짓이다.
여기의 “진” 역시 “거짓”과 대립되는 응답인데 여전히 “참된 것” 이 의의 상에서 “참” 개념을 사용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의 사상과 논술에 관한 “참”의 이론사고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참”에 관하여 이러한 성질상의 토론에서 弗雷格(후레거)와 塔爾斯基 등의 논리학자의 계승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현대 철학 가운데에서 특별히 분석철학과 언어철학 가운데에서 “참(진실)”은 하나의 매우 중요한 개념인 것인데 그 핵심은 연구토론인데 자연히 언어 가운데 “이것은 진실이다” 중의 “진실”이 무슨 뜻인가 이다.
塔爾斯基는 자신의 논문인 <<眞理的語義學槪念和語義學的基礎 진리의 의미학개념과 의미학의 기초>> 가운데에서 말하길 이 문의 토론은 “장차 진리 개념으로써 중심이 된다. 대부분의 문제는 이 개념하에서 총괄하는 것인데 하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만족하게 하는 정의고 곧 하나는 실질상 적절함과 형식상 바른 정의이다.”
그는 최후에 결론을 얻었는데 어구가 진실이라면 어구는 모든 대상에 대해 만족하게 하여 주는 것이고 어구가 거짓이라면 상황은 반대가 될 것이다.
명백히 그는 여전히 “진실” 혹은 “진실이다”인데 이것이 포함한 뜻 위에서 “참”의 이러한 문제를 연구 토론했다.
곧 말하길, 塔爾斯基가 연구 토론한 것은 바로 “진실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렇게 하나의 매우 간단하고도 중요한 문제이기에 또한 당대 언어철학의 기초성의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다.
위에서 말한 “眞的 진실” 혹은 “是眞的 진실이다”에 관여하는 서방 철학에서는 “眞” 개념은 첫 번째 개념으로 여기며 역시 곧 논리학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의 句, 하나의 명제가 “眞”이 되는지 안 되는지 어떤 이는 정확한지 아닌지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토론을 좋아하고 언어의 치밀함과 정확한 풍조를 추구하는 것과 일치한다.
서방철학에서 “眞”이란 이 개념의 두 번째의 개념은 康德(칸트)이 우리에게 제공한 것이다. 칸트는 많은 저서 중에서 “眞”과 관계있는 화제를 연구 토론하였다.
그의 저서인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길 “여기에서 진의 명사 설명과 또 그것으로 전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각종 인식의 眞에 대하여 말하고 진의 보편적 의지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이다.
여기서 칸트는 인식론의 관점으로부터 “진”의 개념을 탐구 토론하였다. 그는 진은 바로 “인식과 그 대상이 서로 일치“한다. 생각하고 역시 사람의 인식은 사물의 실제와 부합이 되는지 아닌지의 문제 곧 ”진이 논리와 일치하는지”이다. 이것으로부터 칸트는 진의 기준에 대하여 깊이 파고 들어가 폭넓은 탐구에 진입하였다.
독일의 고전철학으로써 중요한 기원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삼는다. 그 중국화의 과정에서 인식론의 참된 이름을 진리로 삼았다. 그 함축된 뜻은 “인식 주체가 의식 밖의 존재에 대해 또한 인식으로써 변화되지 않는 객관적 실재의 규율성의 정확한 반영이다”. 여기에서 진은 진리 역시 인식론의 범주이며 구체적 표현의 사람의 인식과 객관 규율 사이의 “관계”이다.
예를들면 사람들이 한 진정한 친구를 아울러 그를 이러한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그의 행위 방식이 우정에 맞는지의 이러한 개념을 논의 한다. 사람들 역시 서로 같은 방식으로 한 건의 참된 예술 관계로부터 진을 말한 것이다.
그것을 종합하면 서방철학 중에서 진의 범위는 세 개의 중요한 속뜻이 있는데 하나는 논리학과 언어철학 상 명제의 정확성이다. 또 하나는 인식론상의 주체인식과 객관적 대상 사이의 일치성이고 다시 하나는 주체론 상 사물현상과 본질 사이의 일치성이다. 이후 둘은 근본 상으로부터 말하면 모두 일종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진”의 뒤에서 모두 두 개의 서로 대응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서방철학 연구 학문의 갈래는 비교적 이른데 중국 문학 사학 철학 학문의 경계가 모호함과는 틀리다.
서방 사상가는 학문하는 가운데에서 학문분야의 한계를 매우 중요시 하는데 예를 들면 칸트는 三大批判書를 나누어 인식론, 곧 창의 문제, 도덕론 곧 선의 문제 심미론 즉 미의 문제를 연구하였고 또한 “칸트 미학의 목표는 미적 특수한 분야를 묘사해 내려 생각했다. 그것을 진과 선과를 구별하도록 하기 시작했다. ” “眞”의 미학적 성질은 문학과 현실의 관계 방면에서 단단히 접해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으로부터 말하고 헤겔의 진미까지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서방 예술의 지극히 높은 목표는 가장 진실한 현실을 그려냄을 추구하는 것이다. 일종의 과학에 가까운 태도로써 미학 연구와 예술 창작을 다루었다.
예를 들면 칸트는 웅장하고 아름다움을 연구할 때에 壯美를 곧 수학적 壯美와 역학적 壯美의 두 종류로 나누었다.
서방 예술사조 중에서 현실주의, 자연주의는 이와같다.
문학 분야에서 예를 들면 희극에서 “삼일치의 법칙(시간, 장소, 줄거리)” ; 巴爾扎克 (발자크)는 당시 사회에 대해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여 귀족계급의 몰락, 쇠미와 자본가 계급의 상승발전을 써냈고 사회 각각의 영역을 풍부한 생동감으로 세밀히 묘사함과 구체적 역사 재료를 제공하였다.
左拉(에밀졸라)는 대단히 진실하게 19C 후반기 프랑스가 자본주의로부터 제국주의로 향하여 건너는 사회의 정경을 재현해냈다. 회화 방면에서 “수(數)”의 관점으로부터 미의 본질을 탐구함이 있는데 윤곽선(그림의 선)의 비례 방면에서 “황금분할”의 원칙이 발견되었다. 물상 관계 방면에서 엄격하게 투시도의 원리에 근거해서 과학적 배분을 진행하였다. 설사 현대 회화예술이라 하더라도 추상파는 물체의 외관 방면에서 “과학”적 비례를 타파하고 초현실적 변형을 진행하였지만 그들은 단지 과학적 식견을 윤곽선의 수학으로부터 빛의 물리학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서방 예술의 “眞”은 하나의 과학정신을 비추어 주는 “眞”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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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節 中國古代哲學中
“眞”的含意
一 中國古代 “眞”的 含意
중국 전통 철학에서 “眞”은 실제 본체론, 도덕론과 심미론의 범주에서 넓게 사용되는 것이다.
자원상(字源上)으로부터 말하면 “眞”은 본래 도가의 고유명사이다. <<老子>>는 맨먼저 “眞”을 사용하였는데 이 자는 그 철학의 성질을 함께 주었다. 도가는 보통 본체론적인 각도에서 “眞”을 말하는데 그로 하여금 심미적 의미를 갖추고 있다. 도가는 문예작품이 혹은 인간이 심미활동에서 용모로부터 정신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내고 현상으로부터 본질을 명백히 하고 한계가 있는 데에서부터 한계가 없는 표현을 하고 현실로부터 지극히 뛰어남을 이끌어 올리기를 요구한다. 漢, 魏의 시기에 시인들은 대부분 이 의미상에서 “眞”자를 사용했다. “今日良辰會, 歡樂難再陳. 令德唱高言, 識曲聽其眞 <<古詩十九首>> ; 오늘 좋은 생신 모임에 즐거움을 다시하기 어려워라. 덕을 노래하여 높이 말하게 하니 가락도 알고 그 진실도 듣는구나. <<고시십구수>>” “對酒不能言,凄愴懷酸辛. 願耕東皐陽, 誰與守其眞. 阮籍 <<詠懷詩>> ; 술을 대하니 말을 할 수 없고 비통하여 괴로움 품노라, 동쪽 언덕에서 밭 갈기 원하노니 누구와 더불어 그 진실을 지킬까. 완적 <<영회시>>”
산 기운은 석양으로 아름답고
나는 새는 서로 함께 돌아가누나.
이 가운데 진정한 뜻이 있으니
명백히 하고자 하나 이미 말을 잊었노라.
(도잠 <<음주>>)
여기에서의 “眞”은 모두 본질과 생명에서 사물의 내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허신의 <<설문해자>>에 근거하면 “진”의 본래의 뜻은 “신선이 하늘을 오르는 변형된 형태이다. 匕와 目으로 이루어져 있다.
八은 그래서 그를 실어서 태우는 것이다.”
고염무는 <<日知录>>에서 말하길 오경에는 “眞”자가 없고 老.庄의 책에서 처음 보인다. 말하길 “그 가운데 精이 있는데 그 精은 심히 진실하다.” <<장자 . 漁父篇>>에서 “공자께서 발끈하여 감히 어떤 것이 진임을 묻는가?”라 했는데 객이 말하길 “참이란 정성이 지극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大宗師篇>>에서 말하길 “그대는 이미 그대의 진실로 돌아갔는데 우리만 아직 사람이구나.” <<列子>>에 “정신이 형상을 떠나니 각기 그 진실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그것을 鬼라 하는데 鬼는 돌아간다. 이고 돌아감은 그 진실의 집이다.“고 하였다. <<漢書ㆍ楊王孫傳>>에 이르길 ”죽음이란 것은 일생을 마치는 변화이며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가는 것은 지극함을 얻어 자연과 동화되어 변화됨을 얻는 것이며 이 물은 각기 그 진실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설문>>에 “진은 신선의 변형된 형태로 하늘에 오르는 것이라.”
