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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12강
말씀 / 잠언 22:17-23:35절
요절 / 잠언 22:28절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어떤 분이 주중에 이찬혁의 “장례희망‘이란 곡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재미와 감동을 함께 받았습니다. 유명 연예인으로 신분상승을 했는데, 선교사 2세라는 지계석을 옮기지 않고 살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오늘 말씀 제목은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지고 사는 모습이 달라져도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해 변함없이 지켜야 할 것들을 돌아보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지혜와 지식을 주는 잠언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말고 마음에 간직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것을 네 속에 보전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마음에 보전하고 입으로 소리까지 내어 암송하면 아름답습니다. 20절에서는 모략과 지식, 곧 잠언 말씀 자체를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말씀 자체가 아름답고 말씀을 마음에 담고 암송하는 모습 또한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람마다 아름답게 보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소방관을 아름답게 봅니다. 영웅입니다. 장래 희망직업 순위를 따지면 항상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갑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름다운 영웅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 3D 업종 종사자로 내려옵니다.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답게 보였는데, 막상 그 길의 실상을 알고 나면 다르게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과거 어떤 분은 허준 같은 한의사가 되는 것을 최고로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서울대 의대와 경희대 한의대를 동시에 합격했는데, 경희대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한의사가 처한 현실을 보자, 크게 실망하여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로 만나지 못했더라면, 술과 담배로 허무를 달래다가 추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부와 권력과 학문의 정점에 앉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는 성공의 자리가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19절을 보시시오. 말씀 따라 여호와를 의뢰하며 사는 것이 아름다움을 알기 원했습니다.(19) 창세기의 요셉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그러합니다. 이집트 총리에 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캄캄한 어둠이 여러 번 그를 덮쳤을 때에도 변함없이 여호와를 의뢰하며 빛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그가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 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광야에 있든지, 왕궁에 있든지 심지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자의 길을 가든지, 여호와를 의뢰하는 믿음을 따라 걸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빛나는 모습인 것도 그러합니다.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이 다가올지라도 담대히 그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에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화답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별과 같이 빛나게 됩니다.(21)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비결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사람에 대해서는 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세상은 강약약강입니다. 약한 자를 탈취하여 부를 쌓는 것을 지혜요 특권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약한 자들의 원통함을 듣고 갚으시는 분이십니다.(23) 당장 이득을 위해 약자를 수탈하는 사람은 절대 생명의 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약자 보호와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상처 입은 자들이 노를 품고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이 울분에 빠집니다. 그들은 위로와 격려, 동행이 필요한 약자들입니다. 여기서 노를 품은 자와 울분한 자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NIV 번역이 명확합니다. hot-tempered, 뜨거운 기질의 사람. 사소한 일에 쉽게 성내고 거친 말을 토하는 사람입니다. 반사회적 성향을 가졌거나 피해의식에 쪄든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들을 약한 자로 헷갈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과 동행하다가 성내거나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당연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화내는 맛에 익숙해지면 가인처럼 올무에 걸립니다.(25)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는데, 보증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더불어 손을 잡는다’는 것은 보증을 확증하는 예식입니다. 따라서 26절은 “너는 보증을 서지 말라,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반복적인 표현입니다. 절박하니까 ‘보증’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증서는 것과 약자 돕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보증 섰다가 침상까지 빼앗길 수 있습니다. 당시 평민들은 대부분 겉옷을 바닥에 깔고 잠을 잤습니다.(출22:25,26, 신24:10-13) 침상에서 자는 것은 어느 정도 기업을 일군 사람입니다. 침상을 빼앗기는 것은 힘써 이룬 기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기업을 지키는 것은 절대 사명입니다. 기업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요소는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지키는 것이면서 아울러 하나님앞에 청지기적인 자세를 지키는 것입니다. 나의 가정이나 기업을 위태한 지경으로 던질 수 있는 권리가 내게는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지계석이란 자기 땅이 어디까지인가를 표시해놓은 돌입니다. 요즘이야 GPS 찍으면 바로 나오겠지만, 고대에는 지계석으로 표시했습니다. ‘옛 지계석’이라는 말씀은 가나안 정복 전쟁 때 세워놓은 지계석이 솔로몬 시대에 와서는 수백년전 세워진 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그때 그 시절과 지금 솔로몬 시대의 상황은 많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지금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 살아가는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집도 달라지고 음식도 달라지고 옷도 달라지고 살아가는 생활의 패턴도 달라집니다. 지난 주 어떤 분이 보이스톡 일대일을 요청하여 그리했는데, 피차 은혜를 받았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입니다. 