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서지 |
권수제 |
무하당유고(無何堂遺稿) |
판심제 |
없음 |
간종 |
괘인사본(罫印寫本) |
간행년 |
필사 연도 미상 |
권책 |
불분권(不分卷) 7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20.7×14.5(cm) |
어미 |
上下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
소장도서번호 |
古3428-450 |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속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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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명 |
홍주원(洪柱元) |
생년 |
1606년(선조 39) |
몰년 |
1672년(현종 13) |
자 |
건중(建中) |
호 |
무하당(無何堂), 무하옹(無何翁) |
본관 |
풍산(豐山) |
시호 |
문의(文懿) |
특기사항 |
이정귀(李廷龜), 김류(金瑬)의 문인. 조석윤(趙錫胤), 박장원(朴長遠), 홍명하(洪命夏), 송시열(宋時烈) 등과 교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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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
기사전거 : 神道碑銘(宋時烈 撰, 宋子大全 卷163), 墓誌銘(金壽恒 撰, 文谷集 卷19), 洪履祥神道碑銘(李廷龜 撰, 月沙集 卷43), 洪霙妻墓誌銘(李景奭 撰, 白軒集 卷49), 豐山洪氏大同譜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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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력 |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선조 |
39 |
1606 |
병오 |
萬曆 |
34 |
1 |
8월, 태어나다. |
~ |
- |
~ |
~ |
~ |
- |
~ |
외조부 李廷龜의 슬하에서 가르침을 받다. ○ 北渚 金瑬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
인조 |
1 |
1623 |
계해 |
天啓 |
3 |
18 |
9월, 선조의 부마로 간택되고 崇德大夫 永安尉가 되다. ○ 12월, 貞明公主와 혼례를 하고 安國坊에서 살다. |
인조 |
2 |
1624 |
갑자 |
天啓 |
4 |
19 |
李适의 난이 일어나 慈殿을 호종하였고, 그 노고로 光德大夫가 되다. |
인조 |
5 |
1627 |
정묘 |
天啓 |
7 |
22 |
江華에 호종하다. |
인조 |
9 |
1631 |
신미 |
崇禎 |
4 |
26 |
1월, 成祿大夫가 되다. |
인조 |
10 |
1632 |
임신 |
崇禎 |
5 |
27 |
祔廟禮 때 終獻官의 공으로 加資되다. |
인조 |
14 |
1636 |
병자 |
崇禎 |
9 |
31 |
남한산성에 호가하다. ○ 虜陣에 가서 內弟 李端相을 찾아 데리고 오다. |
인조 |
15 |
1637 |
정축 |
崇禎 |
10 |
32 |
환도하여 緌祿大夫가 되다. |
인조 |
23 |
1645 |
을유 |
順治 |
2 |
40 |
4월, 부친상을 당하다. |
인조 |
25 |
1647 |
정해 |
順治 |
4 |
42 |
10월, 謝恩使로 연경에 가다. |
인조 |
26 |
1648 |
무자 |
順治 |
5 |
43 |
2월, 復命하다. ○ 淸나라에서 時憲曆을 가지고 와 새로운 역법의 시행을 건의하다. |
