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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학교 가는 날
밥 상위에는 그래도 봄이라고 냉잇국이며 돋나물에 두릅까지 올라와 있었다. 밥상 앞에 앉아 있는 태수는 어젯밤에 밤이 이슥해 지도록 옆집의 운보하고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둘 다 요즘 벌이가 시원치 않은 탓에 천 원짜리 고등어 통조림으로 안주를 시작했다. 나중에는 생라면을 바숴 먹으며 소주를 마셨더니 밥에서 아카시아기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수저를 내려 놓고 싶지만, 밥을 먹지 않았다가는 요즘 돈을 벌어 오지 않는다고 궁시렁 거리고 있는 아내 미경의 심기를 건들을 것 같았다.
아침부터 여자한테 잔소리를 들으면 거리에서 경찰을 자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억지로 밥 한술을 입안에 구겨 넣고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냉잇국을 내려다 봤다.
“오늘 일 나갈 거예요?”
“오늘?”
“제가 오늘이라고 말했잖아요.“
태수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미경이 멸치 볶음을 작은 그릇에 담으며 오늘 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
태수는 냉이와 콩나물을 넣고 끓인 냉잇국에 수저를 담그다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일을 나가려면 며칠 전에 벌서 염탐을 해 두었어야 한다. 요즘 꿈도 좋지 않다. 계획 없이 우발적으로 빈집을 털었다가는 짭새들에게 달려가기 딱 좋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방바닥에서 뒹굴며 케이블방송에 코를 박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당장 며칠 내로 급한 보람이 피아노 학원비야 미경이 어떻게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장인어른 생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작년 생신 때는 불행하게도 학교에서 점잖게 수양하고 있던 중이라서 참석을 하지 못했지만 올해는 꼭 가야한다. 생일날 가려면 그냥 갈 수는 없다. 수원에서 보석상을 하는 큰 동서나, 천호동에서 은행에 다니는 작은 동서의 씀씀이가 있다. 제주도 여행권이나, 양복 티켓 정도는 내 놓을 것이다. 주머니 사정 생각해서 돈 십만 원 내 놓았다가 동서들한테 기는 기대로 죽고, 몇날 며칠 동안 미경에게 바가지를 긁히지 않으려면 체면치례라는 걸 해야 한다. 체면치례를 하려면 돈 백만 원은 있어야 하고,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만한 돈을 벌려면 하루 이틀 상관에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늘부터라도 돈이 있을만한 곳을 물색해야 한다. 그런데도 선뜻 대답하지 않은 것은 미경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제 또 헛소리를 지껄였나?
미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선을 보람이에게 돌렸다. 밥상을 차려 놓고 억지로 깨운 딸 보람이는 우거지상을 쓰고 앉아 있을 뿐 수저도 들지 않았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젯밤에 집에 들어왔을 때 식당에서 늦게 퇴근을 미경은 샤워를 하고 있었고, 보람이는 제 방에서 자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난 자리가 안방이 아니고 거실의 소파였던 것을 기억해 보면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든 것이 분명한 것 같았고, 미경을 화나게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미경의 목소리가 살얼음처럼 차갑게만 와 닿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늘 식당에 단체 손님 있대요. 웬만하면 빠지려고 그랬는데 오늘은 다른 손님들은 받지 않고 단체 손님만 받는대요. 그런데도 일당을 곱절로 쳐 준다고 하니 빠질 수가 없잖아요.”
미경은 의식적으로 태수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어제 식당에서 가져 온 멸치볶음을 보람이 앞으로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구운 김에 밥을 싸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보람이 입에 반쯤은 억지로 쑤셔 넣은 후에야 수저를 들고 태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식당에 빠질 수 없는 거 하고 나 일 나가는 것 하고 뭔 상관이 있는데?”
미경은 버스 종점 근처에 있는 갈빗집에서 하루 열 시간씩 설거지를 해 주고 일당을 오만 원씩 받는다. 태수가 오만 원의 두 배면 십만 원, 십만 원이면 시장 안에 있는 성인오락실에 가서 몇 시간은 땡길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오늘 미란이네 반 급식 당번해 주러 가야 하는 날이에요. 돈이 있으면 사람을 사서 대납을 할 수도 있는데, 설령 돈이 있다고 해도 세 시간만 일을 하면 되는데 삼만 원을 줘요? 협정가격은 아니지만 못 줘도 오만 원은 줘야 한다는데, 어떤 년은 열 시간 동안 손가락이 물러 터지도록 설거지를 해 봐야 겨우 오만 원밖에 못 받고. 어떤 년들은 겨우 세 시간 손끝에 물만 찍어 바르고 끝내는데, 수고비로 오만 원을 줘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오만 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비싸네. 당신 말 들어 보니까 여자들이 많아서 별로 할 일도 없다고 하든데 세 시간에 오만 원이면 칼 안든 강도나 똑 같군.”