믿음 = 현장에 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찬양이나 메시지에 동원하는 미디어도 그러합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유익한 도구들을 적극적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럴지라도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옛 지계석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유업 혹은 계명을 상징합니다. 농경시대 땅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유업이었습니다. 계명이나 말씀 또한 대표적인 하나님의 유업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질지라도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동성애를 허용할 수 없는 선이 그러합니다. 인권시대,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창조질서를 넘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에서 자주 지키라고 강조하는 유업은 부모 공경의 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십계명중에서 인간에 대한 첫 번째 계명입니다. 부모의 재정 상태에 따라 혹은 자녀의 재정 상태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지계석을 옮기지 않는 것처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변함없이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은 자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나 부르심의 사명도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옮기지 말아야 할 지계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큰 배가 닻을 내려야 떠내려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유업을 지키는 것이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고수, 자기 분야의 고수로 빚어지는 비결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달인’으로 부릅니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달인은 존귀한 자로 대접받습니다. 문제는 아무나 달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달인의 조건으로 1만 시간 법칙을 말합니다. 하루 8시간 10년 동안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단순히 시간만 지키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재능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탁월한 재능을 가졌는데도 달인이 되지 못할 수 있는데, 위기앞에 쉽게 포기하고 다른 것을 찾아 이동하는 사람입니다. 위기를 만나 깨어지고 넘어서는 과정을 여러번 거치면서 달인이 되고 고수가 됩니다. 달인들은 하나같이 위기의 시간을 지나며 만들어졌습니다. 남의 빚에 보증을 서주지 말라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당장 고통을 덜어주는 것보다 몸부림치며 성장하도록 놔두는 것이 진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당장 고통을 덜어주다가 돈 잃고 사람까지 잃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 성경의 대원칙입니다.
23: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관원은 9급 공무원이 아니라 통치자, 상급자를 말씀합니다. 그가 뭐가 아쉬워서 풍성하게 접대하는 것일까요? 무서운 노림수를 숨겨둔 속이는 음식일 수 있습니다.(3) 맛있는 음식은 불의의 재물을 상징합니다. 그런 것들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4) 예를 들어 주가 조작을 하고 부동산 사기를 치고 피라미드 금융장사를 통해 큰 돈을 버는 자들이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지라도 붙잡지 말아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부당거래를 통해 대박을 터뜨려 돈을 벌지라도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독수리가 얼마나 빨리 날아갑니까! 쉽게 얻은 재물은 쉽게 날라갑니다. 2001년 미국 금융교육기업 심포지움에 의하면 복권 당첨자의 70%가 당첨 후 수년 내에 파산했다고 합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NIV에서는 stingy man, 인색한 사람입니다. 스크루이지 영감처럼 인색한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차린 것은 불순한 의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몰래 집에 들어오면 개들이 짖는데, 그때 고기를 던져주면 대부분의 개들은 넙죽 받고 꼬리를 흔들며 웰컴한다고 합니다. 고향 시골방앗간에서는 수면제를 탄 고기를 먹은 개까지 도둑 당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호의를 베풀 때, 그 마음을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7) 미련한 개처럼 받아먹는 사람은 조금 먹은 것도 토할 것이며 인간관계마저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8) 물론 미련한 자는 아무리 경고해주어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9) 지혜롭게 권면하는 사람을 세상 물정 모른다며 업신여길 것입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22장 28절에 이어 다시 한번 기록했습니다. 앞의 말씀은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킴’이 강조했다면, 여기서의 말씀은 ‘타인의 것을 넘보지 않음’이 강조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한 족속, 한 가문의 어른들이 모두 전사해버리는 일이 일어나면, 남은 고아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때 이웃 족속, 이웃 가문이 어찌해야 합니까? “어른이 될 때까지 양식을 공급해주고 지켜주자!”, 그리했을까요? “너희들, 땅을 넘겨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드릴께” 라고 했을까요? 기업을 확장할 기회로 보고 고아들의 밭을 빼앗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재테크에 빠른 센스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쌓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환난당한 자, 약한 자들의 구속자입니다. 지계석을 옮기며 타인의 환난을 이득거리로 삼는 자들은 반드시 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탐심을 좇아 살지 말고 훈계에 착심하고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12)
13절을 읽겠습니다. 훈계의 필요성은 모두가 공감하는데, 문제는 ‘채찍으로 때리라’입니다. 채찍은 가장 고통스런 체벌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는데, 회초리도 아닌 채찍으로 때리라니요! 가정 폭력, 학교 폭력으로 신고당하기 딱입니다. 문화적으로 이해하자면, 채찍으로 때려도 참고 받아들이는 시대였기에 가능한 말씀입니다. 저의 청소년 시절은 무지막지한 구타를 ‘사랑의 매’라고 포장해도 어느 정도 받아주는 분위기였습니다. 지금 문화는 그렇지 않으니, 때리면 안된다는 주장입니다. 원리적으로 이해하면, 고통이 없으면 훈계가 새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마음 깊이 새겨지는 시기를 보면, 대부분 뼈아픈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을 때, 심령은 가난해지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교육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의 아파하는 모습을 너무 힘들게만 볼 때입니다. 채찍으로 때린다고 해서 아이가 죽지 않듯이, 고통 자체가 아이의 영혼을 파괴하지 않습니다.(14) 오히려 성경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며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했습니다. 고통가운데 하나님의 연단과 소망이 말씀으로 심겨진다면, 그것은 탁월한 영혼의 보약이 됩니다.
