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은평구 불광동의 유래
- 부처님의 서광이 어린 마을 -
불광동佛光洞근처에는 바위와 절이 많았는데 그중 부처님의 서광이 어린 불광사가 위치한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지금도 북한산 자락인 동 인근에는 여러 개의 사찰이 있다.
장희빈의 입궁으로 관가 인물들이 왕래한 관터고개
관동館洞은 현재 은평구 불광2동 331 번지 은혜초등학교 부근 아미산 기슭에 있던 동네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숙종의 계비였던 장희빈張禧嬪이 태어났다.
어느 날 미복 차림으로 서오릉의 선왕 참배 길에 올랐던 숙종이 갈증을 느끼던 차에 마침 우물가를 지나가게 되었다. 빨래하던 처녀에게 마실 물을 청하자 그 처녀는 물을 떠서 근처에 있던 버드나무 잎을 띄워 바쳤다. 괴이하게 생각한 숙종이 그 연유를 물으니
"물에 체하면 약도 없다 하는데 선비께서 갈증에 물을 급히 드실까 저어되어 버들잎을 띄워 천천히 드시게 했습니다"
말하였다. 이에 크게 감격한 숙종이 훗날 궁으로 맞아들이니 이가 곧 숱한 화제를 낳게 한 장희빈이라고 전해 온다. 숙종이 관동 우물에서 물을 마셨다 하여 어수정御水井이라 전하여 왔으나, 장희빈이 떠주는 물을 받아 마실 때 장희빈의 고운 손을 잡았기 때문에 어수정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어수 우물골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희빈이 입궁한 뒤로부터 이곳에 관가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여 관동官洞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관동館洞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역驛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경기도 고양시高陽市벽제에 있던 벽제관碧蹄館의 경우처럼 관館은 예전에는 교통을 위한 숙박시설을 가리키는 용어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장희빈의 당숙인 장현張炫을 통하여 자신의 벼슬을 매관매직하려는 수많은 관리들이 내왕하던 고개를 관터 고개(관기현館基峴)라고 하였다. 관터 고개는 지금의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연신내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를 말한다. 그 시절에
"관터 고개를 넘었느냐?"
는 물음은 세력가와 손이 닿았느냐는 뜻이었다고 한다. 묘한 것은 장희빈의 연적이나 다름없는 숙종의 후궁 숙빈 최崔(영조의 생모)의 생부 최효일崔孝一과 조부 최태일崔泰日의 묘소가 이곳 관동의 건너편 산에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담양이 고향인 그들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묻히게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것이 역사의 안팎이다.
불광2동 105번지 일대에는 장희빈의 생가터와 장희빈의 부친 옥산玉山부원군府院君 장경張烱의 묘 등이 인동 장씨의 후손에 의해 잘 보전되어 있었다. 장씨 일가의 묘소와 신도비 등의 유적은 1970년대에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으로 옮겼으며 장희빈 생가터와 처음 부친의 묘 일대에는 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인조반정을 모의한 원두표 장군이 거했던 도박골
불광동 독박골에는 1623년 인조반정 당시 큰 공을 세운 원두표元斗杓장군과 관련된 옛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조반정 직전, 즉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光海君때 지금의 은평구 불광동 산42번지와 280번지 일대의 바위굴 근처(현 각황사 절터)에서 낯선 젊은이가 자주 배회하였다. 나무 하러 간 동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당신은 무엇하러 온 사람이오?"
하고 물으면 그 젊은이는 말하기를
"나는 염병이 걸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병을 고치러 왔소."
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염병이 옮을까 염려하여 이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게 되었다
경기도 여주군에 있는 원두표 묘소
이 젊은이가 바로 원두표 장군이었으며, 반정을 모의하였던 사람들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염병이 걸렸다고 둘러댄 것이었다. 이에 당시 인조반정 모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를 모방하여
“이제 병 고치러 가세."
라는 말로 거사의 암호를 대신하였다고 한다. 또 반정이 성공한 뒤에 인조가 원두표의 공을 치하하면서
“내가 그대의 덕을 입었다."
하였으므로 그가 은거했던 바위골을 '덕이 있는 바위골'이라는 뜻에서 덕바위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 독바위골 또는 독박골로 변한 것으로 독박골로 불리게 된 데에는 산에 있던 바위가 독(항아리)처럼 생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돌이 많고 숨어 지내기 좋아 인조반정을 성공하게 됐으므로 그 덕을 기리기 위하여 덕바위굴로 불리다가 독바위골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원두표는 1593년(선조 26)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와 탄옹灘翁,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원두표는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으로 광해군의 정치가 점점 문란해지자 뜻을 함께하는 지사들과 인조반정 모의에 가담하였다. 그는 반정이 성공한 뒤에는 정사靖社공신 2등에 책록되고 원평原平부원군에 봉해졌다. 또한 원두표는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전주 부윤이 되고, 나주 목사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는 1636년(인조 14)에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어영 부사로서 남한산성을 지키고, 1642년(인조 20) 형조판서로 승진되었으며 뒤이어 강화부 유수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원두표는 이 동안에 서인西人 중 공서功西에 속하여 청서淸西를 탄압하다가 같은 파에 속한 김자점金自點과의 정권 다툼으로 분당하여 원당原黨의 영수가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 호조판서로 있다가 한때 파직당하였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좌참찬, 좌찬성을 지냈다. 그는 1654년에는 병조판서 가 되어 김육金堉이 적극 추진하려는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반대하는 동시에, 역시 김육에 의하여 추진된 동전 유통 보급 방법을 논의하는데 참여하였다. 원두표는 1656년(효종 7) 우의정을 거쳐 1662년(현종 3)에는 좌의정에 올라 내의원과 군기시의 도제조를 겸직하였으며 1664년(현종 5) 세상을 떠났다.
부산과 의주 사이 1천 리, 양천리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양천리 유래
현재의 국립 보건원 맞은편에 있는 불광 시장 일대를 예전에는 양천리兩千里, 혹은 돌산리로 불렀다. 양천리로 부르게 된 이유는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는 부산 북쪽으로는 의주까지 각각 1천 리가 된다고 하여 불리게 되었다. 한편 돌과 바위가 많기로 돌산리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논밭과 개천이 있었으며 현재는 상업지대와 주택가로 변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