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구원 (이사야 33:1~6)
성경이 너무 방대해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지 못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해 나가실 때는 하나님이 자유롭게 멋대로 좌충우돌 일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칙이 있다는 것이 중요.
그 원칙이 무엇? 그 원칙에 주목하지 않으면 성경을 인간의 편리대로 보게 된다. 인간의 원칙대로. 성경이 난도질당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은 언약. 언약이라는 흐름으로 프레임이 짜여있다. 구약, 신약. 하나님 언약은 최종적으로 어떤 언약을 말씀하시는 것? 아담과 언약, 노아, 모세.. 수없이 많은 언약이 있지만 최종 지향점은 어디?
예수님이 말씀하신 ‘받아 마시라 이것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큰 원칙. 기차가 레일 따라 굴러가듯.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세워지는 새 언약이라는 레일 위에서 움직인다.
쉽게 다가올 수 있지만 문제는 언약이라는 것이 ktx레일처럼 놓여있고, 우리가 그 레일 위를 걸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문제. 언약이 우리를 덮쳐온다. 하나님이 우리를 잡아다가 언약에다 집어넣어 버린다.
마치 컨베이어 시스템 위에 놓인 것처럼 하나님 언약 위에 놓이면 언약이 우리를 착착 만들어간다. 그 언약에 실려 살아가게 되는 인생이란 것이 우리가 설정해놓은 인생 시스템과 다르기 때문에 거기서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아픔이 다가온다.
사실 아픔이랄 것 없는데 우리가 설정해놓은 목표가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 우리가 설정한 목표, 혹은 우리 육체의 목표. 아픈거 싫고 포근한 거 좋고. 하나님 레일 위에 담기면 우리의 육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1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 네가 학ㄷ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아프게 했던 모든 세력을 두고 하는 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언약이라는 프레임에 담기 위해 동원한 많은 민족들이 있다.
제발로는 언약의 여정에 합류할 수 없다. 아무도 예수님이 걸어가신 새 언약의 길, 십자가로 세워진 새 언약의 길에 자발적으로 합류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변 이방 민족, 주변 사람, 주변 여건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압박해서 이스라엘을 속이고 학대, 죽이는 자리로 몰아붙인다.
그게 앗수르, 바벨론.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땐 애굽이 그 역할. 이스라엘은 항상 주변 민족으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 가나안 땅 들어간 후 그들이 평안함? 그렇지 않다. 사사기 보면 계속해서 주변 민족들이 괴롭힘. 메소포타미아, 모압, 암몬...
그것이 주변 환경 통해 죽음의 길로 우리를 몰아붙이는 것. 왜냐하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 자기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이기 때문. 예수님 길은 십자가의 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구원이라는 것은 반드시 죽음 속에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오는 생명. 그것이 하나님이 주고싶어하시는 생명.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이 모델. 바꿔말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죽음 속에 들어갔다가 그 죽음 이기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오는 과정. 죽음을 이기는 구원만이 진짜 구원이다. 병이 나았다, 부자가 됐다.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 다 가짜복음.
모든 하나님 백성들은 잃었다 다시 얻어져야 하고, 죽었다 다시 살아져야 한다. 탕자.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우리 생명 잃었다 다시 찾는 것, 죽었다 사는 것. 십자가의 길.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언약의 틀.
항상 이스라엘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애굽에 있을 때는 애굽 바로에 의해 죽음 속에. 나올 때는 어린양의 피로 나온다. 마찬가지로 홍해바다에 들어감- 죽음. 자발적으로 들어간 것 아니고 뒤는 애굽이 따라오고 어쩔수 없이
이스라엘이 선택해서 언약으로 간 것 아니고 구름기둥 불기둥이 유도. 타고난 우리 목숨 자체를 하나님이 죽이심. 죽이시기 위해서 학대당하지 않고 학대하는 자들- 주변 강대한 민족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죽인다. 모압 암몬.. 끝없이 뭘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죽인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2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우리가 죽음 속에 들어가면 주님밖에 소망없다는 식으로 주를 바라본다. 주의 은혜만을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마치 수로보니게 여인 주인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것으로 감지덕지한 상 밑의 개같은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나를 개로 봐도 좋으니 오직 주의 은혜를 바라보는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답변 ‘구원 받았다’
2~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팔은 능력을 말한다. 아침마다 주님께서 우리의 능력이 되어 주세요. 주님이 우리 구원이 되어 주세요. 우리 힘으로는 죽음이니까.