인조 |
27 |
1649 |
기축 |
順治 |
6 |
44 |
5월, 告訃請諡請承襲正使로 副使 金鍊, 書狀官 洪瑱 등과 연경에 가다. |
효종 |
1 |
1650 |
경인 |
順治 |
7 |
45 |
氷庫 提調가 되다. |
효종 |
2 |
1651 |
신묘 |
順治 |
8 |
46 |
2월, 인조의 祔廟都監 提調와 永思殿 獻官이 되다. |
효종 |
4 |
1653 |
계사 |
順治 |
10 |
48 |
윤7월, 사은사로 부사 尹絳, 서장관 林葵 등과 연경에 가다. ○ 11월, 복명하다. |
효종 |
5 |
1654 |
갑오 |
順治 |
11 |
49 |
樂靜齋 趙錫胤, 久堂 朴長遠이 國事를 말하다가 귀양 가자, 상소하여 변호하니 임금이 부마로서 국법을 범하였다고 하여 파직시키다. |
효종 |
6 |
1655 |
을미 |
順治 |
12 |
50 |
7월, 모친상을 당하다. |
현종 |
2 |
1661 |
신축 |
順治 |
18 |
56 |
2월, 陳慰兼進香正使로 연경에 가다. ○ 6월, 복명하다. |
현종 |
3 |
1662 |
임인 |
康熙 |
1 |
57 |
4월, 장남 洪萬容이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다. ○ 禁令을 어기고 聞喜宴을 열어 파직되다. |
현종 |
8 |
1667 |
정미 |
康熙 |
6 |
62 |
1월, 두 아들이 급제하여 축하연을 열고 음악을 성대하게 베풀어 推考되다. |
현종 |
9 |
1668 |
무신 |
康熙 |
7 |
63 |
高陽 高峯山 선영에 齋舍 ‘追遠堂’을 짓다. ○ 8월, 왕의 溫陽 온천 행행에 隨駕하다. ○ 9월, 〈溫泉隨駕還來後因病陳疏〉를 올리다. |
현종 |
13 |
1672 |
임자 |
康熙 |
11 |
67 |
9월 14일, 졸하다. 임금이 禮葬을 명하고 棺材를 내리다. ○ 11월, 坡州 梧里洞에 장사 지내다. |
숙종 |
7 |
1681 |
신유 |
康熙 |
20 |
- |
12월, ‘文懿’로 시호를 받다. |
순조 |
24 |
1824 |
갑신 |
道光 |
4 |
- |
7대손 洪奭周가 「豐山世稿」를 간행하다. | 기사전거 : 神道碑銘(宋時烈 撰, 宋子大全 卷163), 墓誌銘(金壽恒 撰, 文谷集 卷19), 洪履祥神道碑銘(李廷龜 撰, 月沙集 卷43), 貞明公主墓誌(宋時烈 撰, 宋子大全 卷187), 朝鮮王朝實錄, 本集內容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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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및 간행 |
저자의 유문은 아들 예조 판서 洪萬容(1631~1692)과 손자 洪重箕(1650~1706)가 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수집하여 稿本을 편차한 후 1684년에 尤庵 宋時烈(1607~1689)에게 서문을 받아 정리하였다. 현재 규장각(古3428-450)에 그 轉寫 경위가 분명하지 않은 7책의 罫印寫本과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貴275)에 6책의 寫本이 소장되어 있다. 이와 같이 현전하는 문집이 稿本 상태이므로 그 간행 여부는 불분명하다. 규장각장본과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장본을 대조하여 보면, 수록 작품의 수는 비슷하나 分册ㆍ題目ㆍ詩語 등에 약간씩 차이가 있고, 正寫 상태나 완성도 면에서 연대본이 우수한 편이다. 연대본은 책1~4의 詩는 규장각장본과 편차가 같으나 책4 말미에 疏와 啓辭를 실었고, 책5에 祭文을 책6에는 燕行錄을 실었으며, 규장각장본 책5에 있는 〈題子修手抄自警編〉과 〈抵李姪成朝兄弟〉, 〈抵李姪喜朝〉 등 書 2편은 누락되어 있다. 규장각장본과 연대본의 내용상의 차이점을 예를 들어 살펴보면, 책1 〈弘濟橋送人獨吟〉의 경우 연대본에는 제목이 〈弘濟橋邊候行獨坐〉로 되어 있으며 시어도 다른 것이 있다. 