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신(白南信)
■제자의 생애1
1. 본명 낙신(樂信), 남신(南信)은 어사명(御賜名)
2. 본관 수원(水原)
3. 부(父) 백현수(白顯洙)와 모(母) 정씨(鄭氏)의 장남
(長男 : 養子)
4. 무관(武官 : 육군 부령(副領), 대실업가)
5. 무오(戊午 : 前 13, 1858)년 12월 9일, 전라북도 완주군 관촌면(完州郡 關村面)에서 출생.
본적 :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경신 (庚申 : 1920)년 1월 26일, 63세로 작고.
■입도
1. 계묘(癸卯 : 33, 1903)년 봄, 46세
2. 김병욱 제자의 천거로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수많은 돈을 상제님의 천지공사 소요 경비로 헌성하였다.
■생애2
배진수(白晉洙)와 최씨(崔氏) 사이에서 6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생부(生父)으 종제(從弟)인 현수(顯洙)의 집안으로 입양되었다.
양부(養父)는 20대에 승정원 좌승지 벼슬을 하였는데 일찍 돌아가시고 후손이 없어 20대 과부가 된 부인 정씨(鄭氏)가 자손을 잇기 위해 생가의 둘째 아들이던 남신을 양자로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생가에서는 집안에서 남신이 제일 똑똑하다고 양자로 내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 양모인 정씨가 하루는 꿈을 꾸는데 집안으로 말(馬)이 들어왔다고 한다(이것은 백남신 제자가 태어난 해에 해당하며, 지금도 그의 묘비에 이 이야기가 적혀있다).
생가에서 남신을 그렇게 주지 않으려고 하므로 남신의 양어머니신 정씨가 아예 그의 생가에 가서 마당에 거적을 깔고 앉아 굶었다.
이것을 보다 못한 생가에서 나중에는 큰일 났다며 '저 청춘과부가 죽으면 큰 귀신이 돼서 잘못되게 생겼다.며 백남신 제자를 양자로 내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양자로 들어온 남신은 처음에는 배포도 크고 해서 젊은 양어머니가 키우는데 애도 많이 먹었지만 아주 엄하게 가르치면서 키웠다고 한다. 계사(癸巳 : 23, 1893)년 38세에 종 8품의 무직(武職)인 무사과궁내주사(富司果宮內主事)로 궁궐(宮闕)내의 관직에 임용되었다.
그 후 육군 전주 진위대(鎭衛隊) 향관(餉官)으로 배속받아 직속상관인 이재한(전주진위대 대장으로 추정)과 함께 고종황제의 직명으로 동학혁명을 평정하기도 했다.
백남신 제자의 원래 이름은 낙신(樂信)인데 동학혁명을 평정한 후 고종황제가 "삼남(전라, 경상, 충청)은 믿고 맡길 신하다."라는 의미로 남(南)자 신(信)자의 이름을 하사해서 남신(南信)이 되었다.
계묘(癸卯 : 33, 1903)년 김병욱 제자에 의해서 상제님께 천거될 때는
김병욱 제자의 상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제님을 추종하면서부터는 천지공사에 필요한 비용과 동곡약방을 만드는데 필요한 비용과 동곡약방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등 많은 재물(20만 냥 이상)을 헌성하여 여러 제자중 물질적으로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갑진(甲辰 : 34, 1904)년 정월에 관액에 걸려 상제님께서 풀어 주신 이후로는 오히려 참령(參領 : 영관급으로 현재의 소령에 해당)으로 진급되어 육군 전주진위대 대장이 되었다. 이 때 김병욱 제자는 무기주관(武器主管) 참위(參慰 : 위관급으로 현재의 소위에 해당)로 직속부하였다.
백남신 제자가 관직에 있을 때 서울에 자주 왕래를 해서 서울에 마련해 놓은 집이 낙원동의 현재 낙원 시장이 들어서 있는 곳에 건평이 1,000평에 98칸의 대규모였는데 당시 조선에서 가장 잘된 집을 보러 나올 때는 이 낙원동의 집에 왔다고 한다.
을사(乙巳 : 35,1905)년에 일제의 강점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 열사와는 막역한 친구로 지냈는데 그가 자결하는 남 백남신 제자의 집으로 찾아와 서성거리다가 사랑방에 손님이 많이 와 있어서 다른 곳에 가서 자결했다고 한다.
일제가 우리 땅을 강점하여 1907년 8월 전국의 진위대가 해산된 이후 백작의
작위를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관직을 버리고 야인이 되어 농산물 집산지인 이리에 자리를 잡고 쌀장사를 했다. 그 때는 쌀을 군산에서 인천항 해로를 통해 서울로 운반했는데, 한 번은 배에 쌀을 선적하는 사이에 쥐가 쌀가마니를 뚫어서 그것을 손질하느라고 며칠 동안 군산에서 배가 뜨지 못하고 있는데, 그 며칠 사이에 서울에서 쌀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큰 이득을 보게 되었다. 이후로 신명이 돕기라도 한 듯 굉장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 부의 정도가 집의 하인만 해도 한 50명이 있었고 인력거도 두 대로 하나는 아들인 인기가 타고, 하나는 식구들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에는 인력거 다음이 자가용으로서 조선총독과 고종황제만이 캐딜락을 타고 다녔을 뿐 차가 없었느데 그 때 백남신 제자도 캐딜락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약간은 검은 피부에 키는 160cm가 조금 넘었고, 식사를 할 때는 늘 '큰상에다가 반찬을 꽉 차게 많이 하라'며 '내 상에 많이 해놔야 내가먹고 물리면 집안 식구들이 많이 먹을 수 있지 않느냐' 했다고 한다.
박씨(朴氏)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인 인기는 일제시대 때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당시의 동일은행을 창립하고 전매청의 전신인 연초공사와 한국 최초로 생긴 경성 고무공장을 운영하였으며 경성 전기회사의 감사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