하였는데 서씨가 <<계전>>에서 “진은 신이다. 변화이다. 匕로 이루어졌다. 匕은 곧 化이다. 人을 돌이켜 亡이 되고 目으로부터 乙을 따른다. 八은 그가 타는 것이다. ” 삶으로써 기대게 되고 죽음으로써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사람” “참된 임금“ “참된 재상”이란 이름이 있는 것이다. 진시황이 “나는 참된 사람을 사모한다. ”라고 말했다. 스스로 참된 사람을 일러 朕이라 칭하지 않는다.
위나라 太武가 연호를 太平眞君이라 고치고 또한 唐 玄宗이 四子의 책으로써 그것을 일러 “眞經”이라 하라 하였는데 모두 여기에서 근본 한 것이다. 후세에 서로 전하였는데 곧 드디어 “거짓”과 반대가 되었다. 이사가 <<上秦王書 진왕께 올리는 글>>에 “독을 치며 질장군을 두드리고 풍경을 튕기고 넓적다리를 치고 또한 노래 소리 지르며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참된 진나라의 소리이다.”라고 하였다. 한신이 가짜 왕에게 청하길 高帝가 “대장부는 제후가 정해지면 곧 참된 왕을 위할 뿐인데 어째서 거짓으로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또 다시 東垣이 참됨은 바로잡음이다.라고 했다.
竇融이 광무제에게 올린글에 “어찌 참된 옛 군주를배반하고 간사하고 거짓된 사람을 섬길 수 있는가.”라고 했다. 또한 老.庄의 말은 참이란 역시 약간의 다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송 때에는 “玄”을 피하고 “眞”으로 그것을 대신하여 썼는데 고로 廟號(임금의 시호)를 眞宗이라 하였고 玄武七宿을 眞武라 고쳤으며 玄冥이라 고치고 玄枵를 眞枵라 고쳤다.
<<崇文总目>> 에 <<太玄經>>을 <<太眞>>이라 하였는데 곧 여전히 그 근본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염무는 이 단락에서 “眞”에 대한 본 뜻을 상세하게 말하였는데 아래에 몇 가지 뜻을 예를 든 것이 있는데 첫 번째는 진은 형이상의 순수한 본질이고 생명의 영혼이며 정신의 귀속이다.
두 번째 진은 변형. 변화의 초 탈적 세계이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새로운 열반이고 漢 나라와 같이 이전의 죽음보기를 돌아가는 것 같이(視死如歸) 생각하고 죽음을 사는 것과 같이 보는 것, 삶과 죽음을 서로 똑같이 보았다.
세 번째는 진은 일찍이 심오하게 여겨 假자로 통하였는데 피휘하였다. 네 번째는 진은 진대부터 처음 시작하여 眞假의 眞으로 변화 발전하였다. 최고 이른 시기에 출현한 이사의 <<上秦王書 진왕께 올리는글>>에서 假와 僞는 상대이고 고대의 “實”과는 서로 같다.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중국고대철학에서 “眞”은 주요하게 아래에 열거한 뜻이 있다. 하나는 本原. 本性. 自然 등을 가리킨다. <<庄子. 秋水>>에 “삼가히 지키고 또한 잃지 말아라. 이것은 그 진실로 돌아가는 것을 이른다.” “진이란 것은 내면이 꽉 차 있다. ” <<韓非子>>에 다시 회복하여 그 진실로 돌아간다.라고 했고 <<漢書. 楊王孫傳>>”에 “欲裸葬, 以反吾眞”. “땅에 장사지내고자하니 이로써 내 진실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둘은 이것은 사물에 내재하고 있는 규칙을 가리키는데 “道”와 같다. 더욱 도가가 탐구 연구하고 추구한 자연의 도와 같음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道家가 말한 바의 “悟眞” “修眞”과 같은 것이다.
顔師古가 “眞”이란 것은 자연의 道다. “라고 말했다. 셋은 득도한 眞人 仙人을 가리킨다. <<樂府詩集. 郊廟歌辭十一>>에 ”진주로 眞을 맞아들이니 경궁전이 번성하네.“라고 했다. 넷은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 假와 僞는 서로 상대임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老子>> 에 “그윽하고 어둡구나. 그 가운데 정신이 있으니 그 정신은 심히 진실하니 그 가운데 믿음이 있구나.”라고 했다. <<史記. 仲尼弟子列傳論>>에 “좋은 평판은 그 사실보다 지나칠 때가 있고 험담도 그 진실보다 지나칠 때가 있다.” 다섯은 불교에서는 관념이 “妄”과 상대이다. 여섯은 精誠(순수한 마음.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 誠心(참된 마음 . 정성스러운 마음. 마음을 성실하게 함) 誠意(본 마음. 진실한 마음 . 참된 마음. 친절한 마음)이다.
<<庄子. 漁父>>에 “眞이라는 것은 정성의 지극함이다.”고 했다. <<文子.精誠>>에 “참을 간직하고 정성을 다하면 천지가 감동하여 정신이 속세 밖을 넘는다.”라 했고 일곱은 곧 자신을 가리킨다. <<庄子. 山木>>에 “이익을 보면 그 진실을 잊는다.”고 하였다. <<淮南子. 本經訓>>에 “신명은 형태가 없는데에서 감추고 정신은 지극한 참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고유주가 “眞은 자신이다.”고 했다. 여덟은 화상(초상화)과 생김새를 가리킨다. 고대에 사람을 일컫는 화상은 진실만을 그렸다. 송의 왕우청은 <<柳贊善寫眞贊序 유찬선이 진을 찬양하여 쓴 서문>> 서문에 “(유의) 집에 어머니가 계시니 그 얼굴을 보고 싶으나 돌아갈 수 없으니 스님의 빼어난 솜씨로 그를 그려서 그 아우로 하여금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다. ” 위의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고대에서 진은 이미 하나의 본체론의 범주이며 또한 하나의 인식론의 범주이다. 단 중요한 것은 본체론의 범주라는 것이다. 본체론으로부터 말하면 “眞”은 세계만물의 존재와 발전의 이유이며 만물내부의 필연의 규정성이다. 문법적으로 말하면
주체로 하며 “진”은 명사인데 語句에서는 주어가 되며 예를 들면 “眞體內充 진은 안으로 충실하다”인데 동사의 목적어가 되고 예를 들면 진으로 돌아간다. 진을 깨닫는다. 진을 포함한다. 그 진을 지나치다. 그 진을 잊는다. 진을 그리다. 등등이다.
인식론으로 말하면 “진”은 주체인식과 객체사이가 서로 부합되는지 아닌지의 관계 문제이다. 문법적으로 말하면 인식론의 “진”은 형용사이며 뜻은 “진실인 것” 또는 “진실이다”인데 假와는 상대이고 어구에서는 서술어이며 예를 들면 “그 정신은 심히 진실하다” 역시 명사의 한정어가 될 수 있는데 참된 선비, 진정한 재인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 참된 재상 등의 “眞”은 참과 거짓의 “眞”이 아닌데 왜냐하면 여기의 “眞人”은 “假人”과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득도한 사람을 가리키며 범인과 俗人의 상대이다. 비록 중국철학의 초기에서 역시 인식론과 논리학의 결핍이 아니더라도 언어방면에서 진의 사상의 자원을 논의하였는데 예를들면 명가인 공손용의 名實之辨(실재 명목 있는 변론)과 <<역경>>의 “言不盡意 말은 뜻을 다하지 않는다.”는 논과 당대 구양건(歐陽建)의 “言盡意 말은 뜻을 다한다.”는 말과 묵자. 순자. 왕충 등 사상가 역시 眞假의 “眞”의 문제를 탐구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단지 중국고대 더욱이 춘추전국시대에서 주요한 것은 여전히 본체론의 각도에서부터 진의 문제를 탐구 토론했다. 이 점은 서방에서 인식론의 중요한 탐구를 “眞”으로 삼았다는 것과는 다름이 있다. 중국철학의 큰 뜻은 하늘과 인간 사이의 지극한 道와 人倫의 큰 덕과 天地의 大美를 연구하는 것이다. 湯一介선생은 중국철학의 근본정신을 天人合一과 知行合一과 情景合一이라고 간단하게 요약했다. 그는 중국전통철학은 眞 ,善, 美의 문제에 관하여 세 개의 장기적 영향과 중국인을 재배하는 사상적 명제가 있다. 혹자는 세 개의 긴 기간에 중국고대사상가들이 논증한 명제가 있는데 곧 ‘天人合一’이다. 사람과 모든 우주의 관계를 해결하도록 요구했고 역시 세계의 통일성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知行合一’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해결하도록 요구하였고 역시 바로 인류사회의 도덕적 표준과 원칙문제에 관하여 이다. 혹자는 인간이 사회적 책임 문제에 대하여 말했다. ‘情景合一’은 예술창작에서 사람과 반영된 것의 대상적 관계의 해결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예술창작과 감상의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세 가지 경지의 본질은 모두 일치한다. 그 착안한 중점은 뒤에 있는 것 곧 사람 행위 경치 등 그것들은 이 세 가지가 반드시 앞의 세 가지와 일치하고 역시 곧 사람이 반드시 하늘에 합하고 행동이 반드시 앎과 합치되고 상황이 반드시 운치에 합치되어야 한다. 중요한 점에서 말하면 ”天人合一“에 도달하면 바로 道家의 ”眞人“
의 경지이다. “知行合一”에 도달하면 곧 유가에서의 “君子”이고 또한 “情景合一”에 도달한 詩文은 참된 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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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미 세 개의 관계상에서 중국고전미학의 특징을 “美善合一”로 귀결지음은 본래 마땅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또한 중국고전미학을 부정한다면 眞을 美로 여기는 전통은 곧 너무 편파적이다.