“저도 당신하고 같은 생각이에요. 그래서 오만 원은 절대루 못 줘요. 하지만 사람을 사 넣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학교에 가야 하잖아요.”
미경은 옆집의 운보가 학교에 가기로 한 점을 알고 있었다. 태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학교에 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당신은 식당에 빠질 수가 없다고 했잖아. 그럼 천호동 사는 처제가 대신 가주기로 했나?
태수는 미경의 표정으로 보아서 자신에게 급식당번을 하러 가라고 시킬 것처럼 보였다. 하나 밖에 없는 고명딸이 보는 앞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배식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수저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미경을 쳐다봤다.
“처제가 뭐가 부족해서 나대신 학교 가서 밥주걱을 흔들어요. 내 대신 수영장이나 헬스클럽에 가라면 혹 모를까.”
“사내 대장부가 여자들 틈에서 남자가 고무장갑 끼고 반찬을 나누어 주는 그림은 괜찮아 보이는 모양이지?”
“아빠가 학교에 급식당번 하러 오면 나 점심 안 먹을 거야.”
미경이 싸 준 김밥을 쓴 약 먹듯이 간신히 삼킨 보람이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섰다.
“보람이도 초등학교 육학년이라구. 제 아빠가 학교에 가서 주걱 들고 설치면 나만 쪽팔리는 것이 아니고 보람이도 쪽 팔리는 일이니까 다른 방법을 연구 해 봐.”
태수는 오늘 따라 보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애비를 위해주는 자식은 역시 딸 밖에 없다는 생각에 느긋하게 말했다.
“보람이는 내가 설득해 놓을 테니까 당신은 시간 되면 학교에 갈 준비나 해요.”
“못 간다면?”
“당신 혼자 빨간 고무장갑 끼고 있으면 내가 죽일 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옆 집 봉구 아빠도 간다고 했으니 봄놀이 삼아 다녀와도 되겠네요.”
“아니? 운보 그 낯짝이 학교에 간다고 했단 말이지?”
“봉구 엄마 하루 일당이 얼만지 아세요? 온종일 종점에서 시내버스 청소해 봐야 삼만 원 밖에 못 받는다구요. 그럼 봉구 아빠가 오만 원을 만들어 내든지, 봉구 엄마가 일당에 이만 원을 더 붙여서 줘야 하는데 어떡하겠어요? 쪽이 팔리든지 말든지 집적 노력 봉사를 해야 할 수밖에”
태수는 남자 자존심에 바람구멍을 내는 미경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보다는 운보 이놈이 술이 덜 깨지 않았으면 어디 탈이 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이빨을 바드득 갈았다.
보람이와 봉구가 다니는 영신초등학교 오늘 점심 반찬은 찰보리밥, 쇠고기미역국 ,돼지고기불고기, 상추쌈, 호박전이다. 요즘 김치를 싫어하는 초등학생 들 때문에 김치는 자율배식을 했다.
태수와 운보는 나란히 서서 돼지불고기와 호박전을 배식했다. 둘이 눈이 빠지게 기다려도 식성이 한참 좋을 때인 보람이와 봉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봉구 안 왔지?”
“보람이도 안 보이던걸. 요즘 육 학년이면 알거 다 아는 나이들이잖아.”
“하긴 나라도 쪽팔려서 못 올 거야.”
태수와 운보는 자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스럽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설거지는 저희들이 할 테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보람이 반 자모회 회장이 친절하게도 태수와 운보에게 특전을 베풀었다. 태수와 운보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다. 점심을 먹고 가라고 영양사까지 나서서 만류를 했지만 한사코 손을 흔들며 거절을 했다.
“씨팔, 오늘 쪽팔려서 혼났다.”
“고 놈의 돈이 웬수지. 돈만 있었으면 쪽 팔릴 일도 없었지.”
여자들 틈에서 배식을 하는 것도 부족해서 언제 보람이와 봉구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내내 고개를 들지 못하긴 했지만 태수와 운보다. 하지만 오랜만에 자식들을 위해 큰일을 했다는 생각에 발걸음도 가볍게 교문을 나섰다.
