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사라진 디스토피아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화씨 451>(황금가지, 2009)
1950년에 출간된 <화씨 451>은 500년 뒤(25세기) 미국 사회의 미래를 예측한 소설이지만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잘 들어맞는다. 소설에서 묘사된 미국 사회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고 대신 영상오락물에만 탐닉하도록 한다. 금서목록만 해도 100만권 가량이다. 사람들은 밤낮으로 거실 벽면에 설치된 대형 화면 텔레비전에 빠져 산다.
사람들은 속도에 익숙하다. 길에서 걸어가거나 자동차를 천천히 몰았다가는 감옥행이다. 도로에서 자동차를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렸다가, 서행했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이틀 동안 감옥에서 살다온 사람도 있다. 도시 바깥의 도로 옆에 있는 광고판들은 길이가 60미터씩이나 된다. 옛날에는 6미터 정도였으나 차들이 너무 빠르게 달리다보니 광고판도 길어졌다. 그래야 보이기 때문이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찬찬히 관찰하고 음미할 여유도 없는 삶이다.
주인공 몬태그의 직업은 ‘파이어맨(fireman)’이다. 통상 불을 끄는 ‘소방관(消防官)’으로 옮겨야 하지만, 소설에서는 불을 지르는 ‘방화수(放火手)’로 옮겨야 맞다. 그의 임무는 책을 몰래 보관하거나 빼돌리는 ‘배교자들’을 색출해 책과 함께 불태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10년 동안이나 이런 일을 해왔고, 재미없고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아내는 눈 뜨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대형 텔레비전 시청으로 소비한다.
지겨운 일상을 보내던 몬태그는 어느 날 우연히 옆집에 사는 17세 소녀 클라리세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녀에게는 ‘반사회적 인물’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또래 아이들과 달리 ‘자기만의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 소녀다. 그녀는 학교의 또래 아이들이 무섭다고 말한다. “지난 1년 동안 제가 아는 아이 여섯 명이 총에 맞았어요. 난 그 아이들이 무서워요. 그 애들은 그런 나를 싫어하고요.” 감각적·충동적 세태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무차별적인 폭력성을 드러내고, 소녀는 그들과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
소녀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엿듣다보면,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공허하고 주제가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며 옷이며 수영장 얘기밖에 안 해요. 누구든 하는 얘기는 똑같아요. 남들과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소녀는 획일적인 상업주의와 물질주의에 물든 세태에 적응하지 못한다. 소녀의 할아버지 시대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책임감이 있었고 가치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책을 통한 내면적 성숙이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라진 풍경이다.
몬태그는 클라리세를 만나면서 책과 삶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바뀐다. 그리고 책을 몇 권씩 읽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 소녀의 가족도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 얼마 후 소녀가 뺑소니 자동차에 치어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연 소녀의 사망은 우연일까?
책과 삶과 자연을 성찰하게 되면서 몬태그는 직업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던 어느 날 몸이 아파 직장에 나가지 못한다. 과거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던 직장 상사 비티 서장이 병문안 차 찾아와서, 자신들의 직업(방화수)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설명해준다.
“활동사진이 나왔다네. 20세기가 막 동틀 무렵이었지. 또 라디오, 텔레비전. 그 때부터 모든 것은 엄청나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네. ……그 때문에 모든 것은 갈수록 단순해졌네. ……영화와 라디오, 텔레비전, 잡지, 그리고 책들이 점점 단순하고 말초적으로 일회용 비슷하게 전락하기 시작했네.”
영상물의 비중이 커지면서 책들은 점점 얇아지기 시작했다. 요약, 압축, 다이제스트판, 타블로이드판 등 가볍고 손쉬운 것들로 변했다. 고전 작품 한 권을 기껏해야 한 페이지 정도 설명해놓고 고전 모두를 안다고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었다. 활자의 황금시대가 사라지고 이미지만이 압도하는 암흑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 과정이 지난 5세기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비티는 말을 잇는다.
“학교 교육도 단순해져 갔지. 규율은 느슨해지고 철학과 역사와 언어는 비참하게 몰락하고, 영어 철자법은 갈수록 변질되어 갔지. 인생은 말초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일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으로,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후딱 일을 끝내고 나면 그때부터 마냥 놀고 즐기는 시간이 시작되는 거지. 단추만 누르면, 스위치만 당기면, 나사만 조이면 그만인데 그밖에 뭘 더 배우고 일을 한단 말이야?”
책이 사라진 미래 사회는 이들을 위해 말초적인 쾌락과 자극을 제공한다. 그러니 책을 읽으며 성찰하는 소수파가 미래의 ‘멋진 신세계’를 전복하거나 뒤흔들어서는 결단코 안 된다. 방화수의 존재 의의가 여기에 있다. 안정과 평화를 위해 이런 골칫거리 책들은 죄다 소각로에 집어넣고 태워버려야 한다. 모든 걸 태워버리는 불은 현명하고 깨끗하다. 책이 불에 타는 온도는 화씨 451도(섭씨 233도)이다. 그래서 방화수의 유니폼에는 451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다. 책 제목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오늘의 현실을 보여준다. 요즘 주택의 필수 인테리어로 자리 잡은 대형 벽걸이 텔레비전을 그 시절에 이미 예견했다는 것이 놀랍다. 소설에 등장하는 미래 사회의 특징들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다.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못하도록 불태우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조치를 취할 필요조차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독서율이 OECD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인 한국은 <화씨 451>의 ‘멋진 신세계’를 앞장서 구현하고 있다. <화씨 451>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가 이미 우리의 현실임을 깨닫게 해주는 멋진 소설이다.