葉朗은 <<中國美學史大綱>>에서 일찍이 말한 적이 있다. “중국의 공자와 유가학파는 확실하고 특별하게 미와 선의 통일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점에 따르면 곧 결론을 낼 수 있을지 모르나 모든 중국고전미학은 모두 미와 선의 통일에 치중하였고 또한 미와 전의 통일에는 중점을 두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먼저 秦나라를 들어 말하자면 老子와 庄子는 모두 진을 강조했다. 그들이 말한 “眞”은 곧 “道”이며 바로 自然이다. 漢代의 王充도 역시 ‘美’와 ‘眞’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五代 때 荊浩는 그림에 대해 하나의
정의를 내렸는데 ‘그림이라는 것은 그린다는 것이다. 物象을 헤아려 그 진실을 취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가 말한 ‘眞’은 바로 ‘一氣運化 단숨에 이루다’인데 바로 ‘自然’이다. 明淸小說 美學家와 명청 연극 미학가는 소설 또는 연극이 반드시 ‘진실해야한다’ 또는 ‘物과 닮아야 한다’ 또는 ‘情에 합당하고 이치에 맞아야 한다’고 거의 일치로 강조했다. 그들은 소설과 연극의 진실성을 첫 번째로 언급하여 요구하였다. 淸代 미학의 큰 스승인 葉燮 역시 ‘美’와 眞의 통일을 모두 매우 강조했다. 이러한 모두는 미학사의 사실이다.“ 이택후, 유강기 역시 “중국미학 역시 예술의 진실성을 말했는데 단 그 말한 바의 진실은 주요한 것은 외계사물에 대한 묘사를 재현한 사실이 아니고 정감표현의 합리와 진실이다. 서방미학은 보통 미와 진의 관계문제를 토론하였는데 중국미학에서는 토론한 것이 매우적다. 왜냐하면 중국철학과 중국미학에 대해서 말하자면 진은 곧 선의 가운데 포함하고 선은 반드시 동시에 진이고 선을 떠나서는 진을 구하는 것은 불가사의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중국미학이 주장하는 바는 ‘정’과 ‘미’의 통일이며 ‘선’의 통일이고 역시 ‘진’의 통일이다. ‘理’는 眞과 善이 겸하고 또한 ‘理’는 ‘情’과의 통일이며 또한 외적인 통일은 아니다. ‘理’로 하여금 개체 내심의 정감의 깊은 곳에 스며들게 해야 하는 것이다.
<<易傳>>에 이른바 ‘修辭立其誠’이라 했고 (<<乾卦.文言>>)에 양웅이 이른바 ‘言’은 마음의 소리다.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라 했으며 (<<法高.問神>>)에 등등의 표현에는 모두 명확하게 이 점을 지적해 냈다. 중국미학은 여태까지 진정한 예술은 인간 인격 가운데 선의 정감의 진실은 거짓이 없는 표현에 집중한 것이었다. ’理‘와 ’情‘ 서로 밖에 있거나 분리될 수 없고 또한 마땅히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진망형은 “중국고전미학은 서방 미학과 비교하여 더욱 美와 眞의 통일을 중시하였다. 그것은 선의 품격을 부여하였고 또 진의 품격도 부여하였으며 또한 진의 품격은 선의 품격보다 대단하게 높게 보았다.
일반적으로 그것을 말하면 중국고전미학은 미의 인식상에 있어서는 선을 영혼으로 삼고 또 진을 최고 높은 경계로 삼은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二 自然之道-道家哲學 “眞”的本眞內涵
(2 자연의도- 도가철학 “진”의 원모습 내용)
우선 “眞”은 “道”의 정신성을 나타낸다. 도가에 있어서 “眞”과 “道”는 긴밀한 관련이 있고 어떤 때는 곧 “眞”이고 “眞”은 곧 “道”이다. 중국에 현재 있는 古書 중에서 “眞”은 가장 이른 시기 <<老子>> 가운데에 곧 “道” 와 더불어 함께 출현했다.
<<老子>> 제21장에 :
공자 덕의 관용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다.
道는 物이 되고 문득 깨닫거나 할 때에
그 가운데 象이 있다.
문득 깨닫거나 얼떨떨하거나 할 때에
그 안에 物 있다.
심오하구나 심오하구나
그 가운데 精이 있으니
그 정이 심히 진실하니 그 가운데 信이 있다.
고 하였다.
여기에서 “眞”을 써서 “道”의 존재 상태를 묘사하고 양자를 이어주는 것은 “精”이다. “精”은 곧 사물의 정화인데 <<老子呂注>>에 “精이란 것은 도를 얻은 것의 하나이며 섞이지 않은 것이다.”
"중간에 있는 것도 있고 굵은 것도 있는데 오직 가운데 있는 것이 없고 그 다음에 있는 것이 가운데 있는 진실이다. 진실만 옳고 거짓은 아니다. 그러므로 있는 대로 살지 않고 없는 것으로 죽지 않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
동시에 도가학파 송형은 윤문이 지은 <<內業>>에서 말한 것이 있는데 “무릇 物이 精하여 변화 되면 生이 되고 내리게 되면 五谷이 생겨나고 상승하면 열을 지 은 별이 되고 천지의 사이에서 흐르는데 그것을 일러 鬼神 이라 하고 가슴에 감추면 그것을 성인이라 이른다.” “眞은 곧 精이다. 信은 곧 眞이다.” 곧 순일한 도는 精이며 眞. 精. 信은 동일한 것이고 道의 생명력의 체현이며 “眞”의 본체론 사상을 반영하였고 곧 사물이 내재한 순일한 생명정신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陳良運 선생은 “信”은 “眞”이 전제가 되고 근거가 되며 “眞”은 “精”으로써 핵심이 되고 영혼이 된다. 위와 아래의 문장을 연결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眞”이다. 物이 “精”이 없는 것은 곧 그 “眞”을 잃은 것이오 “眞”이 “眞”이 없는 느낄 수 있고 살필 수 있어서 곧 그 “信”을 잃는 것이다.고 여겼다. 이것으로 볼 수 있는데 <<老子>>의 진과 정은 물질의 구체적 형태의 진실 존재이며 정신의 眞이다. “정신이란 것은 하늘이 준 본분인데 : 육신은 땅이 준 본분이다. 하늘은 맑아 흩어짐에 속하고 땅은 탁하여 모임에 속하니 정신이 형태를 떠나 각기 그 眞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列子.天瑞>>)에는 이 “정신이 형을 떠난다.”의 “眞”은 중국고전미학에서 시작되었는데 형태와 정신 관계에서 정신을 중시하고 형태의 근원은 가볍게 여기고 대단히 만족하여 形을 잊고 대단히 만족하여 象을 잊어 神似(정신)는 形似(겉모양,형체)보다 높다는 미학 사상이 모두 形과 神의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기초 위에서 발생한 것이다. 또한 老子가 거론한 “美”와 “信”(인식론의 진)의 관계에서 “신이란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을 수 없다.”란 단점을 제기하여 “美”와 “信”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노자의 도가 미학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가의 진은 일반적 뜻의 존재의 진실이 아니고 사물에 대한 본질 역량인 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도의 본질은 “無”인데 그것은 심원(深遠)하고 간접적이며 일종의 無와 有의 통일된 경계이다. “신”은 일종의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심원한 도이다. 장자 역시 도를 최고의 실체로 여겼다. 그는 말하길 “天地에 큰 아름다움이 있으나 말이 없고 사계절이 분명한 법칙이 있는데 의논하지 않고 만물이 이치에 맞는 것이 있으나 말하지 않는다. 성인은 원래 천지의 이름다움이고 만물의 이치에 도달하였다.” 천지의 도는 곧 “大美”인데 “원래 천지의 아름다움이 만물의 이치에 도달하여 ” 곧 “성인”이 되었다. 도는 세상만물이 존재하는 최종의 근거이며 “道”는 어떤 이는 “大美”와 세상 만물이 서로 겉과 속이 되는 것이라하고 만물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 “道”와 “美”가 보이게 되도록 맡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美는 곧 道이며 곧 道 본체의 드러남이다. 장자에서 보면 “道”는 세속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초월한 더욱 높은 함축을 지니고 있다. 그는
“옛날에 들보와 기둥 려와 서시를 들어 기괴한 것에서 벗어나 도는 하나로 통한다. 그 몫은 성공이다.
그 성공은 훼손이다. 모든 것을 다 이루거나 훼손하지 않으면 다시 하나로 통한다"고 말했다.
그 다음은 “진”은 자연의 天性에 합당하다. “道法自然” “法天貴眞”은 도가의 중요한 명제인데 인간은 천지에 대해서 자연을 본받는 것은 “眞”에 도달하는 경지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다. <<老子>> 제25장에 말하길
도는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 역시 크다.
세계(域中) 안에 네 개의 큰 것이 있으니
또한 사람이 그 하나에 산다.
사람은 땅을 법으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으로 삼고
하늘은 도를 법으로 삼아
도는 자연을 법으로 삼는다.