교문을 나서 운보와 태수는 언제 우리가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고함을 치며 싸웠느냐는 얼굴로 샐쭉이 미소를 교환했다. 태수의 가방 안에는 신문지로 싼 호박전이 들어 있었고 운보의 가방에는 비닐봉지로 싼 돼지불고기와 상추가 제법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
“야, 운보야!”
교문을 나선 태수와 운보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던 태수가 심각한 얼굴로 운보를 바라봤다.
“야, 술 걱정은 하지 마, 내가 며칠 전에 킹마트에서 물건 받을 때. 트럭에서 소주 두 박스 점잖게 뚜룩 쳐 놓은 거 있으니까.”
“어제는 한 박스 밖에 없다고 했잖아?”
“너 도둑의 말을 믿냐?”
“믿는 내가 잘못이지. 그건 그렇고 우리가 그래도 명색이 학부형 아니냐?”
“학부형이니까 급식 당번 하러 나왔지. 학부형이 아니면 그 많은 여자들한테 개망신 당할 일이 뭐가 있냐? 여자들이 자모회 회장 앞에서는 발정 난 암캐처럼 꼬리를 흔들다가도 우리를 바라 볼 때는 골목에서 똥 먹는 강아지 쳐다보듯 쳐다보던 시선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 거린다.”
운보는 집으로 가는 방향의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담뱃불을 껐다.
“우리가 수양하러 학교에 들락거릴 일이 또 생길지 모르겠지만, 애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평생 또 언제 와 보겠냐.”
버스가 도착했다. 태수가 버스에 올라타려는 운보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심각한 목소리로 은근하게 말했다. 학교는 전과자들이 교도소를 지칭하는 은어다.
“그럼, 운동장에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자는 거냐?”
“내 말은 이왕 쪽은 팔린 거니까, 애들 담임선생이라도 만나봐야 한다는 거지. 마침 보람이하고 봉구가 같은 반이니까 우리 둘이 같이 만나면 덜 쪽이 팔릴 거잖아.”
“짜식 늦게 철드네. 하지만 애들 담임선생을 만나려면 그냥 가냐? 돈 봉투는 고사하고 음료수 한 병이라도 들고 가야 할 거 아냐?”
“음료수는 무리고 좀 더 교양 있는 선물로 구해보자.”
태수는 담배꽁초에 침을 묻혀 끄고 나서 길바닥에 튕겨 버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길 건너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문구점 겸 슈퍼를 노려보았다.
“그래, 간만에 애들한테 좋은 아빠 소리 듣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운보는 태수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알아 듣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횡단보도 쪽으로 갔다.
문구점 앞에는 오락기 몇 대가 있었다. 백 원짜리 동전을 집어넣으면 슬롯머신처럼 돌아가는 기계와, 원통의 플라스틱 용기 안에 있는 조그만 장난감을 뽑는 기계 앞에 초등학교 저학년 몇 명이 붙어 있었다.
문구점 안으로 들어간 운보는 음료수를 사는 척 하며 재빠르게 가게 안을 훑어보았다. 비교적 값이 나가 보이는 문구들은 모두 유리 진열장 안에 들어 있었다. 다행히 사십대 초반의 여주인은 물건을 정리하느라 진열대 앞을 비워두고 있었다. 운보가 빠르게 태수에게 눈짓을 했다.
“아주머니 잠깐 이 쪽으로 나와 보슈.”
운보의 신호를 받은 태수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집어넣게 되어 있는 오락기 앞으로 주인을 유인했다.
“이런 거 아이들한테 하게하며 법에 걸리는 거 아닙니까?”
“우린 몰라요. 기계 주인은 따로 있고, 우린 그냥 보관만 해 주는 거니까.”
주인은 태수의 위아래를 빠르게 노려보았다. 경찰로 보이지는 않았다. 구청에서 나온 사람 같지도 않았다. 애들처럼 기계에다 돈을 몇 천원 잃고 화가 나서 따질 거라고 생각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 사이에 샤프 두개를 가방 안에 집어넣은 운보가 밖으로 나왔다. 덥다는 얼굴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는 척 하며 오백 원짜리 동전 한 개를 주인에게 던져주고 나서 태수에게 눈을 찡긋 거려 보였다.
