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4 주간 월요일- 가난한 과부의 헌금(루카 21,1-4)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질책하신 예수님(루카 20,45-47)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들이 멸시하는 빈곤한 과부의 봉헌이 더 경건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세와 십일조를 거두기 위한 성전 금고가 마련되어 있고, 이 금고에는 나팔 모양의 13개의 헌금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자진(自進)해서 내는 헌금함으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부자는 많은 돈을 헌금함에 넣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조금밖에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는 ‘렙톤(λεπτός) 두 닢’, 곧 ‘콰드란스(κοδράντης) 한 닢’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들 가운데 가장 작은 단위로, 성인 노동자 하루 일당의 128분의 1에 해당합니다.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10만 원으로 계산하면 1562원, 6만 원으로 계산하면 약 1000원입니다.
① 루카복음에 사용된 ‘눈을 들다’라는 동사 ‘ἀναβλέπω’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Ἀναβλέψας)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ὁράω’).”(1절)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
오병이어의 기적 |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루카 18,41).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루카 18,42),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43). |
예수님과 자캐오와의 만남 |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
「성경」이 ‘눈을 들어’로 번역한 그리스어 동사 ‘ἀναβλέπω’의 문자적인 의미는 ‘위를 쳐다보다’(‘look up’)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regain one’s sight)라는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② 과부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빈곤한’, ‘가난한’, ‘궁핍한’이라는 세 형용사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πενιχρός)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ὁράω’)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πτωχός)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ὑστέρημα) 가운데에서”(2절-4ㄱ절)
성경에서 과부는 자신을 지켜줄 울타리 역할을 하는 남편을 잃었기에 부모를 잃은 고아(孤兒)와 고향과 친척을 잃고 정처(定處) 없이 떠도는 나그네와 더불어 사회적 약자로 제시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자선에 의존하면서 살았는데,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를 ‘가난한 이들’ 곧, ‘아나뷤’과 ‘πτωχός’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루카 4,18) |
참행복 |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하시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
혼인 잔치의 비유-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 |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루카 14,21)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루카 16,22) |
하느님 나라와 부자(부자 청년 이야기) |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르셨다.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카 18,22) |
예수님과 자캐오와의 만남 |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
③ 루카복음에 사용된 ‘생활비’라는 말의 의미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생활비(‘βίος’)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4ㄴ절)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직역: ‘삶의 즐거움’)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4). |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루카 8,43). |
되찾은 아들의 비유(일명 ‘탕자의 비유’) |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루카 15,12)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30) |
우리는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에서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타의 과부(1열왕 17,12)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신앙인들의 참된 봉헌은 세상적인 계산에 따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쓰고 남은 조각을 하느님에게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길’(‘진복팔단’: 마태 5,3-12) 가운데 첫 번째 길로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가난한 이들의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beati pauperes spiritu quoniam ipsorum est regnum caelorum”: 마태 5,3)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오늘의 강론을 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2).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