여기에서의 “자연”은 분명히 지금 이르는 대자연의 뜻은 아니고 자연이 또한 그러한 의미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자연은 바로 천지를 가리키며 이 뜻은 “人法地 인간은 땅을 법 삼다.” “地法天 땅은 하늘을 법삼다.” 가운데에서 이미 명백히 말했거니와 또한 노자의 이 句 중에서 사람에서부터 땅에 이르고 하늘에 이르고 도에 이르고 자연에 이르는 하나가 행해짐에 따라 점점 먼데까지 이르고 점점 추상적 과정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자연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장자가 말하길 “그 하늘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홀대하지 않을 것이고 백성이 거의 천성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에서의 진은 바로 천성을 가리킨다. “以其眞”은 바로 그들의 천진한 본성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다. 그는 단지 천성이 쌓임에 만족하지 않으면 사람을 위한 경비를 소홀히 하지 않고 사람이 곧 “眞”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장자가 말하길 “無爲爲之之謂天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그것을 천이라 한다.” 바로 그 자연에 맡긴다는 말이며 한치도 인위적인 흔적이 없이 곧 바로 천도와 부합된다. 인간은 단지 “天道”를 본받거나 “천도”에 적응하거나 하여 겨우 “反眞” 하거나 “貴眞”한다. 장자는 <<秋水>>에서 북해를 통과 할 때 하백과 대화하는데 그의 성실하고 신중한 천성을 표현해냈으며 또한 진으로 돌아가는(反眞) 생각을 잃지 않았다. “소와 말은 네 다리가 있는데 이것은 하늘이라 이르고 말의 머리가 떨어지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은 사람이라 이른다. 故曰 : 無以人滅天, 舞以故滅命, 無以得殉命. 謹守而勿失, 是謂反其眞.” <<庄子 . 達成>>에 “재경이 나무를 깎아를 鐻(악기 이름)를 만들다.” 의 옛날이야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以天合天 하늘로써 하늘에 합치다.” 라는 진을 귀히 여기는 사상을 명백히 했다. 재경이 나무를 깎아 편경(鐻)을 만드는데 편경이 완성되면 보는 자가 귀신에 놀란다.(見者惊犹鬼神) 노나라 제후가 보고서 말하길 “그대 어떤 기술로 만들었는가?” 대답하여 말하길 “신은 工人(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인데 무슨 기술이 비록 하나가 있긴 한데 신은 편경을 만드는데 감히 기를 소모한 적이 없으며 반드시 마음을 가라 앉혀서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삼일을 재계하고 또한 감히 작위와 녹봉을 받거나 축하받기를 생각지 않았고 오일을 재계하고 감히 솜씨 있거나 없거나의 비난과 칭찬을 생각지 않았고 칠일을 재계하니 문득 나를 잊으니 양팔 양다리인 신체의 외형만 있었다. 이 때에 나의 눈에는 이미 公室과 조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혜와 기교가 한결같아 외계의 어수선한 것이 모두 사라졌다. 그런 후 나는 산속에 들어가 각종 나무들의 품질을 관찰하여 좋은 외형과 자태가 편경과 일치하면 선택하여 가공하여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내 목공일의 순진한 본성을 이용하여 나무 목재의 자연적 천성을 융합하여 만들어진 기물이 아마 귀신의 솜씨가 원인이 아닐까!”
장자는 여전히 사람이 “진”이 성의 원인을 잃어버림을 논증했는데 주요한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명예와 이익의 분쟁이다. “日以心斗 날마다 자신 안에서의 경쟁”는 사람의 “진”의 性 에 위배될 수 있다. <<庄子. 山木>>에서 사마귀가 매미를 잡은 고사에서 장자는 보면 그 진실을 잊는다.”는 이치와 <<장자. 어부>>에서 그는 “심혈은 기울여 형체를 나타냈는데 그 ”眞“의 경고를 위태로움으로써 나타냈다. 두 번째는 애써 꾸민 것이다. 만약에 고심하지 않았거나 인의 또한 닦음이 없고
명예와 지위도 다듬어 짐이 없고 강과 바다도 일렁임이 없고 수명이 길지도 않으며 잊지 않음이 없으며 있지 않음도 없다. 태연하여 급함이 없고 많은 아름다움이 그를 따라서 이 천지의 도가 성인의 덕이다.“ 그 셋째는 “진“은 질박 순수 소박한 처음의 상태이다.
<<노자>> 제41장 다시 “진”을 말하면
어진선비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그 것을 행하고
어중간한 선비는 어떤 때는 마음에 기억하고
어떤 때는 기억을 전혀 못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아주 낮은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웃지 않는 것은 도라고 여길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건의하는 말에 그것이 있으니
밝은 도는 어리석음과 같고 도에 나아감에
물러남과 같고 평탄한 대도는 결점과 같다.
숭고한 도덕이 있는 사람은 산의 골짜기와 같아서
가슴이 깊고도 넓어 골짜기와 같다.
넓은 덕은 부족함과 같고 건강한 요령을
피움과 같다. 본질이 참됨은 변화와 같다.
고상하고 청렴결백한 것은 검게 물들이기 쉬움과 같고
대범하여 끝이 없고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지고
큰소리는 소리가 없는 것과 같고
큰모양은 형태가 없음과 같으며
“도”는 은밀하여 이름이 없다.
오직 ”道“ 만이 좋은 재물이며 또한 이룸이다.
“본질이 참됨은 변화함과 같다.”는 노자가 질박한 진의미학사상을 중시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장자 역시 순박하고 꾸밈이 없는 것을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하길 “소박한 것은 천하에 그 어떤 것과 다툴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朴”은 인위로 깎지 않은 원목(原木)이고 “素”는 염색하지 않은 명주실인데 사물의 본래의 면모를 가리키며 “朴”과 “素”는 “質眞 소박하고 진실하다”의 의미이며 바로 도가에서 숭상하는 본질의 진이고 자연의 진이며 인위의 거짓과 인위의 장식을 멸시하고 “진”은 마땅한 바를 구비한 질박한 미학 특징을 반영했다.
<<한비자 해로>>에서 말하길 “禮는 풍모(기질과 생김새)이고 文은 꾸미는 것이다. 군자가 정을 취하여 가는 모습은 좋은 바탕에 흉한 장식이다. 다른 이를 멸시하며 정을논하는 자는 그 뜻이 나쁘다. 모름지기 장식만하고서 바탕을 논하는 자는 그 본질이 쇠약해진다. 꾸미는 일을 하지 않고 소박하고 진실이 존재하는 본질의 참된 사상 역시 중국고전 미학의 숭고한 수수함과 숭고한 본질과 숭고한 본성사상의 근원이다.
거듭 “진”은 정성의 지극함이다.
노자는 道가 곧 物이 物이 되는 내재하는 근거로 여겼다. 덕은 도를 드러나게 하는 용도이다. “眞”이라 하는 것은 바로 늘 보유하는 실제 내용과 인간본서의 진이다. 만약에 인위적으로 실행한다면 곧 眞을 잃게 될 것이다. 역시 바로 덕과 진은 자신의 진실한 상태를 반영하는 주체이고 사람의 본질과 본 보습과 본성의 일종의 자연스러움과 또 진실한 상태를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장자>>는 “眞”에 대한 서술이 매우 풍부하다. 최고 멋진 것은 <<漁夫>> 가운데의 한 단락의 말이다.
공자가 정색하여 말하길 “묻겠는데 어떤 것을
眞이라 이르는가?” 하니 객이 말하길 ”眞이란
것은 정성이 지극함이다. 정성스럽지도 않고
성의도 없다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고로 억지로 슬피 우는 사람은 비록 슬프더라도
슬프지 않다. 억지로 분노하는 자는 비록 엄해
보이나 위엄스럽지 않다. 억지로 친한척하는
사람은 비록 웃고 있으나 정답지 않다.
진정 슬프면 소리가 없으나 슬프며 참으로
친하다면 웃지 않아도 화목하다.
眞이 속에 있는 사람은 정신이 밖으로 드러나니
이것이 바로 진이 귀한 까닦이다.
그 사람의 도리를 사용하여 어버이 섬김에
사랑과 효도를 다하고 임금을 섬김에 충성과
절개가 곧음을 다하고 술을 마심에 기쁘게
즐기며 상을 당하여는 슬픔을 다해야 한다.
충성과 절개는 공으로써 주가 되고 술을
마심에는 즐거움이 주가 되며 상을 다하여는
슬픔이 주가 되며 어버이 섬김에는 마땅함이
주가 된다. 공을 이룬 아름다움은 하나의
그 정도(正道)가 없고 어버이를 섬김을 마땅함으로
하여 이유를 논하지 않는다. 술을 마심에
즐거움으로 하되 그것을 구비하는 것을
가리지 않는다. 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하되
그 예는 묻지 않는다. 예라는 것은 세속에서나
하는 것이다. 진이라는 것은 天地에서 받은 것이니
자연스런 것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고로
성인은 하늘을 벗 삼아 진을 귀하게 여기고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다. 우매한 자는 이를 돌이켜 하늘을
법 삼을 수 없어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진이
귀한지 알지 못한다. 하늘에서 내린 복이 또한 세속
에서 받아 변하여 고로 만족을 모른다. 애석하다.
자네가 때 이르게 세속에서 빠져서 거짓되고
교활하여 늦게야 겨우 大道를 들었구나!”