교사(校舍)에 도착한 태수와 운보는 낯털이 나왔을 때처럼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이라서 복도와 교실 안은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스피커에서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행진곡 풍의 음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학교하고 경찰서 공통점이 뭔지 알어? 둘 다 지은 죄가 없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는 거야.”
태수는 일이 층 건물이 1,2,3,4 학년이고 삼사 층 건물이 5, 6학년 학생들이 배우는 교실이라는 점에 적이 안심했다. 보람이와 얼굴을 마주칠 확률이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며 교무실을 찾아서 부지런히 눈을 두리번거렸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너도 그러냐? 나도 기분 좋은 마음으로 학교에 와 본 적이 없다. 너는 사정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육 년 동안 육성회비를 제 때 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종례시간에는 육성회비가 밀린 것 때문에 선생님한테 귀가 찢어지도록 잠아 당기게 될 까봐 두려웠고, 산수 시간에는 앞에 나와 문제 풀어 보라고 할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고, 국어 시간에는 일어서서 책 읽으라고 할까봐 고개를 제대로 들고 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교실 복도는 세월이 지나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품고 있다. 운보는 행여 봉구나 보람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좌우를 빠르게 두리번거리며 교무실로 무작정 들어갔다. 보람이와 봉수의 담임선생은 교무실에 없었다. 교직원 휴게실에 있다는 다른 선생의 말에, 관할 경찰서의 김 형사한테 불시에 호출을 받고 형사실에 갔다가 그냥 가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재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보람이 말로는 아빠가 사업을 한다고 하든데……”
보람이와 봉수 담임선생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우선 커피부터 권하고 나서 눈치를 살폈다. 꼬락서니를 보니 실업자가 아니면 막노동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아내들이 밥벌이를 하는 탓에 쫓기듯 급식당번을 하러 온 모양새처럼 보였다.
“아! 주로 야간에 일을 하기 때문에 주간에는……”
태수와 운보는 문구점에서 슬쩍 해 온 샤프를 나란히 내 놓았다. 포장을 하지 않아서 샤프가 제 가격보다는 싸구려로 보이기는 했지만 체면치례는 했다고 생각하며 침을 삼켰다.
“야간에 일을 하신다면? 구체적으로?”
“맨날 야간에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운보는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느냐 하는 표정으로 태수의 눈치를 살폈다.
“아……아닙니다. 그저 뭐 조그만 거 하고 있습니다.”
태수는 이럴 줄 알았으면 직업 정도는 궁리를 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손바닥에 자꾸 땀이 났다. 바짓가랑이에 손바닥의 땀을 슬쩍슬쩍 닦으며 괜히 왔다고 슬그머니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대……대리운전 가게를 조그맣게 영세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해!”
태수 못지않고 자꾸 입안이 마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던 운보가 기가 막힌 생각이 떠 올랐다는 얼굴로 더듬거렸다.
“아! 대리운전 회사를 하시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담임선생은 말과 다르게 조금도 대단하지 않다는 얼굴로 태수와 운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 대단하기는요.”
“며, 몇 명 안됩니다. 대리 기사들이요……”
태수와 운보는 오랜만에 갈빗집에서 갈비를 뜯다가 재수 없게 김 형사를 만났을 때처럼 깜짝 놀라며 거의 동시에 더듬거렸다.
“우리학교가 급식을 시작한지가 거의 십 년이 되갑니다. 그 동안 아빠들이 급식 당번을 나오신 경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정말로 보통 용기가 아니십니다. 낯에 아무리 할일이 없다고 해도 아빠들은 절대로 급식당번 나오지 않거든요.”
담임선생은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태수와 운보에게 더 이상 친절하지 않았다. 말로는 대리운전회사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겨우 샤프펜슬 하나씩 사이좋게 사가지고 온 걸 보면 날품을 팔아먹는 노동자 들인 것 같았다. 같이 있어 봐야 시간만 낭비라는 생각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거만하게 말했다.
“이 친구와 저는 정말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게다가 둘 다 결혼을 늦게 한 탓에 자식 일이라면……”
태수는 무심코 말을 하다 말고 슬그머니 목소리를 줄였다. 말을 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지금껏 진정으로 보람이를 위해 시간을 보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돈이 생기면 보람이가 원하는 장남감을 사주든 피자나 치킨을 배달 시켜 주는 것으로 끝냈다. 돈이 없으면 보람이가 먹고 있던 라면도 같이 나누어 먹는 등 되는대로 살아 온 것이 너무 미안하고 후회가 됐다.