하나님께서 주변 상황 동원해서 욥처럼,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풀무, 사자굴. 그 풀무불에 던져질 때 그들의 심정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것.
3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 우리를 죽음 속에 던지시고 죽었구나 했을 때 우리를 죽이러온 모든 민족들을 흩어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죽음 속에 들어갔던 자들만의 고백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총 때문’ 설죽어서는 그런 고백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에너지가 완전 고갈 상태, 이제 우린 죽었구나 하는 순간에 집어넣으시고 주님이 일어나셔서 우리를 죽였던 환경을 걷어버리신다. 그 때 우리의 답변은 ‘오직 나의 구원은 주님이시다’
5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여기에는 인간의 존귀함이 섞이지 않는다. 오직 주님만이 존귀하시고 정의, 공의, 다 주님의 뜻, 주님이 십자가로 이루신 모든 공로만이 정의가 되고 공로가 된다.
바꿔말해 내가 천국에 들어갈 의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생각을 주님이 다 털어버리신다. 죽음 속에 들어가봐야 안다. 내가 자랑할 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뭘 할때마다 반대급부를 바란다. 순수한 사랑 아니고 거래하듯 살아온 것. 주 앞에 내놓을 수 없다.
주님이 우리를 죽이실 때 우리가 그동안 기대했던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안다.
6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경외한다는 것은 아직 우리의 힘이 있을 때는 경외가 안생기고 우습게 보인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원칙이 무엇? 일단 잃었다가 다시 찾아지는 것.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처럼 잃어버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죽음 속에 집어넣었다가 살아나는 구원. 죽음 속에 들어갔다가 주님에 의해 생명으로 구원된 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죽음을 이기는 구원이 있느냐? 죽음 속에 들어가봐야 안다. 죽음을 줬을 때 죽음 속에서만 비로소 우리에게 있는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생명인지, 아니면 착각인지, 사망의 세력을 보내면 그 때 본색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 잃었다 찾는 식. 항상 죽음의 세력 속에 넣었다가 살리는 방식. 사자굴에 넣었다 빼는 방법, 홍해, 용광로, 예수님처럼 사흘동안 무덤에 넣었다 빼내는 방법. 하나님이 운영해나가시는 언약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모델이고.. 예수를 죽였던 죽음이 항상 우리를 찾아오게 되어있다. 대제사장, 장로에게 버림받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버림, 다니엘과 친구들은 페르시아에 버림, 우리는 세상의 물질, 인기.. 매일 예수와 함께 죽는 것.
고전15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죽을 위기 없이 매일 행복한 것이 자랑인데 왜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이라고 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이 설정하신 구원의 모델. 예수님처럼 죽고 예수님처럼 살지 않으면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확정해놓으신 언약의 원칙, 모델,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한 구원에 합류된 것이 기쁨. 매일 죽음이 자기를 찾아 오니까. 원치않은 죽음이지만 아파죽겠고, 돈이 없어 죽겠고. 항상 찾아오는 죽음 속에서 예수 죽음으로 합류되는 과정속에서 자랑.
핫도그. 밀가루 반죽을 끓는 기름에 넣어 한참 튀기다 꺼내면 맛있는 핫도그. 뜨거운 기름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으면 핫도그 아니다. 모든 성도는 매일 뜨거운 기름 들어가듯. 하나님 기뻐하시는 주의 백성 되는 것. 새 언약의 원칙 속에서 구원.
어차피 세상은 죽음.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영생불사 못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러다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사는 새 언약의 틀 속에 집어넣으신다면 그것이 우리 기쁨 자랑.
날마다 아침마다 주여 우리 구원. 굳모닝 아니고 매일 아침마다 주님께서 우리의 팔 되심. 오늘도 나를 죽이시고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삶.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일하시는 새 언약 통해 확고하게 나타난 것을 우리가 발견.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의 선진이 그랬듯 늘 잃었다가 다시 얻어지고 세상 죽음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나오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언약적 삶이 늘 우리 삶에 충만하게 해 주시고, 그 언약적 삶이 기쁨 안도 담대함이 될 수 있도록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