여기서는 무엇이 진이며 진의 근원 진의 가치 등에 대하여 모두 연구하였다. 첫 번째 <<장자>>는 진을 마땅히 매우 성실한 것이고 억지로 꾸미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늘에서부터 와서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고 자연스럽고도 옳은 것이며 역시 억지로 꾸밀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두 번째는 정성스런 진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인데 정성스럽지 않고 성실하지도 않으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는 것이 전제가 된다. 세 번째는 다만 진이 있으면 최고로 귀한 것이고 안에 있으면 진이 되고 밖에 있으면 마음으로 표현되며 또한 울거나 분노하거나 웃는 등의 밖에 있는 형식이 아니다. 네 번째는 임금을 섬기고 술을 마시고 상을 당하고 어버이를 섬기는 등의 인륜방면에서 공로, 즐거움, 슬픔, 적합함 등으로써 실질성의 정감이 주가 되고 또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의 구체적 표면 행위와 어떤 잔을 사용하여 술을 마시는가와 세속의 등과는 관계없다. 다섯 번째는 일찌감치 거짓지식과 세속의 실익에 얽매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진이 존재하는 대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장자>>는 신령(神眞)의 외재성의 파악에 있어서는 노자와 한 계통으로 이어져 내려 왔음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이하 몇 가지 분야에서는 심화와 발전이 있게 되었다. 그 하나는 신령이 내재하는 근거는 “진이 안에 있는 것이고 표정은 밖으로 나타내는 것”을 명백하게 밝혔다. 그 둘은 “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서 “진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요 자연은 바꿀 수 없는 것임을 밝혔다.” 그 셋째는 “세속에 한정되거나” “세속에서 물려받는 변화” 등 세속에 하는 “禮”는 사람에 대한 “眞”의 파괴이며 심지어 “일찍이 거짓보다 깊은” 지식을 포괄한다. 그 넷은 진이 외재의 표현은 예를 들면 억지로 울거나 억지로 분노하거나 억지로 친함을 열거하여 禮(예의), 행동 등 외재 형식에 중점을 두었다. 그 다섯은 “진”을 “假” 상대적 범주로 이끌어 “眞悲 (참으로 슬프거나)” “眞怒 (참으로 분노하거나)” “眞親 (참으로 친하거나)” 하는 것을 이른다. <<노자>>는 단지 진의 내재적 의미와 일반적 특징을 초보적 단계에서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장자는 이 짧은 한마디 말로써 무엇이 진인지 진의 표현, 본질, 유래, “眞”을 잃게 된 원인 등 전반적인 논증으로 진에 대한 이론 체계를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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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信實之眞 一 儒家“眞”的含義
(성실한 진 ㅡ 유가 “眞”의 내재적 의미)
언제나 선진(先秦) 유가 고서 중에는 거의 “眞” 이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적지 않게 현대 “眞”과 서로 가까운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孚, 情, 神, 合, 誠, 實 등 모두 “眞”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여기 일일이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孚는 <<역경>> 중에 “孚 믿음성 있다.”로써 사람의 정감과 행위 사이에 서로 일치하는 대응 관계를 표시한다. 孔穎達의 “中孚”를 해석한 것을 말하면 “信은 가운데에서 드러나고 그것을 일러 中孚라고 이른다.”라고 했다. “成王之孚, 下士之式”(<<詩經.下武>>) 가운데 “孚”는 誠信(성실하다) 信譽(신용 평판)을 표시한다. “小信未孚, 神弗福也” (<<左傳. 莊公十年>>) 중의 “孚”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복종한다는 뜻이다. 이외에 “孚”는 여전히 마음이 한결같은 뜻도 있다. 오직 한결같이 재능은 신과의 의사소통이 있을 뿐이다. 이점에서 노장의 “滌除玄龜鑑 맑은 거울을 닦다”, “心斋”와 비슷하다.
情은 “최고의 도리는 곧 백성은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최고의 믿음은 곧 백성이 감히 최고의 도리 곧 감히 복종함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논어. 자로>> 편을 공영달이 <<易傳正義>>에 설명하길 “情은 情實이라 이르고 僞는 허위라 이른다.”하였다. 楊伯峻先生은 “情은 實이다. 情이 지금의 眞과 僞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인이 형상을 세워 마음껏 장난치고 卦를 만들어 거짓으로 장난친다.”라고 여겼다. (<<易傳. 系辭>>) 중의 情은 情實의 뜻이며 일종의 진실한 상황을 가리킨다.
역사의 저서인 <<左傳>>에서 “情”은 대부분 사실과 진실을 가리킨다고 여긴다. (晋國公子重耳流亡國外19年 진국 공자 중이가 해외 망명 19년) “매우 험난하고 어려움을 일찍이 그것을 준비했다. 백성의 마음은 거짓이며 그것을 다 알고 있다.” (<<僖公 二十八年>>)과 “작고 큰 감옥을 비록 자세히 볼 수 없지만 반드시 정으로 본다.” (<<庄公 十年>>) 가운데의 “정”은 모두 실제의 뜻이다.
信은 “친구와 교제하면서도 믿음이 없다.” (<<論語 . 學而>>), 양백준이 주에 “믿음은 정성이다.” 성실을 가리켜 속이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그것을 물으니 申生이 信과 强을 심히 좋아했다.” (<<國語 . 晋語>>), 韋昭가 주에서 “신이란 것은 반드시 그 말에 적합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어떤 것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論語>>) 중의 “信” 역시 가리키는 것은 신용을 지키어 약속을 이행한다는 말이다. “믿음이란 아! 공공의 명령이어서 나는 감히 말해서는 안된다.“ (<<尙書 . 金滕>>), 공자가 전하기를 史百이 일에 종사하다는 말이다. 信은 이 일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진실로 확실한 뜻이다.
이외에 “信”은 여전히 신뢰의 의미를 가리키는데 예를 들면 “그대가 믿는다면 나는 지킨다.” (<<尙書 . 湯書>>), “옛것을 기술할 뿐 새 것을 지어내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하여 팽이 나보다 더 낫다. (述而不作,信易好古,竊比我于老彭)” (<<論語>>), “尙書를 완전히 믿느니 차라리 상서가 없는 게 낫다.” (<<孟子>>).
종합하면 “말은 자신의 글이다. 말과 글은 또한 자신을 표현한다. 이치에 합당하면 후에 행하고 분리되면 곧 어김이 있다.”는 (<<國語 . 晋語五>>), 사람을 강조하는 자신과 말의 일치성이다. 순자는 <<禮論>>에서 말하길 “본성은 본래 순박한 것이다. 거짓(작위적인 것)은 문리가 융성하다. 천성은 거짓을 가하지 않고 거짓이 없으면 본성은 스스로 아름다울 수 없다. 性과 僞가 합하고 난 후 성자라는 이름이 붙으면 천하의 공로가 바로 이것이다.” 성악설을 논하는 자는 순자가 후천적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미적기대를 걸고 거짓이 없는 성은 스스로 아름다울 수 없다 여기지만 그도 본성과 거짓의 화합을 중시한다.
<<樂記>>는 예악이 그 중에서도 즐거움은 순응하는 사람에게 내재한 본래의 진과 외재한 겉모양의 사이 관계의 기능에 부여하여 주며 “힘들이지 않고 쉽게 이기면 떠돌고 예의가 지나치면 도리어 사이가 멀어진다. 뜻에 합하여 외모를 꾸미는 것은 예악의 일이다.” (<<樂論篇>>) 역시 지나치게 “禮”를 제시하여 “情”과 “貌(겉모습)”으로 하여금 서로 “離(분리 되게)” 하였다. 역시 시세에 따라 진실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誠(성실)은 “한가함과 사악함이 그 성실함에 있다.” (<<周易 . 乾>>). 공영달이 진술하여 말하길 “말은 한가함과 사악함을 막아 당연히 스스로 그 성실이 있는 것이다.” “修辭는 그 성실을 세운다.” 역시 성실은 참된 성의 의미이다. <<樂記>> 가운데 “본디부터 변해야 할 것을 알고 기뻐해야 할 마음도 있다. 성의를 다하여 거짓을 없애는 것은 예의 경전이다.” “誠”과 “僞”를 대립시키는 것도 이와 같은 방법이다.
實은 “차를 타는 사람으로 하여금 왼쪽은 실제적이고 오른쪽은 거짓되다며 앞장서서 땔나무를 끌고 가도록 한다.”
(<<左傳 . 襄公 十八年>>). 고염무는 <<日知錄>> 가운데에서 “현재 眞”이라 하는 것은 옛날에는 實이라 했고 현재 假라는 것은 옛날에는 僞라 했다. 지금에 “假”라고 하는 것과 같다. <<國語 . 晋語 五>> 가운데 “지금 양자의 용모가 뛰어나고 그 말이 결핍되어 사실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조기의 유가는 비록 “眞”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에 있어서 尙實(진실)과 尙信(믿음)은 명실상부한 학술추구와 도덕추구 중에서 실사구시의 우성유전자를 만들어냈고 강렬한 참을 구하는 정신을 포함하였으며 “文”의 시대적 진실 재현을 주장했다. 이것에 대해 진일보한 고찰을 한다면 다른 시기의 진에 대한 인식에 있어 여전히 비교적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대체로 말하면 유가의 진은 조기에는 진실을 향해 더욱 기울어 현실정신과 사가 정신이 풍부하여 역사사의 실증성을 강조하였으나 후기에는 점점 더 사람 내면의 진정성을 중시하게 되었다.우리는 공자를 경계로 선진유가 서적을 세 가지 시기로 나누려 한다. 즉 공자 전의 서적 <<周易>>, <<尙書>>, <<詩經>>, <<儀禮>>, <<春秋>>와 공자 서적인 <<論語>>, 思孟(자사, 맹자)서적인 <<孟子>>, <<禮記>> 등이다.