“그럼은요. 이 친구하고 학교도 여러번 같이 갔었습니다.”
운보도 태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식을 기르는 부모 입장으로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씩은 담임에게 인사를 했어야 된다. 그것이 어려우면 신학기에는 봉구편에 넥타이나 상품권 같은 것을 보냈어야 한다. 자식이 둘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달랑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위해 해 준 것이 너무 없어서 비통한 끝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중얼거렸다.
“학교를 여러 번이나 같이 갔었다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동기란 말이십니까?”
어제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붉게 충혈 된 눈동자 하며, 햇볕에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 다림질이 되어 있지 않은 바지에 와이셔츠 하나 씩 걸치고 있는 태수와 운보다. 학교를 많이 나와 봤자 중학교 일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담임 선생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벼……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어릴 때부터 똥구녘이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던 탓에 저……전학을 많이 다녔다는 말입니다.”
슬픔에 젖어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태수가 앗뜨거 하는 얼굴로 더듬거리고 나서 운보를 노려보았다.
“그렇군요. 하긴 우리나라가 이만하게 살기 시작한지가 일세기가 된 것도 아니고 겨우 이 삼십 년 전이잖아요. 그 이전에는 모두 어렵게 살았으니 그런 일도 많았겠지요.”
담임선생은 태수와 운보가 솔직하게 어려웠던 시절을 고백하니까 괜히 미안해졌다. 착한 학부형들한테 샤프를 되돌려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요즘 크는 아이들은 정말 물자 귀한 줄을 몰라요.”
“하지만 우리 봉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 엄마가 매일 돈타령을 해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라면을 먹을 때도 라면 한 가닥 남기는 법이 없습니다요.”
태수의 말에 무심코 맞장구를 치던 운보는 봉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다른 아빠들처럼 떳떳한 직업이라도 있었다면 오늘 점심시간에 나를 피하지는 않았을 테지, 혼자서 피자 한 판을 처먹는 놈이 점심을 굻었으니 지금쯤 배가 고파서 환장을 하겠지. 봉구가 점심을 굶을 것을 생각하면 그냥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슬쩍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봤다. 아침에 아내한태 차비조로 받은 돈 오천 원 중에 차비를 제하고 삼천 원 정도가 남을 것 같았다. 봉구를 만나서 그 돈을 건네주리라 생각하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에는 많은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뛰어 다니고 있었다. 운동장을 가득 채운 아이들 중 어디엔가 아빠 때문에 점심을 쫄쫄 굶은 봉구가 햇볕 새하얀 초여름에 우울하게 앉아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우리 보람이도 쌀 한 톨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제 엄마가 늦게 오는 날은 직접 저녁을 하는데……”
태수는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고 학교를 간 보람이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착 갈아 앉는 것 같았다. 제 엄마가 왔으면 점심을 굶지는 않았겠지, 아무리 계집애라고 하지만 그렇게 숫기가 없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누. 철부지 어린 것도 아닌 육학 년짜리면 다 컸는데……하지만 지금은 숫기 탓을 할 때가 아니다. 아침부터 굶은 보람이가 굶주린 배를 안고 집에 오다가 횡단보도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큰일이다. 어떡하든 보람이에게 먹을 것을 사주어야 하는데 주머니에는 달랑 차비 밖에 없다. 그렇지, 매점이 있잖아. 매점에서 우유랑 빵을 슬쩍해서 보람이에게 전해주면 되겠군. 보람이에게 어서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시간이 더디기만 했다.
“점심시간이 끝났군요. 어때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수업하는 모습을 참관하시겠습니까?”
별다르게 하는 말없이 어서 점심시간을 끝내는 종이 울리기만 기다리고 있던 담임선생이 반갑게 말했다.
“아……아닙니다. 일단 학교에 맡겼으면 무조건 선생님만 믿어야지요.”
“그럼요. 저희가 수업하는 모습을 본다고 해서 뭘 알겠습니까? 이렇게 선생님을 만나 뵌 것만 해도 영광스럽기만 한데.”
태수와 운보는 약속이나 한 듯이 벌떡 일어나서 담임선생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담임선생이 샤프를 내밀었으나 황송하다는 얼굴로 양 손으로 거절을 하며 뒷걸음쳤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있는 푸릇하게 물기를 머금은 버드나무 가지는 밥알만한 싹을 매달고 실바람에도 몸을 비틀었다.