또, 규장각장본 책7 연행록의 경우 오언율시 〈松站次冬至日曉起有感韻〉의 尾聯에 脫落字가 있는 것이라든지, 칠언절구 〈入接寧遠衛鄕校有感〉, 〈玉田縣與登極使一行曉行望哭禮〉, 〈沙嶺道中口占以示不可留宿之意〉는 제목이 서로 바뀌어 내용과 맞지 않는데 연대본에는 바로잡혀 있는 등 두 寫本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 외, 1824년에 7대손 淵泉 洪奭周(1774~1842)가 洪崖 洪侃(?~1304) 이하 慕堂 洪履祥(1549~1615), 秋巒 洪霙(1584~1645), 無何堂 洪柱元, 金華 洪萬容, 晦溪 洪重箕 등 豐山洪門의 역대 인물 15인의 시문을 모아 6권 3책의 「豐山世稿」를 활자로 인행하였다. 「풍산세고」는 국립중앙도서관(한43-가37), 규장각(奎3608), 장서각(K4-342) 등에 소장되어 있다. 「풍산세고」에 실린 홍주원의 작품은, 권2에 〈永昌大君遷葬挽〉을 비롯하여 연행록의 시 10제를 포함한 67제의 시와 〈請宥言事兩臣疏〉, 洪命夏와 朴遾의 제문, 〈遷葬時祭山神文〉 등의 文 4편이 실려 있고, 別集에 〈江華寓舍〉 및 연행록의 시 8제를 포함한 17제의 시와 李時白과 鄭雷卿이 지은 제문 2편이 있다. 「풍산세고」 권2 제1판의 홍주원 약력 중에 ‘有集六卷宋文正公時烈爲之序’라고 되어 있어 홍주원의 시문을 抄出한 대본이 6책의 문집인 것을 알 수 있으나 그 대본이 稿本인지 刊本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며, 초출한 시제와 시어는 연대본과 일치한다. 본서의 저본은 필사 연도 미상의 괘인사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宋時烈 撰), 豐山世稿(洪奭周 編), 無何堂遺稿解題(연세국학총서 고서해제1), 本集內容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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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본의 구성과 내용 |
본집은 不分卷 7冊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冊首에 1684년 宋時烈이 쓴 서문이 있다. 책1~4의 시 중에는 挽詩(461題)의 비중이 가장 높은데 그 대상으로 永昌大君ㆍ仁穆王后ㆍ孝宗 등 왕족, 金長生ㆍ鄭經世ㆍ張維 등의 명사, 李貴ㆍ李好閔ㆍ李時白 등 延安李氏 일문, 李朔寧大夫人ㆍ玉城夫人 등 부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책1은 五言律詩(255제)이다. 인조반정 후 영창대군을 천장하면서 지은 〈永昌大君遷葬挽〉을 비롯하여 仁穆王后, 朴東亮, 張維, 麟坪大君, 金德承, 蔡裕後 등을 애도한 만시(108제)가 있다. 호란으로 인해 강화와 남한산성에서 國事를 근심하며 지은 〈江華寓舍口占〉, 〈南漢圍中行望闕禮有感〉, 仲父 洪雴의 양자로 가 成家한 아우 洪柱後가 보낸 시에 차운한 〈次舍弟子裕寄示之韻〉, 1661년에 淸風 府使로 가는 李端相에게 쓴 〈贈內弟李幼能還任淸風〉, 貞洞에 이웃하여 살면서 서로 노병을 앓고 있는 李時萬과의 오랜 인연을 반추하며 졸년에 지은 〈次李鷺渚昔年人日韻〉 등이 있다. 책2는 七言律詩(282)이다. 선조의 후궁 靜嬪 閔氏, 李貴, 李聖求, 金瑬, 李行遠, 鄭弘溟, 閔光勳 등을 애도한 만시(135제)가 있다. 봄비 내린 다음날 강화 전등사에서 읊은 〈傳燈寺次同行人韻〉, 委巷詩人 崔奇男의 〈七十吟〉에 차운한 〈謝龜谷老人自賀七耋之韻〉, 낙동강 가에서 노년을 보내고자 하는 李尙逸을 길주로 전별하면서 지은 〈吉州牧伯李汝休令公 ……〉 등이 있다. 책3은 七言律詩(281)이다. 