앞에 열거한 바와 같이 공자 전의 유가의 서적 중에서 “眞”과 서로 근사한 몇 개 개념은 모두 역사적 사실과 사실의 진실한 존재에 있다. <<시>>와 “사”는 정신에 내재한 위에 고도의 일치성을 갖추고 있고 <<시>>는 최고 이른 “사”이다. 널리 퍼지기 쉬운 특성으로 인하여 구전 역사의 임무를 이어 받아 비로소 맹자가 있어 “<<시>>가 없어진 후 <<춘추>>가 지어졌다.”는 결론이다. <<정자 . 천하편>>은 “<<시>>는 志를 말하고 <<서>>는 事로 말하고 <<예>>는 행을 말하고 <<악>>은 和로 말하고 <<역>>은 음양으로 말하고 <<춘추>>는 명분으로 말했다고 인정했다. “道志”, “道事”, “道行”,“道名分”의 사회 실재성은 말을 기대하지 않고 “음양이라 말”한 <<역기>>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점을 주관하는 사람에 의해 어떠한 일을 점친 후 얻은 징조의 형상을 가록하여 아울러 후에 발생한 일과 따라서 진행하여 연구하여 따라서 특별히 점을 친 것에 대한 실정의 중요한 의미를 강조했다. <<역경>>의 큰 뜻은 점의 길흉에서 길흉의 원인을 또 사건의 진위로 돌렸다.
공자가 예가 붕괴 되고 악이 무너지는 사회현실을 직면하고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예와 인의 관계간의 문제였다.
그는 외재적인 “예”에서 내면으로 예의 내재적 근거인 “인”을 찾아 예를 행할 때 인간의 내면의 진실한 감정을 고찰하고 “주의”의 “예”의 진실성을 위해 빌미를 찾아 중국전통 사상의 전형을 배양하였다. 공자가 지적한 “인간은 어질지 않은데 예를 어찌 알겠는가?” 사람이 어질지 않은데 음악을 어찌 알겠는가? (<<論語 . 八佾>>)에 “인”은 없고 역시 인간으로서의 자격도 상실했다. “예는 단지 겉모습은 사람을 인간으로 만들지만 ”인“은 내면에서 도덕상으로 사람을 인간으로 만든다. 이택후가 ”(공자) “예”의 기초를 심리적 의존에 직접 호소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체 “예”의 혈연 실제를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 규정하였고 또 효제를 일상에서 친부자간의 사랑으로 세웠으며 이것은 바로 “禮”와 “儀”를 외적인 규범으로부터 구속하여 사람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내재된 요구를 해소하고 원래의 경직된 강제규정을 생활을 위한 자각이념으로 높이고 일종의 종교적이고 신비로운 것을 인정의 날로 바꾸어 사용하고 윤리의 규범과 심리적 욕구를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이다. 郭沂 역시 “공자 예학의 주된 공헌은 예에 대한 심리적 기반의 논증으로 예학을 생명에 뿌리는 내린 것이다. “ 라고 여겼다. 공자의 求仁 학설은 인간의 외적 행위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고 외적 행위에 치중하는 내재된 동기로 향하고 인간 내면의 도덕적 수준과 외적인 우아함의 일치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내적 미와 외적 미의 통일 에 대한 질문에도 대답하였다. 그러나 공자 윤리 지상주의의 仁學체계에서는 사기 실록 정신이 약화 된 바가 있고 진은 더 이상 그의 최고의 범주가 아니라 인과 효에 소속되어 있다. 그는 ”우리 당의 곧은 자가 다르니 그래서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은인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은인이어서 그 속에 바로 있다.“라고 생각했다.
”直“은 곧 숨김없이 진실을 말한다. 그러나 ”直“은 효도에 복종해야한다. 맹자 역시 같은 의론이 있다. 그는 어르신 분 말씀은 반드시 믿을 만 하지 않고 행실에는 과실이 필요 없고 의리만 있는 곳에 있다. 의리를 보다 높게 놓고 말은 반드시 믿을 만 하고 행동은 반드시 결과의 진실 위에 공맹이 인의에 치우친 도덕지상주의 정신을 반영한다,
공자이후 유가는 법가 도가 등 다른 학설에 대하여 “위장하여 감정을 꾸미는” 것에 예의로 대하는 것을 비판하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내재한 것을 포괄하고 공자후학은 선왕제례악을 만드는 심리기초와 도덕기초를 논증하였고 예의 존재를 고수하는 합리성과 외모의 필요성을 일정한 정도 상에서 “禮”의 중요함을 어느 정도 강화했다. <<예기>>에서 예는 “모두 성정에서 나오는 것으로 위장하여 감정을 꾸미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선왕이 예물을 제정하고 문장이 크고 정밀하며 뜻이 충실하다고 여기어 믿는 사람이 능히 그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사소한 위험 사이에는 모두 의가 있고 예의가 있어야만 충성을 다할 수 있고 의로운 도리에 어긋나면 예의가 지켜지지 않는다. 반드시 내외를 겸비하되 본말을 들어 문장으로 꾸며진다. 공자가 말했다. “무례하구나.” 군자는 견문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고 사람이란 꾸미지 않으면 안 되고 외모가 없으면 공경스럽지 않고 공경스럽지 않으면 예의가 없으며 예의가 없으면 설 수 없다. 먼 것은 빛이 있는 자요 장식하는 것이고 가까이 있으면서 밝은 자는 배우는 것이다. (<<大戴禮記 . 勸學>>), 이러한 까닭에 선왕의 본래 성정은 도수를 헤아리고 예의를 제정하고 생명력을 화합하고 오상의 운행을 말하여 그것으로 양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고 음지가 밀접하지 않게 하며 강직한 기개는 용서하지 않고 부드러운 기개는 겁내지 않는다. 사방이 탁 트여 밖으로 드러나고 모두 그 지위에서 편안하고 서로 빼앗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바깥으로는 내면의 통일을 하고 복종과 수용 수용과 버림 버림과 덕의 통일과 함께 예의에 더 중점을 두어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四 本眞 - 佛敎的眞心說
불교가 동한 명제 때 중국에 전래된 이후 먼저 위진남북조 때 현학과 결합해 광범위 하고 깊이 있는 전파를 받아 수당시기에 중국화의 개조를 완료하여 많은 종파를 형성하였는데 천태종, 삼논종, 유식종, 화엄종, 선종 등이 그 예이다. 이어서 이학이 흥기하자 불교가 쇠미하였으나 불교의 부분이론은 이학사상체계의 틀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학 구성의 부분을 이루었다. 명대이후 육왕 심학은 더욱 불교에서 본체론과 방법론의 정화를 흡수하여 시대에 유행하는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서 불교를 말하고 선을 논하는 것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불교의 교리의 “진” 사상은 매우 풍부하고 심오하여 연구하는 것이 본론에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명대에 오히려 진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측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할 수는 없다. 인도불교에서 유식종에 의해 본론으로 추앙 받는 <<瑜伽師地論>>의 <<眞實義品>>과 가장 중요한 지론인 <<辨中邊論>>의 <<辨眞實品>> 모두 세계의 진실성 문제를 탐구하고 수도자가 세속의 생각과 망상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타파하여 세계의 진실을 인식하는 목적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본체 상에서 부터 인식세계의 진실성을 지적했다. 중국대승불교의 인문 책인 <<大乘起信論>>에서 곧 진심, 직심. 자연 등의 개념을 제기하였고 세계의 진실의 근본원인을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의 방법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이른바 진심은 진실이 도리에 맞지 않는 마음을 가리키며 이에 맞서는 것은 망녕 된 마음이다. 이르는바 진심은 정직하여 아첨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맞서는 것은 수행하는 가운데 “아첨”에서 멀리 떠나는 것이며 그것은 억지를 부리고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생각의 움직임이다. 또한 자연이라는 것은 아무런 무리없이 자연스럽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조금도 마지못해 하는 것이 없다. <大乘起信論<>>에서는 보살은 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 자연히 중생에게 널리 이익이 행해진다. 이것은 선을 좇아 흐르는 것 같이 하고 싶은 대로 하되 도를 넘지 않는 경지이다.