태수와 운보는 담임선생이 행여 교무실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운동장으로 가지 않았다. 화장실 뒷벽 앞에 나란히 앉아서 실바람에 장단을 맞추고 있는 버드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매점 생각은 참 좋은 생각이었어. 솔직히 요즘 삼천 원 가지고 뭘 사먹겠어. 적어도 햄버거 하나에 콜라 정도는 먹어야 든든하지.”
운보는 꽁초가 된 담배로 땅바닥을 문질렀다. 까만 재가 땅바닥에 묻어나면서 숯으로 금을 그어 놓은 것 같은 흔적이 살아났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낼 잡부금을 주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며 골목어귀에 쪼그려 앉았다. 숯으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금을 대던 기억이 아프게 떠올라서 침을 퉤 뱉어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넌 왜 그렇게 동작이 굼떠졌냐? 까닥했으면 매점 아줌마한테 들킬 뻔 했잖아. 다른 곳도 아니고 학교 매점에서 그 잘난 햄버거하고 캔 콜라 슬쩍하다 들켰다고 상상해 봐라. 나야 네가 슬쩍하는 거 몰랐다고 튕겨 버리면 그만 이지만 봉구가 그 사실 알아 봐라. 학교 못 다닌다고 개판 치다 못해 가출 해 버릴지도 모르지.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가출을 한다고 하든데.”
태수는 화장실 벽에 허리를 기대고 양반다리로 앉으며 운보를 올려다봤다. 운보의 어깨에는 가방이 매달려 있다. 그 안에 햄버거와 캔콜라와 식당에서 가지고 나온 돼지불고기며 상추가 있다. 점심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소주에 돼지불고기를 싸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들면서 군침이 돌았다.
“야! 내 실력 아직 녹슬지 않았어. 아까 문구점에서 진열장 안에 있는 샤프도 꺼내는데 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구. 하지만 학교라고 생각 하니까, 네 말대로 들키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손이 말을 들어주지 않더라.”
“애들 생각하면 우리도 현업에서 은퇴를 해야 하는데.”
교문이 활짝 열리면서 검은색 승용차 한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태수는 운동장에 노랗게 내려앉는 햇볕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검은색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승용차는 곧장 교단 옆으로 갔다. 정문 경비한테 연락을 미리 받았는지 교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남자 몇 명이 교무실에서 빠르게 뛰어 나왔다. 그들은 승용차에서 내린 양복 입은 남자를 앞뒤에서 에워싸고 교무실로 들어갔다.
“너나 나나 배운 것이 있냐? 부모를 잘 만나서 기술을 배웠냐? 철들어서 배운 것이라면 뚜룩질 밖에 더 있냐? 은퇴를 하면 뭘 먹고 살래?”
운보도 승용차에서 내린 남자가 육성회장이 아니면 이사장 쯤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에 비해 훔친 햄버거와 콜라를 자식들에게 건네주려고 운동장도 아닌 화장실 뒤에 서 있는 자신이 처량해 보여서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씨팔! 너나 나나 나이가 아직 쉰 전 아니냐? 어디 노가다 판에 가서 하루 뒹굴면 오륙 만 원 못 벌까? 아니면 시장통에서 좌판을 깔고 갈치를 팔아도 목구멍에 풀칠은 하겠지.”
“웃기고 앉아 있네. 개나 소나 다 시장에서 좌판을 깔 수 있는 줄 아냐? 손바닥만 한 자리 하나 차지하려면 권리금만 해도 돈 천만 원은 줘야 할거다. 그리고 너, 작년에 학교에서 수양하고 나와서 다시는 뚜룩질 않겠다고 보람이 엄마 앞에서 혈서를 썼지. 혈서를 쓰고 나서 노가다 판에 며칠 갔어? 작심삼일이라는데 삼일 도 안 다녔잖아. 그래서 편한 야간경비라도 나갈라고 하니까 아파트 건설현장에 비싼 자재가 많다고 보증인하고 호적초본 내라고 해서 포기 했잖아.”
“그 때는 임마, 네 놈이 바람을 잡았었잖아. 육거리 삼성전자 이 사장이 일주일 동안 유럽여행 가니까 그 집만 털고 손 씻자고 꼬시는 통에 내가 넘어간 거잖아.”
“얼씨구? 그래서 손 씻었구먼.”