이시백, 沈之源, 洪得箕, 兪棨, 鄭維城, 淑靜公主, 洪命夏, 趙復陽, 李景奭 등을 애도한 만시(170제)가 있다. 1664년에 謝恩兼陳奏使로 떠나는 홍명하를 송별한 〈奉送沂川相公赴燕京〉, 4월 어느 날 정신을 맑게 해 준 金壽恒의 시에 차운한 〈奉次文谷投示韻〉, 1667년에 問禮官에 충원되었다가 北評事로 제수된 아우 洪柱國에게 規戒의 뜻으로 보낸 〈歲丁未秋八月舍弟國卿 ……〉 등이 있다. 책4는 五言絶句(35), 七言絶句(232), 五言排律(20), 七言排律(11), 五言古詩(9), 七言古詩(1)이다. 太醫 李郁, 金尙憲, 沈廷熙 등의 七絶 만시(16제), 貞淑翁主, 申欽, 仁祖의 妃 仁烈王后 등의 五排 만시(20제), 韓浚謙, 孝宗 등의 七排 만시(11제), 許砥平을 애도한 五古 만시(1제)가 있다. 1623년 9월 26일에 부마로 간택된 저자가 그즈음에 읊은 〈闕下口占〉, 종남산 아래에 사는 李安訥의 선물에 감사하며 지은 〈奉謝李東岳寄惠簡紙仍次其韻〉, 內弟인 李一相의 시에 차운한 〈次咸卿端陽十絶寄子和之作〉, 申翊聖이 살던 龍津江 蒼然亭에서 고인을 그리며 읊은 〈過樂翁蒼亭〉, 황해도 관찰사로 가는 姜瑜를 전별한 〈別姜公獻海伯之行〉 등이 있다. 책5는 疏箚(24), 啓辭(4), 題後(1), 書(2), 祭文(33)이다. 1654년에 조석윤과 박장원을 변호하여 올린 〈趙樂靜朴承旨事陳疏〉, 活人署와 氷庫의 提調로서 올린 계사, 조카 李成朝와 李喜朝 등에게 1645년 연이어 고인이 된 외삼촌 李明漢, 李昭漢의 유문을 보내면서 쓴 편지, 李景稷, 이행원, 李景曾, 金堉, 이시백 등을 추도한 제문이 있다. 책6은 金佐明, 吳䎘, 李行遇, 朴遾, 李震發, 李弘相, 伯父 洪霶, 이명한, 이소한, 차남 洪萬衡 등을 추모한 祭文(36)이다. 책7은 燕行錄으로 詩(303제)이다. 시체별로 편차하였으나 시체명은 표기하지 않은 상태로 연이어 全詩를 수록하였다. 연대본에는 시체명과 사행 연도가 표기되어 있다. 저자는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연행록에는 1649년 사행 때의 작품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행 연도별로 분류하면, 1647년에 오언율시(45)ㆍ칠언율시(35)ㆍ칠언절구(77)ㆍ칠언배율(2)ㆍ오언고시(4)ㆍ칠언고시(1) 총 164제, 1653년에 오언절구(2)ㆍ칠언절구(11) 총 13제, 1661년에 오언율시(22)ㆍ칠언율시(36)ㆍ오언절구(9)ㆍ칠언절구(58)ㆍ칠언고시(1) 총 126제이다. 외조부 이정귀가 명나라에 사행했을 때 지은 記行韻에 차운하여 靑石嶺, 遼東, 沙嶺, 北京 등지에서 지은 시(칠율 8, 칠절 1, 오고 1, 칠고 1제), 夷齊廟를 소재로 읊은 시(오율 3, 칠율 3, 오절 1제) 등과 1647년 반년여 엄동의 사행 길에서 지은 〈次杏山店舍次杜詩咏懷韻〉, 1661년 약소국의 신하로 청나라에 온 비감을 토로한 〈北京次外祖燕都韻〉, 1647년 산해관으로 가는 길목 영원성에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聖廟 등을 읊은 〈次寧遠城感懷〉, 영평부에서 한나라 때 北平 太守 李廣이 호랑이인 줄 착각하고 쏘았다는 射虎石과 애처롭게 구걸하는 아이 등을 읊은 〈永平府次〉, 요양에서 家書를 받아 들고 객회를 풀어낸 〈到張家墩遇京來宣傳官 ……〉, 1653년 아가씨 머리에 꽂은 국화를 보고서야 중양일임을 알고 형제들이 모였을 고향을 그리며 지은 〈重陽〉, 1661년 사행 길에 여러 번 들른 河北 豐潤에서 고향과 임금을 그리며 외조부의 시에 차운한 〈早發豐潤次外祖記行韻〉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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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이미실(李美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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