동진시대의 혜원은 <<沙門不敬王子論>>에서 形神 문제에 관한 논의는 도가와 현학의 형신 문제에 관한 사고를 계속해 인과응보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形盡神不滅”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慧遠의 한 방면은 “神”은 “形”이 아니고 “神”이 “形”보다 높고 “神”은 곧 “形”에게 전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택후 등은 혜원이 먼저 “傳神”설을 제기했고 아울러 회화이론상의 宗炳에 대해서는 “暢神”이라 했고 顧愷之의 “以形寫神”, “傳神寫照”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축도생은 중국 불교 돈오이론의 중요한 창립자로 돈오이론이 해결해야할 문제는 왜 진리를 얻어야 하는가 이며 또한 돈의 설은 남을 제창하는 사람은 불성을 지녔으며 사람마다 모두 이룰 수 있으며 낮은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는 사람들은 말씀과 권력의 요구를 얻으며 동진 후기부터 송초의 많은 서족들에 이르기까지 “한인”의 힘이 증가하는 사회 현실에 합치한다. 도생의 돈오이론은 초월성, 정체성, 자발성, 주체성 등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제강은 진지하게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진리관의 몇 가지 내포를 요악하였다. 먼저 도생은 허상과 실제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강조하여 모든 감성적인 사물을 허황되고 진실 되지 않은 허상이라 생각하고 허상을 넘어 인생의 해탈은 허상을 넘어 실제에 이르고 열반에 달하고 미학에 영향을 주며 예술가로 하여금 감성적 현상에 머무르지 않고 또한 초감성적 정신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하여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다음 도생은 궁극의 진리의 정체성의 특징을 지적해냈다. 그는 “理”(불교의 이치)는 불가분하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조금씩 얻어갈 수 없고 한 번에 크게 깨닫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그가 머리를 조아려 깨달음을 굳건히 한 중요한 이론의 근거이다. 셋째로 그는 진리의 주체적인 특징을 강조하였고 그는 “見解”를 “聞解”와 구분하여 보았고 “見解名悟, 聞解名信”은 見解만이 진정한 깨달음을 부처로 만든다고 여겼다. 원인은 “聞解”는 단지 수동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주체가 진정으로 믿는 견해는 아니지만 그러나 “견해”는 다른 사람이 전하는 지식을 간단히 받아들이고 믿는 것과 다르게 보며 그것은 주체가 스스로 독립해서 사색한 결과이므로 주체가 진정으로 굳게 믿는 결론이라는 것이다. 탕용동 선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믿는 자는 수행하는데 가르침을 듣고서 이해한다. (고로 신수라 한다) 진심이 아닌 것은 자연히 드러나기 때문에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쉽지 않은 몸으로 항상 비춰지지만 하지만 그 미혹으로부터 일은 아직 내것이 아니다.(고로 깨달음은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탕용동은 도생이 먼저 시도한 “진실된 나”라는 설로 인생의 진실을 통찰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참된 자아의 설이 진리의 틀 안에서 “나”의 주체적 지위를 구현했다. 넷째 도생의 돈오설의 진리관은 자발적인 특징도 가지고 있다. 탕용형 선생은 “진리를 중시하는 자연발현이 바로 공돈설의 특징”이라고 여겼다.
중국 선종사상 최초의 선사인 臨濟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개념은 “無位眞人”이라 부르는데 즉 어떤 지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유로운 사람 즉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은 무궁무진한 진정한 나이다. 임제가 선의 사상적 정수는 “無位眞人” 설이자 선종의 본심의 전형적 상징 중 하나의 본심의 존귀성에 치중한다. <<景德傳燈錄>>은 오온(色,受,想,行,識)의 몸에는 진인이 있는지 없는지 당당하고 훤하게 드러나 실오라기 하나의 간격도 없다고 말한다. <<景德傳燈錄>> 권 28은 紫松柏達觀이 말한대로 “떠나면 오히려 의존하고 바닥이 드러나 단단히 서고 의지할 곳 없이 뛰어오르면 오로지 마음의 빛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것은 세속적인 걱정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하지 않고 홀로 서있는 “참사람”이다. 임제록에서 “赤肉團 위에는 참사람이 한분도 없고 항상 여러 사람의 얼굴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일본학자인 스즈키다이사쿠(鈴木大拙)는 “임제의 ‘無位眞人’을 자성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의 설법은 거의 완전히 이것을 둘러싸고 있다. 이 사람은 때때로 ”도인“라고도 불린다. 그는 중국 선종사상사에서 으뜸이라 말할 수 있다. 인생 활동 모든 면에서 이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꾸준히 그의 제자들에게 이 사람처럼 체득하거나 혹은 진정한 자성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장자에 “도는 기와와 자갈에 있다.” “도는 똥과 오줌에 있다.”는 명제는 도에 대한 저속함이고 보편성을 확인하듯 임제가 “무위진인은 무슨 마른 똥거름이냐”라고 말하고 <<임제록>>, “무위진인”을 마른 똥거름과 같다하여 지혜롭고 일반적인 경지가 같음을 드러냈다. 분양(汾陽)의 “十智同眞”에 있는 “同普遍” 역시 “도”의 “동편동”이다. 그것은 깨달음이 특별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일상 생활의 보잘 것 없는 사물 예를 들면 흙, 돌, 기와와 자갈 가운데 모두 불법이 존재하고 있고 부산구대의 “평회상실(平懷常實 : 평상시 항상 진실을 품고 있다.)”은 불법은 특별히 없는 법인데 옷 입고 먹는 것은 모두 진실한 법이라고 한다. “손이 가는대로 풀을 캐오니 안될 게 없다. 설사 바람이 불어 나무가 움직이고 파도가 일면 배가 높고 봄에는 나서 여름에는 자라고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 저장함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무릇 버릴 것이 없으니 더 바랄 것도 없다. 안팎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면 자취도 없이 저절로 다 없어진다.” (<<人天眼目>> 卷二), “밥 먹고 마시는 것은 별다른 일이 아니고 산과 물을 보면 언제나 그렇다.” (<<五家宗旨編纂要 ; 다섯 집안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을 모은 주석서>>). 바로 “진인이 없다”라고 하는 주장은 일상생활 중에 존재하며 자연스럽게 형상계의 오줌 싸고 똥 싸는 생활이 펼쳐지며 평범해 보이는 비천한 삶에서 묘한 작용이 드러난다. 그것은 생활을 넘어 삶으로의 복귀 등단의 감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진실성을 보여준다. 이 사상은 명백히 왕양명, 왕간, 성범의 평등한 사상은 “백성들이 날마다 쓰는 것이 도가 된다.”라는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임제는 평상시 자유로운 사람들의 생명활동을 “활발하게” 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말했다. “당신은 수로를 아는가? 활발하게 단지 분주한 뿌리와 줄기일 뿐이다. 모이니 않고 헤집어 놓지도 않으며 멀리 돌아가려하고 지금에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영의 소리는 귀에 속해있을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활발하고 둥근 회전이며 생기 넘치는 생명의 활력이다. 왕간은 “천성의 근본은 본래 스스로 활발하고 솔개는 날고 물고기는 뛰어오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양지의 솔개와 물고기가 동일하게 활발하여 생각을 하면 생각하고 잘못을 뉘우치면 바로 그에 따른다.” “평범한 사람과 지혜로운 자의 행실이 곧 도이며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 오르는 것이 곧 지성이다.” 이러한 임제의 수도와 明性(성정, 본성)하는 방법론은 득도한 뒤 흔쾌히 얻은 미적 감각이 같은 맥락임을 명백히 볼 수 있다. 육조혜능은 솔직한 마음을 말하지 않고 단지 진심만을 말했다. 선종의 진심은 본심을 가리키고 본래의 면목 그것은 본심의 원래의 참된 본성에 치중한다. 선종은 참선의 최종 목표인 마음을 밝게 하여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 보이는 곧 본심을 가리킨다. 본모습은 그 고장의 경치라고도 하고 근본의 깨우침은 진심이고 본분은 처지이며 자기본분 등이라 하는데 잉것은 본래 자기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데 모든 대립을 넘어 선종이 주체적으로 자신 가치에 대한 확인을 보여주고 있다. 선종철학의 본심론 중에서 여전히 “부모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도원의 봄물” “한 치의 실도 걸치지 않았다.” “혼탁한 것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큰 종은 칠 수 없다.” “명암은 나눌 수 없다.” “해와 달이 생겨나지 않았다.” “낡은 돛은 아직 달지 않았다.” “한 방울도 삭지 않았다.” 등의 정서들은 남아 있는 시간 상태로 말하면 선종은 최초의 원시적 형태를 숭상하고 재질로는 순수하고 물들지 않은 상태를 숭상한다.
정토종은 솔직한 마음으로 진심을 말한다. <<維摩詰經>>에서 “마음이 정직하여 부당함이 없고 외면에는 거짓이 없다.”, “이것은 성불에 의탁한 까닭으로 이것에 의해 장래의 성공 열매로 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솔직한 마음”이 정토종에서는 참된 결실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솔직함(眞心)이란 거짓이 없는 진심이고 진심은 바로 마음을 비우는 것이요 곧 세속의 티끌에 오염되지 않은 본심이다. “만약 보살이 정토(부처나 보살이 사는 번뇌의 굴레에서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를 얻으려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 마음의 정결함에 따라 불토(부처가 교화한 땅)가 깨끗해진다.” <<維摩(淨名)經>>에 이르기를 “직심은 보살의 정토이다.”라 하고 (<<佛國品>>)은 “직심은 도장이며 거짓이 없다.” 하였다. 이지는 정토종을 신봉하고 그는 <<維摩詰經>>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하여 <<維摩詰所說經 ; 유마가 꾸짖어 말한 글>>에서 말하길 “유마대사가 이르길 ‘그 마음이 깨끗함에 따라 불토가 깨끗해진다.’ 국토를 극락으로 만드는 자요 땅의 정령이다, 아미타불이 국토를 극락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자는 마음이 깨끗하다. 아미타불이 국토를 극락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면 곧 아미타불이 국토를 극락으로 만든다는 자가 나와 따라서 그 마음이 깨끗해지고 곧 불토가 깨끗해진다. 이지의 동심 설은 정토종의 직심, 정심, 진심을 내포하는 것에 유사한 점이 있어 이것은 <<維摩詰經>>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第三節 中國古代 “眞”的美學內涵
(제3절 중국고대 “진”의 미학 의미)
송명이후 중국학술의 대세는 유가 도가 석가의 합류이다. 유가 도가 석가 삼교가 관심을 갖는 인생 사회문제는 차원이 다르고 경계가 다르기 때문에 적당히 같은 문제를 다른 차원에 내포하는 풍부함으로 구성하였다. 도가의 관심은 생명 영원의 문제이고 도가의 관심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의 관계 문제이고 불교의 관심은 사람의 정신 해탈의 문제이다. 그들은 각자의 차원에서 “진”에 대한 문제의 미학적 사고는 중국고대 “진”의 미학의 의미는 경계론으로부터 본체론까지 주체론에서 이에 창작론까지 이르고 작품론 등 매우 전면적으로 풍부한 내용을 형성하였다.