“그때 이 사장 네 집을 털어서 번 돈으로 오락실에만 안 갔어도 이 짓 손 끊었지. 하지만 오락실에서 연타를 터트려서 현금이 사백 만원이나 생기는 바람에 너하고 제주도로 놀러갔었잖아. 제주도에서 한 열흘 푹 쉬고 오니까 삭신이 녹아 버릴 대로 녹아 버려서 당최 힘 쓸 일을 도통 할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원인은 바로 너라고.”
“야 임마, 나야 말로 이 사장 네 집 털고 나서 손 씻으려고 했어. 근데 네 놈이 제주도 갔다 온 후에 보광사 암자에 있는 금불상이 진짜 같다고 우기는 통에 또 연결이 됐잖아. 네 놈 말만 믿고 금으로 갚아 주기로 하고 명금당 변 사장한테 급전 백 만원 땡겨썼잖아. 그 돈 갚을라고 또 한탕 하고, 또 한탕 하다 보니 지금까지 이 지랄하며 살고 있잖아.”
바람이 운동장에 있는 먼지를 파도처럼 몰고 다니다가 제 멋대로 그만 둬 버리고 사라졌다. 태수는 운보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다시 꺼내서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붙이기 전에 바람이 주저앉은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바라보던 운동장은 지평선처럼 넓어만 보였다. 가을 운동회 때면 그 넓은 운동장에 동네 사람들이 가득 찼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하늘 밑에는 읍내에 온 장사치며, 면소재지에서 가게를 하는 사람들이 포장을 쳐 놓고 온갖 것을 다 팔았다. 어머니가 정성들여 싸가지고 온 김밥이며 실로 꽨 밤에 땅콩, 추석 때 남겨서 말려 놓은 송편에 과일을 실큰 먹어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고 이런저런 장난감에 눈이 가는 운동회 날은 축제와 같았다.
“뭔 생각하고 있냐?”
“야, 우리 어릴 때 운동회날 생각나냐?”
태수는 잠깐 사이에 어린 시절을 거닐다 오기라도 한 것처럼 감회가 서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요즘에는 고향에 애들이 없어서 운동회도 오전에 끝을 내고 만다더라. 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는 정말 좋았지. 무엇보다 그 때는 엄마하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잖아. 젠장, 다른 집 부모님은 팔십 구십이 되도록 아직 건강하시기만 한데, 너 하고 나만 부모님이 환갑도 못 넘기시고 그렇게 일찍 돌아 가셨냐?”
“부모님이 지금까지 살아 계신다면 우리도 요 모양 요 꼴로 살지는 않겠지?”
태수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오늘 따라 담배 맛이 달았다. 이제 막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십대들처럼 양 볼이 움푹 패도록 담배 연기를 깊게 삼켰다가 한숨과 함께 뱉어냈다.
“너나, 나나 스무 살 이쪽저쪽에 학교에 갔다 왔으니까 전과자 신세는 못 면했겠지만, 부모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지금쯤 철이 들어서 이 나이가 되도록 뚜룩질을 업으로 삼으며 살지는 안았겠지”
“그럴 수도 있지.”
운보는 태수의 말에 힘없이 대답하며 괜히 화장실 벽을 툭툭 찼다. 화장실 안에 누가 있는지 인기척 같은 것이 들렸다. 발뒤꿈치를 들고 화장실 안을 들여다볼까 하다가 수업 중이라도 화장실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 걸 보면 우린 참 헛살았어. 그렇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한번 전과자는 영원한 전과자 아니냐. 굶어 죽지 않으려면 뭔 짓을 못할까.”
“네 말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학교에 첫 번째 갔다왔다가 취직을 한 카센터에서 전과자라고 쫓겨나지만 않았어도 내 인생이 달라졌겠지.”
“너는 그냥 쫓겨나기만 했지. 난 전자대리점에서 도둑 누명 쓰고 매까지 벌었잖아. 그 때 도둑이 잡히지 않았다면 꼼짝 없이 연타 칠 뻔 했다. 연타지면 특정범죄 가중범이라고 해서 수양기간이 배로 늘잖아. 더 재수 없었으면 청송감호소로 유학까지 갈 뻔하지 않았냐.”
“그러고 보면 참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 왔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린 최선을 다하며 살아 왔어. 너도 매번 느끼는 거지만 뚜룩질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잖아. 담을 타는 거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배운 기술이라 별 문제 없다고 쳐. 하지만 낯털이 할 때는 몰라도 밤에 작업을 할 때 거실이나 방안을 뒤질 때 가슴이 콩알만 해 지잖아. 바람 소리에도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나 하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쭈빗쭈빗 설 정도 아니냐. 그런데도 마누라들은 도둑질 안 해 온다고 허구한 날 바가지 긁고.”