물론 어느 한 시기만 떼어 평가하면, 훈계는 안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훈계받은 아이가 ‘상처받았다, 반발심이 생겼다, 기가 죽게 되었다. 자존감이 낮아졌다’라는 피드백을 돌려줄 때입니다.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말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육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장에 좋은 결과로 돌아올 수 있고 먼 훗날이 되어 돌아올 수 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결과를 놓고 저울질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과 정직한 말로 훈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갔는데, 하나님을 떠나 죄인의 길로 빠져들고 있다면, 결코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어느 자리, 어느 모습이든지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며 사는 것, 그것이 최고의 형통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길이 없는 곳에 길이 생기고 남들이 보지 못한 그곳이 축복의 자리가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훈계하는 사람은 장래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18) 자녀 교육 팁이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훈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19) 20,21절을 보십시오. 술을 즐겨하고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 더불어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껏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최근입니다. 술을 즐겨하고 고기를 탐하는 자들은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을 상징합니다. 아울러 세상 쾌락을 맨 앞자리에 두고 사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자녀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몰락하고 말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21)
22-26절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세를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청종하고 늙은 어머니를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22) 23절 말씀이 22-25절의 부모공경하는 말씀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부모 공경의 진리를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가 사고 파는 것, 경제논리라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처럼 이득을 따지는 사람은 부모를 공경할 수 없습니다. 부모공경은 십계명에서 인간에 대한 첫째 계명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사람이든지 절대 지켜가야 할 진리입니다. 부모 공경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지혜로운 인생, 명철을 잃지 인생입니다.(24)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들에게 ‘네 생명이 길리라’, 장수를 약속했습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부모를 즐겁게 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효도를 유교의 유산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주를 보내며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모가 남긴 신앙의 유산을 따라 가는 것이 참된 효도입니다.(26)
27-35절은 음녀와 술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음녀는 창녀를, 이방 여인은 계명을 몰라 성적으로 문란한 여인을 말합니다. 쉽게 즐기고 쉽게 헤어질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깊은 구덩이와 좁은 함정에 비유했습니다. 28절에서 음녀와 이방 여인을 강도와 사악한 자에 비유한 이유입니다. 양심을 파괴하고 거룩한 소원을 소멸시키고 신자의 정체성을 빼앗아 버립니다. 성적 방종의 유혹을 물리치고 경건한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삶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29절부터 35절까지는 술 취한 자와 술 자체의 해악을 길게 말씀했습니다. 술은 재앙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29) 근심이나 분쟁, 원망이나 상처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폭탄주를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습니다.(30)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갑니다. 맥주는 멋지게 거품이 일면서 흘러넘칩니다.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고 싶어집니다.(31) 그러나 31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그것을 보지 말지니라” 독사에게 독이 있는 것처럼, 술에는 독이 있습니다. 술 취하면 눈에 괴이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33) 자신은 바다가운데 누운 자처럼, 돛대 위에 누운 자처럼 위태위태한데도 그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합니다.(34) 가끔씩 음주 사고로 평생 공들여 쌓아놓은 탑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때려도 아프지 않고 상하게 해도 감각이 없습니다.(35) 끔찍한 고통이라도 잠시나마 잊게 해 줍니다. 건강에 안좋은 줄 뻔히 알면서도, 위기를 불러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다시 술을 찾고 들이키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술에서 깨어나면 여전히 현실은 달라져 있지 않습니다. 마치 수술해야 하는데, 진통제만 들이키고 있는 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방향을 잡고 순종하며 사는 것, 예나 지금이나 가장 지혜로운 해결책입니다. 예부터 내려온 이 길을 옮기지 말고 다시 한번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