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의 일대기
심훈(沈熏, 본명 大燮, 1901~1936) 선생은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現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177-1번지)에서 아버지 심상정(沈相涏, 1871.9.19.~1930.3.9)과 어머니 해평 윤씨(1870. 6.26 ~ 1956.6.20)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흑석리(現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6-10번지로 이주했다.
1915년 교동공립보통학교(5회)를 졸압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었고,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이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징역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약 8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정리하고 출옥했다.
풀려나고 퇴학당했다. 3.1 운동 가담으로 체포된 직후인 3월 17일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관련 학생들의 평소 성품과 행실을 조사한 '학생성행조사서'에서는 심훈에 대해 '영리하나 경솔하여 모든 명령 등을 확실하게 실행하지 않는다. 게으른 편이어서 결석·지각 등이 많고 평소부터 훈계를 받아 온 자이다.'라고 설명했다.
출옥 후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은 그는 곧 중화민국 절강성 황현(杭縣)으로 건너가 지강대학(芝江大學) 극문학부에서 공부하였으나, 복역 시절의 후유증으로 결국 중퇴했다. 1923년에 귀국하여 신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를 만들었고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가자생활을 하며 詩와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5년 5월에 철필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퇴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를 떠난 후에도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 소설인 《탈회》를 동아일보에 1926년 11월부터 연재했다.《탈회》를 계기로 영화계에 진출해 이듬해 이경손 감독의《장한몽》에 배우로 출연했으며,《먼동이 틀 때》의 시나리오를 쓰고 각색 및 감독을 맡았다.(필름이 남아 있지 않음) 1930년 조선일보에 중편소설 《동방의 애인》을 연재했는데,일본 경찰의 검열에 걸려 완성되지 못하고 집필이 중단되어 미완성 소설로 남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모델이 박헌영과 주세죽이라고 한다. 1927년 12월 2일에, 조선일보에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기고한다.
심훈은 박헌영과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이고 친구 사이였는데, 박헌영이 신의주사건으로 인해 형무소에 수감되고 1927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을 때 매우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에 분노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 여기서 박군은 박헌영을 가리킨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海綿)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 마주 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박아 박군아 XX(헌영)아!
사랑하는 네 안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을 빼어서 갈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X(한)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이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영화 평론가로도 활약했는데 메트로폴리스를 극장에서 감상하고 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 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32년 어머니 해평 윤씨가 거주하던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필경사(筆耕舍)'를 짓고 1935년 장편 소설《상록수》를 집필했는데, 이 소설이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금을 받았다. 그는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다. 그리고《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탄압 등 여러 사정으로 끝내 만들지 못했으며,《상록수》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시는 <오오 조선의 남아여>인데,1936년 베를린 올림픽때 동갑내기인 손기정, 남승룡 두 마라톤선수가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는 조선중잉일보의 호외 소식을 길거리에서 주워 들고 그 자리에서 감격하여 신문지 뒷면에 즉석해서 시를 지었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伯林마라톤에 우승한 孫, 南 양군에게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 3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精靈)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그 뒤 그는 《상록수》의 출간 작업을 위해 당진군에서 경성부로 상경해 한동안 한성도서 주식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경성부 연건정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급히 옮겨져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고 결국 1936년 9월 16일 아침 8시 요절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었던 여윤형은 심훈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으면서 이 시를 낭송하였고, 관을 안으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당초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서봉마을에 안장되었다가, 1990년대 중반 용인시 일대가 개발되자 안성시 삼죽면 마전리 산19-7번지로 이장되었다. 이어 2007년 12월 5일 셋째 아들 심재호(沈載昊, 1936 ~ )에 의해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 필경사(筆耕舍) 경내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른다.
- 디지털당진문화대전-에서 옮겨옴
첫댓글 잘 감상하였습니다./ 기행 잘 하십시오..저는 지난주 땡땡이 치는 바람에 이번주에는 호미잡으러 갑니다.
그렇죠.
땡땡이에는
꼭 벌이 따르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