“마누라들도 인간인데 우리가 도둑질로 돈 버는 걸 알며 돈 벌어 오라고 닦달을 하겠냐? 노가다 판을 돌아다니며 돈 벌어 오는 줄 알고 있으니까 바가지를 긁는 거지.”
“하긴, 어떤 마누라가 아침마다 뚜룩질 해 오라고 긁어 되겠냐. 그런 걸 보면 우리처럼 스트레스 받는 직업도 없어. 마누라나 가족한테 떳떳하게 직업 이야기 못하지. 길을 걷다가도 짭새들을 보면 괜히 주눅이 들어서 딴 길로 가야지. 일 할 때마다 다른 직업보다 열배 스무 배 스트레스 받지. 그렇다고 위험수당이 붙는 것도 아니고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잖아. 요즘은 쇠푼깨나 있어 보이는 집은 쌔콤인가 뭔가를 설치하는 것도 부족해서 폐쇄카메라로 도배를 해 놔서 쳐다보지도 못하게 해 놓고, 없는 집안에 들어가면 잘 나와야 돼지저금통 아니면 백일이나 돌반지 몇 개뿐이니 일할 맛도 안 나고……”
“그런 걸 보면 옛날이 좋았어. 아엠에푸가 터지기 전만 해도 웬만한 집에는 금붙이 몇 개씩은 다 있었잖아. 근데 그 좋은 걸 전 국민 금모으기 하면서 몽땅 내다 팔았으니 가정집에서 금 보기가 날아가는 새 그거 보기보다 힘들 수밖에 더 있겠어……”
태수는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 숨을 죽여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말을 끊고 운보에게 손가락과 입모양으로 화장실에서 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까부터 들렸어.”
태수는 운보가 입모양만으로 하는 말을 듣고 소리가 나지 않게 일어섰다.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다 끼고 발소리를 줄여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에서는 화장실 특유의 냄새가 쾌쾌하게 풍겼다. 눈짐작으로 누군가 숨죽여 울고 있는 칸 앞으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여자 아이 울음소린데? 화장실 안에서는 분명히 여자 아이가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는 목소리로 보아서 저학년 같지는 않았다. 너무 슬퍼서 목이 메이는 목소리로 우는 소리가 귀 안으로 전해지는 순간 이상하게 보람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시간에 보람이가?
태수는 보람이가 화장실에 있을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둑질을 하다가 주인에게 들켰을 때처럼 가슴이 덜덜 떨려왔다.
“누구?”
운보는 화장실 앞에 서 있는 태수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다. 화장실 안에 여선생이라도 있느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빠르게 태수 옆으로 다가갔다.
“학생 울음소리잖아?”
“그런 거 같아.”
“그럼 어서 문을 열어 봐야지.”
운보는 입모양만으로 태수와 빠르게 말을 주고받고 나서 문손잡이를 당겼다. 문이 열리는 듯하더니 안에서 힘껏 잡아당기는 느낌이 살아났다.
“학생!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냐. 어서 문 열어 봐.”
“그래, 우린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착한 학부형들이야. 지금 어디가 아퍼서 우는 거야?
“아니면, 중요한 물건을 도둑맞았니?”
“도둑맞은 물건이 있으면 어서 선생님한테 알려서 찾아야지.”
화장실 안에 있는 여학생은 조금 전 보다 더 큰 목소리로 흐느끼면서도 완강하게 문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어서 문을 열어 봐. 선생님한테 혼자 가기 어려우면 우리가 데려다 줄 테니 어서 문을 열어 봐. 응?”
태수는 여학생의 울음소리가 선명해 질수록 보람이의 얼굴도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우리 힘으로 안 되겠는데, 안에 있는 학생이 많이 아픈지도 모르니까 어서 선생님들한테 알려야겠어.”
문을 몇 번인가 힘껏 흔들다가 포기를 한 운보가 금방이라도 교무실로 갈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돼!”
안에서 흐느끼던 여학생의 목소리가 갑자기 터져 나왔다.
“가……가만있어 봐.”
태수는 막연하게 밀려오던 불안감이 거대한 실체를 안겨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목이 콱 쉬어 버린 것처럼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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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재밌고........ 가슴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