먼저 중국고대의 “진”은 사람의 생사의 큰일과 관계가 있고 이것은 사람을 가리키는 생명의 운반체와 귀속 역시 생명의 최고 경계이다.
중국고대의 미학사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중국고대 미학은 일종의 인생미학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은 인간 생존의 의미 사람의 가치와 인생의 경계를 고민하는 탐구와 사고에 근거하며 또한 인간에 대한 생명의 최종 귀속의 사고 곧 중국철학 역시 중국미학의 마지막 문제이다. 자원으로 말하면 주대의 금문에서 “진” 이 자가 있었다. “진”은 원래 역시 최고의 의미는 바로 생명귀속과 관계가 있으며 생명을 가리키는 매개체이다. “진”의 본래의 의미는 “선인이 형태를 바꾸어 하늘에 오르는 것이다.” 匕와 目으로 구성되었다. 八은 그리하여 그것에 올라타는 것이다. 진은 고대에 윗부분은 하나의 가로로 누워있는 “人”자이고 아랫부분은 시체를 올려놓을 때 사용하던 솥이다. “匕”는 허신이 해석하기를 “변한 것이다” 사람이 넘어진 것이며 무릇 匕에 속하는 것은 모두 匕에 속한다. 단옥재가 주를 달기를 “到는 지금의 倒자이다. 사람이 넘어져 匕로 바뀌는 의미이다.”라 했다. 이로 인하여 정확히 알 수 있다. “진”자 윗부분의 “匕”는 거꾸로 넘어져 죽은 사람이고 또한 살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죽은 사람까지 인생 최대의 변화이고 “匕”를 “변화하다”로 확대하여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진”은 인간이 삶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변화에서 최고 갖추고 결정하는 것 즉 생명인 것이다. 중국 고대인들은 인간은 영혼이 있으며 이 영혼은 인간의 영원불멸의 생명이며 또한 “진”은 바로 영혼의 거처이며 생명을 맡기는 곳이라 여겼다. <<열자>>가 “정신은 형체를 떠나 각각의 진실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그것을 귀신이라 한다. 귀신이 돌아가는데 그 眞宅으로 돌아간다.” 이 말은 바로 ”진“이라 말하는 것이고 바로 정, 기. 신 즉 생명의 귀속과 매개체(저장 장치)이며 인간의 사망 곧 “그 진에 반대한다.”라고 간주되어 지고 그 생명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장자>>에 뽕나무로 엮은 분이 있는 집에 돌아가신 분이 있어 공자가 자공을 보내어 초상을 처리하도록 했다. 자공은 어떤 이는 편곡을 하고 어떤 이는 거문고를 타면서 서로 화합하여 노래하며 말하길: “아 상호에 죽음이 오다니! 아 桑戶에 죽음이 이르다니! 나는 진실로 돌아가고 나는 여전히 사람 됨됨이가 있네.” 역시 죽음도 진실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진”은 생명활동이 근본이며 사람과 만물이 의지하여 존재하는 근거를 내재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자에 나오는 “진”44곳 중 명사적으로 사용된 것은 모두 생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眞宰”와 같이 생명의 주재자를 가리켜 더 이상 “정서와 인정을 구하지 않으면 그 진실을 훼손할 수 없다.”와 같이 “인은 인이요, 두려우면 그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열심히 하여 진짜를 위태롭게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호적 고증에 의하면 고대 최초의 지식인 “儒”의 사회적 역할은 바로 귀족을 도와 장례를 처리하고 그들의 영혼을 제도하고 생명으로 하여금 응당한 귀착 지를 찾게 하여 주는 것이다. 즉 “그들의 가장 중요한 생계기능은 남을 대신하여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위에 <<장자>> 중에 공자가 자공을 보내 桑戶(뽕나무로 엮은 문) 주인의 장례 처리를 도와 준 것을 인용하여 보면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이 모든 것이 고대사회에서 생명을 위해 영혼을 안정시키는 참된 장소를 찾는 것이 가장 신성한 일이며 가장 지혜롭고 귀신과의 소통에 능한 선비가 가서 완성하는 것임을 설명한다. “진”을 생명활동의 근본으로 삼는다는 관념은 서양 현대 미학에서 비로소 확립되었다. 니체는 “멋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사람만이 아름답다는 간단한 진리에 모든 미학을 세웠는데 그것은 미학의 첫 번째 진리이다.”라고 이것은 또한 현대미학의 선구자인 니체가 보기에 “진”은 생명의 존재에 기초해서 온 것이고 인생의 가장 큰 진리이다 미학의 첫 번째 진리는 생명의 자기긍정 즉 “미 속에서 자신을 숭배한다.”라고 말한 것을 설명한다. 미국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馬斯洛)의 필요 층 이론도 인간의 최고 필요와 만족을 자아실현을 위한 필요로 본다. 자기 가치가 실현된 후에 자기긍정이 일어나야 자기만족 자기숭배가 인생 체험의 높은 경지이며 그것 역시 생명심미정신의 지극한 경지이다.
정신적인 생명이 형질적인 신체에 이처럼 중요한의미를 지니자 중국 고대인들은 생명을 대표하는 “神”을 “形”보다 높은 위치에 두었다. <<淮南子>>는 神과 形을 하늘과 땅에 비교하여 덧붙이고 “정신”은 하늘과 관련이 있고 또한 뼈와 형체는 땅과 관련이 있으며 “신은 형보다 귀하다.”고 여기어 고로 神制(신이 만든 것)는 형을 따르고 형이 이기면 신은 궁색하다. 특별히 “신”은 “형”에 대한 주재자 역할을 강조한다. 이러한 생명을 중시하는 사상은 위진 시기의 인물품평에서 심화되고 보급되었다. 위진에 즈음하여 권력이 기울면서 선비들은 늘 정쟁의 희생양이 되고 사대부 인들은 처지가 위태하여 생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인물품평은 9품 중정제의 도덕 평판에서 심미적인 감상으로 바뀌었다. 위진 시대에는 현학이 성행하여 노장의 도가미학 정신은 각광을 받고 사람의 정신. 시. 뼈. 살. 피 가운데 정신적 요소가 인간품평에서 권중이 향상되는 것에 대해 “신의와 도리가 의연하다.” “신의와 긍지가 사랑스럽다.” “신의의 끝이 간절하다.” “신의와 자태가 고상하다.”와 같은 기색과 도량이 높은 이름다움은 그 높은 선비들을 칭찬하는데 사용되었다. 중국미학이 사람 중심인 것은 사람의 생명문제를 철학적 미학적 관심의 중심 문제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한위시대 인물평가의 기준을 예술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중국고전미학 특히 회화의 미학에서 예술의 실제 추구에 있어서 가장 일관된 사상은 거듭 진실 되고 약산 비슷한 것이다. 회화에서는 고개지가 “신체의 이름다움과 추함을 본래 신비함과 관계가 없으며 생동적으로 묘사하여 어느 한 곳을 주시하여 보고 있는 중이다.”라고 하였으며 서법상으로는 왕승건의 <<筆意贊>>에서 “서도의 묘는 神彩가 위고 형질이 그 다음이다.”하고 문학상에서 조비는 “글은 기를 위주로 한다.”고 하였다. 모두 사람의 미적 기준을 이용하여 예술을 측정하고 예술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으로 삼아 해석하고 그리고 예술에서의 생명표현에 대해 가장 절실하게 주시한다. 당대의 화가였던 荊浩는 “그림은 그리는 것이다. 사물의 형상을 살펴서 진면목을 취한다. ... ... 술수를 모르고 그럭저럭 할 수 있다면 정말 따라 갈 수 없다.” “아마도 그 모양을 본받아서 기개가 있고 진면목은 기질이 다 있다.“고 그림의 정의를 말했다. 즉 왕성한 ”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고 진이 아니며 진을 베끼나 회화의 별칭이 되고 회화예술의 본질은 바로 “圖眞” 즉 사람과 자연산수를 나타내는 본체와 생명의 심미형상을 창조한다. 그리하여 중국미학의 “진”은 심미대상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사람들이 항상 말하는 어떤 한 폭의 그림이 “生意(생기)”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생명, 생기, 활력이 있는 것이다. 송 대 화론가인 董逌(동유)가 말하길 “장사에 능하면 진짜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이쯤 되면 그 재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산수 인물의 생명력을 잘 표현하는 것이 회화 기예의 최고 경지를 가리킨다. 중국미학에서 중요한 범주의 意境, 神韻, 性靈, 風骨 등등 예술작품에 포함된 생명의 색채로부터 그 이론의 틀을 구축하는 것이 아닌 것은 없다.
“진”의 제2층은 지극히 높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으며 우주 인생의 근본 규율이며 즉 중국고전 철학과 미학에서 키워드인 “道” “理” “眞體” 등이다. 도가사상의 최고범주는 “도”이며 “도”의 중요한 특징은 “진”이다. 윗 절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진”은 생명의 운반체이자 귀속이며 그것은 “있음”과 “없음”의 통일이며 그것은 있고 그것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다. 그것이 없다 말하면 그것은 또 분명히 감지할 수 있고 그것을 벗어나면 만물은 존재의 근거를 잃는다. 이러한 유무의 특성은 바로 “도” 의 속성이기 때문에 노자는 ”진“을 사용하여 “도”의 존재를 표현한다.
박사 친구가
노트에 정리한 것을
해석 범위만
컴으로 다 기록하여 보라하여
옮겼는데 번역만큼이나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